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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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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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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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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역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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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권(북한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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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능(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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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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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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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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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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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한〉(Geumganghan, 조선, 1931년 1월, 출연․제작) 〈남편은 경비대로〉(A Husband Goes to the Border Garrison (Nampyeon-eun gyeongbidaelo), 조선, 1931년 5월, 출연․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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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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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만 Won San-man 遠山滿 (1892~?) 일제 강점기 일본의 배우 겸 제작자. 원산만의 일본 이름은 ‘도오야마 미츠루’였다. 원래 원산만은 검극(劒戟)을 잘 다루는 예인이었지만, 동경에서 극단을 운영하며 연극 공연을 시행하는 시대극 배우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원산만이 시행하는 연극을 현대극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원산만 일행은 1927년 경성에서 공연을 시행했는데, 그 공연에서 불경죄를 범해 해당 공연을 금지당하기도 한다. 원산만 일행은 수정에 있는 경성극장에서 〈피무든 군도(血染軍刀)〉를 공연하다가, 일본 장교의 영정 사진을 걸어놓아야 할 곳에 그만 천황의 사진을 놓아두는 바람에 임석 경관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어 큰 고초를 치룬 바 있다(『동아일보』, 1927년 5월 9일). 이 사건은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이 해프닝을 통해 원산만이 일찍부터 조선 순회공연에 나서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산만이 조선 영화사에 그 이름을 드러낸 시점은 1930년이다. 유현목에 따르면, 원산만은 일본인 신파배우로 1930년 10월 경 ‘원산만(遠山滿)프로덕션’을 설립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본금 10만원에 이르는 ‘대일본영화흥업주식회사(大日本映畵興業株式會社)’를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했으나, 이러한 당초 계획은 쉽게 달성되지 못했다(『한국영화발달사』). 대신 그는 군소프로덕션인 원산프로덕션을 설립했고, 나운규를 초빙하여 창립작 〈금강한(金剛恨)〉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의 여론은 나운규가 원산프로덕션에 가입하여 영화 제작에 가담하는 행위를 ‘훼절’로 평가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동아일보』, 1931년 8월 2일). 원산만프로덕션에서는 “조선의 남녀 영화인을 채용하여 순전한 조선 영화를 제작한 후 경성을 비롯한 조선의 각 지방은 물론이요, 잘하면 동경, 대판 등지에까지 배급을 해볼 작정”으로 〈금강한〉을 기획․제작하고자 했다(『매일신보』, 1930년 11월 22일). 〈금강한〉은 원산만 제작, 도전장(島田章) 감독, 이창용 촬영․편집, 나운규․소원소춘(小原小春)․김정숙․김연실․원산만 등이 출연한 작품으로, 1931년 1월 13일부터 19일까지 단성사에서 8권 2019척 규모로 개봉한 영화였다. 나운규는 각색과 배우로 출연했고, 상업적인 이유로 공동 감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 역시 자극적인 요소를 한껏 겨냥하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색마)이 본처와 이혼하고 시골 마을의 순진한 처녀를 유린하여 임신을 시킨다는 것이 전체적인 설정이었다. 그래서 색마에게 순결을 빼앗긴 처녀는 자결을 하고, 색마는 본처에게 살해를 당하게 된다(매일신보』, 1931년 1월 14일). 이러한 대강의 줄거리는 이 작품이 ‘여성’과 ‘성’이라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를 앞세운 작품임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당대의 조선인들은 이 작품을 저질 신파극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작품에 나운규가 참여한 행위에 대해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더구나 원산만은 영화 흥행을 위해 나운규를 공동 감독(감독은 島田章)으로 이름을 올리고, 조선 관객의 호응을 얻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오히려 나운규에게 욕설을 퍼붓고 악담을 할 정도로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로 인해 원산만의 입지도 줄어들었고, 나운규의 인기도 한껏 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산만이 두 번째 기획한 영화는 〈남편은 경비대로(夫は警備に)〉였다. 이 작품은 1931년 5월 19일부터 23일까지 단성사에서 7권 1633척의 규격으로 개봉되었다. 원산만프로덕션의 제 2회 제작 작품이었고, 나운규․김정숙․원산만․소원소춘(小原小春) 등이 출연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이 작품을 ‘조만국경에 경비대를 보내기 위한 정훈공작용 영화’라고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을 따름이다. 원산만은 조선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의 영화 제작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배우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 조선의 영화적 취향을 자극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한 방안을 도용하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인 방안이 나운규의 기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을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원산만의 영화 제작 역시 2회로 끝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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