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데쉬르 이라니
|
|
영화인명 |
|
아데쉬르 이라니 |
|
권역명 |
|
아시아권(동아시아 제외) |
|
직능(직업) |
|
프로듀서 |
|
국적 |
|
인디아 |
|
작품 목록 |
|
<비르 두르가하르>(Vir Durgadhar, 인도, 1924, 프로듀서) <샤흐 제한>(Shah Jehan, 인도, 1924) <팝 노 페즈>(Paap No Fej, The Debt of Sin, 인도, 1924) <콜 오브 사탄>(Bombay Ni Sethani, Call of Satan, 인도, 1924) <나르시흐 다쿠>(Narsingh Dakoo, 인도, 1925, 프로듀서) <나발샤 히르지>(Navalsha Hirji, 인도, 1925) <볼부레 파리스탄>(Bulbule Paristan, Bulbul-E-Paristan, 인도, 1926, 촬영/프로듀서) <봄베이의 야생고양이>(Wild Cat of Bombay, 인도, 1927, 프로듀서) <아람 아라>(Alam Ara, Beauty of the World, 인도, 1931) <카리다사>(Kalidasa, 인도, 1931, 프로듀서) <더 루어 걸>(Dokhtare Lor, The Lor Girl, 인도/이란/미국, 1933, 프로듀서) <비러비드>(Piya Pyare, Beloved, 인도, 1934, 시나리오/프로듀서) <키산 칸야>(Kisan Kanya, 인도, 1937, 프로듀서) <라브로 네하르>(Lavlo Nehar, 인도, 1937) <푸자루>(Pujaru, 인도, 1945, 프로듀서) |
|
소개 |
|
아데쉬르 이라니 Ardeshir Marwan IRANI (1886~1969) 인도의 프로듀서 겸 영화감독. 1886년 마하라시트라(Maharashtra)주의 푸네(Pune)에서 태어났고, 연출작 수는 적으나 프로듀서, 감독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초기 인도영화 산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이라니는 철도회사 엔지니어가 되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처남의 도움으로 악기 상을 열었다. 이때 악기 상에서 취급하던 축음기를 수입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 과정에서 돈벌이 수단이자, 새로운 매체였던 영화를 접하고 영화 수입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즈음 인도영화계는 산업이 발아하던 시기였다. 인도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다사헵 팔케(Dadasaheb Phalke) 감독이 1913년 인도인이 만든 최초의 장편영화 <하리쉬짠드 왕>(King Harishchandra)을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데쉬르 이라니는 1914년 영화 수입사 알렉산드리아 시네마(Alexandria Cinema)를 봄베이에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수입업에 뛰어들었고, 1918년에는 이를 상영 사업으로까지 확대했다. 아데쉬르 이라니가 제작으로 방향을 선회한 계기가 된 것은 다다사헵 팔케 감독이 만든 영화들을 보고 난 이후였다. 당시 영화 제작 기술에 무지했던 그는 다다사헵 팔케가 1917년 설립한 힌두스탄영화사(Hindustan Film Company)의 매니저이자 영화 기술자였던 보길랄 데이브(Bhogilal Dave)를 스카우트하여 1922년 스타영화사(Star Films)를 설립한다. 이곳에서 그는 2년간 17편의 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하여 경력을 쌓은 뒤 1924년 폐업한다. 이후에도 영화사를 설립하여 몇 년간 운영하다 폐업하는 일을 반복한다. 스타영화사를 폐업한 그 해, 자신의 두 번째 영화사인 마제스틱 영화사(Majestic Films)를 만들고 이듬해 문을 닫을 때까지 15편의 영화를 기획했다. 이 시기에 그는 나반 간히(Navan Gandhi) 감독과 공동으로 <샤흐 제한>(Shah Jehan, 1924), <팝 노 페즈>(The Debt of Sin, 1924), <콜 오브 사탄>(Call of Satan, 1924)을 연출하여 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다. 더불어 바그와티 프라사드 미쉬라(Bhagwati Prasad Mishra) 감독을 발굴하여 <나르시흐 다쿠>(Narsingh Dakoo, 1925)를 프로듀싱 했다. 1925년에는 또 다른 회사 로얄아트스튜디오(Royal Art Studio)를 설립하고, 자신의 단독 첫 연출작인 <나발샤 히르지>(Navalsha Hirji)를 발표한다. 그러나 로얄아트스튜디오 역시 이듬해인 1926년 폐업하였고, 그 해 다시 임페리얼영화사(Imperial Films)를 설립했다. 영화사 설립과 폐업이 잦았던 것은 당시 인도의 불안정한 제작 환경의 탓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몇 명의 파트너와 꾸준히 작업하기보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짧은 기간 운영했지만 로얄아트스튜디오에서 17편, 임페리얼영화사에서 65편의 영화를 프로듀싱하며 봄베이의 영화 제작을 이끌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를 향한 이라니의 도전은 1930년대로 접어들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사운드 녹음 기술을 익히고 15일 만에 돌아와,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인도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록된 <아람 아라>(Alam Ara, 1931)를 연출한다. 인도 내 사용되는 여러 언어들을 활용한 영화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아람 아라>에서 텔루구어 노래를 삽입하기도 했고, 최초의 타밀어 영화 <카리다사>(Kalidasa, 1931), 최초의 페르시아어 영화 <더 루어 걸>(The Lor Girl, 1933)에는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1937년에는 인도 최초의 컬러영화인 기드바니(Moti B. Gidwani) 감독의 <키산 칸야>(Kisan Kanya)를 제작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였다. 그가 사운드와 컬러의 도입 등 영화 기술의 혁신을 주도하면서 그간 시도되지 않았던 여러 지역 언어 영화를 제작한 것은 영화의 무한한 상업적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쉬르 이라니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거침없는 사업 추진력으로 초기 인도 영화 산업의 기틀을 닦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된다. 1945년 에스판다르 이라니(Aspandiar Hormusji Irani) 감독의 <푸자루>(Pujaru)까지, 20여 년간 그가 제작한 영화만 150여 편에 달한다. 임페리얼영화사 시절에는 프리트비라즈 카푸르(Prithviraj Kapoor), 메홉 칸(Mehboob Khan) 등 유명 배우를 발굴했으며,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을 감독으로 데뷔시키며 초기 인도 영화에 젓줄을 대었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