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학 용어사전

다비드 벤구리온 דָּוִד בֶּן-גּוּרִיּוֹ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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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벤구리온
라틴어
דָּוִד בֶּן-גּוּרִיּוֹן‎
외국어
Ben-Gurion, David
자료정의
시온주의 지도자, 이스라엘 정치인, 이스라엘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 제1대~제8대 크네세트(Knesset) 국회의원
출생/사망
1886~1973
출생지
본문

벤구리온은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이스라엘 건국 초기를 이끈 이스라엘 국가 지도자이다. 벤구리온은 1986년 당시 러시아의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 프론스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비가도르 그루엔(Avigdor Gruen)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로 시온주의 단체였던 호베베이 찌온(Hovevei Zion)의 회원이었으며, 프윈스크 지역의 시온주의 운동의 핵심 인사이기도 했다. 이런 집안 배경으로 벤구리온은 십대 때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4세가 되어서는 지역 시온주의 청년 단체인 에즈라(Ezra)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03년 당시 최대 시온주의 노동 운동 조직이었던 포알레이 찌온 운동(Poalei Zion movement)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이다. 그는 1905-96년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에는 시온주의자라는 이유로 러시아 당국에 두 번이나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큰 화를 면하고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실패로 러시아내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벤구리온은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와 페타 티크바(Petah Tikvah)와 리숀 레찌온(Rishon le-Zion) 지역의 오렌지 농장과 포도주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후에도 포알레이 찌온(Poalei Zion)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결과 포알레이 찌온의 최고 기구인 상임 위원회에 선출되어 조직 강화 및 노선 정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유대 민족주의(Jewish nationalism)와 실용주의적 사회주의(pragmatic Socialism)를 이념적으로 통합시키면서 이 두 이념이 향후 시온주의 운동의 핵심 정치 이념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에레츠 이스라엘(Erez Israel)로의 정착은 시온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핵심적인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히브리어가 에레츠 이스라엘(Erez Israel)에서 유일한 공용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디스 정당 조직(Yiddish party organ)인 Der Anfang과의 협력도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 지역 신문인 아흐둣(Ahdut : Unity)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그의 성을 그루엔에서 벤구리온(Ben-Gurion)으로 바꾸었다.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벤구리온(Ben-Gurion)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시온주의자들 터키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였으나, 터키 당국은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반란을 획책한다는 혐의로 벤구리온 등 상당수의 시온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로 인해 벤구리온은 이집트로 추방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시온주의 운동의 동지인 벤제비와 함께 곧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본격적인 미국 시온주의 운동을 펼쳤다. 특히 그들의 주요 활동은 헤-할루츠(He-Halutz) 조직 건설에 집중하였는데, 이 조직의 주요 목적은 제1차 대전이 끝나면 이 조직을 통해 대규모의 미국 유대인들을 에레츠 이스라엘(Erez Israel)로 정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발포어 선언(the Balfore Declaration)이후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대인 부대가 창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18년 8월 이집트로 건너가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영국 RoyalF usiliers의 39대대(the 39th Battalion)인 유대 부대(Jewish Legion) 에 자진 입대하였다.

