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핵심코드명(한글)
민족
핵심코드명(러시아어)
Народность
핵심코드명(그 외 언어)
Nationality (영어); Millat(우즈벡어); Ұлт(카자흐어); Улут(키르기즈어)
메타범주명(한글)
인간과 정서
연관 파생코드
토착화; 쥬즈(1); 대탄압
개요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국가로서 여기에 거주하는 160개에서 190개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은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민족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및 벨로루시인 등 동슬라브 민족이지만, 그 이외에도 카프카즈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 또한 러시아의 민족관계를 이야기 할 때 빠뜨릴 수 없다. 특히 가장 주류민족인 러시아인만 하더라도 소련연방 시기에 전체 공화국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들의 지위 또한 다양한 변천을 거쳐왔다.
소연방이 태동할 시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민족토착화 정책으로 이에 따라 각 공화국의 토착민족의 주민, 언어, 생활양식 등을 복원함으로써 러시아인과 각 공화국 토착 민족간의 관계를 완화시키려는 시도였으나, 1930년대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다시금 러시아 민족 위주의 정책이 거의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구소련 연방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였던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중앙아시아인데, 구소련 시대에 러시아인들이 가장 우월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현재 그 상황은 국가마다 상당히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중앙아시아 토착민족은 주로 이란계인 타지크민족과 튀르크계통의 민족인 카자흐인, 우즈벡인, 키르기즈인, 투르크멘인 등으로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1991년 중앙아시아 각국이 독립하면서 이들 토착민족이 주류민족으로 등장하면서 각국의 민족관계는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의 경우 다른 민족끼리 혼거하는 경우가 있고, 이러한 혼거지역에서 민족갈등이 잦은 빈도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페르가나 지역으로 중앙아시아 전체 인구의 약 20%가 거주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 및 수자원 문제 등으로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갈등은 소련연방시기 임의적인 국경선 획정 때문에 발생한 경우가 많지만, 여전히 인접국가인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이슬람 원리주의의 창궐과 맞물려서 민족문제의 해결이 그렇게 간단히 않음을 보여준다.
기원과 개념
[러시아]

한국어로 모두 민족이라는 것을 뜻하는 용어에는 народность와 национальность가 있다. народность라는 용어는 러시아어로 인민을 뜻하는 народ(people 또는 Volk)에서 연유한 단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용어는 национальность와 혼용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народность와 национальность는 조금 다른 의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사리온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ii)에 따르면 народность라는 용어는 대중들의 공유된 언어와 문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민족의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национальность라는 용어는 조금 더 발달된 민족 문화양식을 함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민족의식(national consciousness)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벨린스키는 национальность가 내포하고 있는 민족문화는 народность가 지니고 있는 민중문화보다는 한 차원이 높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Hirsch, 2005: 43-44).
사실 러시아라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국토가 가장 넓은 국가이기 때문에 그 속에 거주하는 민족에 대한 관심 또한 어느 국가에 못지않게 중시되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민족은 160~190개 이상으로, 모든 민족을 포함한 전체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볼 때 1억4천3백만명이다. 가장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는 민족은 러시아인으로 전체인구의 79.8%이며 그 다음으로는 타타르인 (3.8%), 우크라이나인(2.0%), 바쉬키르인(1.15%), 츄바쉬인, 체첸인 및 아르메니아인 등이다. 러시아의 민족을 언어측면에서 구분할 때는 러시아 슬라브족을 포함하는 인도유럽어족이 8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튀르크어족(8.36%), 코카서스어족(3.3%), 피노우랄어족(1.91%), 몽골어족(0.43%)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소련 연방시기에는 가장 많은 비율의 민족은 주로 동슬라브 민족으로서 러시아인이 (50.8%), 우크라이나인(15.5%), 우즈벡인(5.8%), 그리고 벨라루시인(3.5%) 등의 순서로 되어 있어, 러시아인, 우크라이아임 및 벨라루시인을 포함한 동슬라브인의 비율이 거의 70%를 점하고 있었다.
