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핵심코드명(한글)
사랑
핵심코드명(러시아어)
любовь
핵심코드명(그 외 언어)
love (영어); sevgi (우즈베크어); махаббат (카자흐어)
메타범주명(한글)
인간과 정서
연관 파생코드
뮤즈; 에로스; 영원한 여성성
개요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특히 미움의 대립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원적인 생명적 원리로는 그러한 것도 포괄한다. 사랑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또 교제 형태에서 여러 양상을 취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랑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가페’는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플라톤은 아가페를 본질적 실재인 이데아에 대한 동경, 즉 이상(理想)으로서의 사랑으로 언급했다. 기독교에서는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신의 신성하며 무조건적이고 자기희생과 배려 깊은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둘째, ‘에로스’는 감각적인 욕구와 갈망을 가진 열정적인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에로스’는 성욕을 동반하며 달콤한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에로스를 가장 오래된 신들 중 하나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에로스의 본질은 미(美)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가 없는 아프로디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아프로디테가 둘이라면 에로스 또한 둘이 되어야만 한다.’고 밝히며 에로스와 아프로디테의 깊은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셋째, ‘필리아’는 동료나 친구간의 사랑 즉 우정이나 동료애를 뜻하며 나아가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을 이르기도 한다. 넷째, ‘스토르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혈연으로 얽힌 사랑을 뜻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듯이 혈연으로 맺은 사랑은 인륜을 넘어서 천륜이라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를 유럽에서는 ‘세기 말 fin de siecle'이라고 명명했다. 러시아에게 19세기 말은 과거의 낡은 것들을 청산하고, 역사적인 복수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하면서 구원과 갱신을 향한 희망이 미약하나마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문화 및 예술계를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탈바꿈시켰으며 예술 개혁의 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독특한 철학 개념인 <러시아 에로스>가 형성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철학에서 에로스는 인간 본성의 이성적인 측면을 정신적이며 감성적인 면과 결합시키며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을 밝히려 노력했다. 은세기 러시아 철학자들은 에로스에서 이성과 경험, 신비주의적 학문을 고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종교 철학자인 솔로비요프는 위와 같은 요소들의 통합을 통해 세기 말 철학적 과제를 연구하였다.
쉐스타코프는 ‘유럽 철학자들과 달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상가들은 사랑의 본질적 개념을 통해 인문학적인 전통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은밀한 성(性)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성적 에너지를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종교 및 예술, 도덕적 가치의 추구 등과 결합시켰다. 사랑의 철학은 윤리학이며 미학이자 동시에 심리학이며 종교이다. 이러한 융합은 러시아 에로스의 특징 중 하나다’라고 언급한다. 또한 Н. 베르댜예프는 에로스를 신(神)을 닮은 존재를 탄생시키는 남성과 여성의 창조적인 결합으로 생각했다. <러시아 에로스>는 러시아의 다양한 철학적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발생하였으며 학문, 예술, 철학 및 종교적 요소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은 융합은 은세기 예술 창작의 한 현상으로서의 <러시아 에로스>의 독특한 본질을 형성시켰다.
기원과 개념
[러시아]

러시아어로 ‘사랑’을 뜻하는 단어인 ‘류보피 любовь’는 고대슬라브어 ‘류브이 любы’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와 기원이 비슷한 단어로 ‘혈액’을 의미하는 ‘크로피 кровь’와 ‘시어머니’를 뜻하는 ‘스베크로피 свекровь’ 등이 있다. 그러나 고대 러시아에서 ‘으이 ы’와 관련된 어휘소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보통 실용적인 형태로 바뀌게 된다. 즉 주격 형태인 ‘으이 ы’는 목적격 형태로 교체되면서 ‘사랑’을 뜻하는 명사는 ‘류보피 любовь’가 되었다. 동사 ‘사랑하다’를 뜻하는 단어 ‘류비티 любить’는 원래 사역동사(‘사랑하게 하다’, ‘사랑에 빠지게 하다’)였던 것이 능동적, 적극적 의미(‘사랑에 빠지다’, ‘사랑하게 되다’)를 거쳐 수동적, 상태적 의미(‘사랑하다, 좋아하다’)로 발전한 경우로써, 여기에는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의 순환적 교류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사랑은 비너스의 동반자로서 비너스의 수와 똑같은 숫자의 사랑이 존재한다. 즉 두 명의 비너스가 있는데 하나는 ‘천상의 비너스’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비너스’이다. 비너스의 탄생에 관해서는 두 가지 신화가 있다. 첫 번째는 우라누스의 거세로 인해 피가 흩뿌려지면서 생긴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이다. 두 번째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프로디테 판데모스’이다. 이러한 신화로부터 ‘천상의 비너스’와 ‘지상의 비너스’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천상의 비너스는 지성을 갖추고 모친이 없이 천상(우라누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정의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물질을 의미하며, 지성은 유형의 물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천상의 비너스는 우주의 가장 높은 곳인 천제 위의 지대, 우주 지성의 영역에 거주하는데, 그녀가 상징하는 미는 신성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광휘이다. 또 다른 비너스인 ‘지상의 비너스’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물질과 관계된다고 여겨진다. 즉 지상의 비너스는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사랑, 곧 ‘천상의 사랑’과 ‘세속의 사랑’은 이후의 사랑 개념의 전개와 발전에서 두 가지 중심축을 이루면서 그 대립과 통합을 통해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형성해왔다. ‘천상의 사랑’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교류로 형상화되고 ‘세속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 에로티시즘과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사랑의 개념 발전에서 이 둘의 통합에 대한 지향도 끊임없이 발견된다.
사랑 개념에서 ‘천상’과 ‘세속’의 구분은 러시아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러시아어에 반영된 일상적 세계상에서는 사랑뿐만 아니라 여러 개념에서 ‘천상’과 ‘세속’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거나 의미적 대립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 유사 개념들이 러시아어에서는 별개의 단어로 표현됨으로써 ‘천상’에 속하는 개념과 ‘세속’에 속하는 개념이 구분되곤 한다. ‘기쁨’(радость-удовольствие), ‘선’(благо-добро), ‘진리(진실)’(истина-правд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신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더 넓은 의미로 정신적 사랑까지 포함하는 ‘천상의 사랑’과, 남녀의 사랑, 육체적 사랑과 보다 밀접히 관련되는 ‘세속의 사랑’을 인식적으로 명확히 구분함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은 ‘류보피’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다. 또한 러시아어 사랑 범주의 단어들(‘류보피’, ‘류비티’)은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해 만족감을 얻는 성향, 취미나 기호의 의미까지 포괄한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여러 종류의 사랑의 개념이 녹아있는 현상이 러시아어만의 특성은 아니겠지만 러시아어의 경우 ‘천상’과 ‘세속’의 대립이 어휘 쌍으로 잘 드러나는 언어임을 고려한다면 ‘사랑’ 개념만큼은 명확히 구분되는 의미조차 하나의 단어 안에 수렴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독특하게 느껴진다.
러시아 언어-문화에서 사랑이 연민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도 종종 러시아적 특성으로 지적되어 왔다. 러시아어에 반영된 일상적 세계상에서 사랑과 동정은 개념 쌍을 이룬다는 것이다. 아래 예세닌의 시구에서는 사랑과 연민이 대립하는 것으로 읽힌다.

