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포도주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포도주
토포스명(프랑스) vin
토포스명(러시아) вино
정의 1. 포도주를 제대로 즐길수록 삶의 질이 더 향상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포도주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벵 vin [vɛ̃]’의 어원은 라틴어 vīnum이고, 이는 산스크리트어 베나vena(‘사랑받는’)에서 나왔다고 한다. 포도주는 생명과 재생을 상징하는 신의 음료이자, 인간의 정신을 함양시키고 삶의 환희를 가져다주는 음료로 여겨져 왔다. 유럽에서 포도주를 처음 만든 사람은 그리스인들이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볼 수 있듯 그리스인들에게 포도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고 로마는 그들에게서 포도 경작법을 전수받았다. 포도는 켈트의 족장 브레누스가 로마에서 포도 묘목을 몰래 숨겨 들어와 골의 땅에 심으면서 프랑스에 전해졌다고 한다. 

“브레누스가 신들을 찬양하고 
창으로 땅을 파서
포도나무를 심자, 흥겨운 골 지방 사람들이
먼 장래의 프랑스를 보았다.” (피에르-장 드 베랑제) 

  포도주의 상징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질과 포도주를 연관 짓고 싶어 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포도주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비노 вино [bino]'는 프랑스어 어원과 유사하게 라틴어 ‘vīnum’을 바탕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어‘οἶνος’에서 유래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포도의 원생산지로 알려진 소아시아 지중해와 카프카스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포도라는 뜻의 고대 러시아어 ‘винга’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포도주는 고대 루시 시절부터 러시아에 소개되었다. 포도와 포도주의 주 생산지인 소아시아, 지중해, 그리스 지역과 인접한 남부 러시아 지역과 키예프 루시 지역에서 인근 국가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988년 키예프 루시에 러시아 정교가 도입된 후, 포도주는 성찬식을 비롯한 교회 의식 때 주로 사용되는 신성한 음료로 민중들에게 인식되었다. 당시 포도주는 그 생산량이 극히 제한적이었기에 일반 민중은 물론, 귀족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포도원이 존재해야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11-12세기경 키예프 루시 지역의 수도원에 부속된 작은 포도원들이 러시아에 최초로 개설된 포도원으로 추정한다. 수도원 부속 포도원에서는 극히 소량의 포도주만을 생산하였으며, 이 포도주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주로 교회 의식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러시아에서 공식적으로 포도주가 생산된 것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포도주의 효용과 가치를 인식한 러시아 황제 미하일 표도로비치는 1613년 카스피해 근처의 아스트라한 지역에 러시아 최초의 포도원을 개설하여 국가에서 직접 관리를 하였고, 1656년에 최초의 러시아산 포도주를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주 역시 소량에 불과하여 포도주는 여전히 황실과 교회 의식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표트르 대제는 포도주의 경제적 가치와 효용을 고려하여 러시아 전역에 포도원을 개설하고 포도주 제조 공장을 열어 포도주 생산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러나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는 포도의 특성상 포도원은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의 기후에 맞지 않아 주로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육성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포도주는 러시아에서 ‘술’로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초까지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그 양이 많지 않았고, 질에 있어서도 서구의 포도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고대로부터 포도와 포도주는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었다. 포도 경작지의 소유는 현실적인 부와 권위와 명예의 징표였고, 최상급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소수 엘리트 계급의 특권이었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에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음료(‘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마태 26:20)로서 미사 의례에 필수적이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수도원이 포도경작과 포도주 주조권을 점유했다. 포도주 생산은 종교개혁과 30년 종교전쟁으로 많은 수도원이 폐쇄되면서 잠시 주춤하다가 17세기 이후 다시 급속히 발전했다. 프랑스의 3대 포도주는 샹파뉴, 부르고뉴, 보르도 산 포도주인데, 이 중 하나인 샹파뉴가 양조된 것도 이 시기이다. 오빌리에 수도원의 수도사이자 포도주 양조기술자였던 동 페리뇽이 발효법을 발견함으로써 오랫동안 거품 때문에 골치를 썩여 ‘악마의 포도주’라 불리던 저급 포도주가 최상의 포도주, ‘포도주들의 제왕’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은 샹파뉴 포도주를 매년 200병씩 정기적으로 주문하여 그 명성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샹파뉴 포도주는 출생, 결혼, 생일 등 각종 축하연에 없어서는 안 될 음료로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볼테르의 샹파뉴 예찬은 포도주가 삶에 불어넣어주는 활기를 묘사하고 있다. 