동슬라브 민족의 민족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동슬라브인들은 기원전 1세기 이후 다양한 민족들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동안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 온 바랴그인들이 9세기 경 핀란드만 남쪽의 大노브고로드에 정착하면서 이곳은 바랴그의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조금 더 부연한다면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들이 8세기말~9세기에 걸쳐 동슬라브족의 북서쪽으로 침입하였고, 이곳에 정착하였다.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았던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였던 핀-우고르족은 침입자들을 “로우트시(роутси: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이 오늘날의 ‘루시’(русы)로 알려지고 있다. 침입을 당한 동슬라브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루시는 이들과 언어와 문화를 교류하게 되었다 (Данилов and Косулина, 2015:37-38).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은 바랴기(Варяги)라고 불렸는데 당시 바랴기가 거주한 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민족은 ‘루시’ 또는 ‘슬라브’로 알려졌고, 이곳에 정주한 바랴그인 지배자들은 예속민이었던 슬라브민족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이들은 주로 러시아와 벨라루시를 형성하였다.
반면 남부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키예프공국들은 하쟈르족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9세기초 루시족은 폴랸족의 중심지 키예프로 진입하면서 폴랸족을 하자르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들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민족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9세기 말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과 노브고로드를 중심으로 한 북쪽이 연합하여 동슬라브족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대 러시아 국가 ‘키예프 루시’가 되었다(Nahaylo and Swoboda, 1990:15).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민족은 세부적으로는 다양하지만, 크게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지에 거주하는 튀르크민족과 타지키스탄에 거주하는 타지크족으로 나눌 수 있다. 페르시아계에 속하는 타지크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튀르크계로서 이들의 언어는 우랄-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 타지크 민족의 언어는 인도 유럽어계에 속하며, 이란의 파르시(Farsi)어와 유사하다. 그 외 18세기부터 시작된 제정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기존의 토착민족 이외에 다양한 역외민족이 진출하게 되었다. 가장 많은 수는 역시 러시아인으로 그 규모는 약 4백만명에 이르고, 그 이외에 우크라이나인 25만명, 볼가 독일인 20만명, 그리고 쿠르드인과 고려인들이 각각 25만명~30만명 정도가 구소련 시대에 이주하여 현재 거주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을 이야기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타지크인들이다. 타지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카자흐인, 우즈벡인, 투르크멘인 및 키르기즈인 등이 주로 사용하는 우랄 알타이어와는 다른 어군에 속한다. 중앙아시아 민족의 정체성은 주로 러시아 제국의 정복시대를 거쳐 소연방에 편입되면서 명료해지기 시작하였다. 타지크인들은 위에서 언급된 4개의 튀르크계 민족들보다 훨씬 일찍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타지크인의 조상인 인도-이란계 민족은 기원전 2,000년부터 중앙아시아의 주요한 민족으로 존재해왔다. 이들 이란인들이 주로 숭배한 종교는 조로아스트교이다. 배화교(拜火敎)로도 잘 알려진 조로아스트교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1세를 통하여 이란전역으로 전파된 후 중앙아시아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7세기에 이슬람에 의해 점차 교세가 약해지기 전까지는 이란인들에 의해 많이 숭배되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인들의 조로아스트교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나우루즈(Navruz) 축제로서, 춘분인 3월 21일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신년 축일로서 받아들여진다.
9세기~10세기에 걸쳐 샤마니드 왕조(819-1005)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최초의 이란계 왕조로서,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통제를 강화하였고 이들의 주요 거점 도시는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였다. 샤마니드왕조의 특징을 띠는 페르시아 문화는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이 승리하면서 중앙아시아 전체로 확대된 이슬람 문화를 융합한 것이다. 부하라를 수도로 하는 샤마니드 왕조는 10세기 말 튀르크 민족과 몽골에 의해 점차 그 영향력이 쇠퇴되었다.
튀르크계 최초의 국가 카라한 왕국(Karakhanid Khanate)은 9세기 중엽~13세기 초기까지의 기간 동안 페르시아계 샤마니드 왕조를 밀어내면서 오랜 기간 노예와 군인 생활을 하던 튀르크계 민족들이 점차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에는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던 타지크인들이 옥수스 계곡 북쪽의 산악지역으로 점차 밀려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점차 중앙아시아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튀르크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적 분포는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다. 북쪽의 러시아와 국경을 공유하는 지정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에서는 거의 53%를 차지하는 토착민족인 카자흐민족을 제외하고는 러시아인들이 30%를 차지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러시아인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남아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인의 비율이 80%로 압도적으로 많고, 러시아인(5.5%), 타지크인(5%), 카자흐인(3%) 등의 순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토착민인 투르크멘인의 비율인 85%로 가장 높다. 키르기즈스탄에서는 키르기즈인(64.9%)이외에 우즈벡인(13.8%)과 러시아인(12.5%)이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고, 타지키스탄에서도 토착민인 타지크인(79.9%) 이외에 우즈벡인의 비율이 15.3%로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이채문, 2012:85).

