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1812년 전쟁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1812년 전쟁
토포스명(프랑스) campagne de Russie
토포스명(러시아)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
정의 1. 1812년 전쟁에 승리하면 민중은 해방된다.
2. 1812년 전쟁에 승리하면 조국을 지킨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1789년 파리 군중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은 주지하다시피 수많은 격변과 파란을 거치면서 19 세기로 넘어오는 와중에 새로운 변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비범한 한 인물이었다. 평등과 자유라는 전혀 새로운 깃발아래 퍼져나가는 혁명의 기세에 놀란 유럽의 모든 왕가들이 내세운 군대들을 파죽지세로 격파해 나가는 승리와 기적의 이 영웅은 혁명군의 사령관을 거쳐 급기야 모든 권력을 손에 쥔 1인자의 자리에 올라 프랑스 공화국의 토대를 다져나간다. 황제의 지위까지 얻어낸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의 전파를 명분으로 온 유럽을 대상으로 팽창정책을 펴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진군에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바로 섬나라 영국이었다. 이른바 ‘대륙봉쇄령’이라는 조치를 대륙에 강요하여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함으로써 황제가 자신의 힘을 유지해 나가던 1810 년대 초, 영국에 대한 곡물 수출에서 주요한 재원을 끌어내 오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의 그러한 조치에 결코 협조하지 않는다. 
  몇 번의 권유와 경고를 거친 후 1812년 6월 22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황제는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 60만에 이르는 대군을 징병하여 대포 2200여대를 이끌고 동진을 시작한다. 폴란드를 거쳐 네메강을 너머 러시아에 들어선 나폴레옹의 군대는 8월 17일 스몰렌스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진격을 계속하여 9월 7일, 러시아인들이 ‘보로디노 전투’라 부르고 프랑스인들은 ‘모스코바강 전투’라 부르는 대 격전을 승리로 이끈 후 열흘 후 드디어 모스크바에 입성한다. 
  모스크바에서 며칠을 보낸 나폴레옹의 예감은 썩 좋지 않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입은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크긴 하지만 그건 병가지상사로 간주할 수 있다. 먼 길을 오느라 병사들은 지쳤고 말들은 상당수가 죽어버린 상태다. 하지만 이 정도 역경은 지난 십년간 수십 번도 더 겪은 일이었다. 
  문제는 모스크바에 입성한 지금도 러시아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겨울은커녕 가을도 채 시작되지 않은 9월 중순 모스크바 시가지에서 나폴레옹이 본 것은 보드카에 쩐 주정뱅이들 무리뿐이었다. 러시아 사령관 쿠토조프의 전략은 탁월했다. 몇 번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그는 끊임없이 물러서기만 했던 것이다. 그것도 병력과 군비를 비축한 채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나폴레옹 군의 진로에 있는 모든 도시와 마을들에서 주민들과 물자들을 미리 빼돌리고 껍데기만 남은 가옥과 건물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퇴각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계속 진격하고 입성하고 이겼지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을 챙기지 못했다. 그리고 치명적인 것은 병사들이 먹을 만한 것을 거의 구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머나먼 진격로는 그 자체로 병참선이었다. 보급 물자와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본대로 부터의 수송은 언제나 늑장을 부렸다. 
  알렉산드르 1세의 답장이나 전갈을 한 달 동안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고 양식만 축이 나 갔다. 10월 중순 나폴레옹은 드디어 회군을 결심한다. 이제는 러시아와의 싸움이 아니라 머나먼 여정이 수반할 피곤과 닥쳐올 추위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파리에서는 역모의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퇴각하는 행렬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병사들은 모스크바에서 말 잔등에 가득 싣고 오던 모피와 귀중품들을 버리고 지쳐 쓰러진 말의 고기로 배를 채웠다. 추위에 동사한 동료의 몸을 먹은 기록도 없지 않다. 그러한 와중에 추격해오는 러시아군의 유격전을, 그리고 농민 민병대의 습격을 견뎌내야만 했다. 
