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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혁명
토포스명(프랑스) révolution
토포스명(러시아) революция
정의 1. 혁명이 가져온 변화가 근본적일수록 혁명의 가치는 더 크다.
2. 변화에 대한 욕구가 절실할수록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혁명을 뜻하는 프랑스어 ‘레볼뤼시옹 révolution[ʀevɔlysjɔ̃]’의 어원은 라틴어 ‘레볼루티오 revolutio’이다. ‘별이 주기적으로 궤도의 한 지점에 회귀하는 현상’을 뜻하는 레볼루티오는 본래 천체의 운행이나 자연의 순환현상 같은 우주질서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이것이 국가의 정치, 사회 구조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초래하는 정치 행위의 의미를 처음 갖게 되는 것은 영국에서 스튜어트 왕조가 부활했던 1660년경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봉기나 쿠데타 같이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배 권력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체를 확립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기라고 여겨진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기원전 367년경)에서 우주의 변화와 질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날 신들이 인간의 행복과 생존을 지켜주었던 시기에 만물은 올바르게 전개되고 있었으나, 어떤 운명에 의해 신들이 물러나고 인간만 남겨지는 엄청난 변화(metabolê, 변화 또는 회복을 의미하는 그리스어)가 일어났고 그 뒤로 인간은 타락하고 불행해졌다. 따라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또 다른 변화, 즉 메타볼레를 일으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유럽이 기독교의 지배하에 있던 13~16세기에 ‘레볼뤼시옹’은 “신이 정해놓은 시간의 완성”을 의미했다. 이는 ‘레볼뤼시옹’의 어원과 기독교의 해석이 결합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가 곧 세계의 운명이고 그 의지의 구현이 우주질서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인간에게서 하느님이 정해놓은 시간의 완성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정해둔 본래의 목적으로 회귀함을 의미한다. 이 회귀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타락하기 전의 과거를 되돌려놓음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천체의 주기적 순환이 가능한 것은 되돌아가야 할 본래의 지점이 있기 때문인데, 기독교는 그 지점을 인간을 위해 하느님이 예정해둔 시간의 완성으로 해석했다. 어휘 레볼뤼시옹이 인간사에 적용되면서 ‘단절’의 관념을 내포하는 것은 앞으로만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본래 목적으로의 회귀는 시간의 단절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레볼뤼시옹’이 반복(ré-)과 변화(évolution)의 조합인 것은 혁명에 단절과 변화의 반복이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국가』에서 단 한 번의 혁명으로 결코 본래의 질서가 회복될 수 없으며,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적대적인 세력들의 반혁명적 시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기 때문에 투쟁은, 혁명은 되풀이된다고 말했다(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16세기에 이르면 ‘레볼뤼시옹’은 시간이나 천체뿐만 아니라 세속의 일에도 적용되어, 종종 재앙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표현하는 라틴어 어휘들(mutatio, conversio, vicissitudo)을 ‘레볼뤼시옹’으로 옮기는 용례들이 나타난다. 17세기 이후에는 어휘의 세속화가 더욱 진전되어 순환이나 회귀의 의미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변화나 변질의 의미가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의 주기나 생리 현상(심장박동 주기의 의미)을 가리키는 경우 외에도 정치와 경제의 변동, 정신의 움직임, 사상, 언어의 변화, 건축, 기계 등 다양한 분야에 이 어휘가 적용되었다. 가령 1694년에는 의학에서 기질의 ‘레볼뤼시옹’을 “건강을 변질시키는 기질들의 특이한 변화”의 의미로 사용한 용례가 있으며, 뷔퐁은 『지구의 역사와 이론』(1749)에서 ‘레볼뤼시옹’을 “땅을 뒤흔드는 자연 현상”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1857년 노스반이 쓴 『목공 개론서』에는 “계단의 레볼뤼시옹(축을 중심으로 하는 회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http://www.cnrtl.fr 참조). 오늘날에도 이러한 의미들은 ‘레볼뤼시옹’의 사전적 정의에 분야별 전문용어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레볼뤼시옹’을 정치혁명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첫 번째 계기는 1660년 영국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놓은 크롬웰의 실각이었다. 크롬웰은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일명 청교도혁명이라 불리는 영국내전(1642~1651) 당시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을 수립한 혁명군의 수장으로 1653년에 초대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1660년 쿠데타에 의해 찰스 2세가 즉위하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당시 혁명파는 이 왕정복고를 두고 “영광스러운 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이라 불렀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왕과 귀족계급 사이의 내전이라 할 ‘프롱드의 난’이 한창이었는데, 이 난의 핵심인물이었던 레츠 추기경은 그의 『회고록』(1717)에서 이 난을 가리키는 ‘내전’이라는 표현 옆에 ‘레볼뤼시옹’을 병기했다. 그러나 난이 실패하면서 이 사건은 영국의 혁명과 달리 ‘레볼뤼시옹’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라 프롱드(La Fronde)'라 표기되었다(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사회 개혁의 의지가 드높았던 18세기,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철학 사전』(1764)에서 ‘레볼뤼시옹’은 “전복, 개혁, 정치적 위기, 급변” 등과 유사한 어휘로 사용되는 동시에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예술, 기술, 종교 분야에 나타난 변화를 폭넓게 지시하고 있다. 최초로 ‘레볼뤼시옹’을 정치적으로 명확히 의미규정한 사람은 몽테스키외이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1748)에서 ‘레볼뤼시옹’을 “정치권력의 성격과 조직에 나타난 철저한 변화, 통치자가 아니라 정체를 바꾸는 정치적 사건”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1770년 돌바흐의 『자연의 체계』에서도 ‘레볼뤼시옹’은 파괴적으로 “제국의 전복”을 가져오는 “끔찍한 정치적 혼란”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변화를 거쳐 온 ‘레볼뤼시옹’은 마침내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통해,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전례가 없는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의미의 근대적 공화국을 가져온, “기존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일련의 연속적인 정치 사건들”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혁명을 뜻하는 ‘레볼류치야 революция[revolyutsiya]’의 기원은 라틴어 ‘레볼루시오 revolutio’로 거슬러 올라가며 폴란드어 ‘레볼류차 rewolucja’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다. ‘레볼류치야’가 러시아어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초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샤피로프의 『고찰』(1717)에서는 현대와는 다소 상이한 의미(‘취소, 변경’의 의미)의 ‘레볼류치야’를 만날 수 있다(체르니흐, <현대 러시아어 어원사전> 참조). ‘레볼류치야’가 오늘날과 같은 정치 용어로 공고화되는 시기는 많은 언어권에서 그러하듯 프랑스 대혁명(1789)을 거치면서이다. 
