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메타범주명(한글)
인간과 정서
메타범주명(러시아어)
Человек и эмоция
메타범주명(그 외 언어)
Human and emotion(영어)
연관 핵심코드
가족; 민족; 사랑; 언어; 여성; 영혼; 운명; 자유
본문

 특정한 문화나 사회에 의해서 규정받기 이전의 존재로서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보편적 특징이 있다. 과거에는 그리고 지금도 흔히 감정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내적 특징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태도의 반영일 뿐이다. 존재의 보편적 차원에서 엄밀히 보자면, 감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식물들, 심지어 하늘, 땅, 바다, 산, 강, 호수, 바람, 비, 눈 등과 같은 무생물적 존재들에게도 깃들 수 있는 보편적 실재이다. 물론 존재의 이러한 보편적 차원에서의 감정이란 언어나 문화 이전의 것으로서, 우리 각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소통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호적으로 표상되거나 언어적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감정적 교감과 소통이 지난하거나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리고 마는데, 이유는 당연히 아직까지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상호공통적인 기호들의 집합이나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정이 그 자체로 존재에 보편적인 실재라는 사실은 통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그리고 아주 간헐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적 교감이나 소통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기저의 역할을 한다. 가령,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이의 기쁨을, 마주치는 어떤 새의 기쁨을, 어떤 풀이나 꽃, 나무, 심지어 산이나 강의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 실재로서 ‘기쁨’이 깃들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본원적 차원에서 감정의 보편적 존재가 확인된다면, 인간이 언어적으로 개념화하고 문화적으로 표상하는 감정들은 그 내용상 보편적인 것과 개별 언어-문화권에 한정되는 특수한 것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화자가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과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화자가 “радость (≒기쁨)”라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보편적 실재로서 ‘기쁨’이라는 감정의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 어휘 “기쁨”과 러시아어 어휘 “радость”가 의미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만큼 양자 사이의 어떤 내용적 차이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기쁨”은 “숨이 막힐 듯한 기쁨, 기쁨에 온 몸이 짜릿하다, 기쁨에 미친 듯이 날뛰다, 마음 깊은 곳의 차분한 기쁨, 영혼의 말없는 기쁨 ...” 등과 같은 용례에서 보듯, 육체적으로 보다 강하게 느껴지고 외적으로 아주 강렬하게 표출될 수도 있는 감정뿐만 아니라 또한 육체 쪽보다 마음 속에서 훨씬 더 잘 느껴지는 감정까지도 지칭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러시아어의 “радость”는 지칭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서, ‘외적으로는 아주 강렬하게 표출되지 않는, 그리고 육체 쪽보다는 감정의 내적 장소에서 보다 잘 느껴지는 기쁨’을 가리킨다.[후주1] 이처럼 간단한 비교에서도 보듯, 개별 언어-문화권에서 감정의 언어적 개념화는 내용적으로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과 상대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함께 결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 모든 개별 언어-문화권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감정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어떤 감정들이 보편적일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과거의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은 대부분 통념적이거나 주관적인 성찰에 근거해서 이러저러한 보편적 감정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면, 그중에서 방법적으로 가장 명확한 것은 기하학적인 연역에 근거해서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제시하고 있는 “욕망(cupiditas)”, “기쁨(laetitia)”, “슬픔(tristitia)”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감정일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다른 감정들은 이 세 가지 기본 감정들에 다양한 한정들이 부가되면서 파생되는 복합적인 경우들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생각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는 경험적으로 훨씬 다양한 언어-문화권들의 관찰을 통해서 보다 사실적인 가정을 확립해 볼 수 있다. 즉, 상이한 개별 언어-문화권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감정 어휘들의 관찰과 검토 및 대조와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기본 감정들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화되기 이전 차원의 보편적 실재로서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여섯 가지의 감정들이다.[후주2] 적어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여섯 가지의 기본 감정들 각각에 대해서 우리는 일종의 가정으로서 본질에 관한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단 그러한 정의는 언제든지 필요한 경우에는 보다 나은 형태로 수정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개별 언어-문화권에서도 기본 감정들을 가리키는 대표 명칭들로서 감정 어휘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러시아어에서는 “желание(≒욕망)”, “радость(≒기쁨)”, “печаль(≒슬픔)”, “любовь(≒사랑)”, “гнев(≒분노)” 그리고 “страх(≒공포)”를 이 언어-문화권의 기본적인 감정 어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어휘들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양태의 욕망들이나 기쁨들, 슬픔들, 사랑들, 분노들 그리고 두려움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범주 명칭들로도 기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의미 속에는 상응하는 보편적인 기본 감정의 본질적인 특성과 더불어 거기에 부가되는 고유한 러시아 언어-문화권적인 한정도 담겨 있다. 