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고전과 현대 과학을 아우르는 마음 비교용어사전 DB 구축 상세보기

표제어 정보
표제어 한글 감정 표제어 원어
표제어 영문 표제어 한문
표제어 종류 비교서술 마름모형이름 현상학
비교서술
대범주
마음의 구조와 작동 비교서술
소범주
작용적 기제: 동기
유사어 행동,영혼 반대어
상위유형 하위유형
부분 분노,관념(관념성) 포함
집필자 양선이 비고
용례
내용 감정이란 지각 경험을 통해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키는 복잡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외물의 자극을 받아서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 외물에 감촉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그것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감정을 정이라 본다. 성리학의 시대에는 이러한 정에 관한 이해가 더욱 중시된다. 즉 정을 성과 짝지어서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적으로 발출하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 정임을 인지하고, 그 정이 사유와 판단에 앞서서 자연적으로 발출하고 이후의 마음의 작용과 흐름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관찰하게 된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마음 전체의 작용을 진실하게 하고 그것으로서 시종일관하는 방법을 성과 정의 관계, 특히 정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의 양 단계를 일관하여 진실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중시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중용」의 정의 미발과 정의 이발의 설명인 중과 화를 기본적 관점으로 삼는다. 또 맹자 공손추 상에서 언급되는 四端의 마음, 즉 측은한 마음은 인의 단서,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은 지의 단서라고 할 때 이 마음(心)은 사실 情에 해당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분류는 송대 주자학에 들어와서 뚜렷하게 된다. 朱熹의 문인인 陳淳은 北溪字義에서 사단을 情으로 분류하고, 성이 작용하여 나오는 마음을 정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그는 中庸의 喜怒哀樂과 맹자의 사단을 다같이 정의 범주로 분류하였다. 정은 인간의 마음이 외물의 자극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비롯되는 작용이다. 이 작용은 인간에게 본구된 성이 이미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므로 거의 자동적으로 나타나며 사고나 의지가 개입하기 전의 단계에 작동하는 것이다. 성이 가리키는 방향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보호와 양육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것은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자연스런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경향을 실제의 마음 작용으로 구현하는 것이 곧 정의 작용이며 이를 욕망 혹은 욕구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욕망에는 성욕, 그리고 소유욕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인간의 마음 작용 가운데 정의 작용은 근본적으로 성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며 그 자체는 좋지 않다는 가치를 내포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상황에 대응하여 작동할 때 적절함을 얻으면 그것은 적절하고 선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적절함을 얻지 못하면 좋지 않다는 평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즐거워해야 하는 상황에서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는 것, 불쌍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내는 것, 그리고 시비를 분명히 가려야 하는 때에 시비를 가리려고 하는 마음 등은 모두 적절하고 선한 정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즐거워해야 하는 때에 즐거워하지 못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측은한 마음을 내지 않는 것, 시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하는 때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고 좋지 않은 마음으로 간주된다. 성리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작동하게 되는 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통제되고 조율됨으로써 외부 사물이나 상황에 적절하고도 선한 반응을 하는 태도가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떳떳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양의 방법이 취하고 있는 중요한 방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적절하게 반응하는 정을 발전시키는 방향과 부적절하게 반응하는 정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적절한 반응이 자리 잡도록 하는 방향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적절하고 선한 정을 잘 보존하여서 그것이 마음 작용의 중추가 되도록 발전시키는 방법이 중시되었는데, 그것이 存心, 養性, 存天理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정이 과도하거나 상황에 부적절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정이 과도하고 무리한 욕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통제와 조절 등이 수양의 중요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감정의 적절성과 통제와 관련하여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은 불교에서도 드러난다. 