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대처는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수상을 역임한 보수당 리더이다. 1959년 보수당의 일원으로 의회에 진출하면서 그녀의 정치 인생이 시작되었다. 1974년 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하자 이듬해 당수 선거에서 에드워드 히스(Heath, Edward)의 대항마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보수당을 이끌기 시작했다. 대처 시대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소련의 한 기자에 의해 이름 붙기 시작한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알려진 그녀는 자유시장경제와 정부 지출의 삭감 및 세금 감면을 통한 제한국가(Limited State) 주장과 국내외에서의 영국 민족주의 고무를 통한 이른바 대처리즘(Thatcherism)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녀는 탈규제, 유연한 노동시장,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조합의 권한 약화 정책 등을 통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선도자였다.
유럽통합과 관련해 그녀의 정책은 매우 모호하지만 대영제국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된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수상이 되기 전 그녀는 유럽통합에 대해서는 그렇게 헌신적이지 않았지만 영국이 공동체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국의 회원국 지위 문제를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노동당의 주장에 맞서 1975년 국민투표(Referendums)에서 공동체가 이미 강력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이 계속 공동체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입장은 1979년 유럽의회 직접선거와 영국 의회 선거에서 유럽공동체(EC)를 옹호하면서 그대로 드러났다.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 그녀의 외교정책은 유럽보다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에 의존하는 대서양주의(Atlanticisism)에 집중되었다. 그녀는 유럽공동체의 다른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때로는 유럽에서 고립주의적 입장을 취했으나 198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소위 “my money back”으로 알려진 공동체에 대한 영국의 예산 기여 문제와 공동농업정책(CAP)의 불합리성을 정상회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해 유럽의 지도자들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유럽공동체는 결국 1984년 퐁텐블로정상회담에서의 합의로 영국의 기여분의 일정 부분을 되돌려 주기로 결정하면서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대처는 역내시장(Internal Market)의 완성과 자유무역을 포함하는 공동체의 경제적 목표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정치-경제-통화 연합(Union)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녀가 추구하는 유럽공동체는 주권국가 간의 협력 형태였다. 그녀는 공동체의 목표가 로마조약이 명기한 단일시장(Single Market)에 한정되기를 희망했고 그 이상의 통합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따라서 유럽위원회를 포함하는 공동체 기구의 권한 확대에 관해서는 거부하였다. 그녀는 공동체 기구가 너무나 관료화되었고 대표성도 가지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유럽위원회가 초국가 유럽을 건설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관점은 유럽위원회 및 다른 11개 회원국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그녀의 유럽통합에 대한 개념은 샤를 드골(De Gaulle, Charles)의 유럽통합관과 매우 흡사하다. 그녀의 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은 드골의 그것과 유사했으며, 초국가주의(Supranationalism)가 아니라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형태의 유럽공동체를 희망했다. 따라서 유럽위원회나 유럽의회가 아니라 각료이사회가 공동체 정책결정의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책결정 방식 역시 다수결(Majority Voting)이 아니라 만장일치표결(Unanimity)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유럽통합관이 드골의 그것과 다른 유일한 점은 대서양주의와 유럽주의(Europeanism)에 있었다. 드골의 경우 유럽 공동외교안보정책(CFSP) 형성을 통해 미국이 배제된 유럽주의를 희망했으나 대처는 전통적인 영국의 외교정책 노선인 대서양주의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