“잊어버려, 내가 네 것이었음을, 정신없이 널 사랑했음을.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동정하지. 날 떠나 버려,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예세닌, 『내 창가에서 떠나』, 1915)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1869)에서 언급되는 이 둘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백치』의 유명한 대화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야”라는 미시킨의 말에 대해 “자네의 연민이 내 사랑보다 더 대단한 듯하군.”이라는 로고진의 대답 속에서 연민은 사랑이 아닌 그 무엇, 사랑이 변질된 것, 혹은 사랑보다 더욱 고귀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연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란 어렵지만 사랑과 연민의 긴밀함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연민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의 사랑의 개념은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더 발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측은지심은 인의 시작이다’라는 맹자의 말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에서 사랑이 생긴다는 생각과 관련이 깊다.
전개와 사례
[러시아에서 사랑의 전통]

러시아에서 사랑에 대한 논의는 특히 종교철학 안에서 활발히 전개되어왔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백치』)라고 말하는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의 구원을 ‘미’에서 찾았다고 한다면 톨스토이가 그것을 찾는 토대는 ‘선’이라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미’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선’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겠으나 ‘미’와 ‘선’을 모두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솔로비요프에 이르러 이 지점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여기에 사랑의 의미가 있다는 사랑에 관한 철학이 확립된다. 사랑을 신의 진리로 가는 통로로 보았던 솔로비요프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현상적 존재의 한계가 극복되고 이상적인 개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존재의 자기부정이며 이로써 타인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기부정을 통해 최상의 자기긍정이 이루어진다.” (솔로비요프, 『사랑의 의미』, 1884)

사랑이란 그리스도처럼 타인에게 자기를 모두 내어주는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통해 타인을 긍정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최상의 자기긍정에 이르게 해 주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있기 마련이지만 사랑을 통해 이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타자로 전이시킬 수 있으며 여기에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은 합일의 수단이자 세계 발전을 추동하는 신적인 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비요프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세르게이 불가코프, 플로렌스키, 베르댜예프 등 러시아 철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점차 사랑은 신앙과의 공고한 결합 속에 러시아를 추동하고 구원하는 근본적인 힘으로 사유되기에 이른다.

“사랑은 러시아적 영혼의 근본적인 영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다. [...] 사랑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게으르고 무기력해지거나 혹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러시아인은 그가 무엇을 믿든 이상과 목표 없이는 공허한 존재가 되고 만다. 러시아인의 지혜와 의지는 사랑과 신앙에 의해서만이 영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인, 『러시아적 이념에 대하여』, 1948)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영원한 여성성(☞영원한 여성성)’ 또한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블록과 신비주의 철학자 솔로비요프에 의해 다양한 형상으로 그려졌다. ‘영원한 여성성’은 소피아 이념과 결합되기도 하였으며 성모 마리아 숭배와도 관련된다. 러시아에서는 특히 20세기 초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에 의해 이 형상이 구체화되었다.

[러시아 문학작품 속의 사랑]

