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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허무주의
토포스명(프랑스) nihilisme
토포스명(러시아) нигилизм
정의 1.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허무주의’를 뜻하는 프랑스어는 ‘니일리슴 nihilisme’이다. ‘-이슴(-isme)’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지는 다른 말들과는 달리 니일리슴은 그 접미사 앞에 오는 실사가 없다. 가령, 테로리슴(terrorisme), 코뮈니슴(communisme), 피아니슴(pianisme) 등의 말들은 그것들 이전에 terreur, cummun, piano 등의 말들이 먼저 있었다. ‘니일리슴’의 ‘이슴’ 앞에 오는 ‘니일(nihil)’은 라틴어에만 있으며, 그 뜻은 ‘아무 것도 없음(rien/nothing)’이다.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한국어 단일 (대)명사가 없듯이 프랑스어에는 허무주의 또는 ‘허무주의적인, 허무주의자’는 있어도 ‘허무’는 없다.
  프랑스 언어권에서 ‘니일리슴’ 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말에 간행된 지하 주간지 <비밀 문학 통신>의 1787년 6월 1일자에서이다. 이 잡지는 그 단어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보이면서 “모든 존재 또는 일체의 신념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뜻을 친절히 소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말로 된 이 신문이 간행되어 배포된 장소는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의 작은 도시 노이비트에서였다.
  토포스로서의 ‘허무주의’가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매우 미미한 편이다. 오히려 그것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다른 토포스들, 즉 염세주의, 무정부주의, 회의주의 또는 데카당스 등이 훨씬 더 친숙하고도 뚜렷하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허무주의라는 단어를 최초로 철학적 용어로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야코비(F.H. Jacobi)이다. 야코비는 피히테에게 쓴 편지(1799)에서 피히테의 관념론을 허무주의(Nihilismus)라는 말로 부르며 비판한 바 있다. 허무주의를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 ‘니길리즘 нигилизм[nigilism]’의 등장은 나데즈딘의 <허무주의자 대회>라는 기고문(<유럽통보>, 1829)을 통해서인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어 Nihilismus나 러시아어 нигилизм은 모두 라틴어 nihil을 어원으로 한다. nihil은 일차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곧 ‘무(無)’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결코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 거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러시아에 등장한 ‘허무주의’는 바로 이 강한 거부의 정신을 모태로 하여 정치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를 휩쓸었던 이데올로기이자 행동강령이었다.
  ‘허무주의’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나데즈딘은 이것으로 당시 문학과 철학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을 가리키려 했지만 그 의미가 상당히 모호하여 냉소주의, 회의주의 등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허무주의’, ‘허무주의자’라는 말이 러시아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이 세상에 나오고, 이 소설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면서부터이다. 러시아 허무주의의 바이블이라 칭해지기도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허무주의, 허무주의자는 기존 질서와 권위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사상, 그러한 사상으로 충만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굳어지게 된다. 서구에서 유행하기 이전인 1860년대부터 이미 러시아에서는 이들 용어의 폭넓은 사용이 관찰되고 있으며 이 러시아식 허무주의는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에 널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려 드는 순간 가장 먼저 가로 막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느님 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먼저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그래서 ‘교회의 맏딸’라는 별칭까지 얻은 프랑스에서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니체 같은 스산한 감수성이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늘 춥고 차가운 땅, 그림자 짙게 드리운 숲속의 나라들과는 달리 편서풍이 항상 불어오는 대서양에 면한 이 육각형의 땅에는 언제나 태양이 떠올라 그 풍부한 일조량을 붓고 있었으며 햇볕 머금은 뜨거운 포도밭에서 나오는 싱그러운 술은 사람들을 거의 늘 얼큰하게 데우고 있었다. 누려야할 즐거움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는 그들의 언어생활에서 ‘허무주의’는 낯선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주인공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는 ‘으앙’ 하는 대신에 ‘술~!’ 하고 울었으며 이천 명이 넘는 등장인물을 상상해 낸 발자크이지만 제대로 된 허무주의에 빠진 인물을 그려낸 적은 거의 없었다. 
  19세기에 그 단어가 북쪽으로부터 들어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회자되기 시작할 때 맨 먼저 눈살을 찌푸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쓴 빅토르 위고였다.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무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할 수 있는 얘기가 더 이상 없어진다. 논리 그대로라면 허무주의자는 상대방이 자기 앞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에 서면 자기 자신은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 낸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려고 시도한 자가 있었다. 르네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자 했었다. 자기 손에 쥐어진 펜대가 사실은 없는데 못된 악마가 자기의 촉각을 교란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에 보이는 강이 사실은 없는데 착시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1은 3인데 사람들이 계산할 때마다 전능한 그 요정이 개입하여 2라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증명해 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의심하고 또 생각하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주체도 없을 수 있는가?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의심하고 생각하는 나는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있다(cogito ergo sum). 네덜란드의 한 책상에서 내린 그 결론은 19세기 말까지, 구체적으로 모파상과 졸라와 위스망스가 삶과 세계의 이면을 그려내려고 노력하기 전까지 프랑스를 지배한다.
