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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98호 고분 발굴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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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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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 개요와 원인
정부는 1972년부터 IBRD차관으로 경주관광개발 타당성조사를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자원화로 외화를 획득하고자 하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에 청와대에서 직접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차관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 문화재의 보존과 외화획득을 병행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경주에서 발생한다. 박정희정부는 경주개발의 일환으로 고고학자들에게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동 98호분(이후 황남대총)을 발굴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1971년에 공주 무녕왕릉 발굴과정에서 졸속이었다는 학계의 반성이 있었던 터라, 발굴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에 대다수의 고고학회와 학자들은 발굴에 회의적이었다. 또한 경주지역의 경주김씨와 박씨종친회를 중심으로 왕릉을 파헤치는 것은 후손에게 좋지 않다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주유도회와 불교 연합회, 신라문화동인회 등 지역문화계 인사들도 서명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청와대와 문화공보부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이에 정부지시를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었던 고고학자들은 대안으로 98호분 앞에 있는 작은 무덤(황남동 155호분)을 시범적으로 발굴할 것을 제안하였다. 1973년 3월 문화재위원회는 98호분을 발굴하는 대신 그 앞에 있는 155호분(천마총)을 먼저 발굴하고,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나중에 98호분을 발굴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155호분 발굴 작업에 착수한 후 박정희대통령은 경주에 방문하여 98호분을 발굴하고 복원하도록 지시함으로써, 1973년 7월 발굴에 착수하였다. 155호 고분(천마총)의 발굴 성과에 고무되어 한국고고학회와 지역 종친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굴에 착수하였고, 이듬해인 1974년 11월에 완료하였다. 외화획득을 바라는 정부와 일부학자들이 발굴을 강행하면서 독자적인 집행으로 갈등이 일단락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이 사례는 학계와 지역인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발굴의지를 보인 대통령과 경주지역관광개발 사이의 갈등이다. 문화공보부는 첫째,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로 개발하기 위해 미추왕릉지구 사적정비계획에 따라 고분지역 안에 자리 잡은 고분군을 보수하고 정비해야 한다. 둘째,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봉릉(奉陵)을 확인할 수 있는 20여기의 대소고분이 밀집된 이 지역을 정화하고 고분공원을 만들며, 이들 고분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98호분을 발굴하여 내부를 복원하여 사회교육 자료로 제공한다. 셋째, 오히려 고분발굴작업은 선진 외국에서도 보지 못했던 획기적인 유적의 보존활용 사업이다. 넷째, 발굴의 직접적인 목적은 고분 내부를 정확하게 조사 고증하여 복원하는데 있었던 것이며, 이 결과로 고 신라 고분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얻게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주 98호분 발굴에 반대하거나 신중한 입장이었던 한국고고학회 등 학계에서는 첫째, 98호분을 반드시 파야할 뚜렷한 명분이 없다. 경주고분들은 구조나 유물면에서 대동소이하며 155호분의 경우 이미 발굴된 금관총과 매우 유사하다. 백제무령왕능에서와 같은 뜻밖의 수확이란 기대할 수 없으며, 특히 98호분이 다곽분일때는 그 유물이 155호분만도 못할 수가 있다. 둘째, 크고 모양 좋기로 대표적인 98호분을 다시 복원하기란 어렵다는 입장이다. 셋째, 155호분의 발굴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98호분 발굴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155호분의 지하유구를 모조리 검토하고 특히 복원작업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것이므로 일단 한 개의 고분을 다 정리한 연후에 발굴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는 것이다. 넷째, 155호분 유물 중 접근 이래 지도위원회(관계전문가 7명으로 구성)의 소집이 없었다는 점이다. 경주지역 신라왕릉 3성씨 종친회와 문화계는 왕릉은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국내외의 사례가 있으며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입장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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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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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정부는 IBRD차관으로 경주관광자원개발 타당성조사를 시작하였다. 당시는 문화재를 발굴하여 관광자원화하고, 이를 통해 외화를 획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이에 청와대에서 직접 대책팀이 구성되었고, 심지어 박정희대통령이 직접 도면을 그려 계획팀에 전달하는 등 관심이 지대하였다. 이 계획은 1972년 3월 10일 신라천년고도 경주를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꾸미기 위한 것으로 방대한 종합개발10개년계획안을 확정하여 발표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288억원을 투입하여 총 300여㎢에 걸쳐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일「경주관광 종합개발계획」은 이 지역의 허다한 민족문화 유산을 합리적으로 보존함으로써 그 가치를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여 경주를 문화관광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진행되는 와중에 문화재의 보존과 외화획득을 병행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경주에서 발생한다. 박정희정부는 경주개발의 일환으로 고고학자들에게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동 98호분을 발굴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경주 98호분은 경주시청 앞에 산처럼 솟아 있고,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 높이 22m, 직경 80m의 거대한 고분이다. 신라의 원형봉토분으로 도굴흔적이 없어 많은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973년 3월 19일 문화재위원회는 경주 98호분의 발굴에 대한 심의를 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경주 98호분은 학술상·기술상 대단히 중요하지만, 발굴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므로 바로 표형고분을 발굴하지 않고, 그 부근의 다른 고분을 발굴 조사하여 표형고분의 발굴조사에 관한 성공여부를 타진한 후에 확신이 있을 때에 표형고분을 발굴 조사하도록 의결했다. 그러나 문공부는 3월 21일 경주 98호분 등 18기 고분군의 발굴과 보수공사를 착수한다고 발표하였다. 3월 30일에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는 경주 98호분 발굴의 예비조사격인 발굴대상 고분으로 경주 155호분(이후 천마총)을 결정하였다. 