전개와 사례
[민족과 맑시즘]

민족에 대한 러시아와 소비에트 사상의 발전은 수많은 경로 및 곡절을 겪어왔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던 칼 맑스, 엥겔스 및 레닌은 일부 소수민족의 존속을 보장할 수 없고 또한 이들 소수민족은 큰 여타민족에게 융합되어야 할 것이므로, 일부 민족은 역사가 일천한 여타 민족에 비해 우월하고 발전된 단계에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레닌은 많은 러시아인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러시아 민족이 여타 슬라브 민족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고, 소련 제국내의 수많은 소수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러시아민족의 우월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말년의 레닌은 대 러시아인들이 소수민족에 대하여 맹목적 애국주의(chauvinism)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레닌의 우려는 스탈린의 민족사상에 의해 가려져 거의 주목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1917년 러시아혁명과 함께 레닌의 고민은 비러시아계 민족의 공화국을 어떻게 통합시키는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탈린은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비러시아계 공화국, 예컨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아베르바이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등의 각 소비에트 공화국을 가입시켜 이들 자치공화국과 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러시아 공화국에 비러시아 공화국을 자치단위로 편입하려는 것은 성공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오히려 레닌은 비러시아계 공화국에 양보하는 조치로서 ‘유럽•아시아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만들어서 모든 비러시아인이 가입하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RSFRS)도 함께 정식으로 가입’하도록 함으로써 적어도 겉으로는 비러시아 공화국과 러시아 공화국이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의 생각은 다음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연방제는 연방 구성국가의 상호신뢰와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할 때 강건하게 될 것이다 ...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은 다양한 국민과 민족의 평화적 공존과 형제적 협력의 실험이 성공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이다. ... 거기에는 지배하는 민족도 종속되는 민족도 없고, 본국도 식민지도 없고, 제국주의도 민족억압도 없다. ... 연방제가 갖는 이 자발성은 앞으로도 틀림없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 점점 더 분명하게 필요하게 된 단일 세계 경제체제에서 모든 국가의 노동자가 더욱 고도의 통일을 달성할 때까지의 이행 단계로서 이와 같은 연방제가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Stalin, Works, vol. 5, p. 16ff., 23-4, (Nahaylo and Swoboda, 1990:73)

유물론적 관점은 일반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이라는 것은 개인이 소속 원천이 되어 있고,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며, 그에 대해서 개인이 헌신한다는 점에서 아주 자연스런 현상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유물론을 주장하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에 따른 구분보다는 경제적 생산관계에 따른 구분을 더욱 중시함으로써 경제적 생산이 인간활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집단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간의 이해관계는 상반되며, 결국 이러한 상반된 이해관계는 인간 사회에 적대적인 관계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는 결국 계급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본다. 맑스주의자들의 이러한 계급과 민족간의 모순은 지속적으로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이 해결해야 할 적지않은 과제로 남겨졌다.
물론 일부 19세기 말기 오스트리아의 일부 맑스주의자들은 민족은 인간사회의 자연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민족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가 확산되더라도 결코 소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소비에트식 사고를 대변하는 스탈린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었다. 이러한 스탈린의 사고방식은 1980년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면서 민족은 부르죠아 시대의 자본주의적 필연적인 산물로 간주하여, 자본주의가 민족을 창출하고, 민족간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며 더 나아가 불신, 적대 및 억압을 가져온다고 보았다(Hill, 1992:54-56).
그러나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레닌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은 아직도 러시아민족 이외의 타민족에 대한 적대적 정책은 그렇게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1923년 6월 “민족 공화국 및 지역의 책임자와 중앙위원회의 제4차 회의”에서 채택된 토착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이다(☞ 토착화).
