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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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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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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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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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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권(북한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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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능(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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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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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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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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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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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착지〉(Return Spot(Gui-chak-ji), 조선, 1939) 〈신개지〉(Frontier(Singaeji), 조선, 1942) 〈처녀도〉(Virgin(Cheo-nyeo-do), 조선, 개봉 시점 미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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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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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의 배우 겸 제작자(프로듀서). 1915년 강릉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력은 경성외국어학원 졸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강릉우편국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재직했던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김갑기가 한국 영화계에 등장한 시점은 1938년 무렵이다. 1934년에 설립된 한양영화사는 1937년 〈도회의 뒷골목〉 제작 무산 이후에 잠정적인 폐업 상태였다. 하지만 한양영화사의 창립 멤버들은 재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1938년 7월 한양영화사는 사무실을 무교정 33번지에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부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부호 김갑기(제작자)의 후원으로, 과거의 한양영화사 인력이 거의 동원된 체제를 꾸릴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배우 윤봉춘과 전택이, 촬영감독 이신웅, 영화감독 이영춘 등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자본주 김갑기는 재정적인 후원을 퍼 붇고 의욕적으로 한양영화사의 갱생을 주도했다. 그 결과 한양영화사의 재기작인 〈귀착지〉의 크랭크 인도 1938년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귀착지〉는 크랭크 인한 지 1달도 안 되는 1938년 8월 16일 무렵에 촬영을 완성했고, 곧이어 녹음에 착수했다. 이후 작업은 다소 지연되어, 1939년 3월 4일(~10일) 황금좌에서 개봉하였다. 김갑기가 한양영화사에서 제작자로 참여하여 완성한 영화는 모두 세 편으로 〈귀착지〉가 가장 먼저 제작 완료한 영화였고, 이후 두 작품인 〈신개지〉와 〈처녀도〉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제작과 개봉이 지연된 경우였다. 한양영화사 측은 1939년 6월에 새로운 영화 〈신개지〉의 촬영을 예고하고, 강릉 경포 로케이션을 1939년 6월 18일에 시작하였다. 〈신개지〉는 작품 내용 상 다양한 로케이션을 필요로 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강릉의 경포대와 오죽헌과 동해안이었고, 이 밖에 외금강과 사금 생산지인 영종도 등의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후 〈신개지〉는 약 2달 여 만에 촬영을 완료하고 1940년 2월 22일 동경에서 일본 영화사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이것은 상당히 진전된 제작 일정에 속했다. 더구나 〈신개지〉는 일본 영화계에 상당히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조선의 향토 정서’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한양영화사는 이러한 반응에 고무되었다. 더구나 한양영화사는 처음부터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에, 이 작품의 배급권과 조선과 일본으로 분리하고자 했고, 이를 경쟁시키는 경영 정책도 펼쳤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의 조선 내 개봉은 상당히 지연되었다. 1940년 11월 기사를 참조하면, 처음에 〈신개지〉의 조선 배급권을 ‘아랑영화회사배급소’가 획득하여 배급하기로 결정되었다가, 그 배급권이 ‘문화영협회’로 배급권이 넘어갔고, 그 다음에는 1940년 12월 경 ‘성보’에서 상영될 계획까지 발표되었다. 그러나 최종 개봉은 1942년 1월 10일에서야 가능했다. 〈신개지〉는 1942년 1월 10일부터 16일까지 경성 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렇게 상영이 늦어지게 된 이유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되지만, 그 이유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배급권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갑기는 이러한 배급권과 관련하여 한양영화사의 경영 혁신과 다각화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영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양영화사의 경영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김갑기는 영화 제작을 동시 다발적으로 시행한 제작자였다. 그는 〈신개지〉의 개봉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촬영 완료 시점) 1939년 9월 ‘양심적 대작’이라는 새 영화의 제작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새 영화는 1939년 9월 하순 경부터 촬영에 돌입할 요량으로 준비를 갖추고 있던 작품으로, 한양영화사의 김갑기와 호남의 나천운이 합동 출자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분산투자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39년 9월 시점에서는 작품 제목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1939년 11월 시점에서는 한양영화사가 제작 중인 작품 제명이 〈처녀도〉로 공표되었다. 이 작품은 신경균이 연출을 맡았고, 이형숙‧김한‧김연옥‧독은기‧서월영‧김덕심 등이 출연하였다. 11월 중순 경 〈처녀도〉의 촬영이 개시되었으며, 12월에도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40년 3월 한양영화사가 동경에서 〈신개지〉의 시사회마저 끝마쳤을 무렵, 한양영화사의 차기 작품인 〈처녀도〉의 로케이션도 얼마 남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한 달 분 정도의 여분 로케이션 촬영만 마치면 촬영이 완료될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처녀도〉의 완성도는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곧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처녀도〉의 완성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제작 일정을 고려할 때, 기획 단계에서 중단된 것은 아니었던 만큼 작품 완성과 개봉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이후의 자료와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김갑기가 재정적인 뒷받침을 했던 한양영화사 2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과 경영 행보를 보였지만, 그 실효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것은 〈신개지〉와 〈처녀도〉의 제작 방식과 배급 방식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김갑기는 극장업(계림극장과 화양극장 운영)을 주업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영화사에서 그의 족적이 남은 지점은 한양영화사의 사주이자 제작자로 활동했던 1940년 전후 무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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