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파리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파리
토포스명(프랑스) Paris
토포스명(러시아) Париж
정의 1. 파리는 도시 그 이상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파리 Paris[paʀi]’는 라틴어 civitas Parisiorum 또는 urbs Parisiorum (‘파리지의 도시’ 또는 ‘파리인의 도시’)를 단축한 단어이다. 이 이름은 센 강의 시테 섬에 살던 켈트족 원주민들을 '파리지(parisii)'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으로, 4세기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파리지는 ‘일하는 사람들, 장인’을 의미하는 골족의 언어 ‘parisio’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지’라고 불리던 켈트족 원주민들이 파리의 센 강 한복판에 떠 있는 시테 섬에 터를 잡은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이다. 기원전 52년에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는 그곳을 ‘파리인의 도시'로 규정하고 ‘루테티아’ (프랑스어로는 뤼테스Lutèce)라 불렀다. 파리라는 이름이 다시 사용된 것은 프랑크족이 486년 뤼테스를 점령하고 메로빙거 왕조를 건설한 클로비스 왕이 그곳을 수도로 정하면서이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의 모태이다.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로서 입지가 확고해지는 것은 987년 카페왕조가 성립되고 시조인 위그 카페가 파리에 왕궁을 지으며 파리를 정치, 종교 권력의 중심으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파리는 13세기 넘게 프랑스의 중심으로 군림해왔다. 파리가 결정적으로 프랑스 전체에서 절대 권위를 누리게 되는 것은 특히 1789년 혁명에서 승리한 자코뱅 당이 그들의 수도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핵심으로 삼으면서이다. 이후 파리는 정치, 종교, 지성,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행정, 금융, 무역, 산업,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 최고의 도시가 되었다. (최애영, 『영원한 수도, 파리』, 참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세르반테스, 1547~1616)라는 경구를 연상시키는 “파리는 하루 만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프랑스 속담은 파리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자부심과 경외심을 짐작하게 해준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 가운데 파리만큼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은 도시도 드물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문인, 화가,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고 수많은 영화의 소재나 배경이 된 파리는 서구 사회에서 실로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가진, “로마에 버금가는 신화적 도시”로 여겨진다. 이를 보여주듯 “사치와 유행의 도시, 문학과 예술의 온상, 혁명의 모국, 음욕의 바빌론”이라는 모순적인 별칭들 외에도, “국제적인 수도“(Jean-Pierre Babelon, "Paris" 참조.) ‘19세기(유럽)의 수도’(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925~1940), ‘모더티니의 수도’(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 2000) 등 파리에 붙여진 수식어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19세기 이후 가장 널리 알려진 파리의 별칭은 ‘빛의 도시’일 것이다. 이 명칭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어 ‘빛의 세기(le siècle des Lumières)’ -에 파리가 교육과 사상의 중심으로 기능한 데서 연원하며, 오스만 남작의 파리정비 이후 일찍 가로등이 설치되며 파리가 현대 도시로 탈바꿈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유럽 변방의 낙후된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는 17세기에 이르러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서구화 정책과 급진적인 개혁에 따라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러시아 황제들의 서구화 정책에서 프랑스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중심에는 프랑스의 수도인 도시 ‘파리’가 있었다. 러시아의 서구화 정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도시 ‘파리’의 모든 것을 모방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 문화 지형에서 ‘파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언급은 11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키예프의 야로슬라프 공후의 딸 안나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앙리 1세 (1008~1060)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후에 필립 1세의 모후가 된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의식 속에서 도시 ‘파리’가 중요하게 인식된 것은 1717년 표트르 대제의 파리 방문이다. 
  강대국 러시아를 꿈꾸며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던 표트르 대제는 1703년에 네바 강 유역에 유럽의 도시를 본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당시 북방을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약 700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파리를 방문한다.


