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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앙종합직업학교 설립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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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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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 개요와 원인 대한민국정부는 직업교육의 개선 및 향상을 위하여 1959년 7월 서독정부에 시설 및 기술원조를 요청한 바 있었다. 이에 서독정부는 1960년 1월 기술전문가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제반 직업교육계를 시찰하며 기초조사를 실시하였다. 정부의 직업학교 육성을 위한 정책이 추진 중인 가운데 1961년 2월 인천공업고등학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및 학생들이 새로운 직업학교 설립을 반대하면서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인천시내에 정규공업고등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격을 띤 직업학교를 또 설립하는 것은 공고(工高) 운영에 차질을 준다는 이유를 들면서 극구 반대하였다. 3월 대한민국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정부와 공동으로 인천에 있는 인하공과대학 내의 중앙종합직업학교의 일부로 직업보도부(職業輔導部)를 설치하기로 하고, 기술원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한국정부가 처음으로 서독정부와 공식적인 원조협정을 맺은 것으로 서독의 고도로 발달된 공업기술과 자본을 도입하여 경제분야, 특히 기술협조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외무부장관과 주한서독대사간의 각서교환의 형식으로 체결된 동협정은 서독정부가 전기직업보도부 설치에 필요한 교수진과 기구 및 교과서를 공급하고, 3년간에 걸쳐 매년 12명의 한국인기술자를 독일로 초빙하여 훈련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밖에 동협정에 의거하여 서독정부는 보도부(輔導部)에서 연구하는 청년들에게 3년에 걸쳐 474,000달러에 해당하는 기술원조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3월 서독정부와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한 정부는 10월 인천직업학교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1962년 5월 서독으로부터 기술원조자금을 인수함으로써 직업학교는 계획대로 준공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중앙종합직업학교 설립 갈등의 쟁점은 기득권의 상실에 대한 우려에 있다. 지역 내에 한 개 이상의 유사한 공업고등학교가 입지함으로써 독점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직업교육의 수혜가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로 기득권층이었던 인천공고가 설립을 반대한 것이다. 인천공고측은 인천시내 정규공업고등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격을 띤 직업학교를 새로 설립하여 전기과, 기계과, 화학과 등 학생들을 모집하는 것은 공고(工高) 운영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므로 문교부가 이를 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부측은 당시 기술 및 직업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여 선진화된 서독의 기술 및 경제원조를 희망하는 입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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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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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17일 밤 인천공고생 600여명은 인하공대부속 종합직업학교 설립을 반대하며, 통행금지시간인 새벽 1시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지점인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고척리 만탄교 건너편에 이르러 연좌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영등포경찰서 병력의 강력한 제지망을 뚫지 못하고, 새벽 4시 반경 해산하여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1961년 3월 18일 정부는 서독정부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기술원조의 일환으로 설립이 계획된 직업학교는 학술적인 이론과 실제적인 기술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직업기술공업학교의 기술교사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0월 20일 생산기술자의 종합양성기관인 중앙종합직업학교(인하공대 부설) 교사 및 실습공장 기공식이 인천시 용현동 공사부지에서 거행되었다. 총공사비 38,000만환의 예산으로 300여개의 교실(공사비 10,700여만환; 1,098평)과 19개의 종합실험실 및 공장(공사비 21,500만환; 1,320평)이 신축될 이 공사는 인하공대 건설과가 주관하고, 서울시내 삼양공무사와 삼보기업이 담당하여 1962년 4월말 준공될 예정이었다. 1962년 5월 인하공대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는 서독정부로부터 기술원조자금 475,000달러를 인수하였고,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진행경과 | | 1959. 7. 1960. 1. 17. 1960. 2. 6. 1961. 2. 27. 1961. 2. 28. 1961. 3. 18. 1961. 10. 20. 1962. 5. 4. 1963. 5. 30. | 정부, 서독정부에 시설 및 기술원조 요청 서독 기술전문가 한스 J 로젠탈 내한 조병욱대통령후보, 기술훈련 및 기술노동자의 역할 확대 필요성 역설 인천공고생 600여명, 데모 인천공고생, 데모 해산(새벽 4시 반경) 한국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인천직업학교 설치 등 기술원조협정 체결 인천직업학교 기공식 거행 기술원조자금(475,000 달러) 인수, 서독정부→인하공대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 유네스코본부 교육국의 직업기술교육과장 핑리 내한(기술원조 목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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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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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02-01 ~ 1962-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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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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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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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당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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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인천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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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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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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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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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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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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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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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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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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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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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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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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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공대 부설, 중앙종합직업학교, 서독정부, 경제기술원조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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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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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0. 1. 17. 3면 경향신문 1961. 2. 28. 3면 동아일보 1961. 3. 18. 1면 경향신문 1961. 10. 21. 2면 경향신문 1962. 5. 4. 3면 경향신문 1963. 5. 30. 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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