돈 주앙의 테마는 서구 문학 속에서 몰리에르와 모차르트, 호프만 등에 의해서 구현된 서구 문학 속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이다. 푸시킨 또한 이 테마에 몰두하여 『작은 비극들』의 『석상 손님』에서 ‘돈 주앙’의 형상을 창조하였다. 무엇보다 ‘돈 주앙’의 사랑과 삶의 철학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에 몰두하고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삶의 철학은 그의 대사 “순간의 가치를 안 / 그 순간부터, 그때부터 / 나는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소.”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랑과 삶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푸시킨에게 이미 낯선 것이 아니었다. 돈 주앙적인 요소들은 이미 리체이 시절에 집필된 아나크레온 풍의 시들에 등장하는 쾌락주의적인 시인의 형상에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기 푸시킨은 프랑스의 ‘해학적인 서정적’와 바추슈코프의 영향 하에 지상에서의 삶을 즐길 것을 권하는데, 이때 무엇보다 시인이 즐기고자 하는 것은 짧은 사랑이 주는 쾌락과 행복이 된다. 이 시기 사랑은 에로틱한 사랑이고, 유희이자 농담이 되기도 한다.
1814년의 시 『지복 Блаженство』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의 변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목동을 술의 신, 사티로스가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티로스는 목동에게 “지복의 순간을 영원히 잡으라.”라고 말한다. 술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행복이 없으니, 취한 상태에서 큐피트와 화해하고 새로운 여인의 품에서 행복을 즐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판의 말을 통해서 사랑이 주는 행복의 순간은 잠시일 뿐,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으며 술이 주는 기쁨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복의 순간을 잡아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된다.
푸시킨의 시에서는 시적인 영감을 의미하는 비파와 뮤즈(☞뮤즈)는 사랑의 에로스(☞에로스)와 언제나 함께 하는 친구이자 동반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푸시킨의 초기 시에서는 뮤즈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때, 사랑과 뮤즈는 술, 우정과 함께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대상들로 상호 공존하는 존재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1816년의 시 『이별』에서 시인은 자신의 비파만이 이별 뒤의 절망과 슬픔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비파가 자신의 절망을 너무도 잘 표현하여 어쩌면 처녀로 하여금 다시 탄식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아픔과 절망이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순간을 발견할 수가 있다. 1825년의 시 『명성의 소망』에서는 자신을 버린 여인에 대한 일종의 복수의 일환으로써 영광을 얻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노래한다. 그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이 온통 그녀의 주변에 울려서 그녀가 어떤 사람을 버렸는지 분명히 알았으며 좋겠다는 소망 때문이다. 이렇게 이 시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사랑에서 받은 상처가 복수심과 결합되어 적극적인 창작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적인 힘으로서의 사랑은 안나 케른에게 바쳐진 1825년의 시 『**에게 К**』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순수한 “아름다움의 화신”으로서의 여인은 시인이 상실했던 모든 것, 신성, 영감, 눈문, 삶, 사랑, 시인의 존재 자체를 부활시키는 힘으로 칭송된다.
첫 고백이 아닌, 연인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음을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연애 담론집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고백도, 선언도 아니며 메시지가 담긴 말이라기보다는 행위적인 기호에 차라리 가깝다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의 비평가가 염두에 둔 “사랑한다.”는 문구는 사랑의 행위에 수반된 부수적인 외침이거나, 아니면 상대방으로부터 메아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유도어, 즉 사랑이라는 규범의 상투적 몸짓으로 전락해버린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어쩌면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았는지 모르오.
그러나 그 사랑이 당신을 더는 괴롭히지 않기 바라오.
당신을 그 무엇으로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말없이, 희망도 없이 당신을 사랑했소.
때론 소심하게, 때론 질투심에 괴로워하며,
정말 진심을 다해, 정말 열렬하게 당신을 사랑했소.
다른 사람도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길 바라오.

그렇다면 “난 널 사랑해”가 아닌 “난 당신을 사랑했소.”라는 문구는 어떠한가? 현재가 아닌 과거 시제로 쓰인 존칭형의 문장이 그 구절의 상투성을 과연 자동적으로 배제해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또한 “사랑”의 실제와는 아무 관계없는 하나의 자위적 내지는 자기변명적인 상투어에 불과한 것일까? “당신을 사랑했다.”는 세 번의 확언에 관계없이 푸시킨의 시는 불확실한 감정과 그에 대한 자각의 미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가 노래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현재성인지, 아니면 이제는 완전히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회상인지를 확정지을 수 있는 내적 일관성이 시에는 부족하다.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고백인지, 이별의 선언인지, 그의 어조가 고통스러운 자제력의 결과인지 아니면 사랑이 휘몰고 지나간 후의 냉정한 평온함의 결과인지, 즉 시의 메시지기 진정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역설에 불과한 것인지를 독자들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으며 화자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 역점은 “당신”이란 단어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라는 과거형 동사 어미에도 떨어지고 있다. 즉 시의 리듬을 통해 의미에 있어서의 강도 여부를 유추해본다는 푸시킨 학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화자가 상대방의 중요성을 세 번에 걸쳐 강조해주는 것 못지않게, 사랑했다는 사실 즉 사랑이란 감정의 과거성 역시 강조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화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고결한 감정의 낭만적 이상형이라기보다 차라리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을 그리도 담담하게 그야말로 축복과 함께 떠나 보내주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상반된 해석이 가능해진다.
“당신을 사랑했다”는 구절을 제외하면, 시를 지배하고 있는 문체의 양식은 온통 부정과 애매모호함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또한 그와 같은 해석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당신을 사랑했다”는 과거에 대한 서술 외에 확언되는 것, 긍정되는 것은 더 이상 없다. 현재와 미래에 관련된 모든 것은 가정되거나 부정형으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당신을 사랑했다”는 긍정의 평서문은 부정과 모호함 및 막연한 바람의 언어에 둘러싸인 채 확실성을 잃고 만다.
거의 같은 식으로 사랑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 또 한 편의 푸시킨 시를 대조해보면 1829년 시의 수사적 특징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모든 것은 끝났다네.: 우리 사이 관계는 없다네.
마지막으로 네 무릎을 껴안은 채,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은 끝났더네 — 네 대답이 들린다.
또 다시 나 자신을 기만하진 않으리,
내 애수로 너를 괴롭히지 않으리,
어쩌면 과거는 잊게 될지도 몰라 —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넌 젊고 네 영혼은 아름다워
널 사랑할 이 많고도 많으리.