이 토착화정책에 의해 소수민족에게 민족학교가 허용되었고, 모국어가 학습될 수 있었다. 각 공화국의 중요한 각급기관에 그 지역 토착민족 직원이 충원되어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기가 되자 소비에트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민족정책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스탈린의 독재권력화 정책에 반대가 되는 세력들, 그 중에서는 각 민족세력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 대탄압). 우선 비러시아인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우크라이나인들로서 약 100만명의 우크라이나 부농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소련이 우즈벡공화국을 ‘목화 식민지화’한다고 비난했던 우즈벡 민족지도자들을 체포되었고, 이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민족이 자신의 거주지에서 추방되어 강제이주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18만명의 조선인들을 들 있고, 그 외에도 볼가 독일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쿠르드인, 체첸인 및 잉구쉬인 등이 있다.
이러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의 변화는 약 20여년 후인 1956년 2월에 개최된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소연방 민족들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감지되었다. 이 대회에서 스탈린의 민족정책을 비판하면서 스탈린이 강제이주 시킨 민족들의 명예회복을 시사하였고, 레닌의 민족정책을 다시금 강조하게 되었다(Nahaylo and Swoboda, 1990).

[중앙아시아 민족]

중앙아시아의 주요 토착민족은 카자흐인, 우즈벡인, 키르기즈인, 투르크멘인, 타지크인 및 카라칼팍인 등을 들 수 있다. 제정 러시아시기에 유입된 러시아인과는 달리 수세기 동안 다양한 민족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이들은 타민족의 언어, 문화, 관습 등을 공유해 왔다.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민족들은 모국어외에도 최소한 1~3개의 타민족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것들은 소련의 인위적인 중앙아시아 국경선 획정정책의 산물로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에 거주하는 카라칼팍인의 경우,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자민족 모국어인 카라칼팍어를 구사한다. 또한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우즈벡인과 카자흐인 아이들과 같이 성장하면서 우즈벡어와 카자흐어를 구사한다. 여기에다 영어까지 합쳐서 그는 5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일은 중앙아시아에서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다음에서는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역사적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Abazov, 2007). 먼저 카자흐민족은 주로 유목생활을 해 왔고, 전통적으로 목축을 주요한 생업으로 여겨왔다. 12세기~16세기에 카자흐 민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를 형성하였다. 타라즈와 투르케스탄 등의 지역이 동서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몽골에 편입된 카자흐 한의 통치시기에 행정기구가 정비되었다. 15~16세기에 카자흐 언어와 문화가 형성되면서 카자흐 정체성이 성립되었고, 17세기에 부족연맹체인 쥬즈(Жуз)를 대표하는 대쥬즈(Great Horde), 중쥬즈 (Middle Horde), 소쥬즈(Small Horde)를 중심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쥬즈).
키르기즈 민족은 스키타이인들의 후손으로 10세기 경 오늘날 천산산맥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말, 양, 염소 및 야크 등을 기르는 유목생활을 하면서 오늘날의 키르기즈인들은 이주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과 동화 또는 결혼을 통해 융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키르기즈인들은 우익(Sol Kanat)과 좌익(Ong Kanat)이라는 부족 연맹체를 통해서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몽골, 만주족 그리고 코칸드 우즈벡인들에 의해 정복된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키르기즈인들의 정체성은 16~17세기에 여타 튀르크어와는 상이한 키르기즈어를 사용하면서 점차 형성되었다. 1876년 러시아제국에 병합되면서 많은 키르기즈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Abazov, 2007).
우즈벡 민족은 중앙아시아 최대의 민족으로 2,500만명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농업에 주로 종사하였는데, 기원전 1세기에 현재의 우즈베크 지역에 정착한 민족은 이란계 유목민이었다. 이들이 거주한 주요도시지역은 부하라, 사마르칸드, 타쉬켄트 지역이 동서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주요한 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이 서역과의 상업적 교류를 가속화하면서 이들 도시에 거주한 이란계 주민들중 가장 부유한 계층은 뛰어난 상업적 수완을 지닌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인들은 이란계에 속하면서 오늘날의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거주하면서 돌궐, 위구르, 중국, 몽골 등을 왕래하며 실크로드를 통하여 활발한 상업활동을 하였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은 우즈벡 민족은 14세기 걸출한 민족영웅 티무르에 의해 통일되면서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에 제국이 건설되었다. 이후 부하라, 코칸드, 및 히바로 분리되었다가 19세기 러시아제국의 중앙아시아 침입으로 소연방에 편입되게 되었다.