그는 그 부대에서 팔레스타인 노동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유대 지원병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향후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할 대규모의 유대 노동 운동 조직을 준비하였다. 이 조직은 벤구리온이 팔레스타인에서 향후 노동운동을 세력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벤구리온은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는 1919년 2월 야파(Jaffa)에서 개최된 포알레이 찌온(Poalei Zion: Workers of Zion) 제13차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시온주의 노동 운동에 참여해야 하며, 시온주의 노동 운동은 키부츠 운동(Kibbutz Movement)에 기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919년 그는 페타 티크바(Petah Tikvah)에서 아흐둣트 하아보다(Ahdut Ha-Avodah: Labor Union) 창립 총회를 개최하는 한편, 포알레이 찌온(Poalei Zion) 세계 대표단에 참여하여 에레츠 이스라엘(Erez Israel)의 향후 미래 청사진을 준비하는데 매진하였다. 1920년 패샷(Passover)절에 아랍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대폭동이 발발하자, 쉴로모 카프란스키(Shelomo Kaplansky)와 함께 런던으로 가서 영국 노동당(the British Labor Party)과의 협력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벤구리온은 향후 유대인 최대 노동 단체이자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의 최대 사회 단체인 히스타드루트(Hitarut: General Federation of Jewish Labor)를 추가 조직하고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1919년부터 향후 14년 동안 히스타드루트(Histadrut) 사무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영국 위임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유대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생활 여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전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애초에 히스타드루트(Histadrut)를 정치 및 경제 조직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 팔레스타인 정착을 주도하는 핵심 기관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농업뿐만 아니라 그 외 각 종 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유대 노동자들의 재정 및 복지 서비스까지도 제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대 초반 히스타드루트(Histadrut)와 소련 노동 조합 및 경제 단체들과의 경제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벤구리온은 이를 위해 1923년 소비에트 연방(the Soviet Union)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이런 노력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0년대에 들면서 시온주의 운동(the Zionist Movement)와 이슈브(the yishuv) 내의 비 사회주의 중산층들이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제에브 자보틴스키(Ze'ev Jabotinsky)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운동(The Revisionist Movement)진영은 벤구리온을 중심으로 한 노동 진영의 사회주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한편, 히스타드루트(Histadrut)와의 단절을 밝혔다. 이에 대해 벤구리온은 세계 시온주의 기구(the World Zionist Organization)내 노동 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양한 시온주의 노동 정당 및 단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1930년에는 아흐둣트 하아보다(Ahdut ha-Avodah)와 하포엘 하-짜이르(Ha-Poel ha-Zair)를 통합하여 마파이(Mapai)당을 출범시켰다. 벤구리온은 시온주의 운동(the Zionist Movement)내부에서 수정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마파이(Mapai)를 기반으로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 제18차 시온주의 총회(Zionist Congress)에서 사회주의 노동 진영은 50%에 가까운 대표 의석을 차지하면서 다수 세력이 되었고 벤구리온은 유대기구(Jewish Agency)지도부를 이끌게 되었다. 벤구리온은 시온주의 운동(The Zionist Movement)의 분열을 막기 위해 양 진영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일종의 임시협정을 자보틴스키(Jabotinsky)와 체결을 시도하려고 하였지만,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내부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1935년 벤구리온은 the Zionist Actions Committee 및 the Jewish Agency의 의장으로 선출되고, 그 이후 향후 11년 동안 the Zionist Organization의 대표인 챠임 와이즈만(Chaim Weizmann)과 함께 시온주의 전체 운동을 이끌었다. 비록 이 두 지도자들 사이에 시온주의 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갈등과 대립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시온주의 운동의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갔다.

특히 벤구리온은 아랍인들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930년대부터 아랍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양 민족간의 협력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이런 협상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양 민족간의 평화적 협상을 통한 해결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의 팔레스타인(Palestine)위임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간의 크고 작은 유혈 충돌사태들은 벤구리온에게 있어 유대민족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 기간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자 팔레스타인 아랍 공동체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특히 1930년대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유혈 사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뀌게 하였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유임 통치 정부는 그 동안 보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동조적인 입장 대신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민과 정착을 제약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벤구리온은 영국의 이런 입장 변화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UN) 총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분할 안이 통과되고 그 이듬해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대한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모든 조건에서 열세 상황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이해 벤구리온은 전쟁자금 마련에서부터 무기 구입 및 군 인력 모집까지 전쟁의 모든 임무들을 책임지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벤구리온은 전쟁기간 동안 실제 전쟁 전략 및 세부 전술까지 책임지고, 이스라엘 국가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가 이스라엘 독립 이후에도 정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제1차 중동전쟁 또한 그가 보여준 지도력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여러 정치 분파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각 정치 분파 별로 운영되던 유대인 자치 무장단체들을 강압과 설득을 통해 무리 없이 해체시킴과 동시에 통일된 이스라엘 군(IDF: Israel Defense Forces)을 성공적으로 건설하였다.