일견 두 시는 외면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둘 다 사랑의 종말을 노래하고 있으며 동일 운율과 동일 구조, 동일 문형, 동일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시의 화자 모두 끝나버린 사랑을 인정하며 연인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지만, 실상 그 어투와 어조 상의 차이는 크다.
1824년의 시의 화자는 사랑의 종말을 간명하게 선언한다. 가정과 모호성의 수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1829년의 시의 화자와는 달리 그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단호하다. 그 단호함은 한 치의 미련도 허용하지 않는 맨 첫줄의 단문형 구조와 구두점의 사용에서부터 잘 반영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두 번의 반복구는 아직 전혀 끝나지 않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단호한 부정은 긍정을 말한다고 믿어지는 만큼, 우리는 그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것이 그녀에 대한 마지막 시는 아니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은 바로 시가 담고 있는 어투와 어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실 시속에는 사랑의 상투어, 더 정확히 말하면 다투고 있는 연인들의 상투어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끝났다느니, 우리 사이란 없다느니, 마지막이라느니, 사랑을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말들은 일상적으로 자주 내뱉어지는 사랑 다툼의 용어이며 그러한 상투어로 시가 가득 찬만큼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며, 시가 말하고 있는 “마지막”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에 반해 1829년 시의 화자는 결코 격해 있지 않다. 존칭형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 외의 사실을 통해서도 그 자신과 사랑의 감정 사이에 이미 상당한 거리가 존재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 이외에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란 단어를 자신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는다. 1824년 시에는 대화가 있다. 그러나 1829년의 시는 독백의 시이다. 전자의 화자는 발언을 하고, 상대는 대답한다. 둘은 상호간의 감정을 나눈다. 그러나 1829년 시의 경우에는 사랑 그 자체의 방향이 일방적인 것만큼이나 그에 대한 표현 역시 일방적임을 알 수 있다. “말없이” 사랑했던 것처럼, 화자는 여전히 발언되어지고 화답되어지는 말이 아닌 자신만의 독백을 통해 연인을 향한 사랑의 지속과 종식,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이어나간다.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오네긴은 천편일률적인 사교계의 삶과 사랑과 우정에도 염증을 느끼고, 결투와 같은 낭만주의적인 행동에도 흥미를 잃게 된다. 러시아식의 우울증이 그를 사로잡게 된다. 푸시킨은 그의 심리를 “아무 것에도 관심을 느낄 수 없는” 무관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오네긴의 그와 같은 심정에 작가는 동감을 보내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교계 여인들의 잡담의 공허함과 오만함 등을 비판한다. 그리고 푸시킨은 자신과 오네긴의 유사점을 “정열과 유희”를 알았지만 “둘 다 인생에 염증을 느낀 점”, “사교계의 무거운 관습”을 벗어버린 점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오네긴이 인생에서 느끼는 권태로움의 주요 원인은 익숙해짐으로 인해 소중함을 잊게 되는 습관적인 삶 때문이기도 하다. 4장에서 작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에 의거해 오네긴이 사교계의 사랑에서 느끼게 된 지루함의 감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작가는 그에게도 언젠가 열정이 존재했지만, 그것도 버릇이 된 결과 시들해졌고, 8년간 변화가 없이 똑같은 유혹의 과정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라며 그의 입장을 대변해준다. 오네긴에게 삶과 사랑은 금방 익숙해져서 새로울 것이 없는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삶과 사랑은 진지하게 몰두할 것이 없는 대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오네긴은 결혼도 거부한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것도 서로에게 익숙해지다 보면 금방 시들 것이고, 상대방도 서로에게 짐이자 슬픔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네긴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의 정해진 법칙과 과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위해서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함을 강조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창조되었으므로 타인들이 감내하며 살아가는 허위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혼 거부의 변론이다.
사교계의 삶에 환멸을 느낀 뒤 오네긴이 처음 하는 일은 모든 것들으 버리는 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여인들을 폭풍 같은 환락을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집안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그 고된 노동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지자 그마저도 던져버리고 책을 읽다가도 금방 싫증을 느껴 그만두고 만다. 또한 오네긴은 타치야나를 처음 본 날 그녀에게서 시인의 감수성에 의해 사랑받을 만한 독특한 아름다움, 자신의 과거의 이상과 미래의 신부의 모습도 발견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인상들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미 삶은 정해진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따분한 그 무엇에 불과하므로, 그는 새로울 것이 없을 타치야나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그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타치야나의 사랑을 얻어내지만, 그 사랑을 수용하지 않느다. 그는 타치야나와의 관계에서 그 어떠한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거부할 뿐이다. 그는 타치야나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연인 상 중 ‘사악한 유혹자’의 역할도, ‘선한 수호자’의 역할도 모두 하지 않는다.
오네긴은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인해 그 스스로 자신의 세계관에 의해 자멸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오네긴은 그 비판에 매몰되어 삶이 지니고 있는 그 생명력을 자체를 부정했고, 삶은 오네긴에게 자신이 감추어둔 오네긴을 위한 돌발성, 사랑의 부활과 좌절로, 그의 삶에 대한 화석화된 관념이 그에게 가능했던 행복을 어떻게 짓밟았는지를 그의 눈앞에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복수했다고 볼 수 있다. 삶은 쓰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한 것이지만, 삶속에는 삶을 살아있게 만드는 요소, 아름답게 하는 요소들 즉 사랑, 자유, 순수, 이상, 도덕성 등이 분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순리에 따른 그것들의 도래 자체를 화석화된 관념에 따라 거부할 때, 삶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으로 변모되고, 의미 없는 것이 되며, 그 사람 자체가 죽음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어두운 힘의 도구로 어이없이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오네긴을 통해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반면, 타치야나는 삶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면서도 삶의 변화에 매몰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 자신의 사랑, 순수, 문학, 영감 등을 간직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골 문학소녀로서 그녀는 언제나 작가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아이였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도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어도 사교계의 관습과 사랑의 유희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솔직하고 순수하기만 한 시골처녀도 아니고, 요염하고 유혹하기에 능숙한 도시여인도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능력을 지닌 그녀는 내면의 약함을 극복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모하여 독자들과 오네긴 앞에 나타난다. 타치야나는 화려한 외면 뒤에 순수한 시골 처녀의 영혼을 간직하고서, 외면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며 삶의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성찰할 줄 아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삶의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삶과 이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비틀어진 인생관에 의해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자신의 삶을 피폐시키는 오네긴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고통 받는 인류에 대한 사랑‘의 테마는 도스토옙스키의 전 창작에 걸쳐 잘 드러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랑과 사랑이 담긴 시선이 없이는 온갖 종류의 누적된 왜곡들로 뒤덮인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민중에 대한 진리의 정수를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데,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의 생동감 넘치는, 살아있는 감정인 동시에 의식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의식과 사랑은 아마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으며, 사랑으로 많은 것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작가는 사랑의 시선이 담긴 인간의 본질 속에서 아름다움의 개념을 꿰뚫고 있으며, “미학이란 인간의 자기완성을 위한, 인간 자신에 의한,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한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에서 사랑은 ’진선미의 합일‘로서 미의 범주이자 그것의 체현인 그리스도의 형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에게 진정한 사랑은 신에의 믿음, 인간 영혼의 불멸, 다가올 신의 왕국에 대한 믿음, 즉 개개인간은 모두가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모두에 대해 평등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란 인간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심지어 전혀 생각하기 힘든 것이자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진정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불명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삶의 최상의 목표라는 의미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하기를 원하며 스스로 자살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하며 믿음을 상실한 자의 가슴에 인류에 대한 증오의 씨앗을 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이 언젠가는 인류의 공리가 될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스토옙스키의 믿음은 철저치 ‘인류에 대한 사랑’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 사랑은 작가의 표현처럼 “인간 속의 인간을 발견”해내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서 “수많은 회의의 시련을 거쳐” 도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작가의 초기 창작에서 기독교적, 이타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에서 하급관리도 사랑할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다르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희생적인 헌신적 사랑, 타인에 대한 이해에 바탕한 이타적 사랑, 나아가 모두가 서로에 대해 책임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상호존중의 사랑에 대한 열망은 이미 작가의 초기작에서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가난한 하급관리인 마카르 제뷔쉬킨은 마치 사랑할 능력을 결여한 인물 마냥 주위의 조소와 모멸의 대상이 되지만 항상 자신보다 타인을 더 배려하고, 가난한 역경 속에서도 수치를 알고 자존심과 양심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작가는 한 고독한 말단 관리의 형상 속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성의 보석들 즉 진실한 사랑과 관대한 자기 희생 정신을 발견해 내는데 이러한 점들은 이미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예정되어 있다. 희랍어로 ‘행복한’, ‘성스러운’을 의미하는 마카르란 이름은 러시아 속담에서 ‘가난함’과 ‘유로지브이’의 상징으로 통칭되며, 이러한 특징은 마카르 자신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바렌카, 이 나쁜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기조차 창피합니다. 그 사람이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요? 내가 온순하고 조용하고 선량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 마음에 안 들어서 내게 그런 나쁜 짓을 한 것이죠. [...] 바렌카, 보다시피 이렇게 모든 걸 마카르 알렉세예비치의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카르 알렉세예비치를 우리 관청 안의 얘깃거리로 만들어 버렸어요. 얘깃거리로 만드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그들은 내 구두며, 제복이며, 머리칼이며, 내 외모에까지 험담을 했습니다. [...] 난 무슨 일에든 익숙해지고, 온순하고 하잘 것 없는 인간이라 이 일에도 익숙해졌지요.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1845)