투르크멘 민족은 투르크메니스탄의 대다수를 형성하는 토착민들로서 주로 유목생활에 종사하였다. 19세기 러시아제국의 침입에 완강하게 항거한 민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투르크멘 민족의 조상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중국, 이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및 몽골 등지에 광대한 제국을 형성한 오구즈(Oguz) 유목제국까지 그 기원을 올려서 추정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타직민족은 중앙아시아의 유일한 이란계 민족이다. 이 민족은 주로 농업, 곡물류, 쌀, 목화, 비단, 포도, 살구 등의 생산 및 판매를 주로 하였다. 타직어는 페르시아어에 매우 가깝고, 수니파에 속한다. 1~4세기 까지 쿠샨왕조가 통치하였고, 이후 티벳, 중국 지역등에서 우미야드 왕조로 이어졌다. 9세기~10세기에 걸쳐 샤마니드 제국이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지배하면서 이들 도시는 이란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이후 이들 지역은 호라산으로 알려져왔다. 13세기초 징기스탄의 침략과 이후 티무르 제국에 복속되었고 16세기이후 타지키스탄은 부하라 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이후 러시아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카라칼팍 민족은 우즈베키스탄의 서부지역에 위치한 카라칼팍자치공화국의 토착민으로 현재 약 65만명(2006년)에 이른다. 유목과 고기잡이 생활을 주로 하던 카라칼팍민족은 16세기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농촌에서 대부분 생활을 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4명 이상의 자녀로 구성된 대가족 제도를 아직 유지하고 있다. 코쉬(koshe)라는 씨족단위가 모여 우루(uru)를 형성하고 있다. 양과 낙타 및 말 사육 등 목축이 주요한 직업을 구성하고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콜호즈로 생활기반을 옮겼다. 카라칼팍 민족은 주로 이동 생활을 주로 하였고 16~17세기에 시르다리아강 하류에 정착을 하였다. 그 당시 부하라와 히바 한국의 통치하에 있었고 18세기 아무다리아강 유역으로 이동을 하였다. 이후 1873년 히바한국에 의해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면서 초기에는 카자흐 자치공화국에 편입되었다가 후일 우즈벡 자치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오 오늘에 이르렀다 (Abazov, 2007:15-16). 1960년대와 1970년대 아무다리아강의 관개시스템이 확립되면서 전성기를 맞이 하였으나 이후 아랄해가 고갈되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러시안 디아스포라]

1991년 소연방의 해체와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민족은 러시아인들이다. 러시아인의 중앙아시아 진출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정 러시아시기부터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한 러시아는 18세기 초부터 오렌부르크를 근거지로 하여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섰고 1895년~1914년의 시기에 이르러 중앙아시아 정복은 종료되었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소연방의 산업발전을 위한 내부 식민지로서 및 원료공급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러시아인들의 진출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면화재배 또는 카자흐스탄의 광산자원 개발을 따라 기술력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러시아로부터 기술인력이 대거 투입되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정책에 따라 진행된 강제이주 정책에서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타타르인 20만명, 그루지아의 쿠르드인 약 9만명, 연해주의 고려인 약 17만명 등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의 민족분포는 점차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물론 현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비율은 구소련 말기에 비해 많이은 변화를 겪고 있다. 먼저 러시아인의 구성을 살펴보면, 구소련 말기인 1989년과 2014년을 기준으로 비교해 볼 때 카자흐스탄 러시아인들의 수는 600만명(1989년)에서 407만명(2014년)으로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의 23.3%를 차지하고 있다. 여타 중앙아시아에서도 러시아인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인의 비율은 165만명(1989년)에서 80만명(2007)으로, 키르기즈스탄에서는 91만명(1989년)에서 42만명(2014)으로, 타지키스탄에서는 39만명(1989년)에서 7만명(2014)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33만명(1989년)에서 30만명(2014)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Peyrouse, 2008:4 ; 중앙일보 2014. 3. 26).