  물론 모든 이가 타인들, 자신, 사회, 가치들과 공동체에 대해 늘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허무까지는 아니더라도 허망함 혹은 불안과 회의에 몸서린 친 정신들을 프랑스 문학사가 기록하고 있다. 
  가장 멀리로는 몽테뉴가 있다. 중세의 지붕을 걷어낸 서유럽 대륙이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에 열광하면서 한 세기를 보낸 16세기 중반에 그는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고 되묻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한 세기 후 파스칼은 ‘신이 없다면 인간과 세계는 무엇인가? 얼마나 비참한 실존과 실재인가? 광대한 밤하늘의 저 영원한 적막이 들리지 않는가?’라고 경고하고 슬퍼했다. 둘의 회의주의와 염세주의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훗날의 허무주의에 공급할 자양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7세기의 희극 작가 몰리에르 역시 인간을 혐오하고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는 계기를 엿보인다. <인간혐오자> 공연 내내 명랑한 웃음으로 즐거워하던 관객들은 극의 말미에 주인공 알세스트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영원히 저주하고 증오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나가는 장면에서 뭐라고 설명 못할 그늘에 휩싸인다. 
  허무의 씨앗은 계몽주의 시대에도 말라버리지는 않았다.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이 대륙을 감싸 안을 때 명민한 볼테르는 자신의 주인공 캉디드에게 온갖 터무니없는 고초를 몰아 안기면서 ‘이래도 세상은 선과 행복인가?’라고 항변한다.
  『백과전서』 안에 기존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로 제시하려고 노력했던 디드로도 어느 순간엔 실존의 허무를 보는 듯하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의 유혹에 빠져 물고기로 변한 선원들을 구출하는 장면을 두고 “과연 그들은 다시 사람이 되기를 원할까?”라고 엉뚱하게 묻는다. “어차피 각 생물학적 개체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절대량은 동일하게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라는 사족을 다는 디드로를 계몽주의자로 받아들이려면, 논리적으로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티베트의 승려와도 같은 그 감각은 충분히 허무하다.
  대혁명 이후 라마르틴이 시집 『정치와 종교의 조화』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기에 앞서 전 세기의 디드로가 있었다고 말해서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원 앞에서는 모든 게 마찬가지이니,
사람도 태양도 동등하게 크도다!”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새 세상을 마련하고 있는 동안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로 하여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걸. 왜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파괴되어야 하니까”라고 저주하게 한다. 베르테르의 슬픔과 자살을 공감하는 독자라면 허무주의의 기운을 느낄 만도 할 것이다. 
  혁명은 어지럽게나마 진행되고 있지만 그것의 가치와 실효에 대해서는 아직도 두고 봐야 한다는 프랑스 청년들에게 이상한 전염병이 찾아든다. 이른바 ‘세기병(mal du siècle)’이다.
  귀족인 샤토브리앙이 혁명을 못마땅해 했다는 것을 나무라긴 힘들다. 그는 ‘르네’라는 인물을 창조하여 남아메리카로 보내어 스쳐가는 바람과 황량한 들판 한 가운데에 세워,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며 ‘이 땅의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남아 있는가?’라고 읊조리게 하였다.
  이즈음에 프랑스에 ‘세기병’이라는 것이 찾아든다. 낭만주의의 물결이 날라다 준 것이다. 세상을 뒤집었다고 믿었는데, 그대로이다. 분명히 뒤집었는데 우리의 일상은 전통적이다.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 지도 모른다. 진리가 굳이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그 환멸의 허무한 감정을 때맞춰 표현한 작가는 알프레드 드 뮈세이다.
  사랑이라는 저 알 수 없는 것에 휘둘린 그는 『사랑 가지고 장난치는 것 아냐』라는 희곡으로 연습한 뒤 『세기아의 고백』이라는 소설로 사랑의 허무를 고백한다. 프레데릭 쇼팽에게로 옮겨가는 그의 사랑 조르주 상드와의 패배한 사랑을 곱씹는 그 소설은 세기병에 물든 동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을 위해, 삶과 사랑의 무상함을 아주 깊게 노래함으로써 ‘허무’ 또는 ‘상실’에 대한 문학적 표현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뮈세는 그의 시 『롤라』의 주인공 롤라를 통해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은 주위의 수많은 청년들의 허무주의적 감성을 밀도 있는 언어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허무주의의 형상화를 발자크에게서 굳이 찾자면 1832년 처음 발표되고 1844년 수정 발표된 『샤베르 대령』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뒤늦게 생환한 샤베르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내는 남편의 사망 혹은 적어도 실종을 확신한 후 재혼을 한 상태였다. 샤베르가 자신의 몫의 재산을 찾기 위한 소송을 벌이게 되어 변호사 데르빌과 함께 재판에 임하는 동안 그의 옛 아내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샤베르를 좌절시킨다. 현실적인 패배에 짓눌린 샤베르는 ‘허망함’이라는 이름의 감정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지켜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 변호사 데르빌 또한 파리의 들끓는 군상들을 뒤로하고 지방으로 귀향함으로써 ‘허무’의 한 이미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허무의 감정이 제대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플로베르를 기다려야만 했다. 물론, 『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 모로가 구현한 정서가 정확히 허무인가는 논의의 대상일 것이다. 절망일 수도, 패퇴일 수도, 좌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무기력과 우유부단에 대해서는 누구나가 다 고개를 저을 것이다. 너 댓 명의 각기 다른 여인들이 끝내 가르쳐 주지 못하는 ‘사랑’, 1848년의 2월 혁명도, 뒤이은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도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쳐 비켜가고야 마는 정신 혹은 주체. 플로베르의 프레데릭은 작가의 시대를 향한 진단이며 범속한 부르주아에 대해 갖다 붙이는 푯말의 대명사이다. 그 푯말은 아마도 ‘허망’일 것이다. 정신과 전통이 결여된 군상들이라면 프레데릭처럼, 속 빈 갈대처럼 이리저리 나부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으로 작가는 묘사하고 있다. 
  삶의 허무를 ‘권태’라는 이름으로 묘파한 작가는 시인 보들레르이다. 『악의 꽃』의 서문에 해당하는 ‘독자에게’의 후반부의 한 귀절은 러시아의 허무주의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저주받은 시인의 환멸을 절절히 노래한다. 

