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미학 원전자료 집성 및 해제

서 명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18
문 체
저 자
최치원[崔致遠] 857년(통일신라 헌안왕 1)~ ?
孤雲
海雲(夫)
내 용

某啓 昨日伏蒙恩慈 借示修法雲寺天王碑 綵毫乍閱 俗眼初醒 唯慙鐵印之傭流 忽覩銀鉤之妙迹 旣成國寶 豈許家藏 竊聆將勑貞碑 始揮神筆 風亭減暑 天酒呈祥 固知垂露之蹤 便成甘露 況假崩雲之勢 永耀法雲 宜乎琬琰之詞 鎭彼琉璃之地 共傳嘉瑞 遠振芳聲 然則隋煬帝之故都 永爲寶窟 謝將軍之舊宅 終作福田 下情無任捧讀祠禱榮懼之至 其碑謹專諮納 謹狀

해제

최치원(崔致遠, 857 ~ ? )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고려 현종(顯宗) 14년(1023)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의 부친은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때에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肩逸)이며,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원년(857)에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인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 874년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낙양(洛陽)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5수 1권으로 된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雜詩賦)』 등의 시문집을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뒤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현위(縣尉)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875년부터는 왕선지(王仙芝), 황소(黃巢) 등이 유민을 모아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안휘성(安徽省)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表)ㆍ서계(書啓)ㆍ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名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치원은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다. 그리고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최치원(崔致遠)은 당 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나은(羅隱, 833~909)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 당 희종(僖宗,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을 썼으며,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주(州)와 군(郡)에서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889년에는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이 공부(貢賦)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의 힘은 수도인 서라벌 부근에만 한정될 정도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이 즉위한 뒤,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는 경주의 남산(南山), 합천 매화산의 청량사(淸凉寺),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등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부산의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유(儒)ㆍ불(佛)ㆍ선(仙) 통합 사상을 견지하였다. 그는 개혁이 좌절된 뒤에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은둔 생활로 삶을 마쳤다. 그렇지만 유교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최언위(崔彦撝), 최승로(崔承老) 등은 고려에서 유교 정치이념이 확립되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국가체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최치원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는 등 유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숭앙되었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風流道)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 眞興王 37年條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킨다.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眞興王 37年條).”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최치원은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유교ㆍ불교ㆍ도교 등 외래 사상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풍류도를 두고 지금의 미학자들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미학사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道)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비문(眞鑑禪師碑文)」에 잘 나타나 있다.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가르침이 흐름이 갈리고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이 문(文)으로 사(辭)를 해치지 않고, 사(辭)로 뜻(志)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서 ‘여래(如來)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며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겸하지 못하는 자는 물(物)이 겸하기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도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道)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而學者或謂身毒與闕里之說敎也 分流異體 圓鑿方枘 互相矛盾 守滯一隅 嘗試論之 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 故廬峯慧遠著論 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 釋窮其致 眞可謂識其大者 始可與言至道矣 『孤雲先生文集』卷2 「眞監和尙碑銘並序」).” 최치원은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유ㆍ불ㆍ선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다. 그는 승려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불교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여기에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ㆍ「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ㆍ「석순응전(釋順應傳)」ㆍ「석이정전(釋利貞傳)」 등 화엄종(華嚴宗)과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지증(智證)ㆍ낭혜(朗慧)ㆍ진감(眞鑑) 등 새로 등장한 선종의 승려들에 관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유식학(唯識學)에 대해서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승려의 비문에서도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이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 이는 그가 유ㆍ불ㆍ선의 3교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추앙되었다. 