제부쉬킨의 유일한 희망이자 존재이유인 바라바라는 과거의 추억에 젖은 채 현재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상황에 심한 정신적 위기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제부쉬킨과의 편지를 통해 계속되는 그녀의 현실적 번민과 고통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카르의 답장은 단순히 그녀를 위로하는 수준을 넘어서 전력을 다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미래에의 희망을 심어주고자 한다. 두 주인공간의 이러한 차이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신의 어렵고 불행한 현실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제부쉬킨은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삶에 대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을 간직하고자 노력하는데, 이러한 제부쉬킨의 삶의 근간에는 무엇보다도 이타적 사랑의 힘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스스로를 현실적으로 불행한 존재라 여기는 바르바라에게 삶은 즐거움과 기쁨은 언제나 그녀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녀는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과거의 기억을 뒤로한 채 뻬쩨르부르크의 현실을 저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사랑은 ‘이곳’에서의 즐거움이 아닌 ‘과거’, 자연과 ‘낯선 세계’로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그녀를 비극적 삶의 낭만적 주인공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결국 바르바라는 제부쉬킨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브이코프를 택함으로써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을 새로운 문체를 찾고자 한 주인공의 열망은 ‘낭만적 과거로 회귀’하는 여인을 향해 낭만적 욕망이 아닌 이타적 열정에서 결코 질투가 아닌 분노에 찬 언어로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제 막 형성된 자신의 언어가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나의 천사여, [...]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되다니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다지도 갑자기, 마지막 편지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안 됩니다. 내가 편지를 쓸 테니 당신도 편지를 쓰세요. 그리고 내 문체도 이제 틀이 잡혀가고 있는데....... 아, 내 사랑하는 바렌카, 도대체 문체가 다 뭡니까! 지금은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고,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문체도 고치지 않고 쓸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쓸 수만 있다면 그저 써 나가고 있습니다. 나의 귀여운 바렌카, 나의 정겨운 바렌카, 나의 사랑스런 바렌카!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1845)

여기서 문체에 대한 염려는 이제 편지를 보내는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영원한 우려이자 임무로 승화되고 있다. 이는 서간체 소설의 주인공 마카르 제부쉬킨의 형상을 통해 이타적 사랑의 언어를 전달하고자 한 도스토옙스키의 염려이기도 하다. 이렇게 작가는 ‘고통 받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 명제를 자기 창작의 출발점에 놓고서 기독교적 사랑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이 바로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미완성 대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이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속의 텍스트에 등장한다. 본격적인 대심문관과의 대면이 이루어지기 전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민중적 의식과 성서 텍스트의 혼합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잔혹한 종교재판이 행해지던 암울한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라에 종교적 압제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에게 나타난다. 그는 ‘우리에게 나타나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울부짖는 민중의 기도에 응답해 ‘측정할 수 없는 동정심’ 때문에 다시 한 번 ‘인간의 형상’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무한한 동정심 때문에 반복해서 인간의 형상으로 지상에 강림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러시아 민중의 의식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잡아 감옥에 가둔 뒤 밤에 홀로 찾아와 심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길고 긴 독백을 이어간다. 대심문관에게 인간은 자신의 양심의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하고 가련한 창조물들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줌으로써 인간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인간을 존경하면서 동정하지 않고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연약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결여하고 강한 소수의 인간들만을 선호한다고 오해한다. 이반은 이러한 대심문관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그가 행하는 교묘한 성서의 곡해를 인식하고 있다. 대심문관의 말은 이반의 내부에 공존하는 두 목소리 중 한 목소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반의 공감적 파토스는 대심문관을 향하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는 그리스도와 대심문관 중 어느 누구의 편에도 확실하게 서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반의 태도의 이중성은 그리스도의 침묵과 입맞춤으로 표면화된다. 대심문관이 긴 비난을 쏟아놓는 동안 예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한다. 대심문관의 긴 장광설을 배경으로 할 때 예수의 침묵은 더욱 도드라져 부각된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적극적으로 듣는 행위로, 즉 그리스도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대심문관의 내면에 쌓이고 쌓인 울분과 자기 합리화를 그 당사자 앞에서 실컷 쏟아내도록 허용함으로써 그가 스스로 치유되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한다. 그는 대심문관이 어떠한 반박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반이 만나기를 갈망하는, 만나서 그 앞에서 자신의 내면의 고뇌를 그대로 토로하기를 원하는 타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반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의 입맞춤으로 자신의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입맞춤은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성서적 이미지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그 입맞춤은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시이며 사랑과 용서, 조건 없는 아가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묵인의 조용한 입맞춤으로써 이성적인 언어적 공격에 대답한다. 이 행위는 적들을 제압하는데 직접적인 공격이나 논리를 대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알료사가 이반의 서사시를 ‘예수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찬양’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반에게 그리스도의 입맞춤은 사랑받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어딘가 존재하고 있음을 믿고 싶어 하는 이반의 내재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알료사의 입맞춤에 이반이 기뻐하는 반응을 보인 것을 참작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반은 대심문관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내부적 논쟁에서 대심문관이 패배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리스도가 논리와 설득으로 대심문관을 이길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며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만 설복당하기를 원한다.
레프 톨스토이의 장편 『안나 카레니나』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불행한 이유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묘사는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가 가정교사와의 불륜으로 인해 발생한 가정의 혼란에 관한 상황이다.