가령, 인간에게서 보편적 감정으로서 ‘기쁨’이란 ‘어떤 것을 원인으로 해서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부터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으로 나타나는 비물질적 실재’라고 정의한다면, 러시아어 어휘 “радость”의 의미에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기쁨’의 이러한 보편적 특성과 더불어 ‘외적으로는 아주 강렬하게 표출되지 않는, 그리고 육체 쪽보다는 감정의 내적 장소에서 보다 잘 느껴지는 기쁨’이라는 이 언어-문화권에 고유한 한정도 담겨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문화권 내에서 이 같은 성격을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 어휘들로 지칭되고 개념화되는 감정들은,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들이 개별 언어-문화권의 특수성들에 따라 일정하게 한정되는 양태로 나타나는 바로서의 감정들은 이어서 개별 언어-문화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세분화되면서 파생 감정들을 형성한다. 가령, 한국어 문화권 내에서는 같은 ‘기쁨’의 감정이라도 기본 감정과 더불어 거기에 이러저러한 한정들이 부가된 “희열”, “광희”, “환희”, “황홀”, “열광”, “즐거움”, “흡족함” ... 등과 같은 파생 감정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감정들 및 파생 감정들은 종종 해당 언어-문화권의 사회적 개념들과 결합하면서 실천-윤리적 관념들을 형성하기도 한다. 가령, 한국어 문화권 내에서 “모성애”, “공경”, “명예”, “출세”, “성공”, “겸손”, “애국심”, “애향심”, “민족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 “족벌”, “학벌”, “일류병”, “서열화” ... 등과 같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천-윤리적 관념들의 기저에는 이러저러한 기본 감정들이나 파생 감정들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감정은 개별 언어-문화권 안에서 보다 구체적인 한정을 받으면서, 또 여러 가지 양태로 세분화 되면서, 그리고 종종 사회적 개념들과도 결합하면서, 사회적 차원이나 집단적 차원에서 문화적 특수성이 구축되는 데 핵심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통념적으로, 감정이란 가장 구체적인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인간 개개인 차원의 문제라고 여겨지는 데 말이다. 물론 광장의 기쁨, 분노, 슬픔 등과 같은 집단적인 감정의 경우들도 있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들이 느끼는 구체적인 감정들이 서로 연관된 유사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꺼번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즉 감정과 문화적 특수성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이 “정서”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에는 모호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통상 한국어에서 “정서”는 “감정”과 종종 동의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다음과 같은 예들에서처럼 차별화되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 “우리 동네의 정서는/*감정은 너희 동네의 정서와/*감정과 맞지 않는다”, “한국인의 정서와/*감정과 러시아인의 정서는/*감정은 다르다”, “이 사건에 대해서 느끼는 한국인의 *정서와/감정과 러시아인의 *정서/감정”, “이 사건에 대해서 느끼는 철수의 *정서와/감정과 영희의 *정서/감정” ... 등등. 여컨대 이러한 용법상의 차이가 보여주는 것은 “정서”는 ‘개인 이상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감정적 성향 일반’이라는 의미도 갖지만 “감정”에는 그러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후주3] 따라서 “정서”라는 단어가 갖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 기반해서, 우리는 개인 이상의 층위에서, 요컨대 그룹, 집단, 사회, 그리고 언어-문화권의 층위들에서 특정한 감정의 정서적 차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특정한 감정의 정서적 차원이 언어-문화권의 층위에서 일정하게 공통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나아가 전형적으로 패턴화될 때, 우리는 그 감정과 관련된 토포스(topos)들과 문화코드들을 보게 된다. 토포스가 특정한 언어-문화권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다소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문화적 관념이라면[후주4], 이로부터 더 나아가서 문화코드는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행동양식을 선택하고 따르는 데 준거가 되는 문화적 지침의 성격이 강하다. 예를 들면, 남한 사회에서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원망이나 후회가 섞인 해소될 수 없는 슬픔’을 가리키는 “한”이라는 감정이 정서적 차원에서 중요한 토포스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후주5], 이와 관련해서 자신이 겪은 한스러운 것을 자신의 가족이나 혹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다른 사람들이 겪도록 하지 않게 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한풀이”라는 행동 양식은 일종의 강력한 문화코드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는 그 같은 “한” 대신에 “울화”나 “홧병”의 토포스가 부각되는 반면, 이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전형화된 문화코드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편에서는 “이해와 위로”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화코드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적절한 행동 양식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 당사자의 편에서는 적합하게 대처하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는 문화코드가 사회적으로 아직 없는 것이다. 