『사시금체부』, 『오언칠언금체시』, 『잡시부』, 『사륙집』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과 『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쓴 시문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과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ㆍ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제왕연대력』, 『중산복궤집』,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서예에 있어서도 초당의 서예를 융해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이루어낸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산비문 가운데 하나인 하동 쌍계사의 <진감국사비>는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치원을 대표하는 해서체(楷書體) 비로 모두 38행 2,414자이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高騈)의 막부(幕府)에서 종사순관(從事巡官)으로서 서기(書記)의 직임(職任)을 맡고 있을 때 지은 만여 편의 글 가운데서 정수만을 뽑아 20권으로 편차한 4ㆍ6 변려문의 전형적인 글인데, 이 중에는 시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계원필경집』은 『삼국사기』ㆍ『해동문헌총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ㆍ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 후 1834년 서유구(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홍석주(洪奭周)의 집에 가장(家藏)된 구본(舊本)을 얻어 편목(編目)과 의례(義例)는 그대로 두고 잘못된 글자만을 교정하여 전주(全州)에서 취진자(聚珍字)로 간행하였다. 1834년 감본(刊本)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220),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8년에는 후손 최기호(崔基鎬) 등이 경주 이상재(伊上齋)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1918년 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42-2), 고려대ㆍ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0년에는 음성(陰城) 경주최씨문집발행소(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신활자로 간행하였다. 1930년 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82-68)에 소장되어 있다. 본 ‘한국서예미학 원전자료 집성 및 해제’에서 채택한 저본은 1834년 전주에서 간행된 활자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장본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표점 영인하여 발간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권1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다. 본서에 내재되어 있는 서예미학 관련 자료는 『계원필경집』 자체가 최치원이 879년부터 4년간 고변(高騈)의 막부에서 종사순관으로서 서기의 직임을 맡고 있을 때 지은 것이므로 모두 고변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권10에 실려 있는 「유주리가거태보(幽州李可擧太保)」 두 번 째 글 중에는 유주 이가거 태보가 ‘연대(硯臺) 1구(具)와 연갑(硯匣)과 연궤(硯几) 1구를 보내 온 것에 대한 답례로 고변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이 글 중에서 서에의 효능을 “반드시 구광(九光)이 멀리 빛나고 오색(五色)이 깊이 번질 것입니다. 뛰어드는 나방을 막아 목숨을 살림으로써 인덕(仁德)의 교화가 더욱 드러날 것이요, 향기로운 먹을 갈아 글을 전함으로써 덕의 향기가 더욱 퍼질 것입니다(必可遠耀九光 深滋五色 隔飛蛾而救物 仁化彌彰 硏含麝以傳書 德馨增馥)”라고 하여 풍교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권17에는 고변의 공덕을 칭송한 칠언기덕시(七言紀德詩) 30수가 있다. 이 「헌시계(獻詩啓)」 중의 「필법(筆法)」, 「성잠(性箴)」, 「안화(安化)」, 「반계(磻溪)」 등에 서예미학 관련 내용이 내재되어 있다. 「필법」에서는 고변이 벼슬하기 이전 시절을 ‘와룡(臥龍)’이라 하였으며 이런 고변에게 “신이 묘결 전해 기봉이 되게 하였다[神傳妙訣助奇鋒]”고 한다. 그리하여 ‘외국 사람들이 필법을 배우려고 해도 수적을 구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也知外國人爭學 惟恨無因乞手蹤]’고 하면서 고변의 서예를 높이 평가하였다. 「성잠」에서는 고변이 지은 「성잠」의 내용을 보면 노자(老子)의 『도덕경』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여기에 또 필법까지 뛰어나서 후세에 분명히 전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사한쌍미(詞翰雙美)’라고 하였는데, 사한은 시문의 내용과 서법(書法)을 말하는 것이다. 「안화」에서는 고변이 반필(班筆)하여 선화(宣化)을 이우렀다고 하였다. 즉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한번은 붓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나 장건이라도 본받아서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大丈夫無它志略 猶當效傅介子張騫 立功異域 以取封侯 安能久事筆硏閒乎).”라고 하더니, 뒤에 과연 절부(節符)를 쥐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고사가 있는 것처럼 고변 역시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며 백성을 교화하였다고 그의 공로를 높이 칭송하였다. 「반계(磻溪)」에서는 고변의 석각(石刻)되 글씨를 높이 평가하면서 “더구나 왕사의 공업 일찍 달성하여 도리가 만대의 봄을 끝내 이룸에랴(況能早遂王師業 桃李終成萬代春)”라고 하여 반계에서 낚시질하다가 주 문왕(周文王)을 만나 노년에 왕사(王師)가 된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는 달리, 고변은 이른 나이에 왕사가 되었고, 또 그 문하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어 성황을 이루었다(天下桃李 悉在公門矣. 『資治通鑑』 則天順聖皇后下 久視1年)고 하였다. 권18의 「사차시법운사천왕기장(謝借示法雲寺天王記狀)」는 고변이 법운사 천왕의 비기(碑記)를 보여준 것에 대해 사례한 장이다. 이 글에서도 고변의 서예를 “신필(神筆)을 휘두르자, 정자[風亭]에 더위가 물러가고 천주(天酒)의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수로(垂露)의 자국이 곧바로 감로(甘露)를 이룬 것을 알겠으니, 더구나 붕운(崩雲)의 형세를 빌려 길이 법운(法雲)의 사원을 빛내는 것이겠습니까(始揮神筆 風亭減暑 天酒呈祥 固知垂露之蹤 便成甘露 況假崩雲之勢 永耀法雲)”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서예 수준을 ‘철인(鐵印)의 용류(傭流)’라 하여 최치원 자신은 품삯을 받고 글씨를 써 주며 살아갈 정도의 실력에 불과하다고 하여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에 왕길(王吉)의 후손인 왕부(王溥)의 고사에 빗대었다. 권18의 「사시연화각기비장(謝示延和閣記碑狀)」 역시 고변이 연화각 기문의 비본을 보여 준 것을 사례한 장문으로 고변의 서예 경지를 왕희지의 ‘입목삼분(入木三分)’의 고사와 <난정서>와 견주는 등 높이 칭송하고, 수(隋)나라 최표(崔儦)가 소싯적에 “5천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자는 이 방 안에 들어오지 말라(不讀五千卷書者 無得入此室)”라고 문 앞에 크게 써 붙이고는 독서에 힘쓴 고사를 인용하면서 자신도 고변의 문전에 다가가기를 원하면서 『장자』「양생주(養生主)」의 ‘포정해우’의 고사를 들어 경지가 높아져서 종사순관으로서 서기의 직임에 능숙하게 되기를 바랐다. 『계원필경집』에 내재되어 있는 서예미학 관련 자료는 『계원필경집』 자체가 최치원이 고변의 막부에서 종사순관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므로 모두 고변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며 서예비평 관련 내용 모두가 고변의 서예를 비평한 것들이다. 따라서 온전히 최치원 자신의 서예비평관이 담겨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서예미학 원전자료라는 점에서 범상하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자료> 김기빈, 「해제」, 『계원필경집』, 『한국문집총간』1, 한국고전번역원. 최치원 저, 이상현 역 『계원필경집』, 한국고전번역원, 2010.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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