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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배급정책과 관련된 갈등
갈등개요

1) 갈등 개요와 원인

 
일제강점기부터 양곡은 전면적인 통제와 배급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미군정에서 자유주의적 이념과 양곡통제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을 고려하여 양곡통제정책을 철폐하였다. 즉, 양곡시장을 개방한 것이다. 특히 월남(越南)동포와 해외로부터 귀환한 동포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미가(米價)가 급등하였고,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타개하고자 「미곡수집령(1946)」을 제정하여 양곡통제정책으로 환원하기에 이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한 이후 공출제(供出制) 폐지에 대한 여론은 높았다. 새로 수립된 정부는 이러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으나, 초대농림부장관인 조봉암은 「양곡매입법」(법률 제7호, 1948. 10. 9.)을 제정했다. 이 법률은 자가소비용 식량을 제외한 양곡 전체를 공출대상으로 규정한 것으로 양곡의 전면적인 국가관리방안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미곡생산자들은 생산가에 미치지 못하는 미가(米價)에 반발하여 매입에 반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식량사정은 더욱 참담해졌다.
1948년 가을 매상기간인 1948년 12월 31일까지 양곡매입량은 목표량의 35%에 불과하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양곡매입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양곡을 매도하지 않을 시 엄격히 조사하여 이를 처벌할 것이며, 불법으로 소장한 양곡은 몰수하거나 강매하겠다고 공표하였다. 농림부는 1948년 11월 서울시민에게 배급(3합)을 실시하겠다고 밝혔으나, 양곡매입 부진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 탓으로 결국 2합 6작 배급이 결정되었다. 이에 농림부는 서울시에 식량배급인구의 자격제한을 실시하고, 정확한 인구수를 파악하기 위한 유령인구조사를 하라며 압박하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농림부의 배급인구수가 턱없이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반발하였으나, 유령인구조사를 3회에 걸쳐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농림부는 1949년 3월 1일부터 서울시민에게 다시 3합배급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양곡매입은 당초 목표량에 턱없이 부족했고, 식량배급정책의 변경이 불가피하였다. 정부가 확보한 양곡으로는 비농가 전체를 위한 일반배급제를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월 1일부터 농림부는 서울시민에게 3합 배급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그에 앞선 3월 25일 중점배급제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서울시 280여명의 동장협의회 소속 회원들은 특수대상배급실시 토론회를 개최하고, 농림부의 처사를 받아들을 수 없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반발이 심해졌다. 이에 농림부는 서울시의 이러한 처사를 비난하고 나섰다. 서울시 역시 농림부의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하면서 농림부의 처사를 비난하는 등 양 기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4월 11일 양측이 양곡배급에 합의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7월 22일 「식량임시긴급조치법」을 공표하면서 양곡자유시장의 개설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공무원, 영세민 등 특수층 약 289만 명에게만 식량배급을 실시하는 중점배급제를 시행하는 방향으로 후퇴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 사례는 식량배급과 관련한 서울시와 농림부간의 정부간 갈등이며, 협의지연에 따른 갈등으로 볼 수 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농림부와 서울시 간 갈등의 쟁점은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농림부와 서울시간의 3합배급제를 둘러싼 갈등양상이고, 두 번째 단계는 3합배급제에서 중점배급제로 전환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먼저 3합배급제와 관련된 갈등의 이해당사자간 의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농림부는 서울시의 인구수 1,286,000명을 배급대상으로 수립하였으며, 서울시의 실제 수배(受配) 인구수는 1,540,000명이므로 2합 6작을 배급한다. 서울시의 유령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대상이 아닌 인원수를 말소하면 3합 배급이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1948년부터 유령인구를 조사하여 말소하고 있으며, 1년에 3만 명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지 않았다. 3차에 걸친 유령인구조사로 억지 유령인구 적발이 일어나는 등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라는 입장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농림부는 양곡매입이 부진하여 매입목표의 50%만 달성된 상태에서 균등배급제 실시가 불가능하다. 일단 매입한 양곡은 세궁민(細窮民)과 공무원에 배급하고, 자유시장을 묵인하면 식량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서울시는 농림부의 안은 실정에 맞지 않은, 실현불가능한 안이다. 식량확보량이 부족할 때 도시중점주의로 하고, 배급은 1일 1인 2합 이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수배자(受配者)는 시민의 8할 이상은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진행경과