단지 감정의 당사자를 위해서 “화풀이”라는 다소 일반적인 문화코드는 있지만, 이것은 “울화”나 “홧병” 같은 아주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의 해소나 적절한 대처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한편 다소 유사하게, 러시아 언어-문화권에서는 ‘극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그래서 때로는 육체적 고통까지도 동반하는 슬픔’을 의미하는 “тоска(≒애수, 우수, 비애)”가 소위 민족적 정서를 나타내는 핵심적인 토포스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후주6]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세 가지 문화코드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염없는 슬픔으로부터 나오는 “일상적 무기력함”이며, 다른 하나는 이 지상에는 없는 천상의 것에 대한 막연한 갈구로 이어지는 슬픔으로부터 연유하는 “종교적인 종말론적 태도”이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한 강렬한 슬픔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인간 삶의 비극성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미학적 태도”이다. 물론 러시아 언어-문화권에 속하는 구성원들 각자는 개성적 개인으로서 ‘슬픔’의 이 세 가지 문화코드들 중에서 어느 하나나 둘을 혹은 셋 모두를 따르는 행동 양식을 보여주며, 그 중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개인의 경우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통상 비정상적인 경우로 간주된다.[후주7] 왜냐하면 러시아 문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전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을 느끼는 못하는 마음과 영혼이란 이미 죽은 것, 또는 비정상적인 상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의 정서적 차원은 직접적으로 감정의 토포스들이나 문화코드들의 형성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언어-문화권의 다른 사회적 개념들과 결합하면서 감정이 혼합된 실천-윤리적 관념의 토포스들이나 문화코드들의 구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어 문화권 내에서 “모성애”, “애국심”, “겸손”, “명예”, “출세”, “학벌”, “서열화” ... 등등과 같은 수많은 실천-윤리적 관념들과 관련된 토포스들과 문화코드들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어 문화권 내에서도 가령 “воля(≒거침없는 자유)”, “наши-чужие(≒우리들-남들)”, “правда(≒진실)”, “смирение(≒순종적 겸손)”, “судьба(≒운명)” ... 등과 같은 다양한 실천-윤리적 관념들과 관련된 토포스들이나 문화코드들을 볼 수 있다.[후주8] 감정의 토포스들과 문화코드들이 해당 언어-문화권에 속한 구성원들의 일반적인 정서적 성향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감정이 혼합된 실천-윤리적 관념들과 관련된 토포스들과 문화코드들은 그들의 사회적 행동 양식의 문화적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은 이처럼 개별 언어-문화권의 층위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복합적인 양상으로 토포스화 되고 문화코드화 되면서 개별 언어-문화권의 상대성과 특수성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개별 언어-문화권의 상대성과 특수성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미리 부과되어 있는 문화적 조건이며, 이것에 대해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원칙적으로 상이한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먼저 상반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상정해 본다면, 자신에게 미리 부과되어 있는 문화적 한정들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따르는 입장과 이와 정반대로 그러한 것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두 극단적인 입장들 중의 어느 하나만을 언제나 일관되게 고수하는 개인의 경우란 현실 속에서,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는 발견하기가 지극히 힘들 것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 두 극단 서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다소 치우치거나 중간에 위치하면서 이러저러한 절충적인 방식의 태도를 취하는 개인의 무수히 다양한 경우들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적 차원에서는, 미리 부과되어 있는 문화적 한정들과 사회적 개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것을 소위 보편주의를 표방하는 합리주의적 준거 틀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언어-문화적 상대주의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렇지만 문화와 개인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되는 이 같은 두 관점들은 모두 부분적인 설명력만을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정서적 차원에서 문화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인간 개개인에게 있어서 감정의 보편성이라는 차원은 명백히 존재한다. 그리고 보편적 차원의 감정이 특정한 언어-문화권의 특정한 사회 안에서 특정한 상황과 결부되어서 특정한 개인에게 있어서 최종적이고 유일한 구체적인 것으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어떤 문화적 한정이 개입하고 작용하는 것 또한 명백하다. 따라서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을 다룰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그것이 갖는 개별 언어-문화권적인 상대적 특수성에 대한 기술에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특수성이 인간 감정의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를 해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갖는 다양한 관념들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구성하고 행하는 다양한 제도적, 실천적 행위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서구의 계몽주의로부터 유래한 세속적 합리주의가 세계화의 중심부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곳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와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사람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동기가 