오블론스키 집안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있던 프랑스 가정교사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남편에게 더 이상 한 집에서 그와 살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상태가 벌써 사흘째 계속 되었기 때문에 부부도, 모든 식구들도, 그리고 하인들마저도 몹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 요리사는 이미 어제 저녁 식사 시간에 떠나버렸고, 여자 요리사와 마부도 급료를 지불해달라고 부탁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8)

이처럼 이 소설의 도입부는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 가정의 심각한 불화가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안나와 카레닌의 가정 문제, 키치와 레빈의 가정의 문제와 대비를 이룬다. 키치는 무도회에서 안나와 브론스키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이 연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안나의 형상은 모순 속에서 창조되고 있다. 가령, 키치는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그녀가 매혹적으로 아름답지만, 그녀의 이 매혹 속에는 뭔가 잔인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한 문장에서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안나의 매력적인 형상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가 긴 문장 속에서 그녀의 매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안나의 운명과 긴밀히 연관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안나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 미의 매혹 때문에 죽게 될 것임을 독자에게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안나의 미와 그 매혹 그리고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성과 악마성은 그녀의 죽음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소박한 검은색 옷을 입은 안나는 매력적이었으며 팔찌를 낀 그녀의 통통한 두 팔이 매력적이었으며, 진주 목걸이를 걸친 탄탄한 목이 매력적이며, 약간 흐트러진 물결치는 듯한 머리칼들이 매력적이며, 조그마한 다리와 손의 우아하고 경쾌한 동작이 매력적이며, 생기가 넘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이 매력적이며, 그녀의 매력 속에는 무섭고 잔인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8)

로망 롤랑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의 광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의 “연애는 맹렬하고 관능적이며 절대적이었다.”고 말한다. 키치는 안나의 눈에서 불타오르는 기쁨의 빛과 기쁜 얼굴 표정을 본 다음에 브론스키의 얼굴에서도 안나의 얼굴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공포를 느낀다. 즉 키치는 브론스키의 두 눈에 나타난 안나를 향한 “복종과 공포의 빛”을 본 후 “무서운 절망”에 빠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후 내리막길을 걷는다. 브론스키와 첫 관계를 맺은 후 안나는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요. 나에게는 당신 이외에 아무도 없어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이러한 안나의 전폭적인 사랑 선언은 상대방을 구속하고 부담을 주어 질리게 만들어서 결국 두 사람 모두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잃고,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의 “열정 앞에서 정신적으로 타락”한 안나가 마음의 안정과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열정”이라는 단어는 안나의 삶에, 더 나아가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이로 인한 죽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그녀의 파멸에는 사회적 책임 또한 크다. 그녀의 비극적 죽음은 난폭함과 허위로 가득 찬 이 세계의 준엄한 고발이다. 안나는 카레닌과 브론스키 때문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것들에 의해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간적인 진정한 가치관을 발견할 수 없거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여기에 부르주아 사회의 조건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녀의 비극이 있다. 즉 안나 카레니나가 자살한 것은 그녀의 잘못된 행위뿐만 아니라 카레닌, 브론스키 그리고 상류 사회의 위선 및 잘못된 법과 제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안나의 자살은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범죄, 즉 유혹에 넘어가 탈선하여 육체적 사랑을 지나치게 추구한 죄와 이로 인한 파멸이기도 하지만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찬 부르주아 사회에 복수한 것이기도 한다.

안나는 갑자기 그녀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물론, 그것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죽는 것이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세료자의 수치와 불명예도, 나의 지독한 수치도 다 죽음으로 구원되는 거야. 죽는다면, 그이도 후회할 것이고, 날 동정할 것이며 사랑할 거고 나 때문에 괴로워할 거야.’ 그녀는 왼손에서 반지들을 뺐다 끼웠다 하며 그녀가 죽은 후 그가 느낄 심정을 다양한 측면에서 생생히 상상하면서 자신을 동정하는 엷은 미소를 띈 채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8)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안나는 모든 문제 즉 브론스키와의 불화, 카레닌과 친지들의 수치와 불명예, 자신의 수치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장면은 그녀가 자살하면서 “그이를 벌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과 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방면과 긴밀히 연관된다.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 브론스키에서 복수를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변환기의 작가이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19세기 중후반기 거장들의 대규모 장편소설 장르가 약화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중단편 소설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작가가 체호프였다. 그는 600여 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통하여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만화경처럼 다채롭게 펼쳐진다. 또한 여러 유형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거대한 ‘사랑의 보물 상자’이기도 하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결합하여 탄생된 사랑의 유형으로 이타적이며 남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주며 베푸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심지어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무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실제 현실의 남녀관계에서 아가페적 사랑은 매우 접하기 힘든 유형이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체호프의 대표적인 인물은 단편 『아뉴타』의 여주인공인 ‘아뉴타’이다.