 
  표트르 대제의 파리 방문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우선은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타를 당시 7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루이 15세에게 시집보내 프랑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혼담은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일찍이 파리의 문화를 동경한 엘리자베타는 이후 왕에 올라 가장 적극적으로 파리의 문물을 수용하고 전파한 러시아 여제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두 번째 목적은 도시 파리를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체류 기간 내내 표트르 대제는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광장을 비롯한 건축물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표트르 대제는 루이 14세 동상, 소르본느 대학, 국립 도서관, 왕립 아카데미, 조폐국 등의 건물 양식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이후 레브롱, 라스트렐리, 고쉐르, 카무스, 베가르, 롱슨과 같은 유명한 프랑스 건축가들을 페테르부르크로 초청하여 페테르부르크를 파리와 유사하게 건설하고자 했다. 실제, 페테르부르크는 운하가 많아 ‘북방의 베니스’, ‘북방의 암스테르담’과 같은 별칭이 붙어 있지만, 도시 구조 자체는 파리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도시이다. 프랑스 건축가 레블롱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페테르부르크 구조 자체를 설계하였고, 이후 ‘여름 정원’, ‘페테르고프’, ‘에르미타주’를 비롯한 도시의 건물들을 파리의 건물과 정원 양식을 본떠 건설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파리화’를 시작했다.

  파리의 모방은 표트르 대제 시대를 거쳐 예카테리나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프랑스 문물 수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자신의 친구였던 다슈코바 공작 부인을 통해 파리의 유행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였다. 특히, 다슈코바 부인은 여제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학술원>을 본떠 <러시아 학술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이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파리를 만든 것은 역대 프랑스 왕들과 센 강이라는 말이 있다. 역대 왕들과 공화국의 대통령들은 나라의 수도로서 파리를 가꾸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중심으로서 파리를 새롭게 정비한 앙리 4세, 루이 14세 이후 궁전을 증축하고 왕권을 뒷받침할 성당, 웅장하고 화려한 관청과 군사 시설을 짓고 광장에 왕의 동상을 세운 절대군주들은 파리를 자신과 왕국의 위엄을 드러낼 성소로 여겼다. 
  파리에는 세 개의 개선문이 있다. 나폴레옹의 오스테를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카루젤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 에투알 광장의 파리 개선문, 신도시 라데팡스에 세워진 ‘인류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인간 개선문’이 그것이다. 카루젤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쪽을 바라보면 파리 개선문이,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 콩코르드 광장 가운데 오벨리스크(루이 필립이 이집트에서 선물로 받았다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탑) 아래에서 샹젤리제 쪽을 바라보면 나폴레옹 개선문과 라데팡스의 인간개선문이 모두 일직선상에 놓인다. 이 세 개의 개선문은 각기 파리의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번영, 그리고 미래의 전망을 상징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지만 “언제나 영원할 파리”(<파리는 언제나 파리일 것이다>, 모리스 슈발리에, 1888~1972)의 신화를 가시화하고 있다.


 
  파리가 갖는 이러한 이미지는 프랑스 공화국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제3공화국 정부는 1880~1914년 사이에 프랑스를 빛낸 위인들을 온 국민이 숭배할 수 있도록 근대사회의 형성과 발전을 이끌어 온 예술가와 과학기술자들의 동상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오늘날 파리의 거리와 광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350여개에 달하는, 서구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미술가, 음악가, 문인, 과학자들의 동상은 파리가 얼마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인류 문명의 보고를 소중히 여기는 도시인지를 과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점령당했던 파리가 해방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르네 클레망, 1966)는 서구 사회에서 파리가 갖는 문화적 위상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독일군 사령관 폰 콜티츠는 파리를 사수할 수 없다면 잿더미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무모한 지령을 받고 히틀러를 배신할지언정 파리의 문화유산을 파괴하여 인류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결심한다.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마지막 사투를 벌인 레지스탕스, 르클레르 장군을 연합군보다 앞서 파리로 진격시키고 마침내 8월 25일 파리에 입성, 당당히 개선문 아래를 행진한 드골장군이 한 연설은 파리의 해방을 직접 성취해냈다는 파리 시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고무시킨다. (민유기 외, 『도시는 역사다』, 참조)

“파리, 능욕당한 파리! 불태워진 파리! 박해받은 파리!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다!” (드골, 1944년 8월 25일)

