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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리야마 노리마사
영화인명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권역명 동아시아권
직능(직업) 영화감독
국적 일본
작품 목록 <삶의 광채>(生の輝き, The Glory of Life/ The Glow of Life, 일본, 1919)
<심산의 소녀>(深山の乙女, The Girl in the Mountain, 일본, 1919)
<일본 게이샤의 춤>(日本芸妓の踊り, Japanese Geisha Dance, 일본, 1919, 단편 다큐멘터리)
<환상의 여자>(幻影の女, The Girl in His Dreams, 일본, 1920)
<흰 국화 이야기>(白菊物語, Tale of the White Chrysanthemums, 일본, 1920, 미개봉)
<호수의 작은 새>(湖畔の小鳥, The Lakeside Bird, 일본, 1920)
<안녕히, 청춘>(さらば青春, Farewell to Youth, 일본, 1920)
<비극이 될 때까지>(悲劇になる迄, Until Tragedy Strikes, 일본, 1921)
<사랑의 무쿠로>(愛の骸, Corpse of Love, 일본, 1921)
<불멸의 저주>(不滅の呪, The Eternal Curse, 일본, 1921, 미완성)
<황국의 빛>(皇国の輝, The Glory of the Empire, 일본, 1922)
<신대 모험>(神代の冒険, Adventure in the Time of the Gods, 일본, 1922)
<탁류>(濁流, Turbid Current, 일본, 1922)
<아, 조국>(噫!祖国, Ah, Fatherland, 일본, 1922)
<오싱 짱의 사랑>(お信ちゃんの恋, The Love of Oshin-chan, 일본, 1923)
<아버지는 어디로>(父よ何処へ, Where Is Father?, 일본, 1923)
<사랑의 노래>(愛の曲, Melody of Love, 일본, 1924)
<외로운 사람들>(寂しき人々, Lonely People, 일본, 1924)
<자연은 심판한다>(自然は裁く, Nature Is the Judge, 일본, 1924)
<소년 고수>(少年鼓手, The Boy Drummer, 일본, 1926)
저서
『활동사진극의 창작과 촬영법』(活動写真劇の創作と撮影法, 正光社, 1917): 이후「일본영화이론담론 대계 제3기」(日本映画論言説大系 第3期)로 복간(ゆまに書房, 2006)
『영화의 성적 매력』(映画の性的魅惑, 文久社書房, 1928): 이후 「최첨단 민중영화문헌 자료집 9」(最尖端民衆娯楽映画文献資料集9)으로 복간(ゆまに書房, 2006)
『시네핸드북』(シネハンドブック, 日本アマチュア・シネマ・リーグ出版部, 1930)
『활동사진촬영술』(活動写真撮影術, 日本教材映画, 1931, 공저)
『트릭사진 만드는 법』(トリック写真の作り方, 東京朝日新聞社, 1934, 공저)
『영사기술전서』(映写技術全書, 朝明書房, 1957)
소개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KAERIYAMA Norimasa 帰山教正 (1893~1964)
일본의 영화감독, 영화이론가. 1893년 3월 1일 생으로 1910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学校)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일본 최초의 영화잡지인 『활동사진계』(活動写真界)에 ‘현대일본영화’에 대한 긴 비평 시리즈를 연재하는 것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영화동인지 『키네마레코드』(キネマレコード)의 평론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17년에 영화이론서 『활동사진극의 창작과 촬영법』(活動写真劇の創作と撮影法)을 발간하며 일본의 1세대 영화이론가로 자리잡았다.
그는 영화이론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1917년에 ‘덴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감독으로서의 경력도 시작하였다. 가에리야마에게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영화 만들기는 평론가로서 영화의 본질과 이상에 대해 주장한 바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영화는 서구영화에 비해 영화의 본질을 충족시키지 못한 영화들로 비판당하기 일쑤였고, 이런 비평경향을 이끌었던 그는 자신의 영화관을 바탕으로 1910년대 '순수극영화운동'(純粋劇映画運動)을 주도해갔다. 순수극영화운동에 대해 일본의 평론가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일본영화를 구미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는 이 운동의 근저에는 구미의 영화 작품 속에 일본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인식과 거기서 생겨난 민족주의 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을 추구하여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야심은 1919년에 발표한 그의 데뷔작에 반영되었다.
