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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엔 페어러
영화인명 다미엔 페어러
권역명 영화기술
직능(직업) 촬영감독
국적 호주
작품 목록 <이곳 호주>(This Place Australia, 호주, 1938, 단편, 다큐멘터리/실험영화, 촬영감독)
<티모르의 사람들>(Men of Timor, 호주, 1942, 단편,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폭격 아래의 모르즈비>(Moresby Under the Blitz, 호주, 1942, 단편,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코코다 전선!>(Kokoda Front Line!, 호주, 1942, 단편,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살라모아 기습>(Assault on Salamaua, 호주, 1943,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격침당한 비스마르크 호송선>(The Bismarck Convoy Smashed, 호주, 1943, 단편,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소개 다미엔 페어러 Damien PARER (1912~1944)
호주의 촬영감독, 종군 사진작가. 1912년 8월 1일 호주 멜버른(Melbourne)의 말번(Malvern) 출생. 본명은 다미엔 피터 페어러(Damien Peter Parer)로 스페인 출신의 호텔 매니저인 아버지 존 아서 페어러(John Arthur Parer)와 호주출신의 어머니 테레사 페어러(Teresa Parer) 사이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23년에서 1930년까지 호주의 포틀랜드(Portland)에 있는 로레토 콘벤트 스쿨(Loreto Convent School), 배서스트(Bathurst) 소재의 세인트 스타니슬라우스 칼리지(St Stanislaus' College), 멜버른의 세인트 케빈 칼리지(St Kevin's College)에서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페어러는 1930년대 초반부터 스펜서 샤이어(Spencer Shier)와 아서 디킨슨(Arthur Dickinson)같은 사진작가들의 문하에서 사진을 배운다. 1935년에는 당시 호주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찰스 쇼벨(Charles Chauvel)의 영화 <유산>(Heritage, 1935)에서 촬영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고, 이후 쇼벨의 추천으로 시드니 국립영화스튜디오에 고용되어 <미개인>(Uncivilised, 1936), <날으는 의사>(The Flying Doctor, 1936), <랭글 강>(Rangle River, 1936), <4만명의 기병들>(Forty Thousand Horsemen, 1940) 등의 영화에서 촬영조수로 활동한다.
페어러는 장편 상업영화에서 촬영조수로 일하면서 틈틈이 홈무비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스튜디오 사진작가로도 활동한다. 그는 이 시기에 사진작가 부부인 막스 뒤페인(Max Dupain)과 올리브 코튼(Olive Cotton)을 만나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나눈다. 1938년에는 헨리 로슨(Henry Lawson)과 반조 패터슨(Banjo Paterson)의 시를 모티브로 한 <이곳 호주>(This Place Australia, 1938)라는 단편 실험영화의 촬영을 담당하면서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는 당시 호주의 대표적인 영화 촬영감독인 타스먼 히긴스(Tasman Higgins), 아서 히긴스(Arthur Higgins), 에롤 하인드(Errol Hind) 등의 촬영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사진작가들의 사진 촬영 스타일을 자신의 영화촬영에 응용하면서 독창적인 촬영미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페어러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전쟁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며 종군 사진작가 겸 촬영기사로 이름을 널리 알린다. 특히, 켄 G. 홀(Ken G. Hall)이 제작하고 페어러가 촬영한 1942년의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코코다 전선!>(Kokoda Front Line!, 1942)은 호주 영화사상 최초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페어러가 2차 대전 기간 동안 촬영한 다큐멘터리들은 전쟁의 이면과 포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시네마-베리떼(cinéma-vérité) 스타일의 이미지에 담아낸 작품들로 단순한 전쟁 선전영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1944년 미연합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페어러는 당시 22세였던 교회서기 엘리자베스 마리 코터(Elizabeth Marie Cotter)를 만나 결혼하는데, 같은 해 9월 17일 펠렐리우 섬(Peleliu Island) 전투에서 촬영을 하던 도중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아 전사한다. 그의 시신은 인도네시아 암본 전쟁 묘지(Ambon War Cemetery)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