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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회관 건립을 둘러싼 갈등
갈등개요

1) 갈등 개요와 원인


본 사례는 ‘우남회관’의 건립진행과 관련하여 회관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인 ‘우남(雩南)’을 정한 것에 대해 민주당 시의원들이 반발하여 발생한 사례이다.
광복 후 서울시는 중구 명동에 있던 극장을 빌려 시공관이란 이름으로 시민의 모임에도 쓰고 흥행장으로 빌려주기도 하였다. 시공관은 일제하 일본인 소유의 흥행장이었던 관계로 그 시설이 낡고 협소해 나날이 증대되는 공연 및 집회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외관도 초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 당국과 일부 문화계 인사들은 새로운 시민집회시설 건립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6월 23일 서울시가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을 기념하는 한편 그의 찬란한 업적을 길이 빛내고자’ 80여명에 달하는 각계 인사의 찬성을 얻어 우남회관건립위원회창립총회를 시청 내 대회의실에서 개최하면서 우남회관 건립이 추진되게 되었다.
그러나 1956년 서울시의회 임시회의에서 ‘우남회관 공사중지에 대한 권고결의안’이 의결되면서 우남회관 건립시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시의회는 야당인 민주당원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고, 여당인 자유당은 겨우 한두 석을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민주당시의원들이 우남회관 건립을 격렬하게 반대한 주된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인 ‘우남(雩南)’을 회관이름으로 결정한데 대한 반발이었다.
총공사비 20억 환으로 이천승이 설계하고, 서울대학교 미대 이순석교수가 실내장식을 한 이 4층 건물은 연건평이 2,898평으로 착공한지 만 5년이 소요된 당시 최고·최대의 규모였다. 뿐만 아니라 냉난방장치, 승강식 2층 회전무대, 전자식 조명장치를 갖추었으며, 10층 옥탑 각 층에 켜진 형광등은 서울의 야경에 새로운 정취를 부여하여 시내의 최대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2년 12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없어지게 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당시 민주당은 “시급한 일이 허다하게 있다. 많은 시민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때인데 우남회관 같은 불요불급한 시설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할 수 없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인 ‘우남’을 회관이름으로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내세워 반발하였다.
서울시장은 시의회에서 우남회관건립중지 권고결의를 시당국에 요청한데 대하여 이에 구애됨이 없이 동회관 착공은 그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장의 권고이유는 우남이라는 명칭에 불만을 품고 취한 태도로 보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지속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우남회관 건립문제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고 우남이라는 대통령의 호를 빼도록 하되 회관은 지어놓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소위 우남회관이라는 것은 전 서울시장이 자의로 시내 여러 사람들과 협의하여 발기한 것인데 그 명칭을 내가 알면 허락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회관이 거의 다 진척될 동안 대통령에게 알리지 말아야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줄 알고 있다며 우남이라는 이름을 빼는 대신 회관은 예정대로 지어 놓아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행경과

1955년 6월 23일 우남회관건립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건립부지는 전 체신부 자리로 당시 경기중·고등학교가 임시교사로 사용하고 있던 세종로 1가 81번지로 결정되었다. 당시 건물의 설계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이천승이었으며, 설계비는 무료였다. 건물기공식은 1956년 6월 20일에 거행되었다. 극동건설(주)이 건물공사의 도급을 맡았고, 서울시는 1956년 당초 예산 15,000만환, 7월 추가경정예산에서 1억 환을 계상하여 1956년 가을까지는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남회관 건립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56년 10월의 서울시의회 임시회의에서였다. 결국 1957년 1년 동안 회관건립은 중단상태였다. 1958년도 예산안심의가 진행된 1957년 말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남회관 건립비예산안이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남회관 건립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1956~1960년 사이에 물가가 너무 뛰어올라 회관 건립비 자체가 너무나 거액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공사비 부족으로 공사 진척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4.19혁명이 일어나고 만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우남회관 건립을 서두를 필요성이 사라지고, 1960년 8월 11일의 서울시의회는 우남회관의 명칭을 시민회관으로 변경할 것을 의결한다. 시민회관이 준공되어 개관식이 거행된 때는 1961년 11월 7일 이었다.
 

발생기간 1956-10-01 ~ 1960-08-01
주체 정부-정부
이해당사자 민주당, 자유당, 서울시의회
지역 서울
행정기능 일반공공행정
성격 가치갈등
해결여부 해결
정권 이승만
주요용어 우남회관, 우남, 이승만 대통령
참고문헌 경향신문 1955. 11. 23. 동아일보 1957. 1. 7. 경향신문 1958. 1. 1. 동아일보 1958. 10. 30. 동아일보 1958. 6. 19. 손정목(2010).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 1」, 한울 : 93-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