“온갖 잡스런 짐승들과 악덕들, 세상의 추악한 
쓰레기들 가운데서
단연 빛나는, 훨신 더 추악하고 못되고 더러운 놈이 하나 있나니
바로 권태로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질질 흐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물담배를 피워 물고 사형대를 꿈꾸는 그것.
위선의 독자여, 내 형제여, 
너도 알지?”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가 노래한 『구원救援』의 첫 구절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지적 풍토를 예견하듯이 ‘무(無)’로 시작한다. 

“무(無), 이 거품, 처음 뱉은 시구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평론가 폴 부르제는 자신의 시대를 잠식해 들어오는 허무주의적 경향에 대해 드디어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모파상, 플로베르, 위스망스 등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들은 일정하게 허무주의적 경향을 보인다”고 쓰는 그는 작가들의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푸념을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현대의 심리학 개론』은 “더 이상 살아 나갈 수 없는 치명적 피곤함, 일체의 노력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음울한 지각” 등을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시대를 진단한다. 보수주의자 부르제의 눈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등의 허무주의적 감수성의 유입이나 파리코뮌의 광포하고 극단적인 파괴행위들, 또는 자연주의 작가들의 집요한 인간 해부와 혐오 등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비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의 부정적 세계인식 혹은 암담한 현실의 고발은 주로 자연주의 작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중 대표적인 졸라를 언급할 만한데, 소설 『제르미날』에는 수바린이라는 인물이 폭발적 무정부주의를 표상하기도 한다. 수바린은 주인공인 에티엔 랑티에를 비롯한 파업 광부들이 회사의 압박에 굴복하려는 순간 “모든 걸 때려 부수는 거야... 이젠 국가니 정부니 하는 건 없어! 소유도 신도 신앙 따위도 더 이상 없어!”라고 외치면서 마지막 투쟁의 불꽃을 불사른다. 그가 구현하는 것은 허무주의의 정치적 버전인 무정부주의이다.
  이 시대에 프랑스의 문단에 허무주의의 이름에 값하는 주인공이 한 명 등장하는데, 전통적인 의미의 올바른 주인공이 아니라 말하자면 반反주인공이다. 데카당스 소설가 위스망스가 그려낸 데제생트가 그인데, 대부분의 인생사, 거의 모든 사물들, 모든 타인과 사회와 가치들을 향한 그의 미학적 혐오는 허무주의라는 이름과는 별도로도 주목받을 만하다. 
  시대와 동류 그리고 세계에 대한 데제생트의 불신과 비웃음을 다음 세기에 이어받는 문학 속의 인물로는 셀린의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의 주인공 페르디낭 바르다뮈를 떠올릴 만하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경험한 작가는 그의 주인공에게 일정 분량의 허무의 감수성을 부여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 프랑스에서도 허무주의는 보다 다양하고도 자유로운 표현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 문화적 차원의 발현으로는 레오 페레의 샹송 <시간이 가면서>을 언급할 만하다. 대중문화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허무의 감정은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가벼운 의미로 환기되는 듯하다.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게 가네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나지 않아
심장이 더 이상 고동치지 않으면, 굳이 멀리 찾으러 갈 것 없네
그냥 내버려둬, 그런 거야.”

