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미학 원전자료 집성 및 해제

서 명
목은고[牧隱藁]
詩稿19
문 체
저 자
이색[李穡] 1328년(고려 충숙왕 15)~ 1396년(조선 태조 5)
牧隱
穎叔
내 용

中山毛穎號精強 身染天台智者香 先進摧頹將乞退 後來尖利苦嫌藏 鋒磨烏玉滋如露 跡印華牋淨似霜 已致兩生興禮樂 漢家綿蕝冷無光

해제

이색(李穡, 1328 ~1396)은 고려 말기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齋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鷹峯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 사관 편수관지제교 겸 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 ·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병부낭중(史部侍郎輸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郞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宜)·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화(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 (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 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스승 이제현과 쌍벽을 이루는 대문장가였다. 문장이 우유유여(優遊有餘)하고, 혼후무애(渾厚無涯)하며 변화무쌍 하면서도 인의(仁義)에 근본을 두었다는 평을 얻었다. 그의 문학은 조선 중엽까지 200여 년간의 문풍(文風)을 지배하였고, 그리고 그의 문학에 대한 그 시기 문인들의 존경이 대단해서 동국 문장의 으뜸으로 삼기도 했다. 시에 있어서도 34권이나 되는 많은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 소재면에서도 인사(人事)·풍물(風物)·자연에 걸쳐 매우 광범위하고, 특히 어떤 상황에서 느낀 감정, 시사적(時事的)인 것, 민생(民生)에 관한 것까지 취급하고 있다. 『청구영언(青丘永言)』에 지금도 많이 읽혀지는 “백설(白雪)의 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流) 어 곳에 픠엿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노라”라고 하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이색의 문집은 태종 4년(1404) 아들 이종선(李種善)이 70권으로 편집해서 간행하였으나, 동왕 17년 당국의 검열에 걸려 15권이 압수 불태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로 저자의 시문이 너무 방대한 때문인지 손자 이계전(李季甸)은 문집 중에서 오․칠언고율시를 분문유취(分門類聚)하여 6권으로 정선(精選)하였고, 그의 아들 이봉(李封)은 서거정(徐居正)의 서(序)를 받아 『목은시정선(牧隱詩精選)』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정선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 1583년에는 7대손 충청도 관찰사 이증(李增)이 시(詩)를 제외한 문(文)만을 재편(再編)하여, 홍주(洪州)에서 『목은문고(牧隱文藁)』18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본(傳本)이 희귀해지자 인조 4년(1626) 10대손 현감 이덕수(李德洙)가 시고와 문고의 여러 산본(散本)을 수습하여 순천(順天)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중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간송미술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전질 또는 일부 영권(零卷)으로 소장되어 있다. 본 서예미학 자료집성의 저본은 1626년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표점 영인한 『한국문집총간』3에 수록된 것이다. 『목은집(牧隱藁)』에 실려있는 서예미학 원전자료는 『목은시고(牧隱詩稿)』권9 「금기서화 오속위지사예 작사절(琴棋書畫 吾俗謂之四藝 作四絶)」, 권13 「관법첩(觀法帖)」, 「독국청비(讀國淸碑)」 등 논서시 3편, 권19 「작알천태라잔자 궤상유필신구오육지 간득선자이지휴이래 음성일수록정(昨謁天台懶殘子 几上有筆新舊五六枝 揀得善者二枝携以來 吟成一首錄呈)」, 권28 「종리이상삭황모(從李二相索黃毛)」, 「록필어(錄筆語)」 등 붓을 예찬한 영물시 3편, 『목은문고(牧隱文稿)』권12 「사귀곡서화찬(賜龜谷書畫讚)」, 「상찰찬 병서(上札讚 幷序)」, 「서상찰보정설암대자권후(書上札補正雪菴大字卷後)」 등 공민왕의 어필에 대한 찬 3편, 권13 「서증도가후(書證道歌後)」의 조맹부 서예에 대한 제발, 권15 「한문경공[한수]묘지명 병서(韓文敬公[韓脩]墓誌銘 幷序)」, 「철성부원군이문정공[이암]묘지명 병서(鐵城府院君李文貞公[李嵓]墓誌銘 幷序)」 등 한수(韓脩)와 이암(李嵒) 등 고려 말을 대표하는 서예가에 대한 묘지명 2편 등이 있다. 논서시 가운데서 「금기서화 오속위지사예 작사절」 즉 ‘거문고ㆍ바둑ㆍ글씨ㆍ그림을 우리 세속에서 네 가지 기예(技藝)라 이르므로, 여기에 대하여 절구(絶句) 4수를 짓다’라는 시 중에서 글씨를 살펴보면 “뜬구름 같은 자체는 끝내 닮기 어렵거니와(浮雲字體竟難同) / 진초는 분분하게 모두 우월함을 떨치는데(眞草紛紛儘逞雄) / 살지고 파리하고 길고 짧음은 다 애교스러우나(肥瘦短長俱媚嫵) / 다만 육서의 범위를 벗어난 게 걱정스럽네(只愁跳出六書中)”라고 읊었다. 이 시에서 이색은 우리나라 풍속 중 ‘사예(四藝)’를 ‘서화금기(琴碁書畵)’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지식층의 보편적인 예술 인식이었다. 기․승구를 보면 자체는 뜬구름같이 쓰기가 어렵고, 진서와 초서가 섞여서 더욱 왕성하다는 내용이다. 전구에서 ‘비수단장(肥瘦短長)’이란 운필법의 하나이다. 서예는 문자의 형식미를 빌려 정감과 뜻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형식미의 요소에는 용필․결구․장법 등 다방면으로 나타난다. 용필에는 장로․방원․곡직․비수․대소․장단(藏露․方圓․曲直․肥瘦․大小․長短) 등이 있다. 그 중에 비수와 장단은 용필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하나의 필획에서 굵고 가늠이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길고 짧은가의 문제는 조형미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결구는 ‘육서(六書)’에서 도출되어 적중했는가의 근심이다. 