불교에서는 샤캬무니 붓다의 깨달음 체험 이래로, 우리의 감정이 적절한 수준을 벗어날 때에 현실에 대한 왜곡된 경험을 야기하면서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고 고통을 야기한다고 간주하면서, 우리의 감정의 왜곡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리고 적절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감정 문제에 접근해 왔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하여서, 그릇된 것을 파척하면 올바른 것은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된다는 입장에서 불교 전통은 주로, 특히 초기 불교 전통에서는 잘못된 감정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감정 문제에 접근해 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도가적 전통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정조(情調)에 대한 찬미를 수용하면서 발달된 선불교 전통은 왜곡된 감정을 다스리는 방향보다는,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에서 깨달음과 행복이 경험된다는 데에 보다 주목하였다. 앞서 감정이란 지각 경험을 통해 마음에 무언가를 일으키는 복잡한 상태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지각 경험을 통해 발생하는 감정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 고대 철학에서는 영혼의 건전함과 냉정함을 훼방하는 요인으로 간주되곤 한다. 플라톤은 사랑과 관련한 감정(erotic pathos)을 <<파이드로스>> 265b에서 논하며, <<티마이오스>> 42a-b에서는 원래 자유로워야 할 영혼이 [일종의 감옥과도 같은] 신체(sōma: 육체) 안에 심어지게 됨으로써 발생한 결과가 다름 아닌 감정이라고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5권에서 감정을 몇 가지 의미에서 구분지어 논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이란, (1) 어떤 사물이 변화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의 성질이기도 하며, (2) 이미 현실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변화의 상태이기도 하고, (3) 특히 해가 되는 변화 혹은 운동이자 무엇보다도 고통을 수반하는 상처이며, (4) [눈으로 혹은 심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경험들이기도 하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1105b20 이하에서 감정을 가능성(dynamis: 능력) 및 성향(hexis: 품성)으로부터 구분지으면서, ‘욕구, 분노, 두려움, 확신, 부러움, 환희, 사랑, 증오, 열망, 경쟁심, 동정,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을 수반하는 느낌 일반’이라고 규정한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이성 작용을 훼방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제논은 감정이란 과도한 충동(hormē)이기에 조절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논한다. 크뤼시포스는 감정을 판단의 개념과 연결시키는데, 충동이 주어진 이상 이 충동이 추구되어야 할지 아니면 제거되어야 할지 판단(doxa: judgement)이 이루어져야 하며, 만약 충동에 대한 추구가 지나치게 될 경우 그것이 곧 [비-이성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논한다. 반면 포시도니우스는 크뤼시포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감정이 때로는 독립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감정에 관한 연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에서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부정적 의미로 다루어졌으나 근대 철학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주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7세기에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용어는 ‘정념(passion)'이었다. 이는 데카르트의 <<영혼의 정념들(Passions of the Soul>>(1649)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으며, 감정을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상태로 보려는 당대의 일반적인 경향 때문일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은 신체의 변화에 대한 생리학적 설명으로 해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규칙적 체계, 즉 혈액 순환과 신경 체계가 조화를 이루는 체계로 간주되기 때문에 영혼의 정념으로 파악된 감정은 혈액과 신경의 운동으로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정념론>>에서 상당 부분 신체의 기능과 정신의 기능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 논증한다. 이 문제는 결국 영혼과 신체의 합일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였고, 이에 대해서 유명한 송과선 개념을 사용해 논지를 펼친다. 