  ‘혁명’이란 용어는 긴 의미변화 과정을 겪어 왔다. 혁명의 최초의 어원인 라틴어의 revolvere는 ‘돌아가기’, ‘굴리기’와 같은 동작을 지시했으며 4세기 경 그리스의 천문학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처음으로 ‘레볼루티오 revolutio’가 등장하였다(레비트, <문화 백과사전> 참조). ‘레볼루티오’의 애초의 의미, 곧 천체의 회전, 순환 운동의 의미는 서유럽 언어권에 그대로 수용되어 긴 세월 동안 이것을 어원으로 하는 어휘들의 주도적 의미로 기능하였다. 가령 코페르니쿠스의 유명한 저서 『천체의 회전운동에 대하여』(1543)에도 이 용어의 애초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사회 질서가 우주 질서의 일환으로 편입되면서 ‘레볼루티오’는 점차 국가, 사회, 개인의 삶에서의 변화 과정을 지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변화의 목표가 되는 것은 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회복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신이 인간 세상을 위해 예정해 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로 말미암아 어긋난 것들을 신이 예정해 놓은 원래의 질서로 회복한다는 의미가 혁명이란 용어가 가지는 주도적 의미였다.
  현대 사회에서 혁명은 자연, 과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질적인 급변, 본질의 변형, 토대의 변화를 지시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전형적인 혁명 개념은 정치 사회적 의미의 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정치적 의미로 사용된 최초의 예는 1660년 영국에서 크롬웰이 실각하고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사건을 지칭한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의 정치적 함의는 나타났으나 아직까지도 혁명의 의미 안에 권력의 회귀, 통치형태의 순환이라는 애초의 천문학적 의미와의 연관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혁명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출현하여 근대 사회의 핵심적 정치 용어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러시아에 혁명이란 용어가 유입된 시기와 경로는 18세기 초 폴란드어를 통해서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혁명의 전형적 의미의 획득과 보편적 사용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그 직접적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 사회 발전에 있어 혁명이 수행하는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이에 대한 시각차도 첨예화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혁명에 뒤따르는 대규모 지출에 비해 그 성과가 모든 측면에서 진화적 발전 형태에 못 미침을 주장한다면 좌파 극단주의자들은 혁명 과정의 객관적 법칙을 부정하고 혁명적 아방가르드, 즉 ‘적극적 소수’,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혁명 완수 가능성에 주목한다. 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혁명이 정치 사회적 발전의 가장 강력한 힘이자 최상의 수단임을 증명해보이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을 “역사의 기관차”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이론에서 혁명은 사회적 발전에 있어 거대한 도약이자 새롭고 진보적인 사회 형태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일리이쵸프, <철학백과사전> 참조).
  혁명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을지라도 20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에서 혁명은 일상에서보다는 철학과 사상에서 주로 논의되던 피상적인 ‘관념’으로 머물러있었다면 20세기 초 혁명이 러시아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토포스로 자리매김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러시아 역사 상 혁명이란 명칭을 부여받은 세 개의 정치 사회적 사건, 곧 1905년 제 1차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그것이다. 이들 세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에서 혁명의 토포스는 혁명의 전개 양상 및 의의에 대한 가치 평가 속에 다채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갔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프랑스 공화국의 표어는 1789년 혁명 당시 민중들이 봉기하며 외쳤던 구호 “자유, 평등, 박애”이고, 국기는 당시 왕실과 국민의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백색기에 파리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혁명군을 상징하는 빨간색을 결합하여 만든 삼색기이다. 프랑스의 공공장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리안느라는 이름의 조각상들도 혁명 당시 왕을 대체할 공화국의 상징물로 채택되었다. 또한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혁명 발발 이후 혁명의 유럽 전파를 막으려 결성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찌르기 위해 전투에 나서며 프랑스 군인들이 불렀던 군가였다. 이 모든 프랑스의 상징들은 혁명의 나라 프랑스를, 오늘날의 프랑스가 1789년 혁명의 귀결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그 시발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정치적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자 그 소식을 루이 16세에게 전하러 간 라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이 “반란인가?”라는 루이 16세의 물음에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콜린 존스,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참조). 이 때 ‘혁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민중들이 무기를 탈환하고 죄수들을 석방시킨 행위를 단순히 민중들의 불만이 표출된 폭동으로만 간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18세기 후반에 오면 혁명, 반혁명(contre-révolution) 같은 용어들이 당시 발간된 익명의 소책자나 저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예고하는 혁명이 준비되었다. 불복종의 정신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 정신이 소리 없이 끓어오르고 있는 곳은 가장 낮은 계층이다.” (레스티프 드라 브러톤, 『파리의 밤』, 1788)

