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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카와 히데오(西川秀洋)
영화인명 니시카와 히데오(西川秀洋)
권역명 한국권(북한포함)
직능(직업) 촬영감독
국적 일본
작품 목록 〈운영전(총희의 연)〉(The Story of Woon-yeong(Un-yeongjeon), 조선, 1925, 촬영)
〈심청전〉(The Story of Shim Cheong(Sim cheongjeon), 조선, 1925, 촬영‧편집)
〈개척자〉(The Pioneer(Gaecheogja), 조선, 1925, 촬영‧편집)
〈장한몽〉(Eternal Love of Su-il and Sun-ae(Jang-han-mong), 조선, 1926, 촬영‧편집‧현상)
〈나의 친구여〉(My Dear Friend(Na-ui chingu-yeo), 조선, 1928년 2월, 촬영)
소개 니시카와 히데오(西川秀洋) (?~?)
일제 강점기 조선의 일본인 촬영감독. 니시카와 히데오의 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니시카와 히데오가 조선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처음 등장한 작품은 1925년 〈운영전〉이었다. 이 작품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제작한 2회 작품으로, 윤백남이 감독을 맡은 작품이기도 했다(이경손 조감독).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일본인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로, 창립작과 제 3회 작품은 일본인 감독이 왕필렬이 연출을 맡았다. 제 2회 작품인 〈운영전〉의 제작 역시 왕필렬이 맡았다. 그 만큼 일본인 사주와 감독과 스텝의 힘이 강력한 영화 제작사였다고 할 수 있다. 니시카와 히데오는 이러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운영전〉의 촬영감독으로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운영전〉 제작 과정에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일본인 스텝과 한국인 스텝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윤백남과 이경손이 한국인 배우와 스텝을 이끌고 상경하여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니시카와는 이때 백남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윤백남프로덕션 창립 작품은 〈심청전〉(1925)으로 이경손의 감독 데뷔작이면서 나운규가 심봉사 역으로 출연한 작품이기도 했다. 니시카와는 이 작품의 촬영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용궁 장면이 유치했고 임금의 모습이 임금답지 않았으며 심청이의 행색이 변화가 없어 사실감이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태진은 백남프로덕션 직후를 회고하는 글에서 “기사 서천수양(西川秀洋) 군이 대판(大阪)을 가더니 일금 이백원 짜리 양초궤ㅅ작 같은 ‘캐메라’를 사들고 왓다. 〈심청전〉도 〈개척자〉도 이 기게로 박엇다. 궤ㅅ작에 틈이 나면 ‘멘테ㅣ포’로 때고 또 때고 나종엔 땜통을 메고 나섯다. 김정숙 군도 이규설 군도 모두 이 그릎에서 길러낸 사람들이다. 더구나 촬영조수로 까까머리 중학생이 드나들엇는데 이이가 대작 〈복지만리〉의 프로듀ㅣ서 지금의 이창용씨”라고 밝히고 있다(『동아일보』, 1939년 3월 28일). 니시카와 히데오가 이경손(그의 그룹)과 함께 영화를 제작하면서 촬영 기술을 전수했으며, 영화 제작 전반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윤백남프로덕션이 재정난으로 해산되자, 이경손은 고려키네마를 창립하고 창립작으로 이광수의 〈개척자〉(남궁운․김정숙 주연)를 영화화하였다. 이 작품은 근대소설을 최초로 영화화한 문예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니시카와는 이경손을 따라 고려키네마로 이적했으며, 이 작품의 촬영을 맡았다.
1926년 이경손은 조일제와 함께 계림영화협회를 창립했고, 여기에서 제작하는 〈장한몽〉과 〈산채왕〉의 감독을 맡았다. 이 중에서 니시카와는 〈장한몽〉에서 촬영, 편집, 현상을 맡았다. 이 영화는 배우, 감독, 촬영의 측면에서 기존의 영화보다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동아일보』, 1926년 2월 28일).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백남프로덕션으로, 그리고 고려키네마사로, 다시 계림영화협회로 이적하는 니시카와의 행적은 이경손의 행보와 일치하고 있다. 이경손의 스텝으로 니시카와는 이경손 감독 작품의 촬영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연은 이경손의 영화적 분신으로서의 니시카와를 상정하게 만든다.
니시카와 촬영 작품 가운데 이경손과의 인연이 닿지 않는 영화로는 〈나의 친구여〉를 들 수 있다. 대륙키네마사와 유장안의 첫 번째 영화인 〈나의 친구여〉는 1928년 2월 23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유장안이 각본, 감독, 편집을 맡았고, 니시카와 히데오가 촬영을 맡은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니시카와 히데오는 일본인으로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다. 그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한국 영화인들을 따라 조선 영화계로 진입했고(잔류했고), 이경손을 분신처럼 따르면서 이경손의 영화를 촬영하는 주요 스텝으로 활동했다. 이경손이 설립한 일련의 영화 제작사가 직면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창용을 비롯한 미래의 영화 인력을 길러내는 직간접적인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근대 초창기 영화 제작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촬영감독의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