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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 불교전래사은비 건립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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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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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 개요와 원인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련종계(一連宗系)의 국주회(國柱會)가 주도하여 부여군 부소산(사적5호)에 백제불교전래사은비(百濟佛敎傳來謝恩碑)를 세우기로 하고, 일본불교계를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하였다. 부여에 사은비가 건립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학계와 불교의 반발이 거세어졌다. 한국불교 조계종 총무원의 반대성명을 비롯하여 천도교청년회와 민주수호청년회 등 민족운동진영에서도 반대성명을 발표하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국내의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1972년 2월 한국건립협찬회는 간담회를 열고, 후보지를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지역으로 변경하면서 설립의지를 굳혔다. 이에 충남도는 사은비 건립을 위해 지정문화재현상변경 허가신청을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했으나 기각되었다. 이후 문화재위원회는 사은비 건립후보지의 나성사적보호구역 변경에 대한 심의를 실시하여 나성 좌우 각 20m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사은비 건립이 가능해졌다. 1972년 5월 10일에 불교전래사은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불교전래사은비건립협찬회는 일본의 불교가 백제에서 전래되어 일본문화를 꽃피게 한데 대한 일본 불교계의 감사를 담은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 조계종총무원은 첫째, 사은의 표시는 비(碑)가 아닌 문화재의 반환과 한국문화교류사의 발굴 등 진정한 사은방법이 따로 있으며 둘째, 일본인들에게 사은취지를 알리기 위해서는 한국보다 일본에 세워야 하며 셋째, 비를 세운다 해도 일본인들 간의 사은의 감정이 조성된 후에 세워야 마땅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또한 문화공보부는 백제유산을 위압하고 고도의 분위기를 흐릴 뿐만 아니라 창가학회(創價學會)와 같은 배후를 가진 종파라는 점을 감안하여 신중히 검토한다는 입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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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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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련종계의 국주회가 주도하여 부여군 부소산(사적5호)에 백제불교전래사은비를 세우기로 하고, 일본불교계를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불교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설계계획은 1940년 국주회 창시자인 전중지학(田中智學)이 백제성왕사은사업익찬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1966년 한일국교정상화로 그 손자 전중향포(田中香浦)에 의해서 구체화되어 일본에서 모금운동으로 기금을 확보하였다. 1970년 5월 21일 일본에서 발족한 일본불교전래사은사업회는 일본불교가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감사히 여기는 뜻에서 충남 부여군 부소산에 높이 7m의 한국산 오석(烏石)의 주비(主碑)와 부비(副碑)를 세우겠다는 뜻을 한국 측에 전하고, 가두모금 등을 통해서 2,000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1971년 7월 23일에는 국내 지도급인사들로 불교전래사은비건립협찬위원회를 발기시키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백제 고도(古都) 부여에 불교종파에서 사은비를 세운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백제유산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고도의 분위기를 해칠 염려가 있다고 학계와 불교계에서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불교 조계종총무원의 반대성명을 비롯하여 천도교청년회와 민주수호청년회 등 민족진영운동에서도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8월 14일 반대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 영웅주의로 뭉쳐있는 창가학회의 번창은 매우 위험스러우며, 부여에 사은비석을 세운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 경제대국으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이라는 종단의 공식입장을 밝혔다. 또한 종계종은 사은비건립문제에 대해 첫째, 사은(謝恩)의 표시는 비(碑)가 아닌 문화재의 반환과 한국문화교류사의 발굴 등 진정한 사은방법이 따로 있으며 둘째, 일본인들에게 사은취지를 알리기 위해서는 한국보다 일본에 세워야하며 셋째, 비를 세운다 해도 일본인들 간의 사은의 감정이 조성된 후에 세워야 마땅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또한 8월 21일 민주수호청년협의회는 일본의 군국주의가한반도에 대한 경제적 예속화를 이미 끝내고 정치적·군사적 예속화를 강요하고 있다며, 불교전래사은비는 일본군국주의의 한반도 진출을 영입 또는 방조하는 처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또한 천도교청년회도 이날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국내의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1972년 2월 3일 불교전래사은비건립한국협찬회는 전문가간담회를 열고 사적5호인 부소산에서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606의 5로 후보지를 변경하여 건립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불교전래사은비건립을 위해 한국협찬회와 충청남도는 부여나성(사적 58호)에 대한 문화재현상변경 허가신청을 제출했으나, 문화재위원회는 1972년 2월 22일 이를 기각 결정하였다. 그러나 3월 4일에 다시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는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의 나성사적보호구역 변경에 관한 심의를 실시하여 동남리 604번지부터 606번지에 걸쳐 필지로 지정되어 있는 사적보호구역을 나성좌우 각 20m로 한정키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불교전래사은비의 건립부지가 사적으로 보호되어 있는 지역실정상 어렵다는 문제를 문화재위원회가 해소해 줌으로써 건립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1972년 5월 10일에 불교전래사은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진행경과 | | 1970. 5. 21 1971. 7. 23. 8. 14. 8. 21. 1972. 2. 3. 2. 22. 3. 4. 5. 10. | 일본 불교계, 일본불교전래사은사업회 발족 한국 지도층 인사, 불교전래사은비건립협찬위원회 발기 한국불교조계종총무원, 건립반대 성명서 발표 민주수호청년협의회·천도교청년회 반대 성명 불교전래사은비건립협찬위원회, 간담회. 사은비 건립후보지 변경(부여군 동남리 606-5임야) 문화재위원회, 충남도 지정문화재현상변경 허가신청 기각 문화재위원회, 부여읍 동남리 나성사적 보호구역 변경(사은비 건립 가능) 불교전래사은비 제막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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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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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07-01 ~ 1972-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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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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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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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당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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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보부, 문화재위원회, 충청남도, 종교·문화계(조계종총무원, 불교전래사은비건립협찬위원회, 민주수호청년회, 천도교청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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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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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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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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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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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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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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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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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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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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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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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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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불교전래사은비, 전중지학(田中智學), 일본불교전래사은사업회, 불교전래사은비건립한국협찬회, 나성사적보호구역 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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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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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0. 12. 25. 경향신문 1971. 8. 24. 경향신문 1971. 8. 2. 경향신문 1972. 2. 28. 경향신문 1972. 5. 10. 동아일보 1971. 8. 17. 동아일보 1971. 8. 21. 동아일보 1972. 3. 9. 동아일보 1972. 4. 27. 동아일보 1972. 5. 11. 조선일보 1970. 7. 29. 중앙일보 1970. 6.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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