일제강점기부터 양곡은 전면적인 통제와 배급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군정은 자유주의적 이념과 양곡통제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을 고려하여 양곡통제정책을 철폐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양곡사정은 좋지 못했으며, 미군정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미곡수집령」(1946)을 제정하여 양곡통제정책으로 환원하기에 이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한 이후 새 정부는 공출제 폐지여론에도 불구하고 자가소비용 식량을 제외한 양곡 전체를 공출대상으로 규정한 「양곡매입법」의 상정으로 전면적인 국가양곡관리방안을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미곡생산자들은 생산가에 미치지 못하는 미가(米價)에 반발하며 매입을 반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식량사정은 더욱 참담해졌다.
농림부가 식량사정을 타계하고자 「양곡매입법」을 국회에 상정한 것은 1948년 9월 14일이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9월 22일 담화문을 통해 일반비농가 1일 3합 배급실시와 양곡매입제도를 설명하면서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미곡생산자들이 낮은 미가에 반발하면서 미곡반출이 일어났고, 매점매석까지 이루어지면서 식량사정은 더욱 급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는 양곡매입법에 대한 입장차이가 있어 법안통과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실정이었다. 양곡매입법이 통과된 11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문을 내고 양곡매입에 적극 협조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곡매입 실적은 미비하였고, 일반비농업인구 비중이 높은 서울시의 식량사정은 참담한 실정이었다.


11월 16일 농림부는 서울시 일반비농가에 대해 3합씩 배급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서울시에 유령인구가 많기 때문에 식량배급인구의 자격제한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로 인하여 이른바 3합(홉) 배급과 관련한 서울시의 유령인구 논란이 시작되었다.
정부수립 이전부터 이미 법령 제168호 「식량급물자배급제도 위반행위의 처벌」에 따라 서울시는 유령인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착수했고, 1948년 6월 12일에는 유령인구대책으로 서울시에 「식량수배인구조정위원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시는 1948년 9월 2일부터 15일까지 식량수배자수는 모두 307,311세대(1,713,665명)이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림부가 산정한 약 128여명에 비해 턱없이 높은 인구수였다. 그러자 농림부는 서울시에 유령인구를 적발하고 수급인구를 제한하도록 독촉하였다.


12월 농림부의 수배자수 제한조치에 대하여 서울시는 거듭 유령인구 적발에 나섰다. 12월 1일 서울시는 5일 동안 유령인구를 적발하여 209,197명을 정리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농림부는 여전히 서울시에 유령인구가 포함되어 있어 3합 배급을 불가능하므로, 12월 16일부터 실시하기로 한 3합 대신 2합 6작 배급을 하겠다고 결정하였다. 농림부는 서울시민의 3합 배급 기준인원을 서울시 인구수 129만 명으로 확정하였는데, 서울시에서 154만 명으로 보고하여 3합 배급을 실시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농림부가 매년 2만 명의 서울시의 자연인구수 증가분을 반영하지 않고 너무 낮게 인구수를 계산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서울시의 태도와 항변에도 농림부는 서울시가 유령인구를 적발해야만 3합을 배급할 것이라는 방침을 바꾸지 않자, 서울시는 1949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을 ‘양곡수배자신고기간’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1월 10일부터 1월 16일까지 ‘양곡 소비절약 강조주간’을 실시하는 등 자구책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2월 16일부터 2월 20일까지 제3차 유령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서울시의 3합 배급을 확보하기 위한 인구조사는 곳곳에서 ‘과잉조사’라는 불만이 속출하였다. 특히 해방촌과 이촌동 등 전재민(戰災民) 부락에서 더욱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서울시는 제3차 유령인구조사의 결과를 1,492,000여명으로 집계하여 발표하였고, 이에 농림부는 3월 1일에 서울시에 3합 배급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농림부와 서울시가 3합 배급과 관련하여 유령인구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미곡매상은 목표량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2월 2일에는 대통령령 제54호로 ‘양곡매입법 시행령개정안’이 발효되었다. 이 법령은 양곡매입기간의 변경과 미곡매점에 대한 처벌조항을 강화하였으나, 양곡매입 목표량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3월 15일 농림부 발표에 따르면, 3합 배급을 위한 목표량이 750만 석이었으나 수집은 380만 석에 불과하여 3합 배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서울시와 농림부간의 유령인구 논란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농림부는 3월 21일 특수대상 배급실시요강을 만들어 4월 1일부터 실시하고, 일반배급은 3월 말에 중지한다고 발표하였다. 특수대상 배급실시요강을 보면, ① 공무원, ② 특수사업장, ③ 세궁민, ④ 기타 정부대행기관의 공직자와 노무자, 각국 외교사절단 기관의 공직자, 학교, 신문사 등으로 경찰관, 형무관, 소방관, 각종사업장의 중노무자에 한해서 5홉, 각종 사업장의 경노무자는 4홉, 기타는 2홉 5작을 준다는 것이다. 정부의 방침이 알려지자 서울시는 크게 반발하였다. 서울시는 기존에 1일 150만 명 분의 배급을 받아왔는데, 발표에 따르면 150만 시민의 29%인 약 453,000명밖에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서울시 인구의 70%가 시장에서 식량을 수급해야 할 사정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3월 22일 국·과장회의를 개최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정부시책을 수행한다면 큰 논란이 생길 것이라면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3월 25일 정부는 식량정책을 대전환하는 차등중점배급제을 도입하여 4월 1일부터 실시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정부의 식량정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서울시 280여 동장들은 4월 2일 서울시 동장협의회를 열고, 농림부의 차등중점배급제에 대해 반대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결의안의 내용은 농림부안은 실정에 비춰 실현가능한 것이 아니다. 식량확보량이 부족할 때 도시중점주의로 하고, 배급은 1인 1일 2홉 이상 확보되어야 한다. 수배자는 시민의 8할 이상을 확보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서울시 동장협의회 결의장소에 서울시장이 참석하여 강경한 발언을 했다는 소식이 정부에 전해지자 4월 4일, 농림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윤보선 서울시장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시가 정부의 양곡정책에 성의가 없다며, 이를 비난하는 담화까지 발표하였다. 그러자 서울시는 4월 6일 기자회견을 열어 지방행정기관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농림부의 처신을 반박하고 나섰다. 서울시는 농림부안을 따르려면 10일 안에 배급대상에 대한 조사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서울시장의 반박기자회견이 있은 다음날 농림부장관은 서울시의 태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농림부는 국장을 통해서 네 번이나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서울시장이 응하지 않았다며, 오지 않은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비난하였다.


