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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영화인명 김학성
권역명 영화기술
직능(직업) 촬영감독
국적 대한민국
작품 목록 <성황당>(Alter for a Tutelary Deity(Seonghwangdang), 조선, 1939, 촬영)
<집 없는 천사>(An Angel without a House(Jib-eop-neun cheon-sa), 조선, 1941, 촬영)
<풍년가>(A song of a year of abundance(Pung-nyeon-ga), 조선, 1942, 촬영)
<거경전>(Story of Big Whales(Geo-gyeong-jeon), 조선, 1944, 촬영)
<새로운 맹서(노도(怒濤))>(A New Oath(Saelo-un maengseo), 한국, 1947, 촬영)
<여수순천 반란사건>(Yeosu-Suncheon Rebellion(YeosuSuncheon banlansageon), 한국, 1948, 다큐멘터리, 촬영)
<정의의 진격>(An Assault of Justice(Jeong-ui-ui jingyeog), 한국, 1951, 촬영)
<애정파도>(The Wave of Love(Aejeongpado), 한국, 1956, 촬영)
<왕자호동과 낙랑공주>(Prince Ho-Dong and Princess Nak-Rang(WangjaHodonggwa Nakranggongju), 한국, 1956, 촬영)
<풍운의 궁전>(The Palace of Ambition(Pung-un-ui gungjeon), 한국, 1957)
<생명>(Life(Saengmyeong), 한국, 1958, 촬영)
<어머니의 길>(The Way of Mother(Eomeoni-ui gil), 한국, 1958, 기획)
<청춘극장>(A youth theater(Cheongchungeugjang), 한국, 1959, 촬영)
<자나 깨나>(Waking or sleeping(Jana kkaena), 한국, 1959, 촬영)
<연연>(An attachment(Yeon-yeon), 한국, 1960, 촬영․제작)
<오발탄>(Aimless Bullet(Obaltan), 한국, 1961, 촬영)
<임꺽정>(Lim Kkeok-jeong(Lim Kkeok-jeong), 한국, 1961, 촬영)
<성웅 이순신>(Great Hero, Lee Sun-sin(Seong-ung Lee Sun-sin), 한국, 1962, 촬영)
<건너지 못하는 강>(Impossible Love(Geonneoji Motaneun Gang), 한국, 1963, 촬영)
<계룡산>(Mountain Gyeryong(Gyeryongsan), 한국, 1966, 촬영)
<죽은 자와 산 자>(The Dead and the Alive(Jugeun Jawa San Ja), 한국, 1966, 촬영)
<공산성의 혈투>(Fight in Gongsan(Gongsanseong-ui Hyeoltu), 한국, 1968, 촬영)
<어떤 눈망울>(A Gaze(Euddeon Nunmangul), 한국, 1968, 촬영)
<아리랑>(Arirang(Airang), 한국, 1968, 촬영)
소개 김학성 KIM Hak-seong 金學成 (1913~1982)
일제 강점기 조선과 해방 이후 한국의 촬영 감독. 1913년 수원에서 출생하였고, 1932년 한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나인 김연실의 손에 성장했다. 김연실은 연극 배우이자 영화 배우로 명성을 얻고 있던 여배우로, 태양극장과 예원좌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김학성의 형 김학근은 무성영화 변사이기도 했다.
1934년 일본 도쿄센슈대학(東京專修大學)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이후 명치대(明治大)로 학적을 옮겨 복싱 선수를 하기도 했다. 학업을 마치자 귀국하여 경성촬영소에 입사하여 근무했고, 여기서 촬영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자, 다시 도일하여 신흥키네마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가 촬영을 배우던 시절 일화 중에 톨스토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김학성은 촬영을 배우기 위해서 일본의 유명 촬영감독에게 찾아갔지만, 그 감독은 김학성을 제자로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김학성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그 집에 찾아가 신발을 닦아주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일본인 촬영감독은 그에게 책 한 권을 던져주었다. 그 책이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이었는데, 김학성은 이 책을 읽고 촬영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탐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야 김학성은 일본인 촬영감독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일본촬영기술협회의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9년 신흥키네마에서 제작하는 일본영화 3편의 촬영을 맡았다. 그는 일본에서는 가나이 세이치(金井成一)라는 이름으로 촬영 작업을 하다가, 귀국하여 반도키네마사 제작․방한준 감독의 <성황당>(1939) 촬영을 맡으며 국내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데뷔작 <성황당>을 통해 촬영감독으로서 가능성을 크게 인정받았다.
1940년 2월 17일 김학성은 고려영화협회로 이적하여 전속 촬영 감독이 되었으며, 최인규 감독의 <집 없는 천사>(1941)와 방한준 감독의 <풍년가>(1942)의 촬영을 연이어 맡게 되었다. <집 없는 천사>의 후반 작업을 방한준이 맡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내 데뷔 무렵 김학성은 방한준의 파트너로 활동하며 방한준의 영화를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력은 방한준 감독의 <거경전>(1944)에서도 확인된다.
<거경전>은 수산증산을 장려하는 일제의 정책에 찬동한 영화이다.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식량 생산의 차질을 빚어지자, 조선에서 식량을 대량 공출하게 되었고, 그 부족분을 고래로 메우려는 정책을 내놓았다. 이 영화는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명백하게 친일영화라고 할 수 있다. 조선영화에서 제작하였고, 김일해․김신재․서월영․김소영 등이 출연하였다.
해방이 되자 김학성은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를 촬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이 영화로 데뷔한 최은희와 결혼했다. 이후 6.25전쟁 전까지 <여수순천 반란사건>(1948)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고, 6.25 전쟁 중에는 미국공보원에서 뉴스를 촬영하는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다가 부상당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입은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던 것으로 생사를 좌우할 정도였다. 그때 폐에 박힌 포탄 파편 3조각은 평생을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학성은 신체적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과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는 다시 활발하게 영화 촬영에 임했다. 1950년대 대표작은 김소동 감독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였고, 1958년 촬영한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였다. <생명>은 안양촬영소 B 스튜디오에서 거대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메울 정도의 세트를 지어놓고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혁신과는 달리 <생명>은 가난한 여대생 창님(문정숙 분)과 부유한 마담(이민자 분)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사 설병국(최성진 분)의 욕망을 그린 상투적 영화로, 삼각관계와 가난이라는 모티프를 엮은 전형적인 통속극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다가 김학성은 한국영화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오발탄>(1961)의 촬영을 맡았다. 김학성의 촬영 세계는 이 작품에서 예술적인 세계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참한 현실을 관조하듯 지켜보며 영화에 리얼리즘 시각을 투영하게 만든 롱 테이크, 음향과 화면의 대립과 병치를 통해 드러나는 몽타주 효과 등은 이 영화가 이룩한 영상 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촬영 수법들은 <오발탄>이 간직하고 있는 무거운 대사회적 전언을 충실하게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김학성은 이 영화의 촬영을 맡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명 촬영감독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김학성은 일본에서 촬영기술을 배워 조선에 도입한 촬영감독으로, 초창기 고려영화협회와 방한준의 영화를 전담하는 스태프로 활동한 바 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개인적인 상처와 가정의 불화를 겪으며 일시적으로 방황했지만, 1950년대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걸작 <오발탄>을 촬영하는 성과를 쌓았다. <오발탄>에 반영된 김학성의 촬영 기술은 당시 촬영 기술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일제강점기부터 누적된 그의 경험의 총화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