  


  서쪽으로 계속 퇴각하던 중 드디어 베레지나 강을 만났다. 11월 말이면 꽁꽁 얼어 있어야할 강은 때마침 높아진 기온 때문이었는지 얇은 얼음으로 덮여 있을 분이었다. 황제군의 공병대가 살을 에는 강물 속에 들어가 부교를 만드는 동안 수많은 병사가 얼음 사이로 수몰하였다. 추격하는 러시아 군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완성된 두 개의 부교로 나폴레옹과 근위대와 선두 부대는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지친 병사들은 아직도 강 저편에 있었다. 나폴레옹과 사령부는 눈물을 머금고 건너온 부교들을 폭파시킬 수밖에 없었다. 수만에 달하는 프랑스 혁명군 패잔병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 이제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몇 갈래로 예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라 명명하며,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아테체스트벤나야 보이나)’라고 불리는 1812년 6월 12일부터 1812년 12월 14일 프랑스 군대의 퇴각까지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을 말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구사일생의 고초를 넘기고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은 정치적 역경이었다. 60만 대군의 위용은 간데없고 겨우 4만 남짓의 군대만 귀환했을 뿐이다. 엎드려 잠복해 있던 구체제의 왕당파 세력들 즉 왕실의 잔존 인물들, 귀족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은밀히 모여 정세의 역전을 꾀한다. 황제는 여론을 돌이키기 위해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10만의 병력을 충원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다하지만 러시아 원정의 실패의 대가는 너무 크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등의 외부세력은 동맹을 맺어 패전의 책임을 물으면서 나폴레옹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러시아 원정 패전의 원인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기도 했다. 첫째, 추운 북동 지방의 일기에 대한 대비의 부족, 둘째, 수송과 보급의 중요성에 대한 과소평가, 마지막으로 러시아 군의 독특한 전략(먹을 것을 남기지 않고 마을을 비우고 불태워 버리는) 등. 
  1814년 3월 말, 승전국의 동맹국들은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로 입성한다. 이들의 군홧발 소리를 들으며 지켜보는 시민들은 그들의 속마음과는 달리 이들을 환영해 준다. 전쟁으로 지친 민중들은 이제 어떡하든 평화 체제가 정착되는 것에 안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는 그들의 영웅 나폴레옹을 잊지 못한다. 그 사이에 왕정주의자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이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한다. 
  자유와 평등의 화신 나폴레옹,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공화국’의 자랑스러운 전도사 황제 나폴레옹. 프랑스의 언중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집단적 생존을 도모하는 것에 동의하는 듯하다. ‘러시아 원정’은 프랑스가 한 것이 아니라 야욕에 가득 찬 한 영웅 나폴레옹이 저지른 것으로 정리하면서 그 토포스는 침묵 속에 묻힌다. 
  베레지나는 현재의 벨로루시를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그런데 프랑스어 사전에 bérézina는 보통 명사로 등록되어 있다. 말의 뜻은 ‘대 재앙’ ‘완전한 패멸’ ‘절망적 상황’이다. “베레지나로군”이라는 말은 즉 “다 끝났군/완전히 망했어/이젠 끝이야”라는 뜻이다. 이 굳어진 표현은 러시아 원정이 프랑스 언중들에게 얼마나 수치와 열패감의 토포스로 자리잡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베레지나 전투의 경험은 발자크의 소설 『안녕』에서도 강력한 모티브가 되어준다. 백작부인 스테파니는 구사일생으로 부교를 건너지만 그녀의 연인 필립 쉬시는 건너편에 남는다. 그의 운명을 직감한 그녀는 강 건너로 “아디외(영원히 안녕)”라고 눈물 속에서 외친다. 수년 후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파리로 돌아온 필립은 우연히 스테파니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미 광녀가 되어 모든 기억을 상실해 있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필립은 마지막으로 “아디외”를 반복해서 외치면서 배레지나 강변에서의 상황을 재연해 본다. 그러자 기억이 되살아온 그녀는 충격과 고통 속에 죽어간다. 몇 년 후 필립은 자살한다. 