이처럼 중점배급제를 둘러싼 농림부와 서울시간의 갈등은 첨예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농림부의 입장이 강경하여 서울시로서는 중점배급제에 대해 더 이상 거부할 여지가 없었다. 4월 11일, 농림부는 중점배급만이 공정한 배급이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중점배급을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균등배급제도를 주장하던 서울시는 입장을 선회하여 농림부와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시와 농림부는 차등중점배급제도에 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배급량에 대해서 또 다시 갈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농림부는 267,000석을 확보하여 453,000명에게 중점배급한다는 방침이었고, 서울시는 722,000명에게 배급해야 하므로 417,000석을 확보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농림부의 안과 서울시의 요구사이에는 15만석의 차이가 있어 타협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림부가 5만석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자 사무적인 타협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4월 14일, 서울시와 농림부는 양곡 중점배급방침을 확정 발표했다. 4월 16일부터 92만 명의 세궁민에게 최저한도 식생활을 보장하는 원칙하에 2합 배급을 하기로 절충한 것이다. 이로써 농림부와 서울시간의 식량배급에 따른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서울시와 농림부의 타협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행경과

1948. 9. 14.

9. 22.

11. 1.

11. 16.

12. 16.

1949. 1. 15.

1. 10~12.

1. 10~16.

2. 16-20.

3. 1.

3. 15.

3. 21.

3. 22.

3. 25.

4. 2.

4. 4.

4. 6.

4. 11.

4. 14.

농림부 “양곡매입법”상정

대통령, 담화; ‘양곡수집에 대하여’ 발표

대통령, 양곡매입 적극협력당부 담화 발표

서울시, 3홉 배급 식량수배인구 자격제한 실시

농림부, 서울시 쌀 배급 2홉 6작으로 결정

농림부, 서울시 3홉 배급가능 기자회견(유령인구조사)

서울시, ‘양곡수배자 신고기간’ 설정

서울시, ‘양곡소비절약 강조 주간’ 설정

서울시, 3차 유령인구조사

농림부, 서울시 3홉배급 실시 발표(1,492,436명)

양곡매입량 380만석(목표량의 50% 달성)

농림부, 특수대상 배급실시요강 발표

서울시 국과장회의, 정부시책 반대의견

농림부, 중점배급제도 도입담화 발표(4월 1일부터 중점배급 실시)

서울시 280여 동장협의회, 특수대상배급 실시 토론회 개최

농림부,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처사 비난

서울시, 농림부 기자회견 비난

서울시와 농림부, 중점배급제도 협의

서울시와 농림부, 중점배급방식 타협




 
발생기간 1948-09-01 ~ 1949-04-01
주체 정부-정부
이해당사자 서울시, 농림부, 서울시동장협의회
지역 서울
행정기능 농림해양수산
성격 이익갈등
해결여부 해결
정권 이승만
주요용어 양곡매입법, 유령인구, 중점배급제, 3합 배급제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9. 2. 19. 경향신문 1949. 3. 23. 경향신문 1949. 3. 24. 경향신문 1949. 4. 12. 경향신문 1949. 4. 3. 경향신문 1949. 4. 8. 동아일보 1949. 4. 15. 동아일보 1949. 4. 3. 동아일보 1949. 4. 7. 자유신문 1948. 11. 14. 조선일보 1949. 1. 16. 조선일보 1949. 3. 26. 조선중앙일보 1949. 1. 20. 조선중앙일보 1949. 4. 13. 이송순(2008). “식민지 조선의 식량관리제도와 해방후 양곡관리제도의 비교”. 「한국사회학」 32: 411-443. 관보 제5호(1948. 9. 22.). “대통령 담화 : 양곡수집에 대하여”. 대통령령 제54호 「양곡매입법시행령 개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