“우리는 위기의 상태, 혁명의 세기에 다가가고 있다.” (장 자크 루소, 『에밀』, 1726)

“그 당시(1788) 1789년 7월 세 시간도 안 걸려서 용감한 우리 프랑스 사람들의 기습공격에 바스티유가 점령될 것이라고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개인의 자유, 공공의 자유와 더불어 분명 우리를 지켜줄 혁명의 신속한 진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장-밥티스트 루베 드 쿠브레, 『기사 포브라의 사랑』, 1790)

“절반의 혁명을 하는 자들은 자기 무덤을 팔 뿐이다. 공화국의 확립은 곧 혁명에 대립되는 모든 것의 파괴이다.” (생-쥐스트, <국민의회 연설>, 1794)

  1789년 혁명 이후 혁명이란 어휘는 혁명에 비판적이든 호의적이든,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는 정치 용어가 되었고,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고찰하며 혁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혁명 이후 온건 공화파였던 지롱드당의 일원인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미국 혁명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미국 혁명이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인들의 대의에 관심을 갖고 다른 어느 곳보다 그들의 저작물과 원칙을 많이 유포시킨 국민이 있다면, - 그곳은 가장 많이 계몽되었지만 가장 덜 자유로운 나라였다 -, 철학자들은 진정한 지식을 가졌으나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했던 나라가 있다면, 법률이 공공의 정신보다 수준이 낮아 낡은 제도에 자부심이든 편견이든 묶어둘 수 없는 국민이 있다면, 이 국민이야말로 인류가 희망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던 저 혁명을 태동시킬 운명에 놓여있지 않았겠는가? 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콩도르세,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1795) 

  또한 미국의 독립혁명(1776)과 프랑스 대혁명에 참여하며 국제혁명이론가로 활약했던 토마스 페인은 『인간의 권리』(1791)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프랑스 대혁명의 보편적 의의를 주장했다. 

“<인권선언>의 머리말에서 우리는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후원 하에 제 임무를 시작하는 한 국민의 엄숙하고 장엄한 광경을 목도한다. 이 장면은 정말 새롭고 […] 너무도 숭고하여 혁명이라는 명칭이 그것의 위엄에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혁명의 의미는 인간의 갱생에까지 이른다.” (토마스 페인, 『인간의 권리』, 1791) 

  1792년 9월 21일 마침내 ‘단일하고 불가분한’ 제 1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 당시 발미 전투(프랑스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전투)에 참가했던 괴테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며 당신들은 그것을 보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는 말로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혁명이 초래하는 파괴와 폭력, 무질서, 그로 인한 역사의 퇴행에 주목하여 혁명의 모순을 고찰하는 시각과 일상의 차원과 유리된 채 이념 투쟁에 그치는 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했던 19세기 내내 혁명의 성과에 대한 의심과 회의는 계층과 신분에 따라 이유는 달랐지만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특히 1793년 국민공회를 장악한 자코뱅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실시한 공포정치의 경험과, 혁명기간 내내 무수히 잘려나간 단두대 희생자들이 사람들에게 남긴 끔찍한 혼란과 공포는 혁명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심어놓기에 충분했다. 

“프랑스 국민은 시간이 생겨난 이래로 발전해온 모든 상황과 오래된 이념들의 폐허라는 무서운 기념비를 세웠다. 이 국민이 베일을 찢을 것이고, 온 세상이 베일 뒤에 숨어 있던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과 동시에 선도 엎어버렸으니 이제 폐허만 남았다.” (로드 바이런,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 1812)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 또한 2월 혁명이 발발한 1848년에 쓴 시 <보이는 것들>(『여러 세기의 전설』, 1859)에서 “가난이 민중들을 혁명으로 이끈다면, 혁명은 민중들을 가난으로 이끈다.”, “미래의 혁명을 피하려면 과거의 혁명을 받아들이라.”라는 표현으로 혁명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내보였다. 혁명이 가져온 대참사에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혁명에 대한 증오는, 지롱드 당원으로 혁명에 열렬히 가담했던 피에르 베르니오의 “혁명은 사투르누스처럼 제 자식들을 집어삼킨다.”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폴레옹의 제정을 비판한 샤를 노디에의 『라 나폴레옹』(1803)과 독일의 극작가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1835)에서 인용되기도 한 이 구문은 혁명에 대한 회의를 표출한 대표적인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보수주의 정치가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반대했던 프랑수아 기조도 다음과 같은 말로 혁명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혁명의 정신, 봉기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자유에 반하는 정신이다.” (프랑수아 기조, 『프랑스 의회의 역사』, 1863) 

“인간들이 혁명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혁명이다.” (조젭 드 매스트르, 『프랑스에 대한 고찰』, 1796) 

“능숙한 사람들이 저지른 어리석음, 재간꾼들이 말한 기괴한 생각들, 정직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 바로 이것이 혁명이다.” (루이 드 보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 1817) 

  다른 한편, 혁명이 발발하자 ‘인권선언만으로는 굶주림을 달랠 수 없다.’고 외치며 이데올로기 혁명에서 생활 혁명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 혁명운동가 바뵈프의 경우, 로베스피에르 실각(1794년 7월 28일) 후 1795년 총재정부가 들어서고 “시민들이여, 혁명은 그것을 출범시켰던 원칙을 정착시켰다. 그러므로 혁명은 끝났다.”(1799)라고 선언하자, 다음과 같은 말로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기도 했다. 

