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정책 갈등사례 DB 구축
부산 조선방직 노동쟁의
갈등개요

1) 갈등 개요와 원인


본 갈등은 대기업에 속하는 부산 ‘조선방직’의 새로운 관리인으로 파견된 강일매가 자의적 해고와 차별적 임금지급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을 산 것에서 비롯되었다.
강일매는 반발하는 노조지도자들을 파면하였고, 어용노조를 조직해 회사를 지배하였다. 이에 노동자들은 1951년 12월 15일부터 공장굴뚝에 “폭군 강일매는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이승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강일매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여성노동자 1,000여명이 국회의사당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고, 국회는 진상조사단까지 구성해 강일매의 퇴임을 결의하였지만 강일매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결국 파업을 주도한 전진한이 경찰의 가진 고문 등으로 굴복성명을 발표하였고, 파업참여 노동자 1,000여명은 해고되었으며 500여명은 보다 못해 스스로 그만두면서 갈등은 종결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노동자들은 “폭군 강일매는 물러가라”는 표어를 써 붙이고 퇴진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의 시위를 강일매가 탄압하자 대한노총은 강일매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조선방직 회사에 대해서 아직도 다소간 시비가 있는 모양이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비가 있어도 다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부의 방침은 공업과 정당운동을 갈라놓으려는 것이니, 만일 정당에서 각 공장과 생산기관을 붙잡아 가지면 거기서 나오는 돈을 가져다가 정당 운동하기에 바빠서 공업을 다 결딴낼 것이므로 어떤 생산기관이나 특별히 정부 소관인 공장을 어느 정당에서든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위협하였다.
 

진행경과

1951년 정부는 부산 조선방직에 관리인으로 강일매를 파견하였다. 이에 강일매는 노조지다자들을 파면하였고 어용노조를 조직해 회사를 지배하자 같은 해 12월 15일 해당 방직 노동자들이 공장굴뚝에 “폭군 강일매는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이승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강일매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여성노동자 1,000여명이 국회의사당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고, 국회는 진상조사단까지 구성해 강일매의 퇴임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지속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노동쟁의에 대하여 회의적인 발언으로 위협하였다. 이에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3월 12일 파업을 단행하고 회사정문을 나섰으나 폭력진압을 당하였다. 검찰과 경찰은 전진한을 소환 취조하였고, 노조간부들에게는 모진 고문을 가했다. 전진한은 결국 3월 13일 굴복성명을 발표하였고, 파업참여 노동자 1,000여명은 해고되었으며 500여명은 보다 못해 스스로 그만두고 말았다.

 

진행경과


1951. 9.

1951. 12. 15.

1951. 12. 19.

1951. 12. 23.

1952. 1. 21.

1952. 3. 5.

1952. 3. 11.

1952. 3. 13

정부, 부산 조선방직에 관리인으로 강일매 파견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시위에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한 탄압

대한노총 산하 17개 연맹, 공동명의로 강일매 비난

조선방직(강일매), 노조간부 추가 해고

여성노동자 1,000여명, 국회의사당 앞 시위

노조지도자 출신 전진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

전진한 국회 발언. 이승만 담화 발표

전진한 굴복 성명 발표. 파업참여 노동자 해고 및 자진 퇴사


발생기간 1951-12-01 ~ 1952-03-01
주체 정부-민간
이해당사자 정부,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대한노총
지역 부산
행정기능 사회복지
성격 이익갈등
해결여부 해결
정권 이승만
주요용어 부산 조선방직, 노동쟁의, 강일매, 전진한
참고문헌 경향신문 1952. 3. 14. 강준만(1998).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