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가족]
러시아의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가장이 집안문제의 전권을 지니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기반을 지닌다. 러시아인들은 예로부터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는데 대가족의 구성원에는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까지도 포함되었다. 30~50여명의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대가족은 가장의 지휘 하에 공동의 경제활동을 꾸리며 살았다(코스벤, 『가족 공동체와 부계친족명칭』 참조).
가족 공동체의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가장의 몫이었다. 결혼한 아들을 분가시키거나 재산을 나누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자식은 분가할 권리를 지니지 못했는데 마을 공동체는 분가를 하려는 자에게 가족의 반목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죄를 묻기도 하였다. 가장에 대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의 존경과 복종은 절대적이었으며 이를 행복한 가족의 전제 조건으로 여겼다.
기독교 교리는 가부장적 가족 형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성인들의 형상과 복음서 교리를 통해 훌륭한 남편상과 아내상이 마련된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훌륭한 남편의 이미지를 선한 기독교인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식솔들의 도덕성을 책임지는 자로 고착시키고, 훌륭한 아내의 형상은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자식의 양육에 힘쓰며 오로지 가정의 일에만 혼신을 다하는 모습에서 찾았다.
러시아 가부장 사회에선 노인에 대한 태도도 특별했다. 노인은 집안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결정권자로서 가정과 사회 일을 주도하며 전통을 보존하고 전수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경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공동체의 의견을 주도해나가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노인들이 길을 지나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존경의 표시로 길에서 잠시 비켜섰다(베르딘스키흐, 『러시아의 시골』 참조).
러시아 사회에서 가부장적 대가족 형태는 19세기말까지 비교적 잘 유지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에서 대가족 형태가 상대적으로 길게 지속된 원인 중 하나로 농민 대가족이 조세 단일체였다는 점이 손꼽힌다. 농노제가 존재하던 시대에 정부와 지주들이 앞장서서 대가족의 보존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농노제 시대에 잘 유지되던 가족 공동체가 농노제가 폐지되면서 차츰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코발렙스키, 『가족과 재산의 출현과 발전』 참조).
이와 함께, 러시아 사회에서 대가족 제도가 오랫동안 지속된 데에는 러시아인들의 세계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시대부터 중세 사회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에게는 개인주의의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에게 가족, 집단, 공동체 밖의 개인은 상상하기 어려웠으며 개인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위험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사회의 전통 가족도 가부장적 기반을 지닌다. 유목민의 전통 가족은 혈연관계로 묶인 대규모의 씨족 연합을 토대로 하는데 이는 유목민의 생활 조건과 경제 활동에 부응하여 발전한 가족 형태였다. 이러한 가부장적 대가족 형태가 19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유목, 반유목민들 사이에서 널리 나타났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가족관계와 친족관계에서는 옛 대가족 공동체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대가족 공동체는 해체되었지만 그 특성들이 오늘날 친인척 간 끈끈한 유대관계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크고 작은 집안 행사들에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이 대거 참석한다든지 가계에 큰 부담이 되는 칼림의 마련에 친척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주기도 하며 또한 일가친척을 위한 공동의 매장지가 존재하는 것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아브람존, 『키르기스인과 그들의 민족, 역사, 문화적 관계』 참조).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늑대가 먹어치운다”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중앙아시아 사회에서는 대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 가정을 일구는 것을 전통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생전에 자식의 분가는 완전한 성격을 지니지 못한 채 단순히 ‘솥’만 분리되는 모습이었다. 즉 집 혹은 방이 분리되어 있고 음식을 따로 해먹는 정도였고 가정 경제의 대부분은 여전히 가장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대가족으로부터 분리된 가족 일원들도 경제를 따로 꾸리긴 하지만 상호 긴밀한 관계를 평생 유지한다. 다양한 의례, 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하고 참석한다. 가족, 친지, 이웃들이 다양한 집안일, 농사일, 가정 행사를 서로서로 돕는 ‘하사르’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대가족 전통의 흔적은 한 가정의 대소사가 그 집안만의 행사로 머물지 않고 친척, 지인, 마을사람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특히 할례 의례인 ‘수낫 토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의례는 종교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의 가정 행사를 공동체에 개방하는 사회적 의무이기도 했다.
가족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공동 경제를 꾸려나가기 힘든 경우와 같이 불가피하게 분가가 이루어지는 경우, 중앙아시아 사회에서는 보통 맏아들을 분가시키는 관습이 존재한다. 이때 분가 의례를 치르는 전통이 있는데 친척, 이웃들을 초대하여 가장이 자식의 분가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고 기도를 올리면 참석자들이 동의를 표하고 축복의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분가 의례를 치른다.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부모 부양의 책임은 막내아들에게 돌아간다. 막내아들은 일반적으로 독자적인 경제를 꾸리지 않고 아버지 집의 계승자로 남는다. 부모 부양에 대한 책임과 부모의 사망 후 장례 절차와 추모의례를 책임지는 대신 유산 상속의 권리도 지닌다. 현대 사회에서는 집안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과거 사회에서 이 관습은 상당히 엄격히 지켜졌다고 한다(카바코바, 「현대 카자흐 가족의 가치와 전통」 참조).
중앙아시아 사회의 가부장적 가족 문화는 집안의 윗사람에 대한 존경의 태도를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집안의 가장이자 혈통을 이어나가는 존재로서 아버지, 아궁이를 지키고 전수하는 자로서 어머니, 그리고 가족의 평안과 번영을 지켜주는 존재로서 조상혼에 대한 존경심을 배워나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엄격한 가부장적 가족의 관습에 따라 규율되었다. 자식은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고 미성년의 자식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자식의 재산도 아버지가 관리했다. 이렇게 가부장적 가정에서 가족의 소유물에 대한 절대권은 가장에게 속했으며 따라서 가족의 분가와 재산의 분할은 가장의 동의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가부장적 가족 문화는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미래의 결혼을 약속하는 관습을 낳았다. ‘베식 커다(бесiк құда)’(‘요람 사돈’)라 불리는 관습에는 결혼을 포함해 자식의 미래가 부모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오랜 인식이 담겨있다. 이 관습은 전통적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도 지닌다. 부유하고 명망 높은 가족은 이른 결혼을 통한 친인척 관계의 확대와 사회적 권위의 신장을 노리고, 가난한 가족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칼림을 모으고 조금씩 지불하기 위해 이른 결혼을 약속한다(아가르코바&메젠체바 「카자흐 민족문화에서 ‘가족’ 관념」 참조).
[집]
가부장적 가족 형태가 정착되면서 집은 단순히 거주 장소로 머물지 않고 가족의 가치를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러시아 사회에서 집의 가치와 의의는 특히 ‘우사디바(усадьба)’와 ‘조상 대대로 전수된 집(родовой дом)’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독특한 러시아 단어 ‘우사디바’는 조어적 형태에 따르면 정원 옆의 집, 곧 정원이 딸린 저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정원과 저택이 있는 영지를 의미한다. ‘우사디바’나 ‘조상 대대로 전수된 집’과 같은 개념에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 개념을 넘어서 선조, 전통, 관습에 대한 표상이 담겨있다.
톨스토이가 거주했던 ‘우사디바’. 1921년에 11월에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하모브니키’로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