“그 날(1795년 12월) 고위관료들과 권력자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특별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우리의 혁명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차라리 ‘반혁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혁명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모두의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혁명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반혁명은 대다수의 불행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그렇다면 반혁명이 이루어진 것 아닌가?” (프랑수아 바뵈프, 『인민의 호민관』 지, 1795. 10)

  혁명의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 바뵈프는 부자나 특권층의 혁명이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으므로 진정한 혁명은 대중 혁명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혁명이 이렇게 끝났다면 혁명은 커다란 범죄였을 뿐”(<방돔 고등법원 앞에서의 보편적 변호>, 『에크리』)이라는 과격한 발언으로 혁명의 모순을 추적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풍속과 사상에서 완성되지 않은 모든 혁명은 실패한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고대와 근대의 혁명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도덕적 에세』, 1814) 

  혁명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다음 시대에 가져다준 가장 큰 결실은 민중을 일깨운 계급의식과 혁명의 정신일 것이다. 칸트가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과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신의 진보에 발판을 마련한 이상 프랑스 혁명은 받아들일만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나, 혁명의 모순을 목격했지만 빅토르 위고가 “혁명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레미제라블』, 1862)는 신념을 고수하며 혁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 것 또한 민중의 의식을 일깨운 혁명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모든 것이 어두워졌으나 잃어버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무너졌으나 아무 것도 소멸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수렁에 빠졌으나, 아무 것도 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모두 다시 나타난다.” (빅토르 위고, 『돌무더기』, 1844)

  19세기에 프랑스는 정치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다섯 차례나 겪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 1제정이 1804년에 시작되었고, 1815년에는 왕정복고 체제가 들어섰으며 이에 저항한 부르주아지가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정치권을 장악했다. 또한 중소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1848년 2월 혁명은 처음으로 사회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다시 공화국을 수립시켰으나, 1852년에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다시 한 번 제정이 들어섰다. 그리고 1870~1871년에 걸쳐 노동자와 시민에 의한 자치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을 보여준 파리코뮌이 일어났다. 1871년 제 3공화국이 확립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이 봉기와 혁명들은 그것들의 다양한 성격 때문에 세계 혁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83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을 때 프랑스에는 귀족, 성직자, 농민이라는 구체제의 신분체계 대신 왕당파, 공화파, 나폴레옹 지지자, 부르주아지, 무산계급 등 신분과 다양한 정치 이념이 뒤섞인 복잡한 사회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혁명에 적극 가담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상-퀼로트(귀족들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무산계급을 가리킨다)와, 지방 귀족들의 반혁명 반란에서 계급들 사이의 갈등을 체험한 농민들은 이미 샤를 10세가 구체제로의 복귀를 내세우며 펼친 극단적인 반동정책을 용납할 수 없었다. 1830년 7월 25일에 발포된,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 해산, 선거자격 제한 등을 포함한 7월 칙령이 7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영광의 3일(7월 27일~29일)’ 동안 파리에는 대혁명의 상징인 삼색기가 다시 내걸리고 곳곳에 저항의 상징인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7월 29일 왕궁으로 침입한 민중은 정부를 굴복시켰지만 부르주아 세력이 함께 투쟁했던 민중과 공화주의자를 따돌리고 루이 필립을 왕으로 추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것을 목격했다. 사르트르가 7월 혁명을 순수 정치 혁명이라고 평가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후로 발발하는 혁명에서는 정치이념 외에 사회 문제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이 늦었던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을 전후하여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그 결과 상공인들과 노동자 계층의 세력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치 용어인 혁명을 경제 분야에 적용하여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며(1845년경), 또한 사회철학자 생-시몽, 유토피아적 전망을 갖고 사회변혁을 구상한 샤를 푸리에, 그리고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이론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을 조직하고 『공산당 선언』을 초안, 발표한 것은 1848년 2월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문에서 계급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에 토대를 둔 ‘공산주의 혁명’이 처음 언급되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1848)

  1848년 2월 혁명의 뚜렷한 특징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가난을 면치 못하던 도시 노동자들이 처지 개선을 위해 필요한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혁명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2월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빈,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서유럽의 대도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갖가지 정치적 변동을 낳았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프랑스가 감기에 걸리면 유럽은 재채기를 한다.”는 말을 남길 만큼 당시 프랑스 2월 혁명의 파급력은 상당했다(콜린 존스, 『캠브리지 프랑스사』, 2002)에서 재인용). 2월 혁명 이후 혁명의 개념은 법률과 정치적 권리, 정치체제의 범주를 넘어서서 사회 문제의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면서 ‘사회적 혁명’의 개념이 활발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789년 혁명에는 제한적 혁명, 다시 말해 ‘정치적’ 나아가 ‘부르주아적’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정치 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의 혁명이다. 낡은 사회의 성격은 무엇이었던가? 단 한마디가 그것을 특징짓는다. 봉건제도. 부르주아의 옛 사회는 특히 정치적 성격을 가졌다.” (칼 마르크스, 『유대인 문제』, 1844.)

  경제발전은 이루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동이었던 제 2제정 말기에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가장 근대적인 형태의 운동이 파리에서 일어났다. 1870년 7월에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처음부터 프랑스를 제압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이 났고 1871년 1월 28일 양국 사이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굴욕적인 휴전조약에 반대하며 코뮌 자치를 결의한 파리의 시민과 국민군은 3월 26일 선거를 치루고, 28일 시청 앞 광장에서 20만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코뮌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29일 집행위원회 아래 군사, 재정, 식량, 노동, 교환, 교육, 외교, 사법, 보안의 아홉 개 위원회가 성립되고 자주관리체계가 정비되었으며, 블랑키 파, 프루동 파, 자코뱅 당원 등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된 코뮌위원회는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의 폐지 및 인민에 의한 국민군 설치, 종교와 재산의 국유화,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의 정책과 법령을 발포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 때문에 코뮌 정부는 불과 60일 동안 유지되었지만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수립된 최초의 혁명적 자치정부로 규정된다. 5월 28일 코뮌정부는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의 공격에 의해 ‘피의 1주일’ 이라 불린 마지막 시가전 끝에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사망, 처형되면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은 3월 18일의 혁명 또는 코뮌 혁명, 국제적 사회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불렸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지속기간이 매우 짧고 봉기가 시민조직이 아닌 국민군에 의해 주도된 점, 그리고 가혹한 실패를 이유로 이 사건에서 혁명의 성격을 부인하기도 한다. 파리 코뮌을 최초의 자율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받아들인 것은 마르크스였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이고, 착취계급에 대한 생산계급의 투쟁이 낳은 소산이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 노동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 흘리는 파리는 새로운 사회를 가슴에 품은 채, 적들이 바로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역사를 창조하려는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 노동자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런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 (칼 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1871. 5. 30.)