클로치코프는 여섯 번째 남자였다....... 곧 이 사람도 공부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의 앞에는 빛나는 미래가 펼쳐질 것이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상황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담배도, 차고 없었고 단지 설탕 네 조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뉴타는 가능한 한 빨리 수놓는 일을 끝내서 주문한 여인에게 갖다 주고 삯으로 25코페이카를 받아서 차와 담배를 사와야만 한다. (체호프, 『아뉴타』, 1886)

그러나 동거나 클로치코프는 아뉴타를 어떻게 대하는가? 의대생인 그는 자신의 해부학 공부를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옷을 벗기고, 목탄으로 아뉴타의 늑골을 따라 선을 그어놓고 타진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웃 화가가 모델로 그녀를 빌려달라고 하자 흔쾌히 동의하기까지 한다. 갑자기 클로치코프가 변덕을 부리며 ‘당신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그녀는 눈물을 감추며 아무 말 없이 즉시 짐을 싸서 나가는 행동을 취한다. 왜 아뉴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들에게 반복적으로 헌신하는 것일까? 봉사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헌신이 의무로 변질이 되면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이제 일방적인 수혜자와 기증자의 관계로 변질이 되고 만다. 아뉴타의 행동양식은 그녀의 선천적인 심성과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이외에도 그녀의 아가페식 사랑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아뉴타의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은 남녀관계를 떠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담은 스토르게식 사랑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서 조금씩 애정이 자라나 서로에게 헌신하게 되는 우정과 같은 사랑의 유형이다. 스토르게식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이상형을 별도로 생각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파트너를 선택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과 비슷한 다른 사람들과 천천히 성장해 나가면서 ‘사랑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며’ 우연히 뜻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 간의 편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
이와 같은 스토르게 유형은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의 여주인공 올렌카가 대표적이다. 올렌카가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은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면서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이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살아왔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와 숙모를, 학창 시절에는 프랑스어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삶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자 필수품이었다.
그녀가 만나서 사랑한 세 남자 -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쿠킨, 이웃남자 푸스토발로프, 또 다른 세입자 스미르닌 - 이 모든 인물들은 올렌카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극단 경영자이자 연극 연출가인 쿠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나이의 불행한 삶에 연민을 느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자신의 친척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연극이며, 참된 즐거움을 맛보고 교양이나 휴머니즘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극을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연극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러다 목재상 푸스토발로프와 결혼한 후에는 목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용하고 중요한 것으로 바뀐다.

올렌카는 벌써 오래 전부터 목재상을 경영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재통나무, 기둥, 톱밥 등의 말을 들으면 어쩐지 다정하고 감동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남편의 생각이 곧 올렌카의 생각이었다. 가령 남편이 방안이 넓다거나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하면 올렌카도 그렇게 생각했다. (체호프, 『귀여운 여인』, 1898)

이제 수의사 스미르닌이 그녀의 연연이 되자 올렌카의 주관심사는 가축 방역 문제로 바뀐다. 그녀는 수의사의 이야기를 똑같이 되풀이하며, 어떤 일에도 그와 동일한 의견을 피력하게 된다. 그런데 실상 그녀에게 세 사람은 동일 인물이다. 체홉이 세 남성인물의 이름을 바니치카(Ваничка) - 바시치카(Васичка) - 볼로디치카(Володичка)로 작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직업이나 성격이 달라서 그때마다 사용하는 어휘나 행동이 다르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어떤 경우라도 그녀는 상대의 연인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맞추며 사랑하는 방식을 택했다. 상대방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 그 이후 열렬하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동화하고자 하는 올렌카의 사랑을 유형을 볼 때, 그녀는 스토르게식 사랑의 실천가라고 할 수 있다.
체홉은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서 진정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안나의 형상을 러시아 정교의 엄숙주의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색채로부터 거리감을 둔 채 구축하고 있다. 텍스트의 1-2장에서 드러나는 안나의 형상은 불행한 결혼으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 채 지루함과 초조함이 가미된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인이다. 안나는 고결, 순결한 여성의 이미지로 부각되지만, 텍스트의 결말에서 새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하는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로 변하고 있다. 안나는 사랑을 위해 현재의 불행한 결혼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과 사랑을 위해 도전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삶의 의욕이 넘치는 여인상으로 변모한다. 이와는 달리 구로프는 연성편력을 통해 찰나적인 욕망만 추구하면서 살다가 안나와 만남으로써 삶과 운명이 바뀌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체홉은 후각을 통해 두 기혼남녀의 어두운 성적 리비도를 자극하여 성적합일을 보여준다. 이 텍스트에서 체홉은 안나가 풍기는 입술의 체취와 꽃향기가 향수냄새와 같은 후각 모티브를 예술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안나와 구로프가 선착장에서 산책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때 안나의 입술에 남아있는 꽃향기, 그녀의 체취와 습한 기운이 구로프에게 성적 리비도를 자극한다. 또한 무덥고 습한 여름 날씨와 휘몰아치는 바람이 두 사람에게 감추어진 성적 에너지를 일깨운다. 안나의 숨결에서 풍기는 습한 꽃향기와 무더운 날씨의 습기가 가득한 공기로 인해 의식이 몽롱해진 구로프는 안나와 “온실”같은 방안에서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어 최초의 정사가 발생하게 된다.
더운 여름날의 습함과 몰아치는 바람이 생성하는 에너지는 마치 마술사가 자신의 영혼을 소환하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 피우는 향료와 유사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달콤한 안나의 숨결과 체취는 안나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무의식적인 상상력의 언어로 남성 주인공의 잠재된 리비도를 촉발시킨다. 안나의 방안은 후덥지근하고 밖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격정적인 날씨이다. 무덥고 후덥지근한 여름의 냄새는 성적 리비도를 촉발시켜 두 사람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언어로 작용한다. 꽃향기와 그녀의 체취는 유혹과 성적 리비도의 상징이다.
둘째로 후각 모티브로 인해 발생한 두 사람의 성적합일은 구로프에게 찰나적인 기쁨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이후에 구로프에게 정신적-육체적인 고통의 시간을 수반한다. 안나와의 만남을 여성편력들 중 하나라고 단순히 치부했던 구로프는 안나의 존재를 잊지 못하고 고통의 시간을 갖는다. 안나와 헤어진 이후 후각을 전달하는 언어단위들은 구로프에게 어두운 무의식의 성적 리비도를 자극한다. 그는 불면과 두통의 시간을 보내고 타인과의 소통의 불가능성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에 적응할 수 없게 된다.