데카르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윤리학적 견해를 인간의 정서에 대한 통찰에 기반을 두고 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있어 윤리학은 인간 신체에 대한 생리학적 설명에 근거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서 감정 이론은 <<에티카>> 3, 4, 5 부에 걸쳐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진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 이성과 반대되는 신체적 개념이라고 주장했고 홉스와 같이 자기 보존의 욕망이 인간을 행동하게 만드는 근본적 동기라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의 감정 중 근원적 감정이 기쁨, 고통, 욕망이라고 규정했고, 정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오면서 특히 영국에서 ‘감성’(sentiment)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이 용어는 때로는 정념과 구별 없이 사용되기도 했고, 때로는 정념과 대비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에 감성은 ‘차분한 감정’(calm emotion)으로서 반성에 의해 다듬어지고 조절된 그런 감정이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정제된 그런 감정을 뜻하며, 정념은 다듬어지거나 교정되지 않은 감정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거나 이성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격한 감정’(violent emotion)이다. 영국 경험론자인 흄은 자신의 인식론과 윤리학에서 정념에 기초하여 반합리주의적 입장을 전개한다. 흄의 용법에서 정념은 이차 인상(secondary impression; 또는 반성 인상(impression of reflexion))이다. 일차 인상(original impression; 또는 감각 인상(impressions of sensation))은 그 어떤 앞선 지각들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런 인상은 색깔, 소리, 촉감 등의 감각들, 그리고 직접 느껴지는 고통과 쾌락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이차 인상은 근원 인상들로부터 생겨나는데, 이것들로부터 직접 생겨나거나 아니면 근원 인상들에 의해 산출된 관념들로부터 생겨난다. 내가 화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고통은 감각 인상(일차 인상)이다. 한 달 뒤 내가 그 고통스런 화상의 기억을 떠올릴 때, 이것은 관념이다. 만일 나의 그 기억이 정신적 고통을 낳는다면, 그 불쾌한 느낌은 반성 인상(이차 인상)이다. 이와 같은 이차 인상은 차분하거나 격렬하다. 차분한 인상(calm impressions; 예를 들면, 도덕감, 미감, 자비심, 삶에 대한 사랑)은 때때로 이성과 혼동되기도 한다. 격렬한 인상(violent impressions)은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나뉜다. 직접 및 간접 정념은 “고통과 쾌락에 기초하지만”(T 438), 전자는 쾌고의 근원 인상으로부터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발생하는 반면, 후자는 “다른 성질들과의 연계”(T 276)를 요한다. 직접 정념의 예로서 흄은 욕구와 혐오,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두려움과 안심을 든다. 간접 정념은 야망, 허영, 선망, 동정심, 적의 및 관대함을 포함하는데, 흄은 두 개의 대립쌍, 즉 자긍심과 수치심, 사랑과 증오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간접 정념은 직접 정념보다 더 복잡하게 작용하는데, 정념의 ‘원인’ 말고도 ‘대상’이 요구된다. 동일한 사람이 자긍심과 수치심 양자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감정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즉 대상)을 필요로 한다. 흄에 따르면 그 ‘대상’은 자아이다. 만일 자아(또는 사람)가 개입되어 있지 않으면, 자긍심이나 수치심은 일어나지 않는다.(사랑과 증오의 경우에 대상은 다른 자아 또는 타인이 된다.) 칸트는 신체적 감각 기관을 통해 감지되는 쾌를 쾌락(Vergnügen)이라고, 불쾌를 고통(Schmerz)이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면 칸트에게 감정이란 쾌와 불쾌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의미한다.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쾌의 감정을 인간의 마음의 능력에 따라 감성적인 쾌와 지성적인(intellektuelle) 쾌로 나누고 감성적인 쾌를 다시 감관에 의한 쾌(즉 쾌락)와 상상력에 의한 쾌(취미Geschmack)로 나눈다. 한편 지성적인 쾌는 개념에 의한 쾌와 이념에 의한 쾌로 나뉜다. 이러한 쾌의 분류는 <<형이상학 강의>>에서의 생명의 분류에 상응한다. 즉 생명은 동물적 생명, 인간적 생명, 그리고 정신적 생명으로 나뉘는데, 동물적 생명의 쾌는 쾌락이며, 인간적 생명의 쾌는 취미, 그리고 정신적 생명의 쾌는 지성적 쾌로서 도덕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감정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칸트 철학이 기여하고 있는 바는 바로 그의 정동(Affekt, affect)과 정념(Leidenschaft, passion)의 구별이다. 칸트에게 정동은 감성적 쾌이자 쾌감과 고통과 관련된 감정인 반면에, 정념은 욕구 능력으로서 욕망, 특히 경향성(Neigung)의 일종이다. 이 둘은 그 유사성 때문에 흔히 혼동되지만, 칸트의 관점에서, 쾌의 감정과 욕구 능력은 서로 구별되는 마음 상태이기 때문에 엄연히 구별되는 상태다. 우선 정동은 일정한 마음의 상태를 지칭하는 감정이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수치, 조급함 등을 포함하는 이러한 감정은 우리의 활동을 자극하고, 일정한 행위의 동기로 작용한다. 가령 분노의 정동은 빠르게 끓어오르고 그만큼 또 쉽게 가라앉는다. 반면 정념은 하나의 습성화된 욕망, 즉 경향성이 지배적인 마음 상태이며, 이에 따라 다른 경향성들을 배제한다. 나아가 칸트에게 정동이 감정 상태에 대한 적절한 판단의 결여라고 한다면, 정념은 경향성과 그에 따른 행위에 대한 판단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판단을 결여했다고 해서 정념은 정동처럼 급작스런 사고의 마비 상태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정념은 일정한 행위를 계획하고, 또 이를 철저히 실행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정동과 정념이 우리를 사로잡을 경우 이를 “마음의 병(Krankheit des Gemüt)”이라고 부른다. 이는 단지 건강을 해친다는 실용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올바로 살아가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즉 도덕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감정은 육체적이며 수동적이라는 것이 고대로부터 유지되어 온 서양 철학의 기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러한 상식적 견해와 거리를 둔다. 