  19세기 동안 토크빌과 미슐레, 루이 드 보날, 루이 블랑 등 많은 정치사상가와 역사학자들이 혁명에 대한 고찰과 분석을 시도했다. 이들은 대부분 1789~1793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대상으로 혁명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토크빌의 경우 구체제 역시 이미 평등화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1789년 혁명이 구체제와의 단절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인 전개과정 속에 놓여있음을 강조하여 혁명의 급진적인 성격을 약화시켰다.

“혁명이 이룬 모든 것은 혁명이 없이도 이루어져 있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혁명은 정치적 상태를 사회적 상태에, 사실들을 관념에, 법을 풍습에 맞출 때 도움이 되는 폭력적이고 신속한 하나의 방식에 불과했다.”(알렉시스 드 토크빌, 『앙시엥 레짐과 대혁명』, 1856)

  다른 한편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에 일어난 혁명들까지 고찰한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19세기 혁명의 일반적 개념』(1851), 조레스(프랑스 사회당의 설립자)의 『혁명의 사회주의 역사, 1789~1900』(1898)는 이들의 혁명에 대한 관점이 어떠하든, 대체로 혁명에서 두 가지 관념을 인정한다. 하나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정치체제 전복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적,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는 경제적, 사회적 전복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1980년대까지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20세기 이후 혁명과 관련하여 프랑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 사건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일 것이다. 특히 러시아 혁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부로서 1920년 프랑스 공산당을 창당시켰다. 프랑스 공산당과 2차 세계대전 전후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관계는 앙드레 지드나 장-폴 사르트르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로의 전향을 선언했다가 『소련 기행』(1936)을 저술하며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1947년의 작가상황>이란 글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 하에서 노동계급에 기여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사회주의의 실제적 대표자인 공산당에 대해서는 그들의 교조적이고 타협적인 정책과 태도를 비판하며 가담을 거부했다. 또한 혁명 이후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부침을 지켜보며 친소노선을 걸어온 프랑스 공산당과 공산주의와의 관계는 최근 프랑스 공산당 전서기관이었던 로베르 위가 출간한 회고록 『공산주의, 변화』(1995)에서도 잘 나타난다. 로베르 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좌파의 상상 속에서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인들은 스탈린의 참전 결정을 나치 체제로부터의 프랑스 해방과 연결 짓고, 스탈린의 공포정치 또한 자유의 적에 대해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혁명적 결단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공산당의 친소노선에 대해서도, 혁명의 이념으로서 스탈린주의를 채택한 결과이지 스탈린의 일당독재와 동유럽에 대한 피의 학살을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의 혁명정신을 의미한다(로베르 위, 『공산주의, 변화』, 1995, 참조). 

“러시아 혁명은 추위 때문에 뒤늦게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다.” (살바도르 달리, 1970년 경) 

“1939~1945년의 전쟁 이후 소비에트의 권력은 계속 ‘혁명적’임을 자처했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적이고 제국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1956년 헝가리의 봉기는 모스크바에게는 일종의 ‘반혁명’이지만, 반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반전제주의 혁명’이다.” (레이몽 아롱, 『세기의 희망과 공포, 비당원의 에세』, 1957) 

  냉전시대를 거쳐 동구권이 몰락하기까지 프랑스 공산당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의 지지 철회는 러시아 혁명이 품게 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이후 전개된 폭력적이고 전제적인 스탈린 체제가 안겨준 실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알베르 카뮈는 혁명의 정신과 현실의 혁명 사이의 괴리를, “혁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모든 근대의 혁명들은 국가를 강화시킬 뿐이다.”(『반항인』, 1951)라는 말로 표현했다. 

“모든 혁명은 제 뒤에 오로지 새로운 관료주의라는 위탁물만 남겨두고 증발해버린다.” (프란츠 카프카, 1833~1924)

  오늘날 혁명의 개념은 더욱 확대되어 정치성과 무관하게 기존 사회를 변화시키는 모든 발견과 혁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를 과학 혁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용어는 버터필드가 17세기 유럽에서 갈릴레이, 뉴턴 등이 확립한 고전역학과 그것이 가져온 자연관, 세계관의 변혁을 가리키기 위해 『근대과학의 탄생』(1946)에서 처음 사용한 이후,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란 표현과 함께 다시 언급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후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란 표현은 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1924년에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이 문학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하고 현실의 삶을 바꾸자는 기치 아래 정신의 혁명을 부르짖은 바 있다. 
  이러한 혁명정신은 1968년 5월 일상 전반에 걸친 혁신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학생운동에서 발휘되기도 했다. 이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 서양 사회 전체를 강타한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 기성의 모든 제도를 타파하고 모든 것을 바꾸자고 외쳤던 프랑스 68 세대가 보여준 것은 관례주의나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바꾸려는 의지와 열정, 곧 혁명 정신이었다. 

