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세계 영화인 인명사전 상세보기
와께지마 슈지로
영화인명 와께지마 슈지로
권역명 한국권(북한포함)
직능(직업) 프로듀서
국적 일본
작품 목록 〈전과자〉(Ex-Convict(Jeongwaja), 조선, 1934, 제작)
〈대도전〉(Challenge(Daedojeon), 조선, 1935, 제작)
〈홍길동전〉(The Story of Hong Gil-dong(Hong Gildongjeon), 조선, 1935, 제작)
〈춘향전〉(The Story of Chun-hyang(Chunhyangjeon), 조선, 1935, 제작)
〈아리랑고개〉(Arirang Pass(Alilanggogae), 조선, 1935, 제작)
〈장화홍련전〉(Story of Jang-hwa and Hong-ryeon(JanghwaHongryeonjeon), 조선, 1936, 제작)
〈홍길동전(후편)〉(The Story of Hong Gil-dong Ⅱ(Hong Gildongjeon Ⅱ), 조선, 1936, 제작)
〈미몽(죽음의 자장가)〉(Sweet Dream(Mimong), 조선, 1936, 제작)
소개 와께지마 슈지로 Shujiro Wakejima 分島周次郞(1930년대 주로 활동)
일제 강점기 조선의 일본인 영화제작자. 와께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는 경성 본정 3정목에 위치했던 경성촬영소의 실제 소유주였다. 경성촬영소는 1934년 10월 경 이필우와 김소봉 그리고 박제행 등이 설립 주체가 되어 창설한 영화 촬영소이자 제작사였다(김남석, 「1930년대 ‘경성촬영소’의 역사적 변모 과정과 영화 제작 활동 연구」). 이후 경성촬영소는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제작했는데, 이로 인해 와께지마는 〈춘향전〉의 자금을 댄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다(「현대 ‘장안호걸(長安豪傑)’ 찾는 좌담회」, 『삼천리』(7권 10호)).
하지만 와께지마는 일찍부터 조선에서 흥행업에 종사해왔다. 그가 1919년 9월 21일에 경성부 본정 3정목 94에 설립한 경성연예관(京城演藝館)은 대표적인 기업이었다. 자본금 50,000원을 불입하여(주식 수 1000주, 주주 수 166명) 건설된 경성연예관은 주식회사였으며, 池田長兵衛이 사장을 맡았고, 山崎鹿藏, 梶原末太郞, 大宮貞次郞, 成淸竹松이 이사를 맡은 전형적인 일본인 회사였다. 와께지마는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5년 판)).
1920년대 와께지마는 국수회 간사장을 맡으면서 그 세력을 넓혀갔다(「사상문제 강연회에 관한 건」, 『검찰사무(檢察事務)에 관한 기록(2)』). 하지만 국수회 회장이 도변정일랑(渡邊定一郞)으로 바뀌자, 회장 자리를 둘러싸고 폭력 사건(살인 미수)을 일으킨 혐의를 받기도 했다( 『매일신보』, 1923년 9월 16일). 또한 와께지마는 1930년대에 경성촬영소의 중역으로 활동하면서 영화 이권에 대거 관여하기도 했고(「조선영화 상영금지로 경성업자 반대봉화(反對烽火)」, 『매일신보』, 1936년 7월 25일, 2면 참조), 경성에서 대대적인 토지 매입(예정)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매일신보』, 1937년 6월 2일).
이러한 와께지마의 행적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흥행업에 종사하면서 경성극장, 경성촬영소 등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한편, 경성과 조선의 이권에 개입하면서 그 세력을 넓히는 일종의 유지였다. 더구나 그는 폭력조직을 이끌고 있었던 일종의 갱이었다.
와께지마는 일본 정계에서 막강한 실세로 군림하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계파에 속하는 인사로, 이른바 일본 야쿠자 조직의 조선지부장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는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에 해당했고, 그가 간사장을 지냈고 조직 내의 패권을 둘러싸고 경합을 벌였던 ‘대일본국수회’는 일본 우익의 대표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야쿠자와 흥행업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조선에서 경성극장과 경성촬영소 등을 경영하면서 조선의 흥행계를 좌우하는 권력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