헤겔은 감정을 신체적 느낌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과 구별하고 감정에는 관념이 개입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감정은 ‘자기 본위적(Selbstischkeit)’이다(<<엔찌클로페디 Ⅲ>> 중 ‘감지하는 영혼(Die fühlenden Seele)’ 장 참조). ‘자기 본위적’이란 감정이 단순한 다발로 파편화된 정보를 제공하는 감각과 달리 감정은 느끼는 주체, 즉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감정은 외적 환경이나 대상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은 감정을 ‘자기감정(Selbstgefühl)’이라고도 표현한다(같은 곳 참조). 자기감정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 나의 것으로 특수하게 추상화된 감각들의 총체이다. 이러한 감정의 예들이 욕구, 충동, 격정 등등과 같은 것이다. 또한 헤겔은 이성과 감정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감정에는 낮은 차원일지라도 판단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감정론의 논의 구도에서 보자면 헤겔은 감정에 인지적인 것이 포함된다는 인지주의적 입장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완전히 신체성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기에, 그의 입장을 단순하게 인지주의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이상과 같이 서양 근대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다루어진 감정은 현대에 와서는 윌리엄 제임스(1884/1890)와 안토니 케니(1967)를 통해 철학적 주제의 하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편 최근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인간의 심적 상태 중 믿음, 욕망, 그리고 지각 등과 같은 각각의 심적 상태들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감정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가 명제적 내용을 갖는 판단이냐 아니면 신체적 증후를 동반하는 느낌이냐에 따라 크게 인지주의, 비인지주의로 나뉘고, 인지주의에도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감정에 관한 인지주의에 따르면, 사고나 인지적인 요소가 본질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감정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각각의 감정은 우리의 안녕과 관련된 어떤 일반적 속성에 관한 생각을 통해 구성된다. 예를 들어 분노는 나에 대해 모욕이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에 생길 수 있고, 슬픔은 큰 상실이 존재한다는 사고로 구성될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가 죽었을 때, 나는 우선 메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어서 그 강아지의 죽음은 하나의 ‘상실(loss)'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공포는 아주 나쁜 일 때문에 내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과 그런 일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아주 해로운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것을 제거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해 있지 못하다는 믿음 등등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추론된 생각들과 믿음들이 인지주의에 따르면 감정을 구성(constitute)한다. 감정에 관한 비인지주의 모델에 따르면, 감정은 사고나 인지적인 요소로 구성되기보다 신체적 감각과 동일시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로 대표되는 이러한 모델은 감정에 관한 (신체적) 느낌 이론(Feeling Theory of Emotion)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윌리엄 제임스는 감정을 일정한 패턴을 가진 신체적 감각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감정에 관한 제임스의 이와 같은 생각을 우리는 먼저 데카르트와 흄에게서 엿볼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감정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감각과 유사한 내적인 성질을 갖는다. 데카르트와 흄의 입장은 ‘전통적 신체적 느낌 이론’(a traditional feeling theory of emotion)이라고 종종 불린다. 감정에 관해 인지주의와 비인지주의를 이상과 같이 간략히 구분했을 때, 데카르트와 흄의 입장을 절충주의로 해석하는 사람들로 있지만 데카르트와 흄이 때때로 정념(passion)과 달리 감정(emotion)을 신체적 느낌(bodily feeling) 또는 감각(sensation)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비인지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감정에 관한 비인지주의자의 전형인 윌리엄 제임스 이론의 모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감정을 쾌락과 고통에 대한 내적 감각이나 반성 인상으로 본 영국 경험론자 로크와 흄을 따르는 윌리엄 제임스의 입장을 비인지주의로 부르고 현대 제임스주의자들은 비인주의라고 불리기보다 신제임스주의(Neo-Jamsian)라 불린다. 대표적으로는 제시 프린츠(J. Prinz)가 있다. 프린츠는 자신의 체현된 평가 이론이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에 대한 수정된 견해라고 한다. 프린츠는 한편으로 제임스에게 있어 감정은 일정한 패턴을 갖는 신체적 감각의 복합체이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때때로 감정은 항상 의식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물려받는다. 프린츠에 따르면 감정은 제임스가 제안한 것처럼, 몸을 통해 구현된다. 그는 말하길, 한편으로 “감정은 우리 신체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지각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또한 평가(appraisal)이다.” 