  1970~80년대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는 『위대한 혁명군의 승리』라는 역사 소설을 2001년에 발표한다. 이 가상의 소설에서 데스탱은 러시아 원정을 나폴레옹이 승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스토리를 구상하는 애국심을 발휘하는데, 몇 권 팔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에서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그 패퇴를 주제로 한 프랑스의 영화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다. 물론 역사 다큐멘터리물은 몇 편 제작되었을 것이나 그다지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러시아 원정의 토포스는 프랑스어권에서는 침묵 속에 갇혀있다. 19 세기와 20 세기에 걸쳐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식민 지배와 함께 이 주제는 프랑스인들의 말하자면 ‘선택적 침묵’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1812년 전쟁은 프랑스의 영국 봉쇄령, 즉 대륙봉쇄령이 발단이 된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영국함대에 패하고 난 뒤, 1806년 11월 ‘베를린칙령’을 공포하여 유럽과 영국 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발포하였다. 나폴레옹의 위세에 눌린 유럽 각 나라들은 차례대로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였고, 러시아는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인해 대륙봉쇄령을 따르게 된다. 1807년 6월 14일 러시아는 프러시아의 프리들란트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함으로써 같은 해 7월 7일 틸지트에서 프랑스와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게 된다. 틸지트 조약이 러시아 사회에 준 굴욕은 푸시킨의 시 『나폴레옹』 에 묘사되고 있다. 

“보라, 부끄러운 위용 자랑하며 / 거대한 우상이 유럽의 가슴 짓밟았다.
틸지트...! 이 욕된 이름을 들어도 이제 러시아 인은 놀라지 않는다.” 
(푸시킨, 『나폴레옹』, 1821)

  그러나, 러시아는 당시 수출의 상당부분을 영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대륙봉쇄령으로 국내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810년 12월 31일 알렉산드르 1세는 중립국 선박에 항구를 개방하여 대륙봉쇄령을 해제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당연히 이 행위는 프랑스를 자극하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당시 유럽 전체에 몰아닥친 흉년으로 경제난이 심각하자 나폴레옹은 국내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1812년 6월 러시아 원정을 감행한다.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6월 12일, 서유럽 군은 러시아 국경을 넘었고, 그리하여 전쟁은 시작되었다. 즉 인간의 이성과 본성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무수한 악업과 기만 배신, 절도, 위조 지폐의 발행, 약탈, 방화, 살육 등 몇 백 년이 걸려도 세계의 재판소의 기록이 수집할 수 없을 만한 범죄를 범했으나, 이 시대에 그와 같은 범죄를 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이 이상한 사건을 낳았던가? 어떠한 원인이 있었던가? 사학가들은 올덴부르크 대공에게 가해진 모욕, 대륙봉쇄령의 불이행, 나폴레옹의 권세욕, 외교가들의 과오 등등이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고 단순한 확신을 가지고 단언하고 있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70만 대군으로 편성된 프랑스군은 폴란드를 거쳐 모스크바 서쪽 약 90km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도착하여 유명한 ‘보로디노 전투’를 펼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쿠투조프 장군의 러시아 군대와의 이 격렬한 전투는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은 4만 4000명에 이르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후퇴하였고,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9월 2일 모스크바에 입성하게 된다. 
  보로디노 전투 후 낙승을 예상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모든 주민들과 군인들이 퇴각하고, 연일 이어진 대화재로 인해 모스크바는 텅빈 도시가 되어버렸고, 지친 군사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르 1세가 항복을 전제로 협상을 할 것을 예상했지만, 러시아 황제는 협상을 거부하였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맞게 되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후퇴를 명령하지만 유독 혹독했던 그 해 러시아의 겨울은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에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군은 70만 명의 원정군 중 4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맞는다. 러시아군의 승리에 대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1812년에 프랑스 군대가 왜 패망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나폴레옹 군대가 패망한 까닭은, 그들이 겨울철에 대비한 원정의 채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여름철이 거의 갈 무렵에 러시아 땅 깊숙이 침입했다는 것과, 한편으론 러시아의 도시들이 불태워지고 러시아 국민들에게 적개심의 눈이 뜨인 결과 전쟁이 특수한 성격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1812년 전쟁의 결과 프랑스와 나폴레옹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반면, 러시아는 전쟁의 승리로 강대국의 위상을 얻게 되었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푸시킨이 16세 되던 1815년에 쓴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에서는 러시아인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읽어낼 수 있다. 