'덴카츠'에서 만든 그의 데뷔작 <삶의 광채>(生の輝き, 1919)와 <심산의 소녀>(深山の乙女, 1919)(이 두 영화는 동시에 공개되었다)는 일본의 첫 ‘순수영화’로 호평받았다. <삶의 광채>는 상류층 청년에게 버림받은 소녀가 결혼 후 그 청년의 유혹을 뿌리치는 이야기이며, <심산의 소녀>는 신령스런 산 처녀가 금광을 찾아나선 탐험가의 세속적 욕망을 단념시킨다는 내용이다. 일본식 멜로드라마에 서구적 요소를 뒤섞은 이 영화들은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었기에 일어와 프랑스어 자막을 동시에 썼다. 무엇보다 극중 여성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아하던(‘온나가타’(女形)라고 불리던 여역배우) 당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여배우를 기용하는 파격을 택하여 유명해졌다. "진짜 여배우를 캐스팅"한 일은 “희곡이 아닌 시나리오를 쓸 것”, “변사가 아니라 자막을 활용할 것” 등과 더불어 그가 주장한 영화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영화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에 역시 해외수출을 목표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일본 게이샤의 춤>(日本芸妓の踊り, 1919)을 거쳐 일본 최초로 여성 누드 장면이 등장하는 <환상의 여자>(幻影の女, 1920)로 상업적으로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일본 최초의 예술독립영화프로덕션인 '영화예술협회'(映画芸術協会) 설립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창립작 <흰 국화 이야기>(白菊物語, 1920)는 이탈리아에서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이다. 찬바라 스타일을 시도한 이 영화는 그러나 일본 내 개봉에는 실패하였다. 가에리야마는 이 작업에 조감독을 비롯하여 스텝과 배우진을 모두 경험없는 신인으로 기용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후 그들 대부분은 영화예술협회에서 감독으로 데뷔하거나 다른 영화사에서 기회를 얻어 일본영화계의 주요 인력으로 성장해갔다는 점이다. 이로써 가에리야마의 제작사는 새로운 영화를 꿈꾸는 인재들이 속속 모여드는, 또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혁신적인 프로덕션으로 커갔다.
그러나 가에리야마의 영화를 비롯하여 그들 새로운 세대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흥행에서 큰 좌절을 맛보았다. 당대 대중들은 자막보다 변사를 선호했고, 신파극을 보며 울고 웃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1921년에 쇼치쿠(松竹)에 초청받아 <사랑의 무쿠로>(愛の骸, 1921)를 발표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영 금지 당하고 그 여파로 쇼치쿠에서 제작 중이던 그의 차기작 <불멸의 저주>(不滅の呪, 1921)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대중적인 호응을 끌어내는 데에 실패한 순수극영화운동은 1923년에 이르러 완전히 끝이 난다. 관동대지진으로 도쿄 촬영소가 완전히 무너졌고 그들이 지향하는 모던한 영화실험을 교토에서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에리야마는 그의 나이 33세에 연출한 <소년 고수>(少年鼓手, 1926)를 마지막으로 제작현장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영화평론과 이론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여 여러 권의 명저를 내놓았다(그의 저서들은 2000년대에 재출간될 정도로 지속적인 관심을 모았다).
가에리야마 노리마사는 일본무성영화기 7년 동안 20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작품들은 현재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일본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현대화한 순수극영화운동의 주창자로 초기 영화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알렉산더 자코비 Allexander Jacoby)로 평가받고 있다. 1964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 마이니치영화콩쿨은 “일본영화 초창기의 선구적인 영화계몽운동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