누스범(Nussbaum)과 솔로몬(Solomon) 같은 판단주의자들(judgmentalist)들은 평가를 ‘평가적 판단’으로 규정하는 반면, 프린츠 자신은 평가(appraisal)를 ‘우리의 안녕과 관련이 있는 유기체-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어떤 표상’으로 본다. 신체적 지각이 유기체-환경 관계를 표상하는 방식은 ‘올바른 인과적 관계’를 통해서이지 ‘개념을 사용하거나 기술(description)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심리학에서도 감정 또는 정서란 일반적으로 유기체로 하여금 외부 사태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이끄는 심리적·행동적·생리적 요소들의 복합적 반응 양태로 이해된다. 그리고 느낌(feeling)이란 용어는 대개 감정 또는 정서의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가리킬 때 또는 차가움, 아픔 같이 경험된 감각(sensation) 일반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 문화적 차이와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구별 가능한 기본 감정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컨대 이 분야의 연구를 선도한 폴 에크만(Paul Ekman)은 분노, 혐오, 공포, 행복, 슬픔, 놀람이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 감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심리학에서 감정에 대한 이론과 연구는 크게 감정에 대한 신체적 접근과 인지적 접근으로 나뉜다. 감정에 대한 신체적 접근에서는 신체의 특정한 흥분 상태를 감정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샤흐터와 싱어(Schachter & Singer 1962)는 생리적 흥분과 인지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감정이 생긴다는 감정의 2요인 이론(Two-factor theory of emotion)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주위 환경에 존재하는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단서들을 활용해 그 자체로는 애매한 생리적 흥분에 명칭을 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게 된다. 자이언스(Zajonc 1980)는 의식적 지각의 역치 아래에 있는 역치하자극(subliminal stimuli)에 단순히 노출되는 것이 피험자들의 감정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실험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서 체계와 인지 체계는 서로 상당히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감정이 인지보다 더 강력하고 우선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다마지오(Damasio 1994)는 이성과 감성의 전통적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이 합리적인 의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체 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에 따르면 특정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들의 연합인 신체 표지가 뇌에서 형성되어 여러 선택 사항 중에서 더 이로운 것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양 철학사에서 감정 개념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온 측면이 있다. 다만 철학자마다 감정을 논할 때 인지적 측면을 강조하느냐 신체적 증상을 강조하느냐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에서 감정은 비이성적인 것, 신체적인 것으로 통제되어야 할 부정적 대상이었다. 근대 철학자들은 감정을 인간 삶의 보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로 부각시겼다. 현대 철학에서는 감정이 갖는 특성 중 그것이 동반하는 신체적 느낌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판단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론들이 생긴다. 전자를 비인지주의 또는 느낌 이론이라 부르고 후자를 인지주의 또는 판단주의라 부른다. 심리학에서 감정 또는 정서란 일반적으로 유기체로 하여금 외부 사태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대처하도록 이끄는 심리적·행동적·생리적 요소들의 복합적 반응 양태로 이해된다. 그리고 느낌(feeling)이란 용어는 대개 감정 또는 정서의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가리킬 때 또는 차가움, 아픔 같이 경험된 감각(sensation) 일반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정 개념은 각 철학자들의 윤리학적 견해와 연결되었다. 서양 철학자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동양 철학에서도 감정에 대한 이해는 윤리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 개념은 윤리학과 관련해서 더 진일보해 왔다. 흄의 감성주의 윤리학이나 아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대표적이며, 현대 도덕 심리학 분야에서 조너던 하이트 같은 직관주의 윤리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도덕적 판단에서 앞선다고 주장한다. 동양의 성리학에서는 정의 작용이 근본적으로 성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라 보았으며 그것이 상황에 대응하여 작동할 때 적절함을 얻으면 그것은 적절하고 선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적절함을 얻지 못하면 좋지 않다는 평가를 얻게 된다고 보았다. 성리학자들은 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통제되고 조율됨으로써 외부 사물이나 상황에 적절하고도 선한 반응을 하는 태도가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수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