“우리가 타도하고자 하는 것은 체제이지 ‘인간’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모든 가면을 벗기고, 모든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광대’의 비밀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비밀의 배후에 '부패한 국왕'의 추악한 얼굴이 숨어 있다. 우리는 이제 착취자로서의 역할을 미래에까지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혁명적 힘의 원천이 있다.” (68혁명 행동위원회 성명초안, <우리들은 전진한다>, 1968) 

“정장 입은 혁명에 반대한다.” 
“혁명은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순간부터 멈춘다.” 
“현실을 바라보지 않은 채 혁명과 계급투쟁에 관해 말하는 이들의 입 속에는 송장이 들어있다.” (68혁명 당시 낙서들) 

  이 때 혁명은 억압적이고 위선적인 현실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고 저항하며 삶의 혁신을 꿈꾸는 정신의 자유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역사에서 혁명이란 명칭을 부여받은 세 개의 혁명은 발생 당시의 러시아 사회의 구조, 혁명의 주도 세력, 혁명의 결과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어왔다. 레닌이 “그 내용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이고, 그 방법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평가한 제 1차 러시아 혁명은 1905년에 발생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혁명은 제정러시아의 체제상의 문제와 러일전쟁(1904~1905) 그리고 세계 경제의 위기라는 대내외적 혼란 상황 속에 축적된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정점으로 폭발하면서 발생하였다. 제 1차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폰 사제의 인솔 아래 노동자들이 평화 시위를 벌였으나 황궁수비대의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지주 귀족에게 향했던 불만이 황제에게로 이동하면서 혁명적 분위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오데사에 정박 중이던 포템킨 호에서 일어난 6월의 수병반란 사건은 전국적인 폭동과 파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로 하여금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입법 의회 개설을 약속하는 이른바 ‘10월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는 등 소정의 성과를 얻어낸 듯 보였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당국의 유화정책에 의해 혁명 세력이 와해되고 주력 인사들이 체포됨으로써 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후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극심한 파업에 시달렸으며 혁명적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갔다. 1917년 2월 말에 이르러 볼셰비키의 지휘 아래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나고 수도인 페트로그라드(1914~1924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칭)에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시위대는 2월 28일 저녁에 전 도시를 장악하고 황실까지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제 2차 러시아 혁명인 1917년 2월 혁명이다. 2월 혁명의 결과 니콜라이 2세가 하야하고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마침내 러시아에서 전제 군주제가 청산되기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2월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2월 혁명으로 확보된 민주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민중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1917년 망명지였던 스위스로부터 귀국한 레닌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노동자에게는 빵을, 농민에게는 토지를, 병사들에게는 평화를!”이라는 구호 아래 본격적인 무장 혁명을 선동하였다. ‘토지, 빵, 평화’를 약속하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마침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 제 3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흔히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 10월에 일어난 제 3차 러시아 혁명을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관계는 항상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고 전자의 긍정성과 후자의 부정성이 강조되지만 대체로 10월 혁명을 2월 혁명의 연장선으로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2월 혁명은 10월 혁명의 알맹이가 숨겨져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2월 혁명의 역사는 10월 혁명이라는 알맹이가 어떻게 그 껍데기로부터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이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열매를 낳는 씨앗처럼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931) 

  트로츠키와 정치적 시각이 상이했던 솔제니친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관계에 대해서만큼은 트로츠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피력했다.

“2월에는 피와 폭력이 적었고 대중이 아직 활발히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은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와 폭력, 대중의 장악, 민중 삶의 요동침...우리의 혁명은 1917년의 시간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자연적 힘에 의해, 그리고 내전에 의해, 수백만 체키들의 테러에 의해, 농민 봉기에 의해, 30~40개 현에 가해진 볼셰비키의 인위적 기아에 의해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솔제니친, 『2월 혁명에 대한 고찰』, 1980~1983)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함께 두 혁명에 대한 평가 또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이다.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혁명의 긍정성과 당위성의 입증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서방 국가들과 심지어 러시아 내부에서도 혁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안에서 10월 혁명의 평가는 아래의 전당대회 선언문에서 잘 드러난다.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은 세계사에 대전환을 가져온 사건으로서, 세계 발전의 일반적 방향과 근본적 경향을 결정지었으며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경제구성체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역사적 과정에 초석을 놓았다.” (<제 27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강령>, 1986)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해석은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이른바 ‘방향전환’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방향전환(스메나 베흐)’이란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정권에 반대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던 지식인들이 러시아 혁명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면서 1921년에 발행한 논문집을 가리킨다. 이 책의 제목은 1905년 혁명 후 출간된 사회평론집 『베히(방향표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베히』가 1905년 혁명의 실패 속에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나아갈 길을 그 정신적 가치 속에서 보았다면 『방향전환』은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승리한 상황에서 ‘베히파’와는 다른 각도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 책의 집필자 중 한명인 보브리셰프-푸시킨은 혁명의 결과 권력을 쟁취한 소비에트 정권의 정당성을 아래와 같이 찬양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정권이 그 모든 역량을 집약해 러시아를 몰락으로부터 구원해내었다. […] 소비에트 정권은 비록 결함은 있을지라도 러시아에서 살아남아 혁명의 위기를 감내해 낼 수 있는 권력의 정점이다. 다른 권력들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이며 서로를 물어뜯고 말 것이다.” (보브리셰프-푸시킨, <새로운 신앙>, 『방향전환』, 1921)

