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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승과 대처승 간 갈등
갈등개요

1) 갈등 개요와 원인

 
본 사례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5월 20일 공보처를 통해 발표한 ‘대처승’ 관련 담화로 인하여 초래된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 간의 갈등이다.
담화의 내용은 “현재 많은 중들이 처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러한 중들은 물러나도록 하라”는 것이었으며, 이어 11월 4일 “왜식(倭式) 불교관을 버리고 대한불교의 전통을 살려 황폐한 각 사찰의 전각을 수리 보유하도록 하라”는 2차담화도 발표하였다. 이대통령의 담화가 나온 후 비구승들은 일제히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불교계는 부패한 현재 상태를 정화하고 불도(佛道)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명을 통해 대처승 측을 비난했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과정에서 불교계 내부는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색(倭色)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갖고 시작된 비구측과 대처측의 갈등은 상호 사찰을 뺏고 빼앗기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승려들이 대처(帶妻)를 하여 자식을 낳고 살림을 하면서라도 불도에 정진할 수 있다는 이른바 왜식(倭式) 불교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승려들은 대부분 처를 얻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때로는 육식과 음주의 취미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이 보통으로 여겨질 만큼 승려들이 세속화에 젖어 있었다. 세속을 떠나 궁벽한 산속에서 독신주의를 지키며 수도에 정진해 온 소수 비구승들에게 대처승들은 파계요 부처님의 진리를 잊은 배교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는 승려들이 세속화에 젖음으로써 그들이 민족의식 등 저항정신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승려들에게 대처의 경향을 권장하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대처승 쪽이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제총독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대처승단은 해방과 함께 재빨리 대한불교총무원이란 간판으로 바꿔달고 여전히 한국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건국과정에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남한의 사찰 90% 이상이 대처승들 손에 장악돼 있었으며, 불교관련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참여하는 간부들 역시 대부분 대처승들이었다. 구체적인 수치로는 대처승이 3,000여명이고 비구승은 300여명으로 10배의 우위에서 대처승들이 불교계를 장악 주도하고 있었다. 비구승들은 해방이후에도 여전히 대처승들의 위력에 눌려 ‘불교정화’를 공염불처럼 외울 뿐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에 관한 담화는 비구승들에게는 그야말로 연옥(煉獄)에서 부처님을 만난 격이었다.
불교 내부의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단출범 전사(全史)인 50년대 이른바 ‘불교정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비구승 측이나 대처승 측 모두 정화과정은 처절한 생존권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비구측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통사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고, 조계종은 이러한 과정에서 설립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대처측은 “몸은 비록 세무(世務)를 경영할지라도 마음으로 불법을 생각하는 자는 승(僧)”이라며 자신들이 불교의 정통임을 주장하였고, 비구승측은 “독신으로 지계(持戒)하고 수도원에서 수행한 자만이 승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비구승들은 1954년 11월 14일 100여명의 대표가 서울 태고사에서 모여 대처승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대처는 불교의 진리를 역행하는 망동”이라 규정하면서 만약 대처승들이 불교정화운동에 호응하지 않을 때는 승적에서 제적하겠다는 강경한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주일 후 이선근 문교부장관은 “불교정화는 순리로 할 것이지 정부가 강권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대처의 악습은 일제잔재이니 이를 청산하고 대처-비구 양파가 신성한 종교정신을 발휘하여 불교계를 정화함이 좋을 것”이란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 대통령에 이어 주무장관의 담화에도 대처측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9일 세 번째 담화를 발표했다. “불교정화는 순리대로 해결하면 순순히 해결될 것이며, 일본식 중들이 짐짓 반항해서 쟁론을 일으키려 할 때는 정부도 순리해결의 정책을 버리고 원칙대로 집행하겠다”는 강경한 내용이었다. 이 같은 정부의 거듭되는 담화에도 대처승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구승들은 행동으로 나섰다.
 