1973년 4월 6일부터 경주 155호분의 발굴조사가 현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주 155호분의 발굴이 시작되면서 고고학계와 관련학회들은 경주 고분발굴에 대한 반대의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발굴자체가 문화재 파괴라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복원은 당시 기술수준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문화관광도시로 조성하여 외화획득을 꾀하던 정부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경주관광개발을 위해 발굴계획이 성안된 것으로, 155호분을 발굴하는 선에서 그치고 98호분은 되도록 손대지 않는 방향으로 문화재위원회는 의견을 모았다. 155호분의 발굴성과에 따라 98호분 발굴문제를 논의할 것에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그러나 155호분의 발굴현장에서 금관 등 화려한 유물이 나오기 시작한 6월 20일경에 이미 98호분을 헐기 시작하였다. 고고학자와 관련 학회는 앞에서 말한 발굴의 명분이나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 등을 제시하며 이에 반발했다. 또한 이 고분군 안에 미추왕능이 있듯이, 98호분도 대규모 봉분이란 점에서 통치자의 무덤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1973년 7월 3일 박정희대통령이 미추왕릉지구 발굴현장에 들러 98고분도 발굴하고 복원하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1973년 7월 6일에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 98호분에 대한 발굴안건이 원안대로 의결되었다. 신라최대의 고분 경주 98호분도 발굴하겠다는 문화재관리국의 발표가 있자, 경주일원에서는 신라왕조의 박씨․석씨․김씨 3성씨 후예들을 중심으로 98호분 발굴저지운동이 일어났다. 문화재발굴도 좋지만 혼과 얼을 지키기 위해서도 왕릉을 마구 파헤치는 일을 후손들로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7월 27일 응주김씨종친회와 밀양박씨 종친회는 서로 합의하고, 보존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8월 5일에는 신라숭혜전릉보존회와 경주김씨전국이사회를 경주에서 개최하고 발굴 반대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8월 6일에는 박씨종친회와 신라6부촌대표 20여명이 모여 고분발굴의 적극 반대를 결의하고, 이 운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서명운동과 청와대와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전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3성씨는 8월 9일에 경주개발공사를 찾아 발굴중지를 강력히 촉구하는 등 발굴저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런 발굴반대운동은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유도회, 불교연합회, 신라문화동인회 등 단체와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 소속의 문화재관리국은 8월 9일 학계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굴을 강행하였다. 이로써 한국고고학회와 일부 문화재위원 및 경주지역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8호분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다음해 1974년 11월 15일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진행경과 | | 1973. 3. 19. 1973. 3. 21. 1973. 3. 30. 1973. 4. 6. 1973. 6. 20. 1973. 7. 3. 1973. 7. 6. 1973. 7. 27. 1973. 8. 5. 1973. 8. 6. 1973. 8. 9. 1973. 8. 9. 1974. 11.15. | 문화재위원회, 경주 98호분 발굴계획심의 문화재관리국, 경주 98호분 등 18기 고분군 발굴 및 보수공사 착수 시사. 문화재위원회, 경주 155호분 발굴심의 (조사단장 김정기소장) 경주 155호분 발굴 시작 문화재위원회, 경주 98호분 발굴 결정 박정희대통령, 미추왕릉지구 발굴현장 방문(98호분 발굴 복원 지시) 문화재위원회, 경주 98호분 발굴 결정(원안 의결) 응주김씨종친회와 밀양박씨종친회 협의, 보존운동전개 시사 신라숭혜전릉보존회·경주김씨전국이사회 개최, 경주 98호분 발굴반대 결의 박씨종친회와 신라6부촌대표, 경주 98호분 발굴반대 결의 신라왕조 박·석·김 삼성(三姓)씨 대표, 경주개발공사 항의방문 : 발굴중지 강력 촉구 문화재관리국, 경주 98호분 발굴강행 시사 경주 98호분 발굴완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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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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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03-01 ~ 1973-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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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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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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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당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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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위원회, 문화재관리국, 문화공보부, 청와대, 경주3성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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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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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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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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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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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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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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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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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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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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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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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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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분, 155호분, 미추왕릉, 천마총,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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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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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74. 11. 26. 동아일보 1973. 8. 10. 조선일보 1973. 6. 20. 5면 조선일보 1973. 7. 4. 7면 중앙일보 1973. 7. 28. 중앙일보 1973. 12. 11. 경향신문 1973. 3. 22. 7면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1973/3/19, 1973/3/30. 최광승(2012). “박정희의 경주고도개발사업”. 「한국문화연구」 126: 18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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