  그러나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어는 기본적으로 광장의 군상들이며 주고받음의 언어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기 보다는 누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들 가운데서 허무주의를 보기 위해서는 일탈과 예외적 기준을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삼은 소수의 예술가들을 찾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만큼 토포스 ‘허무주의’는 프랑스에서 희미하다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알베르 카뮈가 그러한 사실을 시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존재와 (허)무’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성찰을 수행한 사르트르와 함께, 『페스트』, 『이방인』, 『시지푸스의 신화』 그리고 『반항적 인간』을 남긴 카뮈는 프랑스어 언중 사이에 ‘허무주의’의 토포스를 형성하는 데 나름으로 기여하였다. 그의 기여는 ‘부조리’라는 어찌할 수 없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가능했다. 양차대전과 학살의 역사를 지울 수 없는 서구 대륙의 기억에 카뮈는 어떤 대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려들기 보다는 우선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살아내자’라고 제언하였다. 그리고 ‘허무주의’로 물러앉는 대신 반항하고자 하였다. 그가 조수석에 태우고 가다가 사고 나서 함께 죽은 그 ‘쾌락’이 허무하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18세기와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토포스들 중에는 프랑스로부터 들어와 러시아적 토양 속에 뿌리내린 것들, 혹은 기존의 토포스들이 프랑스의 영향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는 것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허무주의 토포스만은 러시아적 토포스가 프랑스를 포함하여 서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토포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무주의를 전유럽적 현상으로서 다각적으로 분석한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을 촉발한 것도 러시아 허무주의였다. 니체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읽었으며 허무주의란 말도 이 작품을 통해 받아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 허무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던 니체는 이에 대해 여러 저서에서 언급한 바 있다.

“페테르부르크 풍의 허무주의는 신앙을 부정하는 신앙이며 이를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는 신앙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1881)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은 기존의 가치체계, 이상, 도덕, 규범, 원칙을 모두 부정하고 거부하는 러시아식 허무주의로 시작되지만 점차 nihil의 일차적 의미 곧 ‘무(無)’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하는 허무주의 사상으로 발전해나간다. 거부와 부정의 허무주의는 우주운행 질서에 대한 자각과 맞물리면서 영원회귀 사상이라는 우주적 허무주의로 수렴된다. 유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으로 되어있는 우주에서 가능한 것이라곤 존재하는 것의 끝없는 순환운동뿐이지만 인간은 아무 목적 없이 회귀를 반복하는 세계의 덧없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세계를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진정한 세계로서 ‘내세’라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해내지만 이 진정한 세계라는 것은 스스로가 날조해낸 창작물일 뿐이며 ‘목표’라든가 ‘통일성’, ‘진리’라는 그 어떤 가치 개념으로도 존재의 일반적 성격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다는 인식, 곧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우주 운행 법칙인 영원회귀에 있어 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허무주의가 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허무주의의 한계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니체는 인간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고조로 상승시킴으로써 이 허무주의를 삶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야 함을, 그렇게 스스로를 극복하는 사람 곧 위버멘쉬가 됨으로써 이 허무주의를 떨쳐버릴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처럼 니체를 포함해 서구 철학자, 사상가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허무주의를 논할 때,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1862)이 발표된 시기인 1860년대는 기존의 가치체계, 종교, 도덕규범을 부정하고 서구 철학과 자연과학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기성세대와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던 시기였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차이, 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을 면밀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인 아르카디는 방학을 맞아 시골 영지로 돌아오게 되는데 자신의 친구 바자로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는 큰아버지 파벨과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바자로프를 허무주의자라 소개한다. 니콜라이가 허무주의자를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파벨은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해하자 아르카디는 허무주의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허무주의자란 그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아무리 주위에서 존경받는 원칙이라고 해도 그 원칙을 신앙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 사람이에요.”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1862)