  제3공화국(1870~1940) 정부의 문화도시 파리건설사업은 20세기 후반에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1969 취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1974 취임)에게로도 이어졌다. 퐁피두 대통령은 파리 도심의 낙후된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공공정보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음향음악연구소, 영화관, 전시장, 서점, 레스토랑, 카페 등을 포함한 복합 문화센터 건립을 추진했고,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퐁피두의 뒤를 이어 데스탱 대통령은 끝까지 사업을 추진하여 그곳에 퐁피두센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0~1990년대는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세계적으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된 시기이다. 자본의 이윤추구 논리에 따라 낙후된 도심을 고급주택화하거나 쇼핑몰, 문화공간을 확충한 영국, 미국의 도시사업과 달리, 프랑스는 미테랑 사회당 정부와 파리 시의 강한 의지 하에 공공사업 성격을 띠고 문화예술 공간을 확충하는 파리의 ‘그랑 프로제’를 추진하였다.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루브르 박물관을 정비하고 버려진 기차역 건물을 활용해 오르세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파리의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에는 라빌레트 과학 공원과 음악원, 국립도서관이 들어섰다. 전통을 보존한 채 혁신을 도모하는 이러한 도시문화조성 사업을 통해 파리는 서구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강화했다. (민유기, 『도시는 역사다』 참조)
  서로마가 몰락하고 오랜 혼란기를 겪은 유럽에서 다시 도시가 번성하기 시작한 12~13세기 이래 파리는 항상 서구 문명의 주요 순간들 속에 위치해왔다. 12세기 초에 건립된 파리 대학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로서 서유럽 신학의 중심으로 기능한 이래, 서구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합리주의를 주창한 데카르트에서 18세기 유럽의 지성으로 추앙받은 볼테르와 디드로를 거치면서 파리는 유럽 정신의 한 축으로서 명맥을 유지해갔다. 16세기 전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이미 “파리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세계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의 도시를 넘어 세계적 보편성을 띤 장소로서의 파리의 위상은 파리 코뮌(1871)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혁명과 봉기를 치르고 마침내 공화국이라는 현대적 국가와 사회 체제를 이루어낸 역사의 장소, 19세기의 파리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파리는 진정한 대양이다. 거기에 수심측량기를 던져보라. 결코 그 깊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파리를 두루 다녀보라, 파리를 그려보라.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많은 탐험가들이 관심을 기울여도 그들은 그곳에서 언제나 최초의 대지, 미지의 동굴, […] 문학가들이 잊고 있는 놀라운 어떤 것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오노레 드 발작, 『고리오 영감』, 1835) 

“파리를 호흡하는 것, 그것은 영혼을 간직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862)

“파리가 충고하면 유럽이 깊이 생각한다. 파리가 시작한 것을 유럽이 이어간다.” (빅토르 위고, <제헌국회 연설>, 1871)

“파리를 구하는 것은 프랑스를 구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 『망명 이후』, 1876)

이러한 파리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던 유럽 여러 나라의 진보주의자들, 폴란드의 낭만적 민족시인 아담 미키에비치(1798-1855), 독일의 반전통적 혁명적 시인이자 산문가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혁신의 도시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지겨워지면 창문을 열고 파리의 대로를 바라본다.’는 오랜 속담을 떠올렸다.” 
“파리는 프랑스 전체이다. 프랑스는 파리의 커다란 교외일 뿐이다. […] 프랑스는 사람들이 꽃다발을 만들려고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꺾은 정원과도 같다. 그리고 그 꽃다발은 파리라 불린다. […] 파리는 프랑스만의 수도가 아니라 문명화된 전 세계의 수도이다. […] 그곳에는 사랑, 증오, 사상, 감정, 지식, 권력, 행복, 불행, 미래, 과거를 통틀어 위대한 모든 것이 모여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 『프랑스에 관하여』, 1833)

  쇼팽은 1830년 조국 폴란드의 독립투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슬픔을 안고 파리에 왔으며,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로 도피한 바그너도 1839년 파리를 찾았다. 
  이처럼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파리는 위고, 발자크, 에밀 졸라,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스테판 말라르메, 아르튀르 랭보,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브르통,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 등 많은 근현대의 문인들이 근대적 삶과 인간에 대해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 지적, 감성적 활동의 주요 무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작가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도 파리에서 문학 수업을 하고 등단했고, 헨리 밀러(1891~1980)는 파리 경험을 토대로 초현실적인 파리 스케치(『북회귀선』, 1934)를 그렸으며,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은 파리에 거주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을 썼다. 작품의 음란성과 신성모독을 이유로 작품 출판이 어려웠던 영국의 작가 데이비드 로렌스(1885~1930)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1882~1941), 난해한 작품세계로 이해받지 못하던 사무엘 베케트(아일랜드, 1906~1989)와 외젠 이오네스코(루마니아, 1909~1994)에게 파리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감수성을 표출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모든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 특별한 공간이었다. 