요컨대 ‘육서’는 한자의 ‘조자법칙(造字法則)’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육서’란 여섯 가지 서체로 즉 서체의 총칭으로 볼 수 있거나, 또는 필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설문해자』의 서에서는 고문․기자․전서․좌서․무전․조충서(古文․奇字․篆書․左書․繆篆․鳥蟲書)를 ‘육서’라고 하였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금․기․서․화’가 고려시대에 ‘사예’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서예를 단순히 기예로만 보지 않고 ‘예(藝)’로 보아 ‘서(書)의 예술’로 인식하였다는 점이 한국서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는 기술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자유로운 정신세계까지를 포함한다. 즉 ‘기(技)’와 ‘기(氣)’가 동시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경지이다. 또한 이색이 용필 방면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비․수․장․단’과 ‘육서’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단순히 시의 소재 선택에서 진전하여 구체적인 필법의 인식접근까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이 이를 시에 수용한 사실은 서예의 지향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비평의 안목 또한 높았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공민왕의 어필에 대해 찬을 붙인 「사귀곡서화찬(賜龜谷書畫讚)」 즉, ‘귀곡(龜谷)에게 하사한 서화(書畫)에 제한 찬 병서(幷序)’에서는 공민왕의 서예를 평하여 “심중(深重)하고 온건(穩健)한 것이 마치 몇만 근이나 나가는 정종(鼎鍾)과 같고,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마치 아홉 번 구워낸 끝에 얻어지는 금단(金丹)과 같다(大字深穩如萬鈞鼎 變化如九轉丹)”라고 하였으며, 「상찰찬 병서」에서는 “서리 살짝 내린 듯 흰빛 펼쳐지매(輕霜鋪白) / 빛나는 이슬이 맑은 기운 더하나니(華露滋淸) / 붓끝이 한 번 휘돌아가는 곳에(筆鋒旋轉) / 종소리 퍼지고 경쇠로 거두었네(玉振金鳴)”라고 하여 서리가 내린 듯한 흰 종이 위에 자획(字畫)이 제대로 안배(按排)된 가운데, 이슬방울 같은 먹물이 번져 나가 더더욱 맑은 기운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민왕의 글씨가 서법을 집대성한 것처럼 완전무결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였다.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공자는 집대성한 분이시다. 집대성이란 종[鍾]과 같은 금의 소리가 먼저 퍼지게 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경쇠와 같은 옥의 소리로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라는 대목이 있다. 또한 「서상찰보정설암대자권후」 즉 ‘상께서 설암(雪菴)의 대자(大字)를 보충해서 써 주신 두루마리 뒤에 적은 글’에서는 공민왕의 어필에는 여섯 가지 아름다움의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상이 겸겸군자(謙謙君子)의 덕을 갖추었고 보면 그 도가 더욱 빛나게 되리니, 이것이 첫 번째 아름다움이다. 상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심경을 지녔고 보면 온갖 상서로움이 모여들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아름다움이다. 겸양하는 자세가 드러났고 보면 백성들이 앞으로 다투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아름다움이다.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모습을 보였고 보면 백성들이 교화를 따를 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아름다움이다. 지신사는 왕명을 출납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 이른바 후설(喉舌)의 신하이다. 그런 신하를 후하게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미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다섯 번째 아름다움이다. 자획(字畫)을 반드시 바르고 곧게 쓰면서 대소(大小)가 한결같이 되게 하였고 보면, 이는 또 전일(專一)함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인데, 전일함은 곧 성(誠)과 통하는 말이다. 성(誠)이 있고 난 다음에야 각 존재의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 성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덕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늘이든 사람이든 어떻게 이 성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여섯 번째 아름다움이다(上德謙謙則道光 一也 上心虛則善集 二也 示讓則民不爭 三也 右文則民知化 四也 知申事出納王命 所謂喉舌也 待之厚 其不允乎 五也 字畫必正必直 大小如一 又以示夫專一也 專一者誠 誠而後有物 大哉誠乎 天人其外此諸六也 有此六美)”라고 하여 총결하여 성(誠)사상적 관점으로 공민왕의 어필을 논하였다. 「서증도가후」에서는 조맹부의 서예를 평하여 “내가 듣건대, 오흥(吳興)의 조 공자(趙公子)는 풍류스럽고 정채(精彩)가 나는 것이 그의 필체와 똑같고, 한아(閑雅)하고 고묘(高妙)한 것이 그의 시와 똑같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묵적(墨跡)을 보니 그 인물 됨됨이가 어떠한지 대략 상상해 볼 수 있겠다(予聞吳興趙公子風流精彩如其字 閑雅高妙如其詩 觀此墨迹 槩可想見其爲人矣)라고 하여 ‘서여기인(書如其人)’의 관점에서 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신용남, 「해제」, 『목은고』, 『한국문집총간』3, 한국고전번역원. 김광욱, 「韓國의 論書詩 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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