“병 속에 압착되었던 거품들이 마치 번개처럼 병마개를 번쩍 튀어 오르게 한다. 병마개는 병을 출발하여, 깔깔거리고 막 웃어대다가 천장을 때린다. 신선한 포도주에서 반짝거리는 거품이 흘러나오듯이 우리 프랑스인에게는 번뜩이는 재치의 이미지가 나온다.” (볼테르, 1694~1778)

  1789년 혁명을 거치며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자 교회에 딸린 포도경작지는 개인들에게 공채 처분되었다. 이에 소규모 경작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포도주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고 포도주에 대한 민중의 관심도 더욱 높아졌다.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르 페르 뒤센』, 1789년 혁명 기간 동안 발행된 일간지)는 표현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 상퀼로트(귀족의 옷인 퀼로트를 입지 않은 계층을 가리킨다.) 계층의 사회적 불만은 프티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포도주 소비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포도주를 마실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그들에게 혁명의 승리를 의미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 산업화를 거치면서 포도주의 종교적 상징성은 많이 약화된 반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작품에 소재가 된 포도주의 문화적 의미는 더 풍부해졌다. 포도주는 사랑의 묘약 같은 음료로서, ‘하늘은 우는 장(Jean)을 위해 물을 만들었고 웃는 장을 위해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프랑스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람을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슴을 열어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술로 여겨졌다. 

“나는 프랑스의 모든 포도주를 다 좋아한다. 프랑스의 포도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니까.” (알프레드 뮈세, 1810~1857) 

  20세기 여류 소설가 루이즈 드 빌모랭은 포도주를 문명의 상징으로까지 추대했다.

“문명, 그것은 샴페인 한 병과 바닷가재 샐러드 한 접시와 대화, 그리고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이다.” (루이즈 드 빌모랭, 1902~1969)

“포도주는 태양과 땅의 자식이지만 산파처럼 고통을 겪었다.”(폴 클로델, 『산문과 시』, 1935)

  프랑스가 포도주의 왕국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포도주에 관한 단절되지 않은 오랜 역사와 전통, 포도재배에 적합한 프랑스의 예외적인 토질과 기후 외에도 최상의 포도주를 만들려는 프랑스인들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지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물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인간은 포도주를 만들었다”(빅토르 위고, 1802~1885)는 표현에서는 포도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엿보이며, 포도주의 혼을 빌어 프랑스와 포도주와 프랑스인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보들레르에게서 포도주는 그야말로 ‘포도주는 포도주 그 이상’이었다.

