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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충렬초등학교 명도변경을 둘러싼 갈등
갈등개요

1) 갈등 개요와 원인


본 사례는 경상남도 충무시에 위치한 충렬초등학교를 국립구호병원으로 계속 점용하게 된 것에 따른 학생 및 학부형들의 불만으로 발생한 갈등이다.
충무시내 충렬초등학교는 6.25사변 당시 상이군인을 수용하기 위하여 국방부가 교사를 징발하여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1,800명의 어린 학생들은 교실이 없어 거리 혹은 시내 창고, 교외 산기슭에 판자로 가교사(假校舍)를 짓고 수업을 진행해 왔었다. 그런데 국방부의 징발이 해제되자마자 보건사회부가 충렬초등학교를 국립구호병원으로 계속 점용하게 되었다. 이에 약 7년여 동안 교사를 빼앗긴 충렬초등학교 아동들과 학부형들의 불만이 쌓여왔던 중 결국에 폭발하게 되면서 보건사회부로부터 충렬초등학교 교사(校舍)에 대한 명도변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충렬초등학교는 6.25 당시 상이군인을 수용하기 위하여 국방부에 의하여 병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국방부에서 징발이 해제되자마자 보건사회부가 국립구호병원으로 계속 점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간 거리나 시내창고 등을 전전하며 판자가교사에서 수업을 하던 어린아동들과 그들의 학부형들은 7년여 동안 빼앗겼던 교사를 돌려달라며 투쟁위원회까지 조직하여 시위를 하였다. 학부형 대표들의 입장은 ‘이번만은 꼭 결정지어 달라’ 부탁하는 한편 명도 될 때 까지는 아동의 등교를 계속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보건사회부의 의견은 6.25사변 동안 환자는 많이 생기고 병원건물은 없어서 그 건물을 사용한 것이지만, 학부형들의 요구에 따라 곧 환자를 가수용소 등으로 옮기고 명도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진행경과

1956년 8월 25일 충렬초등학교 사친회에서는 충렬사 강당에서 당시 통영국립구호병원이 사용하고 있는 동교 교사를 돌려달라고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농성하였다.

같은 해 8월 25일 정오경 수백명의 학부형들이 가교사(假校舍) 인근에 운집하여 구호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교사의 명도를 요구하고, 관철될 때까지 아동의 등교거부까지 결의하였다. 이들은 아동들과 같이 시가행진 시위에 들어가 ‘나라 위한 용사 위해 7년 동안 참아왔다’, ‘교사를 비워 달라’는 등의 구호를 적은 플랜카드를 높이 들고 시위하였다. 이에 참가한 어린 학생들도 ‘아버지 어머니, 학교를 찾아주시오’라고 외치며 학부형 뒤를 따랐다.

이날 학교장 및 경찰은 이를 제지하고자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질서정연한 시위행렬은 시내를 한 바퀴 돈후 시청 앞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시위를 강행하였으며, 그에 앞서 관계요로에 진정서를 냈다. 이후 보건사회부 당국은 본교사의 실태조사를 완료하고, 20일만에 보건사회부 당국 및 국립구호병원 측의 조처로 중환자 72명을 광주정양원으로 이송하고, 나머지 경환자 120명은 충렬초등학교 가교사 8칸을 임시 대여해서 시내공설운동장에 이전 수용하기로 하였다.

 

진행경과


1956. 8.

1956. 8. 25.

1956. 8. 27.

~31.

1956. 9. 14.

국방부, 6‧25당시 병원으로 쓰던 충렬초교교사 징발해제-보사부 국립구호병원으로 재점용

충렬초등학교 사친회, 투쟁위원회 조직 및 진정서 제출

학부형과 아동들, 등교 거부

관계당국, 학부형들을 진정코자 현지출발 및 조사 착수

보사부, 기존 입원환자 광주정양원 이송. 휴학중이던 아동들(1,800명) 일제 취학 등교

발생기간 1956-08-01 ~ 1956-09-01
주체 정부-민간
이해당사자 보건사회부, 충무시, 충렬초등학교(사친회 및 학생)
지역 경남
행정기능 교육
성격 이익갈등
해결여부 해결
정권 이승만
주요용어 충무시, 충렬초등학교, 보건사회부, 국방부, 국립구호병원
참고문헌 경향신문 1956. 9. 1. 3면 동아일보 1956. 9. 2. 3면 경향신문 1956. 9. 6. 3면 동아일보 1956. 9. 11. 3면 동아일보 1956. 9. 19. 3면 동아일보 1956. 9. 21. 3면 네이버 백과사전(충렬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