독립 이후 세워진 임시 정부에서 총리와 국방장관으로 선출되었는데, 1963년 그가 정계를 영구 은퇴하기 전까지 총 8개의 연립 정부를 이끄는 동안에도 총리직과 국방장관직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국가건설 이후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포하기도 하였으나 실제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한 국가는 많지 않았다. 이런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국내적으로 국가통제주의(Statism: Mamlakhtiut)를 추진하는 한편, 국제적으로 이스라엘 생존권과 안보를 위해 그의 모든 정치적 노력들을 집중하였다.

1953년 12월 정계은퇴를 선언 후 키부츠 세데 보케(Kibbutz Seder Boker)에서 키부츠 생활에 잠시 하기도 하였으나, 1954년(확인요망) 2월에 발생한 소위 "재앙(mishap: esek bisk)"이라고 불려진 이집트 내 이스라엘 첩보활동 사건은 그가 다시 정계로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이집트 내 유대계 이집트인들을 포섭하여 이집트 내 미국 대사관 및 서방 민간 건물 폭파 작전 및 이스라엘 첩보망을 구축하려다 이집트 당국에 발각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고립 상황을 맞게 되는데, 1955년 4월 인도 반둥에서 개최된 비동맹 회의(the Bandung Conference of Nonalignment States)에서 공식 회원 국가로 등록이 거부되었으며, 1955년 체코-이집트간 무기협정 체결은 이스라엘 안보위협에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국가 안보 위기 상황은 그의 정계복귀와 정치 활동 재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the Suez Canal) 국유화로 인해 발생한 1956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 전쟁기간 동안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The Sinai Penusula)에서 1957년 완전철수 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다자간 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한 벤구리온은 국제적인 다자간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데 집중하였다. 1960-62년 사이 벤구리온은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John Keneedy)*와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대미 관계 개선을 꾀하였으며, 서독과 프랑스 등 서구 유럽국가들과의 대외 관계를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953년 라본 사건(The Lavon Affair)을 책임지고 물러났던 국방 장관 에쉬케나지 피하스 라본이 (Pinhas Lavon)이 1960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재조사를 요구하였다. 라본은 당시 벤구리온의 키즈(Kids)로 불리었던 국방부 사무총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와 국 참모총장 모셰 다얀(Moshe Dayan)이 벤구리온의 승인 하에 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조사를 맡은 국가조사위원회는 라본이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벤구리온은 국가조사위원회의 결정에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라본의 정치 사면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벤구리온은 마파이당을 탈당해 시몬 페레스와 모셰 다얀을 이끌고 라피당(Rafi)을 창당했다. 그러나 라피당은 1965년 총선에서 에상보다 훨씬 적은 8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1967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벤구리온의 뒤를 이어 마파이당 총리가 된 레비 에쉬콜(Levy Eshkol)은 라피당과 베긴의 헤루트당(Herut)이 참여한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벤구리온 또한 라피당의 참여를 인정함으로써 연합정부는 그 후 3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라피당의 시몬 페레스와 모셰 다얀은 다시 1968년 마파이당으로 복귀하게 되고 그 해 마파이당은 라피당, 아흐둣-하아보다(Ahdut-HaAvoda)당과 합쳐 노동당으로 합쳐졌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노동당에 합류하는 대신 자신의 정당인 레쉬마 맘라크팃(Reshima Mamlakhit: National List)를 창당하였다. 그러 1969년 치루어진 총선에서 겨우 4석을 차지함으로써 벤구리온의 정치적 위상은 급속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레쉬마 맘라크팃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리쿠드당(Likud)에 통합되어 정치 무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벤구리온 또한 1970년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의 길고 긴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벤구리온은 은퇴 후 네게브 사막(the Negev Desert)의 키부츠 세데르 보케(the Kibbutz Seder Boker)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보내다 1973년 12월 그의 삶을 마감했다.

이스라엘 건국사는 벤구리온의 개인사와 일치한다고 말할 정도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에 기여한 공헌은 지대하다. 벤구리온의 탁월한 지도력은 이스라엘 국가가 성공적으로 출범하고 안착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스라엘 사회 각 영역에는 벤구리온이 심어놓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인프라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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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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