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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이 후미오
영화인명 가메이 후미오
권역명 다큐멘터리/실험영화
직능(직업) 영화감독
국적 일본
작품 목록 <모습없는 모습>(姿なき姿, 일본, 1935, 다큐멘터리)
<상하이: 중일전쟁 후방 기록>(上海: 支那事変後方記録, Shanghai, 일본, 1938, 다큐멘터리)
<베이징>(北京, Peking, 일본, 1938, 다큐멘터리)
<파이팅 솔져스>(戦ふ兵隊, Fighting Soldiers, 일본, 1939, 다큐멘터리)
<고바야시 이사>(小林一茶, Kobayashi Issa, 일본, 1941, 단편, 다큐멘터리)
<이나부시>(伊那節, Inabushi, 일본, 1941, 단편, 다큐멘터리)
<도시와 농촌>(町と農村, Town and Country, 일본, 1941, 단편, 다큐멘터리, 미완성)
<일본의 비극>(日本の悲劇, The Japanese Tragedy, 일본, 1946, 다큐멘터리)
<전쟁과 평화>(戦争と平和, War and Peace, 일본, 1947)
<여자의 일생>(おんなのいっしょう, Onna no issho, 일본, 1949)
<어머니와 여자>(母なれば女なれば, Haha nareba onna nareba, 일본, 1952)
<여자 혼자 대지를 가다>(女ひとり大地を行く, Onna hitori daichi o yuku, 일본, 1953)
<피의 기록: 스나>(流血の記録: 砂川, Record of Blood: Sunagawa, 일본, 1956, 다큐멘터리)
<산다는 건 좋은거야>(生きていてよかった, It’s Good to Live, 일본, 1956, 다큐멘터리)
<인간은 모두 형제다>(人間みな兄弟, Men Are All Brothers, 일본, 1960,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모든 것은 친구다: 새, 곤충, 물고기의 ​​자장가>(生物みなトモダチ――トリ・ムシ・サカナの子守歌, All Living Things Are Friends: Lullabies of Birds, Insects, and Fish, 일본, 1987, 다큐멘터리)
저서
『Tatakau eiga: Dokyumentarisuto no Showa shi』(1989)
소개 가메이 후미오 KAMEI Fumio 亀井文夫 (1908~1987)
일본의 영화감독. 1908년 일본 출생. 가메이 후미오는 2차대전 이전의 일본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가메이 후미오는 1928년 소련으로 유학을 가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온다. 소련 유학 시절에 걸린 폐결핵을 치료한 후 1933년 25세의 나이에 도호영화사(東寶映畵社, Toho Motion Picture Company)의 전신이자 당시 일본 영화산업의 선두주자였던 일본 사진화학연구소(Photo Chemical Laboratories: PCL)에 들어가 당시 '문화영화(文化映画, culture films)'라고 불리던 프로퍼갠더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하는 일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시작한다. 당시 후미오는 소비에트 몽타쥬 이론을 적용한 일련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완성하는데, 1935년의 데뷔작 <모습없는 모습>(姿なき姿, 1935)을 비롯해 15년간의 중일전쟁의 역사를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상하이: 중일전쟁 후방 기록>(上海: 支那事変後方記録, Shanghai, 1938)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이후, 중일전쟁에 관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베이징>(北京, Peking, 1938), <파이팅 솔져스>(戦ふ兵隊, Fighting Soldiers, 1939) 등을 연이어 발표하는데, 영화 속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전쟁의 참상과 부상당한 병사들의 모습에 일본정부는 <파이팅 솔져스>의 상영을 금지하기도 했다. 제작부서의 명령에 의해 다른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1941년에는 일명 '시나노 3부작(Shinano Trilogy)'이라고 불리는 나가노현(ながのけん)에 관한 홍보영화 <고바야시 이사>(小林一茶, Kobayashi Issa, 1941), <이나부시>(伊那節, Inabushi, 1941), <도시와 농촌>(町と農村, Town and Country, 1941)를 연출하게 된다. <고바야시 이사>와 <이나부시>는 완성되어 호평을 받지만 <도시와 농촌>은 미완성으로 남는다.
한편,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후미오는 태평양 전쟁(Pacific War)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후미오는 갑작스레 평화수호법(Peace Preservation Law)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년의 구금형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경찰의 보호관찰 아래 생활하게 되며, 석방 이후에도 일본정부는 영화 법(Film Law)의 규정을 명분으로 그에게서 영화감독 허가증을 박탈한다. 이 사건은 일본영화사상 최초로 일어난 일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영화작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가메이 후미오는 종전 이후에 가서야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1946년 발표한 <일본의 비극>(日本の悲劇, The Japanese Tragedy, 1946)은 일본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과 결말을 비판적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후미오의 냉철한 시선이 다시 한 번 발휘된 작품이며, 이 작품 역시 일본정부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이후, 후미오는 다큐멘터리적 스타일을 가미한 몇 편의 장편 극영화들을 만들기도 하는데, <전쟁과 평화>(戦争と平和, War and Peace, 1947), <여자의 일생>(おんなのいっしょう, Onna no issho, 1949), <어머니와 여자>(母なれば女なれば, Haha nareba onna nareba, 1952), <여자 혼자 대지를 가다>(女ひとり大地を行く, Onna hitori daichi o yuku, 1953)가 그 작품들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보다 큰 관심과 열정을 지녀왔던 그는 곧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돌아오고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Japan Documentary Film'을 설립함으로써 드디어 자신만의 독립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게 된다. 미 공군 기지의 확장에 반대하는 농부들의 투쟁을 기록한 <피의 기록: 스나>(流血の記録: 砂川, Record of Blood: Sunagawa, 1956), 원자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의 현실에 관한 <산다는 건 좋은거야>(生きていてよかった, It’s Good to Live, 1956),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도에서 최하층에 위치해 있던 천민과 신분제 철폐 이후 근현대 일본에서도 여전히 천민집단의 후예로 차별을 받고 있는 부라쿠민(ぶらくみん)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간은 모두 형제다>(人間みな兄弟, Men Are All Brothers, 1960)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1960년 이후 더 이상 영화작업을 하지 않던 가메이 후미오는 27년 만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친구다: 새, 곤충, 물고기의 ​​자장가>(生物みなトモダチ――トリ・ムシ・サカナの子守歌, All Living Things Are Friends: Lullabies of Birds, Insects, and Fish, 1987)를 발표하는데, 지구의 환경파괴에 대한 그의 걱정과 함께 유언의 내용이 담겨있는 이 유작을 남긴 채 1987년 2월 27일 7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