궁극적으로는 이성적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체적으로 온갖 경우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따져보면, 여전히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이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하거나 심지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가령, 한 언어-문화권의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소위 “민족 정서”나 “언어 감정”과 같은 것들은 여전히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차원에서 중요한 구성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도 맞물려서, “우리 대 그들”, “시민 대 비시민”, “다수자 대 소수자” 등과 같은 구분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공포, 배척, 멸시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집단화시키면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때때로 정치적, 제도적으로도 차별과 배척을 낳고 있다. 세속적 합리주의의 정치적 원칙은 타인의 인간적 권리와 자유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시민적 덕에 근간을 두면서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사회적 행위들의 합리성을 구축해나가는 것인데, 이 원칙은 인간의 “같음 대 다름”의 다양한 사회적 현실들로부터 유발되는 정서적 차원의 부정적 측면들을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사정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세속적 합리주의가 인간의 올바른 사회적, 시민적 형성에 있어서 감정보다 이성에 우위를 두는 입장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인간의 올바른 생각과 행동은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가능해지며, 거기서 감정의 역할이란 만일 좋은, 긍정적 감정들이라면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보다 강화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현실 속에서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결정의 순간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우세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예기치 않게 많이 있다. 따라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많은 다양한 실제의 사정들을 직시하고 고려한다면, 인간에게서 감정보다 이성을 전적으로 우위에 두는 사회적 체계의 구성적 기획이나 가치론적 입장은 앞으로도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인다. 대안적 기획이나 입장은 당연히 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과 양자 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새롭게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에게서 감정을 단순히 개인적 층위의 현상이나 이성에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의 정서적 차원을 인간 현실의 총체화라는 관점에서, 다시 말해서 개인의 실존을 한정하는 사회적, 언어-문화적 제반 조건들과 그리고 개인들이 바뀌는 만큼 이러한 조건들도 바뀌는 구성적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총체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명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과 고찰에서는 당연히, 본 문화코드 사전의 작업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 감정의 정서적 차원이 어떻게 개별 언어-문화권에 고유한 감정적 양태들로 나타나는가를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기술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언어-문화권에 고유한 “자유”, “민족”, “운명”, “영혼”, “언어” 등과 같이 일견 감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관념들의 문화코드 안에도 어떠한 정서적 차원과 계기들이 내포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주1] 이기웅, <러시아어와 감정의 토포스>, 경북대학교출판부, 2016, p. 183 이하 참조.
[후주2] 상동, p. 173 이하.
[후주3] 한국어의 “감정/정서”의 구분과는 다르지만,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분이 있다 - “Gefühl/Emotion”, “чувство/эмоция”, “feelings/ emotion”, “sentiment/émotion”. 그런데 동일하게 라틴어로부터 유래된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독일어의 “Emotion”, 러시아어의 “эмоция”, 영어의 “emotion”, 그리고 프랑스의 “émotion”이 일상어적인 용법에서 서로 반드시 동일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 Anna Wierzbicka, “Everyday conceptions of emotion: a semantic perspective”, J. A. Russell et al. (eds.), Everyday Conceptions of Emotion, Dordrecht,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5, pp. 17-47. 그렇지만 학술어에서 ‘감정 일반’이라는 의미로는 대체로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를 쓴다는 공통점도 있다. 가령, “psychology of emotion”, “philosophy of emotion” ... 등등. 이 경우 한국어로는 “감정의 심리학”, “감정의 철학” 등과 같이 번역될 수밖에는 없다.
[후주4] 토포스에 관한 일반 이론 및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할 것 – 이기웅, <러시아어와 감정의 토포스>, 앞에서 인용.
[후주5] 상동, pp. 61-62 참조.
[후주6] 상동, p. 200 이하 참조.
[후주7]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것을 참조할 것 – Anna Wierzbicka, Semantics, Culture, and Cognition,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92, pp. 31-63.
[후주8] 여기서 언급된 러시아어 토포스들의 구체적인 분석과 설명은 앞에서 인용된 이기웅의 책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