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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쿄헤이
영화인명 가토 쿄헤이
권역명 한국권(북한포함)
직능(직업) 촬영감독
국적 일본
작품 목록 〈농중조〉(Nongjungjo, 조선, 1926, 촬영)
〈아리랑〉(Arirang, 조선, 1926년 10월)
〈풍운아〉(A Soldier of Fortune(Pung-un-a), 조선, 1926년 12월, 공동 촬영)
〈들쥐〉(Field rat(Deuljwi), 조선, 1927년 4월, 공동 촬영)
〈금붕어〉(The Golden Fish(Geumbung-eo), 조선, 1927년 7월, 공동 촬영)
〈뿔빠진 황소 (Ppul Ppajin Hwangso, 조선, 1927, 촬영)
소개 가토 쿄헤이(加藤恭平) (?~?)
일제 강점기 조선의 일본인 감독. 가토 쿄헤이의 출생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비록 그는 일본인이지만, 한국 근대 초창기 영화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가토 쿄헤이가 한국 영화사에 처음 족적을 드러낸 작품은 〈농중조〉였다. 유현목에 따르면 “충무로에 있는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상 요도(淀)가 조선키네마를 신설하여 역시 일본 통속 〈농중조〉를 이규설 감독, 복혜숙과 나운규 주연으로 6월에 개봉했다”고 한다. 실제로 〈농중조〉는 1926년 6월 개봉되어 복혜숙의 데뷔작으로 큰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이때 촬영감독이 가토 쿄헤이였다. 그는 일본인 기획자와 일본인 각색 작품이라는 〈농중조〉의 제작 여건 때문에, 초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가토 쿄헤이는 나운규 출연 작품에서 촬영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아리랑〉과 〈풍운아〉, 〈들쥐〉, 〈금붕어〉등이었다. 특히 〈아리랑〉은 식민지 시대 조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촬영되었다는 점은 다소의 아이러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조선의 촬영기사들은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김학성이나 양세웅 등이 등장하는 시점은 1930년대 중반이며, 이신웅 역시 한양영화사가 창립되는 1934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 가토 쿄헤이의 등장은 조선의 영화를 변화 발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수불가결한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풍운아〉, 〈들쥐〉, 〈금붕어〉의 경우 촬영은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한 사람이 가토 쿄헤이였고 다른 한 사람이 이창용이었다(『동아일보』, 1927년 3월 17일 ; 『동아일보』, 1927년 7월 1일). 이창용은 이후 가토 쿄헤이의 조수로 일하면서 촬영 관련 업무를 배웠다.
또한 위의 네 작품의 제작사는 모두 조선키네마사였다. 따라서 가토 쿄헤이는 조선키네마사의 전속 촬영감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가토 쿄헤이는 나운규프로덕션이 설립되고 제작된 영화 〈잘 있거라〉(1927년 11월)에서는 촬영을 맡지 않았다.
1927년 가토 쿄헤이는 김태진(남궁운) 감독의 영화 〈뿔빠진 황소〉의 촬영을 담당했다. 남궁운과 가토 쿄헤이는 〈아리랑〉에서 이미 함께 작업을 한 바 있기 때문에, 〈뿔빠진 황소〉에서의 작업은 첫 만남은 아니었다.
〈뿔빠진 황소〉는 1927년 11월 3일부터 11일까지 상연되었는데, 처음에 이 작품은 김태진(남궁운)의 원작을 김창선(金昌善, 일본인 즈무라)이 연출했다고 광고되었으나 김창선은 명목 상 감독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그는 작품의 원작자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감독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조선 문화 급(及) 산업박람회, 영화편」, 『삼천리』(12권 5호)). 김창선은 실제로 〈아리랑〉을 제작할 당시에도 명목 상 감독으로 내세워진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키네마사의 주요 인물로 김창선 외에도 가토 쿄헤이와 남궁운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토 쿄헤이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1920년대 조선의 중요 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하며 한국 영화의 완성과 촬영 기술의 발달에 중대한 공헌을 한 영화인이다. 그의 조수로서의 이창용은 훗날 조선의 촬영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명우 역시 가토 쿄헤이와 공동 작업을 한 바 있다. 가토 쿄헤이는 특히 나운규의 성장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감독이라는 상징적 위치도 점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