“싸웠다! 러시아인이 승리자이다! 오만한 프랑스인은 뒤로 도망친다.
그러나 하늘의 신은 많은 싸움에서의 강자에게 마지막 빛의 관을 씌웠었다.
백발의 전사가 그를 쓰러뜨린 것은 여기가 아닌가, 
오, 보로지노의 피비린내 나는 들판이여! 
광란과 오만에 종말을 가져다 준 것은 그대가 아닌가!” 
(푸시킨,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 1815)

  1812년 조국 전쟁의 승리에 대한 러시아의 자부심과 긍지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1880)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보로디노 전투의 승리를 바탕으로 쓰인 이 곡은 정교회 성가인 『신이여,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해주소서』와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예즈』 등을 절묘하게 혼합시켜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투 모습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특히, 곡의 결말부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대포 소리, 러시아 국가인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를 통해 러시아의 승리를 축하하며 강력한 러시아의 부흥을 듣는 이로 하여금 고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심과는 별개로 1812년 조국전쟁은 19세기 러시아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결정적인 외부적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한편으로는 황실과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경험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문물을 직접적으로 보고 접하면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의 승리로 파리까지 입성한 젊은 귀족 장교들은 이제껏 책과 지인들을 통해 듣던 유럽 문물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당시 무도회, 결투, 살롱과 같은 귀족들의 여흥 문화를 비롯해 음식, 옷 등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프랑스 문물들을 러시아 귀족 사회에 전파하여 ‘러시아의 프랑스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양적인 문물의 수용뿐만 아니라 젊은 장교들이 프랑스 사회를 보고 느꼈던 자유로운 분위기와 사상을 통해 조국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의 낙후성, 억압성, 폐쇄성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1825년 ‘귀족들의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까지 이어지면서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정신적 자각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1812년 전쟁은 러시아 사회에서 프랑스 문물의 직접적 수용의 매개체, 러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적 자각을 일깨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토포스를 형성한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러시아에서는 ‘1812년 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19세기 초 양국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준다.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럽의 정복자’, ‘민중의 해방자’로 불리던 당대 유럽 최고의 인물이었던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다준 결정적인 전쟁이었고, 승전국의 입장이 된 러시아의 경우는 당연히 ‘조국전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의 애국심과 강대국 프랑스를 물리친 커다란 자부심을 얻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의 토포스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한편으로는 황실과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문물을 직접적으로 보고 접하면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의 승리로 파리까지 직접 입성한 당시의 젊은 귀족 장교들은 파리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진보적인 사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여 프랑스 문물 수입의 직접적인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1812년 전쟁은 러시아의 사상적 근대화의 출발점이자 자각점의 토포스를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연관 토포스 나폴레옹; 애국심; 언어; 지식인; 혁명
참고자료(프랑스) Adam Zamoyski,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HarperCollins, 644 Pages.
Benoît Sommier et Bernard Chevallier, La Campagne de Russie - La Moskowa, Le Rubicon Editeur, 2013
Denis Davidoff, Essai sur la guerre de partisans, Traduction d’Héraclius de Polignac, Avant-propos du général Fortuné de Brack, Editions Astrée, 2012, 14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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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Pierre Rey Paris, Flammarion, coll, L’Effroyable Tragédie : Une nouvelle histoire de la campagne de Russie, « Au fil de l’histoire », 25 janvier 2012, 390 p.
Mémoires du Sergent Bourgogne présentés par Gilles Lapouge - arléa - Diffusion le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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