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세계 영화인 인명사전 상세보기
강호(강윤희)
영화인명 강호(강윤희)
권역명 한국권(북한포함)
직능(직업) 영화감독
국적 북한
작품 목록 〈유랑〉(Vagabond(Yu-rang), 조선, 1928, 기획)
〈암로〉(The Dark Road (Amlo), 조선, 1929, 각본․감독․출연)
〈지지마라 순이야〉(Jijimaa sooniya, 조선, 1930년 3월(?), 제작․기획․각본)
〈지하촌〉(Underground Village(Jihachon), 조선, 1931, 제작․기획․각본․감독․출연)
소개 강호 Gang Ho 姜湖(1908~1984)
일제 강점기 조선의 감독이자 기획자이며, 해방 이후 북한의 무대미술가. 강호의 본명은 ‘강윤희’이고, 예명으로 ‘독고성’을 사용한 적도 있다. 그는 1908년 경상남도 창원(진전)에서 출생하여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학비가 없어 조선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자, 13세 되던 해(1920년) 자진 도일하여 고학으로 교토 중학과 동경 미술학교를 마쳤다고 한다.
귀국 후에 그는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연구생으로 가입하였다. 조선영화예술협회는 1927년에 설립된 단체로 최초에는 안종화가 이경손, 이우 등과 함께 신파성을 축출하고 지식을 갖춘 신인을 발굴하여 양성할 것을 목적으로 발족한 단체였다. 하지만 이 단체에서 교육을 받던 서광제, 김유영, 임화 등은 이 단체를 장악하고 사회주의 영화운동 단체이자 카프(KAPF)의 조직으로 전환하였다. 강호 역시 서광제, 김유영, 임화 등과 영화 공부를 함께 하였다.
이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최초로 제작한 신경향파 작품이 〈유랑〉(1928)이었는데, 강호는 이 작품의 기획을 맡아 참여하였다(이 작품의 연출은 김유영이었고, 주연은 임화였으며, 서광제도 배우로 출연했다). 강호는 카프에서 미술부에서 활동했는데, 점차 영화부 활동도 겸하게 되었다.
이후 강호는 1929년에 자신이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한 영화 〈암로〉를 진주남향키네마에서 제작하였다. 진주남향키네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며, 이 작품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암로〉가 1928년 5월 21일부터 촬영에 착수되어 2주일에 걸쳐 촬영이 완료되었으며 진주명승지를 배경으로 하는 ‘농촌애화’를 담은 작품이라고 소개된 것이 전부이다(『동아일보』, 1928년 5월 27일). 주목되는 점은 강호가 김유영, 서광제, 임화 등과 분리되어 이 작품을 각본, 감독, 출연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조선영화예술협회의 회원들이 아닌 강호의 단독 작품인 셈이다. 당시 정황으로 판단하건대, 강호는 임화 등과 분리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화 활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동아일보』, 1931년 7월 29일). 당시 강호는 예명으로 ‘독고성’을 사용하였다.
〈암로〉에 대한 서광제의 평을 참조하면, 이 작품에서 서사적 문제가 적지 않게 발견되기는 했지만, 영상 미학의 측면에서는 주목할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조선일보』, 1929년 1월 29일). 그의 전공 분야인 미술 실력이 발휘된 결과로 추정된다. 1930년에는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제작한 영화 〈지지마라 순이야〉에서 제작․기회․각본을 맡았다.
강호의 두 번째 연출 작품은 〈지하촌〉이었다. 이 작품은 청복키노에서 제작했으며, 임화 등이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었다. 강호는 이 작품에서 제작, 기획, 각본, 감독을 맡아 영화 제작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한남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봉기를 다룬 영화로 1930년대 노동계급의 생활과 그 일면을 보여주는 고발성 영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악덕 기업가와 결탁한 일본 위정자의 모습을 등장시켜, 가난한 노동자들의 격분과 아픔을 묘사하고자 했다. 이 작품을 촬영하는 도중 제작진들이 종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검열로 인해 끝내 개봉하지 못하기도 했다. 〈지하촌〉을 끝으로 강호는 영화계에서 물러나 문필가로 주로 활동하였다.
1932년 8월에 창단한 극단 신건설에 참여한 강호는 역시 미술부에 소속되었다. 그의 전공을 연극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할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신건설은 그동안 좌익극단들이 공연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고 연극 활동에 활발하게 임할 것을 창단 목표로 제시한 단체였다. 하지만 1933년 일제 경찰은 좌익운동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강호를 김태진 등과 함께 구속했다. 이후 강호는 한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연극운동사건(演劇運動事件) 김태진 등 기소」, 『매일신보』, 1933년 3월 8일).
독립을 맞이한 이후 강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의 서기장으로 재직했고, 이후 월북하였다. 월북한 이후에는 북한에서 국립영화촬영소의 연출가와 무대미술가로 활약하였고, 평양미술대학에서 영화와 무대미술을 강의하였다. 무대미술과 관련된 저서를 다수 남겼으며, 1984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