  바자로프는 아버지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귀족주의, 권위와 원칙, 규범, 진보 사상 등 기존의 권위와 가치체계를 모두 거부하고 부정해버린다. 바자로프에게 부정과 거부는 그 자체로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귀족주의, 자유주의, 진보, 원칙들이라..., 보세요, 얼마나 많은 외국단어들, 무용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는지! 러시아인에게 이것들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위해 행동합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부정이 가장 유용하며 그래서 우리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1862)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뿐만 아니라 예술과 시까지 부정하고 러시아 민중을 모욕하는 이들 젊은 세대를 자유주의적 진보 사상을 견지한 아버지 세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이들 허무주의자들은 부정과 파괴만을 일삼을 뿐이며, 훨씬 더 중요한 창조와 건설에는 관심이 없는바 사회적으로 무익한 자들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은 작품이 발표된 이후 보수진영을 통해 수용되고 강화되었다. 소위 ‘60년대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을 비난하기에 ‘허무주의’, ‘허무주의자’만큼 적절한 단어는 없었던 것이다.
  ‘60년대 사람들’이라 불리는 1860년대 급진적 인텔리겐치아는 1840년대 자유주의적 성향의 인텔리겐치아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들 두 세대는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토대가 상이하였다. 40년대 세대는 1812년 전쟁 이후 사회의 고조된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란 자들로서 니콜라이 1세 시대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였고 셸링, 피히테, 헤겔 등 독일의 관념론에 심취하였다. 이에 반해 60년대 사람들은 크림전쟁(1855)의 패배를 통해 러시아의 무력함을 목도한 자들로서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의 농노해방 등 자유주의적 개혁의 한계에 절망하고 이에 대해 일체의 기대를 버리게 되면서 생시몽, 푸리에 등 프랑스식 사회주의 사상에 더욱 경도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토대는 기존 권위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그들의 태도를 설명해준다. 또한 두 세대 간 출신계급의 차이도 존재한다. 초기의 인텔리겐치아가 주로 귀족계층이었다면 6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그 구성원을 상인, 하급관리, 성직자, 농민 출신 등 소위 ‘잡계급(разночинцы)’으로 확대하였다. 성직자의 아들이었던 체르니솁스키, 귀족가문 출신의 피사레프, 농노의 아들이었던 네차예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인텔리겐치아가 배출되었다. 이들 잡계급 출신 인텔리겐치아는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에 있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과격했으며 반대 진영과의 논쟁에 있어 훨씬 더 신랄하고 격렬했다.
  이들 ‘60년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허무주의자라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허무주의자’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아버지 세대 니콜라이가 지적하고 있듯, 이들은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부정만 할 뿐 사회에 유용하고 건설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 자들로 매도되었다.

