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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삼산면 삼산제일광산 폐수 피해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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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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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 개요와 원인
경남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일대는 ‘한국의 동광상구(銅鑛像區)’로 불릴 정도로 많은 동광산(銅鑛山)이 밀집해 있었다. 삼산제일광산은 1916년 일본인 2명이 광업권을 등록하고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1968년에 삼산제일광산이 광업자로 등록한 후에 본격적인 탐광을 하였다. 1970년도 1,410m와 1971년도 600m의 시추탐광으로 약 20만톤의 동을 확보하였고, 1971년 3월에는 경상남도로부터 허가를 받아 선광장(選鑛場)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병산리 주민들은 광산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이웃한 삼봉마을의 경우 일제 강점기부터 구리 채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광산에서 흘러나온 ‘나쁜 물질’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고, 개울의 미꾸라지까지 남아나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100가구 남짓한 동네사람들은 광산으로 찾아가 시설보수와 철거를 주장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1971년 11월 13일에는 주민 50여명이 광산에 난입하여 공장 폐수로 인하여 식수오염과 농작물 및 가축 등이 피해를 입었다며 농성을 벌였지만, 경찰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그러나 광산이 휴·폐업을 계속하는 동안 적절한 처리가 되지 않아 환경오염의 피해가 계속되었다.
2) 주요 쟁점과 이해당사자 의견
지역주민들은 삼산제일광산의 폐수로 인해 식수와 농작물과 가축의 피해가 막심하다며 시설보수를 요구하였다. 특히 해당 지역 주민 50여명은 제일광산에서 흘러나오는 폐수 때문에 식수와 농작물 가축 등에 피해가 심하다고 광산작업장에 들어가 신축중인 건물과 자재를 마구 부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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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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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일대의 삼산제일광산은 1916년 일본인 2명이 광업권을 등록하여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1968년에 광업자로 등록한 후에 본격적인 탐광(探鑛)을 하였다. 1971년 3월 30일에는 경상남도로부터 허가를 받아 선광장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자 병산리 주민들은 경악했다. 이웃한 삼봉마을의 경우 일제 강점기부터 구리 채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광산에서 흘러나온 ‘나쁜 물질’ 때문에 곡식 농사가 잘 되지 않고 개울의 미꾸라지까지 남아나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시 100가구 남짓한 동네 사람들은 광산개발 반대운동을 벌였다. 1971년 11월 12일에는 평산리 주민 50여명이 부락에서 1km쯤 떨어진 제일광산 선광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식수와 농작물 및 가축 등이 피해를 입었다며 시설개수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출동하여 제지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다가 광산산업의 어려워진 1992년에 모든 광산업체가 완전 철수했다. 그러나 이들 광산이 휴·폐광된 후 적절한 처리를 하지 않고 방치되어 주변토양이나 하천의 오염으로 최근까지 피해를 입고 있다. 진행경과 | | 1968. 1971. 3. 20. 11. 12. | 삼산제일광산, 삼산면 동광산 개발광업권자로 등록 삼산제일광산, 선광장 설치(경상남도 허가) 삼산면 병산리 주민 50여명, 삼산제일광산 선광장 농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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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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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03-01 ~ 1971-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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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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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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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당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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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삼산제일광산, 병산리 주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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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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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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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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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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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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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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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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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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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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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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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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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제일광산, 동광산, 선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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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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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1. 11. 13. 대한광업진흥공사(1973). 「탐광굴진」. 제2호. 한겨레 21, 2004. 6.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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