“들리시오. 과거의 힘 있는 후렴, 사랑과 영광의 노래가 내(=포도주) 안에서 용솟음치며 울려 퍼지는 소리가? 나는 조국의 영혼이며, 반은 한량, 반은 군인이오. 나는 일요일의 희망. 노동은 번영의 날들을 일구고, 나는 행복한 일요일을 만들어 준다오.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소매를 걷어붙인 채 그대는 자랑스럽게 나를 찬미할 것이며, 진정 만족할 것이오.” (보들레르, 『포도주와 하시시에 대하여』, 1851~1860)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에서 포도주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며, 포도주의 확산은 러시아 문화 지형에서 매우 흥미로운 토포스를 발현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제한된 양으로 인해 황실과 종교의식에만 사용되는 극히 제한된 술이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러시아는 유럽에서 많은 문물들을 수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포도주의 수입 또한 증대되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러시아 근대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당대 귀족들의 유럽 문물, 특히 프랑스 귀족 문물의 절대적인 모방과 수용이었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이름만 귀족이었지, 음식, 옷, 예절, 문화생활 등에서 일반 민중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수용된 프랑스 귀족의 문화는 당대 러시아 귀족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을 귀족답게 만들어주는 여러 가지 문화에 매료되어 그 확산 폭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널리 확산된 문화가 살롱, 무도회, 결투, 카페 등을 비롯하여 프랑스어, 프랑스 옷, 프랑스 음식 등이었다. 포도주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당대 귀족 사회에 매우 유행되었다. 
  당시 러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술은 익히 알다시피 보드카였다. 그러나 보드카의 높은 알코올 도수는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에게 알맞은 술이 아니었고, 프랑스 문물과 함께 건너온 포도주는 민중들의 저급한 보드카와 구별되어 귀족들만이 마시는 술의 토포스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당시 귀족들이 모이는 무도회, 살롱이나 지인들을 초청하여 벌이는 만찬에는 포도주가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얼마나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주인의 품위가 결정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확산되었는데, 네프스키 거리에는 ‘영국산 포도주 상점’, ‘독일산 포도주 상점’, ‘외국 포도주 상점’등이 문을 열어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외국산 포도주들이 수입되었다. 독일의 라인 백포도주, 모젤 백포도주, 스페인의 히메네스, 말라가, 헤레스 포도주,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 이탈리아의 무스카토, 크리스티 포도주, 헝가리의 토카이 등이 그 대표적인 포도주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포도주는 단연 프랑스산 포도주들이었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 프랑스산 포도주의 인기에 대해서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매우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푸시킨은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르도산 포도주의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술은 그 요란한 거품으로 나의 위장을 배반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온전한 보르도산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 (북부 프랑스 아이 지역에서 나오는 최고급 삼페인 -저자 주)는 나에게 맞지가 않는 다. ‘아이’는 비유하자면 화려하고, 변덕스럽고, 활기 있고, 제멋대로이며 천박한 정부와 같 다.... 그러나 너 보르도는 친구과 같이, 슬플 때나 불행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내 반려가 되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조용한 한가로움도 더불어 나눌 수 있다.
우리의 벗 보르도 만세!”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당시 포도주는 매우 값비싼 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귀족들에게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포도주는 유럽 문물에 대한 동경과 시인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주의적 찬미의 성격을 종종 보여주곤 하였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포도주에 대한 찬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과부 클리코 또는 모에(프랑스의 유명한 샴페인, 포도주 제조업자 -저자 주)의 자랑스러운 포도주가 시인을 위해 찬 병에 넣어진 채로 
식탁에 놓여진다. 그 시원함과 거품이 한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을 마시고 싶어 마지막 동전까지 다 털어버린 것을 내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는지?
그 요술 같은 맛은 바보 같은 짓을 수없이 낳게 하였고, 또 얼마나 많은 농담과 시와, 논쟁과 즐거운 꿈을 낳게 했던가!”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1831)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와 러시아에서의 포도주의 어원은 동일하게 라틴어 vīnum에서 파생되어 각각 ‘벵’, ‘비노’로 불리고 있다. 포도주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지역에서 최초로 생산된 것이 그 연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의 보급과 그 효용가치에 있어서 양국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중세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찍이 포도주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이르러 급속한 발전을 보였고,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중들도 즐겨 마시는 일상의 술이 되었다. 반면, 포도가 자라기에는 그 기후적 조건이 프랑스에 비해 열악한 러시아에서는 18세기 초부터 추진된 유럽화 정책에 힘입어 유럽의 포도주들을 수입하면서 비로소 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포도주는 귀족들을 위한 술이었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바로 이점에서 양국의 포도주의 토포스의 차별화가 발생하는데, 러시아의 경우 포도주는 프랑스 문물, 유럽 귀족 문물의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포도주가 귀족 사회에서 애용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인들이 즐겨 마셨던 보드카는 강한 알코올 도수로 인해, ‘술취함’, ‘알콜 중독’등의 부정적인 토포스를 발현한 반면, 포도주는 ‘귀족의 술’, ‘예술적 영감의 원천’등으로 찬미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연관 토포스 무도회; 살롱; 술; 축제
참고자료(프랑스) Bettant, M. et Jean Branas, J. «Vignes et Vins», 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consulté le 5 août 2013.
URL :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vignes-et-vins/
Gautier, J.-F. Idées reçues sur Le Vin, éditions Le Cavalier Bleu, Paris, 2001.
Rey, A. dir. La dictionnaire culturelle en langue française, Le Robert, 2005.
고봉만 외,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 한길사, 2001.
샤를 보들레르, 『포도주 예찬』, 임희근 역, 21세기 북스, 2005.
참고자료(러시아) Бокова В. Балы и праздники в России, М.: 2000.
Конечный А. Быт пушкинского Петербурга 1, 2. Спб.: Ивана Лимбаха. 2003
Лютман М. Ю. Беседы о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е. СПБ.: Искусство. 1994.
Мотив вина в литературе (Сборник научных трудов), Тверь. 2001.
Романова Г.И. Мотив денег в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е XIX века, М.: Наука, 2006.
Черных П.Я. Историко- этимолог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т.1, М.: Русский Язык. 1996.
추천자료(프랑스) 마르셀 에메, 최경희 역, 『파리의 포도주』, 작가정신, 2006.
샤를 보들레르 외, 임희근 역, 『포도주 예찬』, 북이십일, 2005.
줄리앙 뒤비비에 작, <무도회 수첩>, 1937.
추천자료(러시아)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