“ «자네들은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군...하지만 건설하는 것도 필요치 않겠나?» 라고 니콜라이가 말하자 바자로프는 응수했다.
«그건 이미 우리 일이 아닙니다...우선은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1862)

  투르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이 발표된 후 얼마 안 있어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바로 1862년 페테르부르크 화재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투르게네프의 아래 회상은 이 시기 허무주의자란 단어가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또한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내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시기는 그 유명한 아프락신스키 궁전의 화재가 있었던 때였다. 이 시기 ‘허무주의자’라는 단어는 이미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이었다. 넵스키 대로에서 첫 번째로 만난 지인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다음과 같은 탄성이었다. «당신의 허무주의자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시오! 페테르부르크를 불태우고 있소!»”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에 관하여>, 1868~1869)

  심지어는 허무주의자들의 외모도 불쾌하게 생각되었다. 허무주의자라고 하면 더러운 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의 지저분한 남자, 짧은 머리에 매력 없는 외모, 여성성을 상실한 여자와 연상되었으며, 그보다 더 혐오스럽게 생각된 것은 그들의 거칠고 무례한 태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 이미지의 허무주의, 허무주의자는 60년대 사람들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피사레프가 바자로프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면서 개념 변화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보수진영을 통해 젊은 세대의 부정적 특성과 연결되었던 바자로프의 형상은 피사레프의 평론 <바자로프>를 통해 젊은 세대의 긍정적 자질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피사레프 자신은 문학적 허구인 바자로프가 실제 인간으로 되살아난 것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비록 평민출신인 바자로프와 달리 피사레프는 귀족계급의 일원이었으며 우아한 미적 취향을 지닌 자였지만, 1860년대 평민출신 대학생의 삶의 조건과 처지, 이를 극복하면서 이루어낸 강인한 성정을 긍정적이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통찰하였다. 바자로프에게 붙여진 ‘허무주의자’라는 명칭은 피사레프에 이르러 자랑스러운 이름이 될 수 있었다(한정숙,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들> 참조).
  피사레프는 특히 여러 평론을 통해 이성적 이기주의를 찬양하였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에서 건강한 이기심을 높게 평가한 바 있는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니체보다도 먼저 이성적인 이기주의, 건설적인 이기주의의 강점에 눈을 돌린 것이다.

“현실주의자의 이기주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즐거움을 무궁무진하게 쌓아가는 이기주의, 성숙한 어른의 분별 있고 속 깊은 신중한 이기주의이다.” (피사레프, <현실주의자>, 1864).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이익이 되고 편리해 보이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피사레프, <바자로프>, 1862)

  1860년대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사회평론가 셸구노프는 회상록에서 피사레프의 이기주의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은 바 있다.

“피사레프는 사람들 각자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진실, 선, 사랑 그리고 정의의 공통된 원천 위에 설정하기를 원했다. 그가 설파했던 이기주의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셸구노프, <회상록>, 1967)

  이 이성적 이기주의는 ‘60년대 사람들’의 선두주자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 <동시대인>에 발표)에서 빌려온 사상이다. 인간은 오로지 이익 계산에 의해 지배되는 바, 주인공 로푸호프는 “타인을 위한 일과 그러한 일을 즐기는 것”이 최상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사람들이 이렇게 올바른 계산을 한다면 “누구도 타인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 세대의 눈에 바자로프와 같은 허무주의자들은 파괴만을 일삼을 뿐 건전하고 창조적인 건설에는 뜻이 없는 듯 보였듯이, 초기의 허무주의자들은 이런 소극적 허무주의의 한계에 갇혀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미 바쿠닌이 “파괴를 향한 열정은 그와 동시에 창조적 열정이다”(<독일에서의 반동>, 1842)라고 천명한 바 있듯이 소극적 허무주의는 점차 적극적 허무주의로 변모해나간다. 6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기존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민중을 위한 헌신에 혼신을 다했다. 러시아 허무주의의 교과서라고도 불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주인공들은 강력한 실천성까지 구비함으로써 바자로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 작품의 부제가 ‘새로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새로운 세대의 삶의 방식, 삶에 대한 태도, 행동방식, 사고 구조가 이전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체르니솁스키와 피사레프 등 60년대 사람들의 활약 속에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받은 허무주의 개념은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펜 끝에서 다시 그 부정성이 극대화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를 시작으로 『죄와 벌』(1866), 『악령』(187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등을 통해 허무주의적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파헤친다. 특히 『악령』은 네차예프가 주도한 실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네차예프는 아나키즘과도 맞닿아있던 당대 혁명적 허무주의자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인민재판’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혁명 활동을 수행하던 네차예프는 조직 내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배신을 두려워하여 조직원이었던 대학생 이바노프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도스토옙스키는 허무주의 사상과 그것이 정치 분야에 미치는 부정적 결과의 필연적 관계를 보이고자 시도한다. 혁명적 테러리스트 베르호벤스키가 조직한 샤토프 살해 사건은 바로 네차예프의 이바노프 살해 사건을 모델로 하며 극단적 허무주의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급진적 허무주의자들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었지만 점차 허무주의적 인간의 심리상태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하게 된다.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에서 ‘거부’와 ‘무(無)’의 필연적 수렴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는 허무주의도 당대의 급진적 사상으로서 허무주의에서 점차 인간의 병리적 현상으로서의 허무주의로 나아간다. 같은 해(1844년)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간 도스토옙스키와 니체는 서로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야말로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생애의 가장 큰 행운 중의 하나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 1888)