“점잖지 못한 파리가 깨어난다. 레몬 색 거리의 노골적인 불빛. 모락모락 김이 나는 크루아상의 촉촉한 속살, 청개구리 빛의 압생트, 거기서 풍겨 나오는 아침의 향기가 대기를 어루만진다. 벨뤼오모는 아내 애인의 아내의 침대를 떠난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1922) 

‘예술가들의 구역’으로 불린 파리의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르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로 황금기를 구가하며 예술의 도시 파리의 명성을 드높인 것도 이 시기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테르트르 광장과 선술집을 중심으로 예술적 열정을 토로하고 삼류 배우, 사창가 여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몽마르트르는 그들의 삶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들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식당 물랭 드라 갈레트, 불행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물랭 루주’에서 춤추는 무희들을 그렸던 툴루즈 로트렉은 이곳의 신화로 남아있다. 몽파르나스는 1, 2차 세계 대전 사이 다양한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어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는 화파를 탄생시킨 곳이다. 이곳에 거주하며 예술적 교류를 가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이탈리아), 마르크 샤갈(러시아), 섕 수틴(리투아니아), 파블로 피카소(스페인) 등은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적 감수성을 잃지 않은 채, 인상주의를 태동한 파리의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형성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보리스 비앙, 자크 프레베르,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단골로 드나든 카페들이 모여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거리는 ‘문학가 생제르맹’이라는 전설을 만들며 유럽 지성의 맥을 이었다. 그곳은 한편 기성세대의 관습과 편견에 반항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재즈에 열광하며 별난 옷차림과 춤(비-봅)으로 새로운 유행과 청년 문화를 창출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대 불어권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참조.)
  이러한 파리의 분위기 속에서 1906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재즈가수 조세핀 베이커가 파리에서 활동하며 1931년에 <내겐 두 개의 사랑이 있어요.>로 인기를 모았다. “내겐 내 고향과 파리라는 두 개의 사랑이 있어요.”라고 노래한 그녀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한택수, 『프랑스 문화교양 강의』 참조.)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헝가리의 음악가 벨라 바르톡(1881~1945)에게 파리는 “신 없는 신성한 도시”, “세계의 중심”(Philippe A. Autexier, Musique de la vie에서 재인용.)이었다. 파리는 또한 자유와 평등을 고민하던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망명지였고,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호치민(胡志明) 등 아시아의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이 공부하고 일하고 프랑스의 좌파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곳이다.
  영화 <파리의 마지막 탱고>(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1972)에서 파리는 모든 금기가 깨질 수 있는 곳, 사회적 욕망과 가치가 성립되기 이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의 회귀를 꿈꿀 수 있는 곳이다. 영화 <파리, 텍사스>(빔 벤더스, 1984)의 배경은 가정이 깨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은 미국의 텍사스 주이다. 감독은 그곳의 작은 마을인 ‘파리’를, 프랑스의 파리가 그렇듯, 미국인의 고향과 같은 곳, 잃어버린 낙원인 것처럼 묘사한다. (한택수, 『프랑스 문화교양강의』 참조) 
  파리의 신화는 파리가 오랜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전통을 존중하지만 결코 기존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는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도시라는 데 있는 듯하다. 