  그러나 러시아 혁명을 “후진성의 산물”로 본 파이프스(R. Pipes)와 같이 주로 반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서양 학계의 비판적 견해도 끊이지 않았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계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러시아 내부의 부정적 시각은 10월 혁명을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비교하면서 양자의 공통성과 부정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양자가 모두 수행방법에 있어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보다 더 큰 상처를 러시아 역사에 남겼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러시아 혁명을 통해 “국가는 살쪄 가는데, 국민은 여위어갔다”(클류쳅스키, <러시아사 강의>)는 것이다. 또한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러시아 혁명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간극을 더욱 벌려놓았으며 러시아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문화의 단절, 정치 사회적 변동을 초래한 사건이라는 평이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전적으로 볼셰비키적이다. […] 표트르 대제와 레닌,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볼셰비키의 그것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둘 다 야만스럽고 강제적이었으며 위로부터의 원칙을 강요하고 유기적인 발전의 단절, 전통의 거부, 국가 통제주의, 정부의 이상 비대, 특권적 관료 계급의 형성, 중앙집권주의, 문명의 유형을 격렬하고 급격하게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베르댜예프,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과 의의』, 1955)

  특히 혁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혁명의 폭력성에 대한 것이다. 레닌은 착취 계급의 해방은 폭력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폭력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바 있지만 폭력의 불가피성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혁명을 등지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혁명에 있어, 프랑스 혁명에서 루소가 갖는 의미에 결코 뒤지지 않는”(베르댜예프, <러시아 혁명의 정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 속에 혁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수단의 폭력성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톨스토이는 1793년 프랑스 혁명(지롱드당 지도자들이 국민공회에서 추방당하고 상-퀼로트들이 지지하는 산악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건)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비교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목표와 수단이 결코 동일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목표는 평등이고 평등의 실현을 위해 폭력적인 수단이 사용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이와는 다르며 따라서 폭력적인 수단으로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바라 본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폭력으로부터의 인간 해방’, ‘진정한 자유’였다.

“인간 해방이라는 혁명의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은 분명 지금껏 평등의 실현에 사용되었던 폭력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혁명의 목표인 자유는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이는 명백하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폭력으로 현 정부를 전복하고 폭력으로 새로운 정권(입헌군주제, 사회주의국가)을 세움으로써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폭력 혁명은 그 수명을 다했다. 폭력 혁명은 그것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주었고 이와 함께 폭력 혁명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보여주었다. 독특한 유산을 지니는 일억 러시아인들의 혁명, 1793년이 아니라 1905년에 일어난 이 혁명은, 전혀 상이한 정신적 유산을 지니는 게르만, 로망스 민족들의 60년, 80년, 100년 전의 혁명과 동일한 목표를 지닐 수 없으며 동일한 수단으로 실현될 수 없다.” (톨스토이, 『세기의 끝』, 1905)