진행경과

1954년 12월 25일 오전 대처승들이 현안문제와 간부개편 등을 논의하고자 태고사에서 집회를 갖고 있을 때 성급한 비구승들이 “대처승들은 즉시 태고사에서 물러나고 비구승들에게 일체의 불교운영에 관한 사무를 인계하라”고 요구하며 회의장으로 난입하여 양파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해방 후 불교계의 첫 난투극이었다. 이날 소동으로 대처승 7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대처승 측은 비구승 측에 대화와 타협을 제의하였다. 12월 7일 조계사에서 양측대표와 신도대표 등이 모여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양측대표의 대표성 문제로 별다른 성과가 없이 결렬되었다. 양측회담이 결렬되자 비구승들은 제3차 전국대회를 조계사에서 소집하였으나, 대처승 측이 이를 방해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비구승들은 불교정화가 뜻대로 안되면 집단 순교하겠다며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문교·내무부 두 장관은 대처승·비구승들과의 연석회의를 열어 조정작업에 나섰지만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 대통령의 네 번째 담화가 발표되었다. “불교계 정화를 위해 중들은 평화로운 해결에 노력할 것이며, 각 사찰주지들은 공천이나 투표로 결정하고 처첩이 있는 중들은 전과를 회개하고 물러가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대통령은 비구승 측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대통령의 거듭되는 담화와 정부의 조정에도 양측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염불보다 잿밥 싸움에 영일(寧日)이 없다’는 국민의 따가운 비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1955년 1월 5일 대처승들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를 점거하고 포교대회를 열었다. 태고사에서 대회를 열기로 했던 것이 비구승들의 점거로 장소가 바뀌었다. 이에 앞서 비구승들은 태고사에 조계종 중앙총무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사찰을 점거하고 있었다. 태고사 점거를 둘러싸고 양측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치안국은 비구승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문교부는 1월 26일 양측 대표를 불러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정부가 마련한 6개항을 제시하였으나, 양측의 이해가 더욱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문교부가 양측에 제안한 수습안은 이제까지 불교정화문제로 선두에 나서지 않았던 승려들 즉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비구승·대처승의 원로 10명씩을 쌍방에서 선정하여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방안이었다. 양측은 이 같은 정부의 수습방안에도 불구하고 욕설과 난투극으로 타협의 길을 찾지 못했다. 이때 서울 종로 선학원에 모였던 비구승승 40여명은 1월 29일 문교부장관실로 몰려가 문교부가 대통령지시의 취지를 외면하고 있다며 항의농성을 했다.

끝없는 대치와 물리력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한 양측은 수습위원의 명단을 제출했다. 대처측은 임석진, 정봉한, 김상호, 박서각 외 1명이고, 비구승측은 이청담, 윤월하, 이효봉, 손경산 외 1명이었다. 2월 4일 양측대표는 문교부장관실에서 불교정화의 자격문제부터 논의하여 주지의 자격은 ① 독신승으로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는 자, ② 불구자가 아니며 3인 이상의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 자, ③ 35세 이상된 자, ④ 사파라이(四婆羅夷)에 규정된 불주초육(不酒草肉)하는 자 등으로 규정하고, 각 사찰주지도 이 규정에 맞는 자로 교체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합의는 일선 사찰의 집행과정에서 극심한 분란을 일으켰다. 경북 선산 도리사에서 양측의 충돌이 일어나 비구승 9명이 부상하고, 서울 조계사에서는 비구승 300여명이 단식에 들어갔으며, 개운사에서도 양측의 충돌이 벌어졌다.

치안국이 6월말까지 대처승들은 모두 사찰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하여 정부는 마침내 비구승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대통령은 6월 16일 다섯 번째 담화를 통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갈 것”을 지시하였다.

이승만정권에서 진행된 비구승과 대처승 간 다툼에서 열세이던 대처승 측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퇴진하자 반격에 나서며 분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정권이 불교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1962년 1월 18일 비구승 측과 대처승 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같은 해 3월 종회의원 비율문제로 대처승 측 간부가 전원 사퇴하고 대처승 측은 ‘새종원 무효 및 이효봉 비(非)종정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비구승과 대처승의 다툼은 사회법에 호소하는 소송과 사찰접수시도 등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양측의 소송과 사찰접수 시도는 1963년 흥천사 사찰점유권 다툼을 비롯해 1964년 대처승 측의 종헌무효소송과 1965년 비구승·대처승 간 종헌 및 종정추대무효확인소송 공방으로 이어졌다. 또 1967년 비구승· 대처승 통합논의가 불발되는 와중에 종정청담스님과 총무원장경산스님 간 대립으로 양측이 동반퇴진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비록 불교정화가 비구승 측이나 대처승승 측 모두에게 생존권이 달린 일이기는 했으나, 결국 승자인 비구승 측 역시 많은 손실을 받은 만큼 서로에게 있어 정화과정상 많은 문제를 남겼다. 즉 권력과의 밀착을 비롯해 많은 시간, 자원 소모 및 무자격 승려 양산 등의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진행경과


1954. 5. 20.

1961. 5.

1962. 1. 18.

1963.

1964.

1967.

이승만대통령, 불교정화 담화문 발표. 불교계 내부 분열 갈등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불교계분규 수습의지 밝힘

비구승·대처승 양측, 문교부에서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

흥천사 사찰 점유권 다툼

대처승 측에서 종헌무효소송 제기

비구승·대처승, 통합논의 불발


발생기간 1954-05-01 ~ 1970-01-01
주체 정부-민간
이해당사자 정부, 비구승·대처승
지역 전국
행정기능 문화체육관광
성격 이익갈등
해결여부 해결
정권 이승만
주요용어 비구승, 대처승성토대회, 불교정화, 조계종, 태고종, 불교내부갈등
참고문헌 동아일보 1960. 12. 29. 국가기록원(2001.2.13). 「불교평론」 강인철(2000). 해방 후 불교와 국가, 1945~1960 : 비구-대처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와역사」 통권 57집, 한국사회사학회: 79-112. http://naver.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2003116097&sysid=n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