“파리Paris에 철자 두 개를 더해보라. 그것은 낙원paradis이다.” (쥘 르나르, 『일기』, 1928)

“오랫동안 유럽의 뇌였던 파리는 오늘날 여전히 프랑스 이상 어떤 것의 수도이다.” (밀란 쿤데라, 『대담』, 1984)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인들에게 도시 ‘파리’는 프랑스와의 정치, 역사적 관계에 의해 변화되곤 하였는데, 1812년의 조국 전쟁, 1830년과 1848년 프랑스 혁명,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화 정책 초기 러시아에서 파리는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유럽의 유행과 에티켓, 변화와 변혁,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가 유럽을 모방하려던 러시아인들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파리를 방문한 러시아 문인들과 정치가들은 파리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파리에 왔다! 이러한 생각은 내 마음 속에 어떤 특별하고도, 재빠른,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유쾌한 움직임을 시행하게 하였다. ‘나는 파리에 왔다’라고 말하고 이 거리 저 거리를 뛰어 다녔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집, 마차, 사람들.” (카람진,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들』, 1790년)

“거리에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끊임없이 마차들이 지나다니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한시도 눈을 쉬게 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조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즐거워한다.” (수마르코프, 『외국 산책』, 1820년)

18세기부터 이어진 ‘러시아의 프랑스화’,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페테르부르크의 파리화’는 도시의 건물뿐만 아니라, 언어, 음식, 옷, 그리고 무도회, 살롱 등으로 대표되는 파리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곤 하였다. 

“리자: 밤새 책을 읽으셨어요. 
파무소프: 무슨 변덕이 든 게야?
리자: 방에 박혀 읽으시는 게 죄다 프랑스 말이더라고요.
파무소프: 딸애는 프랑스 책 때문에 잠을 못 자는데 나는 러시아 책만 봐도 잠이 오니……. 그래 이게 바로 그 책들의 결실이구나. 다 쿠즈네스키 모스트의 (당시 모스크바에서 파리의 최신 유행 상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던 거리), 영원한 프랑스인들 덕분이지. 거기서 유행이라면 작가에서부터 뮤즈까지 죄다 팔고 있으니…….”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무분별한 파리 문물 수용에 대한 비판은 파리라는 도시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낳게 하였는데, 그것은 서구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던 파리라는 거대 도시가 지닌 허위, 위선, 타락, 방탕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곤 하였다. 특히, 푸시킨은 시 『비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파리를 성서에서 타락으로 멸망한 도시 소돔에 비유하고 있다. 

“분노하신 야훼가 일찌감치 소돔에 벼락을 내리신 건 참으로 유감일세! 
속세의 찬란한 방탕 속에서 신의 보호를 받는 인간이자 추밀원의 간부인
나는 저 구약시대의 파리에서 겸손하게 한 백 년은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푸시킨, 『비젤에게 보내는 편지』, 1823)

  부정적 이미지의 파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유럽 인상기』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반복된다. 1860년대 유럽을 여행한 인상을 바탕으로 쓴 작가의 글에서 19세기 서구 유럽 자본주의의 속물적 근성과 탐욕, 비인간화에 대한 비판과 이에 따른 유럽 문명의 위기를 보여 주고 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그 중심지를 파리로 보고 있다. 작가는 파리에 도착한 첫날 도시의 외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파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도덕적이며 가장 선행적인 거리다. 어쩌면 그렇게 질서정연한가! ...어쩌면 그렇게도 확실하고,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가! 어쩌면 그렇게도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 그렇다! 파리는 놀라운 도시다. 안락한 도시. 편의를 누릴 수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가능한 모든 편의가 제공되는 완벽하게 질서정연한 도시다.” (도스토옙스키, 『유럽 인상기』, 1877)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편의와 안락의 뒷면에 숨겨진 파리의 탐욕과 방탕한 모습을 구약에 나오는 타락의 도시 바빌론에 비유하고 있다. 

“현상에 머물러 있는 것에 절망하여 자기 살을 떼어내듯 모든 희망과 기대를 내버리고, 확실치 않은 자신의 미를 저주하며, 바알신을 숭배하고 있다. …… 이것은 어딘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풍경이나 바빌론의 그 어떤 풍경과 같으며 눈앞에 실현된 묵시록의 예언과 같다. …… 파리인들은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고 느끼면, 자기 자신이 서푼의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결정해버린다. 그것도 의식적으로, 양심적으로 위대한 확신을 갖고 결정하는 것이다. 돈만 있다면, 어떤 괴상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 (도스토옙스키, 『유럽 인상기』, 1877)