  톨스토이도 프랑스 혁명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처럼, 프랑스 혁명 이후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과 혁명 이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갔다. 혁명의 일반 법칙에 주목하였던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프랑스 혁명 과정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추이와 향배를 가늠하고자 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성격이 프랑스 혁명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 것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둘러싼 길고도 치열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 역시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새롭게 조명하고 두 혁명을 비교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프랑스의 탁월한 혁명이론가 마티에즈는 『볼셰비즘과 자코뱅주의』(1920)를 통해 둘의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1917년 2월 혁명에 의한 차르 정권의 몰락을 프랑스 혁명의 재연으로 보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후진성은 18세기 말의 프랑스와 공통점이 많으며, 시차로 말미암아 이론과 해결책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동일하다는 시각이다. 1793년 프랑스와 1917년 러시아의 상황적 공통점은 결코 피상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며 러시아 혁명가들이 프랑스 혁명가들을 자진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모방했다는 것이다(최갑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참조).
  혁명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레닌과 트로츠키도 프랑스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레닌은 19세기 혁명사를 연구하고 로베스피에르 전집을 섭렵했으며 프랑스에서 발간된 전문학술지 <프랑스 혁명>도 구독했다. 『러시아 혁명사』(1931)와 『배반당한 혁명』(1936)을 통해 ‘혁명의 자연사(自然史)’ 규명을 시도한 트로츠키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비교 작업을 통해 혁명 과정의 보편적 법칙을 추출해내고자 하였다. 1917년 10월의 영광과 뒤이은 볼셰비키 당의 퇴화, 1930년대에 확립된 스탈린 체제를 프랑스 혁명 과정과 비교함으로써 볼셰비키 당의 퇴화는 러시아판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스탈린 체제는 새로운 유형의 보나파르트 주의라 결론지었다.
  세 개의 혁명, 곧 제 1차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중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안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혁명으로 평가받는 것은 단연 10월 혁명이다.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사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고, 혁명의 가치는 그 어떤 반박이나 이론도 허용치 않는 절대적 가치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의미가 가치평가적 요소와 밀접히 결합되면서 ‘정당성’, ‘정통성’ 등의 긍정적 의미와의 상관관계 속에 개념 발전이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혁명의 법칙에 따라”, “혁명의 프라브다” 등과 같은 표현은 혁명적 이데올로기와 혁명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아갔다. 사회, 문화적 담론이나 예술 및 문학을 통해 혁명이 신성화되고 심지어 ‘혁명적 폭력’, ‘혁명적 테러’까지 신성화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해 비판적인 국내외 여론도 만만치 않았으며 이는 볼셰비키에게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혁명 이후 혁명에 대한 평가와 긍정적 기억의 창출은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비우호적인 국내외 관점에 맞서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시급하고도 중대한 문제였다. 볼셰비키는 당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사를 정리할 목적으로 ‘10월 혁명 및 러시아 공산당 역사 위원회’(일명, ‘이스트파르트’)를 설립하여 10월 혁명사 및 러시아 공산당사 관련 자료의 수집, 편찬, 출판을 관장하게 하였다. 볼셰비키의 이러한 자기 기억 작업은 권력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당면한 또 하나의 과제는 새로운 사회의 구축이었다. 여기서 볼셰비키 정권이 주목한 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다. 예술가는 선동과 선전의 선봉에 서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임무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각광받은 것이 바로 영화 및 건축, 디자인, 사진과 같은 실용 예술 분야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영화다”라고 말한 바 있는 레닌은 영화의 홍보적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1920년대 성인 5명 중 3명이 문맹이었던 러시아에서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선전과 선동을 위한 중요한 무기였다. 혁명 이전에도 러시아 민중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과 휴식의 도구였던 영화가 혁명 후 볼셰비키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대중의 교육과 계몽을 담당하는 수단으로 한층 더 각광받게 된 것이다. 다양한 선전, 선동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민중은 각 지방을 순회하는 ‘선동 열차’를 통해 영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탸샤댄스』 참조). 이렇게 1920년대 중반 이후 러시아 무성영화는 황금기를 구가하였으며 몽타주라는 새로운 기법의 영화가 도입되면서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세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에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과 <10월>(1927)은 러시아 혁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전함 포템킨>은 제 1차 러시아 혁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1905년 포템킨 호 수병 반란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부제로 하는 <10월>은 10월 혁명을 주제로 하여 혁명 10주년 기념에 맞추어 제작된 영화이다.
  10월 혁명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최고조를 이룬 가운데 이러한 열망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생산주의(productivism)라는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을 삶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자 시도했다. ‘아침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예술 비평을 하는’ 사회주의적 인간상의 구현을 위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건축과 사진, 디자인과 같은 실용 예술이 더욱 각광받았다. 1920년대 초 구성주의 그룹은 생산주의로 이행하면서 보다 더 실생활 밀착형 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1923년 마야콥스키가 주축이 되어 창립한 예술좌익전선(LEF)이 내세운 바도 생활 속의 미술을 목표로 하는 생산주의였다. 생산주의자들은 자금 부족으로 그 아이디어가 스튜디오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구성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 포스터, 사진과 같이 이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은 분야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산주의자들이 특별히 주목한 분야가 사진이었다. 사진이라는 기계적 이미지가 주는 사실성, 진실성이라는 힘에 주목하게 되면서 언어보다 더 쉽게, 그러나 더 효율적으로 선전, 선동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포토몽타주가 각광 받게 된다. 러시아 포토몽타주는 그 출발부터 정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피사체는 정치적 필요나 사회적 이슈에 의해 선택되었다. 특히 소비에트 사회에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레닌은 그의 사후에 포토몽타주의 가장 선호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이처럼 혁명 후 문화예술 분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문화를 선동과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정권의 열망은 스탈린 체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이로써 순수 예술은 설 곳을 잃게 되고 문화의 이데올로기화, 문화의 획일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혁명에 열광했던 예술가들에게 회의와 실망을 안겨다주었다. 러시아 혁명을 열렬히 환호했으며 혁명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혁명적 예술가’이자 ‘예술의 혁명가’로 불렸던 시인 마야콥스키가 “그 시대 예술은 없었다.”라고 말하고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건이나,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의 관료주의적 속성을 비판하면서 10월 혁명을 “배반당한 혁명”이라고 부른 것은 러시아 혁명의 의의에 대한 비관적 시각이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혁명 후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한 혁명에 대한 비관적 시각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더욱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혁명의 절대적 가치도 차츰 허물어지고 러시아 사회에서 혁명이란 개념에 담겨 있던 긍정적 열기도 서서히 빠져나가게 된다. 


비교문화적 설명   혁명을 뜻하는 프랑스어 ‘레볼뤼시옹’과 러시아어 ‘레볼류치야’는 모두 천체의 운행, 자연의 순환 현상과 같은 우주 질서를 가리키던 라틴어 단어에서 기원한다. 사회 질서가 우주 질서의 일환으로 편입되면서 혁명이란 용어도 국가, 사회, 개인의 삶에 있어 변화를 지시하는 의미로 점차 세속화되지만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이 변화의 목표가 되는 것은 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회복이었다. 이 용어가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정치 사회적 혁명이라는 근대적 의미로 정착되는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이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전례가 없는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고 이제 혁명은 “기존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정치적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러시아 사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혁명이란 용어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여 이를 통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추이와 향배를 가늠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활발해졌다.
  살바도르 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 혁명은 추위로 인해 뒤늦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서 프랑스 혁명이란 경험을 배제하고 러시아 혁명을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러시아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프랑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의 창당이나 앙드레 지드, 사르트르 등 프랑스 지성인들의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한 열띤 논의에서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의 강력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긍정적 해석은 이것이 세계사에 있어 새 시대의 서막을 알린 대 사건이었으며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고 인간 정신의 진보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 근거한다. 러시아 혁명 역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세계사에 대전환을 가져왔으며 세계 발전의 방향을 정립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사회와 20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혁명의 의의에 대한 의심과 회의도 결코 적지 않았다. 혁명의 폭력성과 혁명 이후에 뒤따르는 공포 정치를 경험한 두 나라의 민중들에게 혁명은 더 이상 절대적 가치로, 신성한 것으로 남을 수 없었다. 빅토르 위고의 “가난이 민중들을 혁명으로 이끈다면, 혁명은 민중을 가난으로 이끈다.” 혹은 “혁명은 사투르누스처럼 제 자식을 집어삼킨다.”라는 베르니오의 말이나, 러시아 사학자 클류쳅스키의 “국가는 살쪄 가는데 국민은 여위어 갔다.”와 같은 말이 혁명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논의에서 계속적으로 회자됨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 혁명의 토포스가 갖는 복잡한 함의를 확인시켜준다.

연관 토포스 개혁; 공산주의; 공포; 레닌; 민중; 봉기; 애국심; 자유; 정의; 지식인;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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