  도스토옙스키는 허무주의를 인간 영혼을 갉아먹고 병들게 하는 병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허무주의란 현대인이 직면하고 있는 공허감에 다름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공포에 떨다가 드디어 모든 것을 의심하며 기존의 가치들을 부정하고 나서는 허무주의적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공허감에 시달리게 된다. 삶의 의의도 상실한 채 신, 불멸성, 양심과 같은 가치체계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이종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허무주의적 인간상> 참조).
  20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베르댜예프와 로스키에게서 발견된다. 

“허무주의는 혁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의 일부이다. [...] 허무주의는 전형적인 러시아적 현상으로서 정교의 정신적 토양에서 자라났다. [...] 러시아 정교는 문화의 정당성을 옹호하지 않는다. 정교는 인간이 이 세상에 창출한 온갖 것에 대해 허무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러시아 허무주의는 특권계급에 의해서 창조되어, 특권계급만을 위하여 계획된 문화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었다.”
“러시아 허무주의는 러시아 계몽주의의 급진적 형태이다.”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이념』, 1971)

  이처럼 베르댜예프는 러시아 허무주의의 저변에 문화를 숭배하지 않는 정교적 토대가 깔려있다고 본다. 1860년대 인텔리겐치아를 휩쓸었던 허무주의는 민중에 대한 죄의식, 특권층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독특한 속성이라는 주장이다. 허무주의가 인민주의 등과 같은 급진적 계몽주의와 연결된 것도 오로지 러시아에서만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베르댜예프가 허무주의를 고유한 러시아적 현상으로 파악하였다면 로스키는 허무주의를 러시아인의 민족성과 연관시킨다. 

“허무주의자들은 사회의 전통적 토대를 끊어버리는 데 있어 러시아인들의 특징인 최대주의와 극단주의를 드러내곤 했다. [...] 허무주의는 러시아 민족이 지니는 선량한 특성들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종교를 상실하고 유물론자가 된 러시아 지식인이 ‘지상의 천국’을 폭력에 의해 건설하려는 목표를 설정하였을 때 출현한 것이다.” (로스키, 『러시아인의 민족성』, 1957) 

  이러한 견해는 러시아에 허무주의가 그토록 강력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 이유를 러시아인이 모두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시각과도 합치되는 부분이 있는 듯 보인다.

“허무주의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난 것은 우리가 모두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이 새롭고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 까닭에 다소 놀랐을 뿐이다. [...] 허무주의자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원래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우리 곁에 존재해온 것이다.”(도스토옙스키, <작가수첩>, 1880)
비교문화적 설명   ‘허무주의’를 뜻하는 프랑스어 ‘니일리슴’과 러시아어 ‘니길리즘’은 모두 라틴어 nihil을 어원으로 한다. nihil은 일차적으로 ‘무(無)’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결코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 거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러시아에 등장한 ‘허무주의’는 바로 이 강력한 거부의 정신을 모태로 하여 정치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를 휩쓸던 토포스이다. 애초의 시작은 기존의 권위와 가치체계를 거부만 하는 부정적, 소극적 의미로 출발했지만 점차 낡은 것을 거부하고 새 것을 창조하는 생산적, 건설적 의미까지 함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여러 사상가들은 러시아에서 허무주의가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킨 원인을 정교적 세계관 및 러시아인들의 민족성에서 찾기도 하였다. 
  러시아와는 달리 토포스로서의 ‘허무주의’가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다소 미미한 편이다. 프랑스에서 허무주의는 주로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머무르면서 염세주의, 회의주의, 권태 등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되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적 허무주의의 파급력이 프랑스에까지 미쳐 허무주의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무정부주의에 상당부분 영향을 주기도 했다.
연관 토포스 계몽; 무정부주의; 민중; 양심; 이데올로기; 정교; 지식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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