  19세기 러시아인들에게 파리는 부정적인 형상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의 진보적인 혁명과 높은 수준의 문화 예술 때문에 러시아인들에게 파리는 자유와 평등의 도시이자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장교들은 ‘파리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들 때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라는 말을 하면서 조국 러시아의 억압된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에게 파리는 매우 특별한 도시이다. 1858년부터 파리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한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적과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 파리로 도피하였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파리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다. 특히 그는 파리에서 진보적 지식인들과 졸라, 플로베르 등과 같은 문학가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1843년부터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프랑스 여가수 비아도르의 파리 교외의 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파리에 대한 이러한 형상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많은 지식인들과 문인들이 파리로 망명하면서 또 다른 형태로 변모되었다. 혁명을 수용하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파리, 베를린, 뉴욕, 런던, 스톡홀름, 바르샤바, 프라하 등으로 망명 하였는데, 망명지의 중심지는 단연코 파리였다. 따라서 파리는 1920-30년대 러시아 망명자의 중심지이자 ‘러시아의 외국 수도’로 불렸다. 
  1923년 약 3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망명했던 파리에는 문학가들이 많이 모였다. 부닌, 쿠프린, 레미조프, 기피우스, 메레쥐코프스키, 호다세비치, 이바노프, 츠베타예바 등과 같은 당대 유명 작가들은 파리에 모여 <창문>, <미래의 러시아>, <러시아 사상>, <부흥>, <러시아와 슬라브>와 같은 문학 신문들과 출판물을 간행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망명 문학 시대’를 파리에서 열어 간다. 특히 시인 메레쥐코프스키와 기피우스는 문학, 철학 클럽인 <녹색 램프> (1927-1939)를 개설하여 파리의 망명 문학을 주도하였다. 또한 1929년에는 시인 아다모비치를 중심으로 하는 ‘파리 악보’라는 독특한 시 유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아나톨리 쉬테이게르, 이고리 친노프와 같은 시인들이 참여한 이 유파는 주로 몽파르나스 언덕의 저렴한 카페를 중심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문학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수세기 동안 러시아들의 인식 속에 파리라는 도시는 단순한 지형적 공간을 넘어 때로는 선망과 동경, 그리고 피난처의 토포스로, 때로는 탐욕과 방탕의 토포스라는 독특한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현대 러시아에서 파리는 여전히 선망과 동경의 도시이자, 문화적 자부심을 견궈 보는 비교 대상의 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1812년 조국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첼랴빈스크 지방에 작은 소도시를 하나 건설하였는데 1843년에 이 도시의 이름을 파리라고 지었으며, 2005년에는 에펠탑을 본뜬 송전탑을 건설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파리 센 강의 시테 섬에 살던 켈트족 원주민들을 지칭했던 ‘파리지’에서 파생된 도시의 명칭 ‘파리’는 987년 카페 왕조가 파리에 왕궁을 지으면서 프랑스의 정치, 종교,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현재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특히 1789년 대혁명을 기점으로 파리는 자유와 사상의 중심지로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예술과 유행의 중심지로서 유럽의 문화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유럽인들, 아니 전 세계인들에게 파리는 하나의 도시의 이미지를 넘어 거대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선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 
  러시아에서 파리는 다른 국가들이 갖는 파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넘어 러시아 문화의 가장 중요한 토포스의 위치를 차지한다. 러시아의 근대화 과정을 단순화한다면, 그것은 ‘프랑스로부터 문화적 세례’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연코 파리가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 근대화의 출발점인 표트르 대제의 계획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시의 모든 건물과 구조 자체를 파리를 본떠서 만든 ‘페테르부르크의 파리화’의 결과로 탄생한 도시이다. 당대의 러시아 귀족들은 파리의 모든 문물, 파리 귀족들의 모든 유행을 무분별할 정도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파리로부터 수용한 것은 단순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1812년 조국 전쟁 이후 파리에 입성한 젊은 장교들은 파리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사상을 수용하여 러시아의 민주화를 추진하였으며, 이후 파리의 문학과 예술은 러시아 근대 문화 예술 발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토포스로 자리 잡는다.
연관 토포스 나폴레옹; 낭만성; 도시; 무도회; 살롱; 욕망; 자유; 정원;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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