그러나 아직도 중앙아시아의 러시아인은 소수민족이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8세기부터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인들은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진출하는 개척시대를 연상시키듯이 중앙아시아는 러시아가 문명화시켜야 할 개척지로, 그리고 황무지로 인식된 측면이 강하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풍부한 현지의 자원개발을 위한 공장을 설립하고, 광대한 지역에 수로를 개발하여 황무지를 면화경작지로 전환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여전히 중앙아시아은 개척해야할 식민지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은 1970년 모띌감독의 “사막의 흰 태양(Белое солнце пустын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중앙아시아 민족갈등]

중앙아시아의 민족들은 타민족과 혼거(混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구소련 시대의 인위적인 국경선 획정의 산물로 볼 만하다. 이러한 과거의 정책적 산물이 오늘날 민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페르가나지역이다.
페르가나 지역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및 키르기즈스탄의 3개국이 국경선을 공유하며 약 1천1백만명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2,3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비옥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중앙아시아 전체인구 6천1백만명의 20%에 해당할 정도로, 현재 복잡한 민족관계의 와중에 있으면서 중앙아시아 이슬람 원리주의가 활발하고, 또한 부족한 수자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초점이 되는 지역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민족이 혼재하는 페르가나 지역에서의 민족갈등은 19세기의 안디잔 폭동을 필두로 하여, 1989년 6월에 발생한 아흐스카 튀르크인과 우즈벡인간의 충돌로 약 90,000명의 튀르크인들이 이 지역을 떠나 타 지역으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90년 6월에는 페르가나 계곡의 오쉬지역에서 키르기즈인과 우즈벡인간의 민족충돌로 1,200명이 사망하였고, 이러한 양 민족의 갈등은 2010년 6월 다시 재연되었다. 이로인해 우즈벡인의 주택 약 2,000채가 파손되었고 약 400명의 우즈벡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지고 있다(이채문, 2011).
이렇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페르가나 지역의 민족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원인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1924년~1928년간 형성된 구소련 시기의 공화국간의 임의적인 국경선 획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당시 국경선 획정시기에 해당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분포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우즈벡인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오쉬와 잘랄라바드 지역은 소련연방의 키르기즈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991년 중앙아시아 각국이 독립하면서 이 지역은 키르기즈스탄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키르기즈스탄에 속하게 된 오쉬와 잘랄라바드지역의 우즈벡인들은 자치권, 모국어인 우즈벡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지방정부의 요직을 우즈벡인에게 할당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키르기즈인과 우즈벡인간의 충돌로 표출되게 된 것이다(이채문, 2011, 2012).
뿐만 아니라 주류민족의 거주지내에 산재하는 소수민족의 고립지역(enclave) 또한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키르기스탄의 바트켄 지역 깊숙이 타지크인 마을 보루어, 서칼라차 등의 마을이 산재하고 있고, 키르기즈스탄 내에서도 소흐, 샤히마르단, 총가라, 장가일, 타이얀 등의 우즈벡인 마을이 고립되어있어 민족간의 갈등이 언제나 분출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이채문. 『공간으로 읽는 중앙아시아 』 . 경북대출판부. 2012.
「페르가나 지역과 중앙아시아 민족 종교 국경선 및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 『중앙아시아 1』(전략지역심층연구 논문집 IV).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을 하는 사전』. 한길사. 1992.
중앙일보. 2014. 3. 26.
Данилов А. А., Л.Г. Косулина [문명식 편역]. 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새로운 러시아 역사]. 2015.
Abazov, Rafis. Culture and Customs of the Central Asian Republics. CT: Greenwood Press. 2007.
Hill, Ronald. “Ideology and the Making of a Nationalities Policy,” in The Post-Soviet Nations, ed., Alexander J. Motyl. N.Y.: Columbia University.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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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haylo, B. and Victor Swoboda [정옥경 역]. Soviet Disunion: A History of the Nationalities Problem in the USSR, Russia [러시아 민족문제의 역사]. 신아사. 2002.
Peyrouse, Sebastien. “The Russian Minority in Central Asia: Migration, Politics, and Language.” Kennan Institute Occasional Paper #297.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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