구로프는 밤새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다음 날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이어지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계속 침대에 앉아 생각하거나 방안을 서성였다. 아이들도 지겨웠고, 은행도 지겨웠으며,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1899)

젊은 나이에 결혼한 안나는 결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치도록 살고 싶다”라는 외침을 부르짖고 있다. 그녀의 강렬한 외침인 “살고 싶다”는 욕망은 체홉에게서 자주 “살고 싶다”와 “사랑한다”로 해석되고 있다. 안나는 구로프와 일주일 간 만날 당시에도 계속 불면과 심장의 두근거림, 질투와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질투와 공포감 때문에 흥분하기도 하고 자신이 경멸당하고 있지 않느냐는 판에 박힌 질문을 구로프에게 퍼붓는다.
안나의 불행한 결혼이 불륜으로 이어진 사건은 여성의 모태를 자극하는 재생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모성 이미지와 일치할 수 없다. 꽃향기가 지닌 식물적 상상력으로 인해 여성이나 꽃이 다같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모계사회 원리의 잠재적 현상이다. 그러나 안나의 입술과 꽃향기와 체취는 구로프라는 대지에 씨를 뿌려서 생명이 탄생하는 질서에 역행한다. 두 사람의 불륜은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고 안나에게도 고통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사람의 삶의 전환점에서 체홉은 사랑을 위한 현재의 포기 혹은 현재의 삶을 위한 사랑의 포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체홉은, 사랑이란 심오한 삶의 근본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체홉은 안나를 더 이상 사회적 약자와 상대적 박탈감을 앉고 있는 자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여성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체홉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대전제는 총체적인 삶의 구현은 남녀 서로간의 사랑을 통해 이룩된다는 것이다.
이반 부닌의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길』에는 여러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따라서 비평가 유리 말쩨프는 이 단편집을 ‘사랑의 백과사전’으로 부르기도 했다.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인간은 작은 우주 즉 마이크로코스모스이며 이는 기본적인 인식의 진리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인간 속에 포함될 수 있으며 인간과 우주는 동격으로 볼 수 있다. 인간 속에는 우주의 모든 구성 성분과 특징이 들어가 있다. 즉 인간은 우주의 작은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М. 바흐친 또한 인간은 예술적 비전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이며 중요한 중심이라고 언급한다. 예술적 비전을 갖춘 세계는 조직적이고 규칙적이며 완성된 세계이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주요 구조와 압축된 세계는 미학적 현실을 창조해낸다.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길』에는 하나의 소우주적 존재인 인간이 또 다른 소우주의 강한 중력에 이끌리면서 사랑에 빠져 서로 충돌하고 부딪힌다. 그러나 그 자체로도 아직 확실한 규칙과 질서가 정립되지 않은 ‘사랑에 빠진 소우주’인 인간은 비이성적이며 무모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강한 욕망의 힘에 이끌려 본능에 충실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때로는 ‘사랑하는 인간 (호모 에로스)’은 그들을 둘러싼 또 다른 적대적인 세계 즉 사회 계급이나 일상의 걸림돌과 맞닥뜨리며 충돌 및 대립하면서 투쟁한다.
『갈랴 간스카야』에서 사랑은 하나의 욕망으로서, 은밀하면서도 불가피한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사랑은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자 가장 큰 비극의 원천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한 화가는 소녀였던 한 여인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 가까워진다. 그녀는 질투 때문에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려하지 않고 사소한 말다툼 끝에 독약을 마시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부닌의 여주인공들은 대개 은밀하고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수수께끼 같은 등장인물인 경우가 많다. 갈랴 간스카야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녀의 출생에 관해 명확히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평범하지 않은 욕망을 소유한 채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돌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정열적이고 충동적이며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교태를 부리고, 성숙한 여인의 행동 속에 어린아이 같은 미숙함도 섞여있다. 이러한 복합적이며 모순적인 성격의 그녀가 사랑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자네 들었나? 간스키의 딸이 독약을 마셨다네! 죽었다는군! 얼마나 희귀하고 치명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독약 상자에서 꺼냈다는군. 그 바보 같은 늙은이가 자신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여기며 독약이 든 상자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 기억하지? 정말 미친 사람들이야. 빌어먹을 폴란드인들 같으니라고! 그녀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납득이 되지 않아!’ (부닌, 『갈랴 간스카야』, 1940)

이 작품은 여러 돌발성에 근거해 있다. 화가와 갈랴 간스카야가 갑자기 우연히 만났다가 갑자기 가까워지고 또 갑자가 말다툼을 하고 그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자살로 끝을 맺게 된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그들이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왔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주인공들의 생활은 자세히 그려지지 않은 채 그들의 삶은 욕망의 이야기로 나타난다.
『루샤』와 『나탈리』에서 사랑의 테마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중요한 것임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행복으로 그려진다. 또한 『어두운 가로수길』과 『늦은 시간』에서도 비슷한 테마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영원한 사랑의 비극의 문제 즉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자 하는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길』을 비롯한 부닌의 작품에서 사랑은 실제로 거의 결혼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사회 계급 차이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등장인물 자신들이 거부하기도 한다. 단편 『예배당』의 “매우 사랑에 빠지게 되면, 항상 권총 자살을 하게 된데.”라는 한 어린아이의 말은 부닌이 생각하는 사랑의 한 개념을 잘 설명해 준다.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길』에서 부닌의 사랑은 모든 현상들이 인간의 본성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로 그려진다. <사랑의 실재>는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에 근거해 있지 않으며 사랑이 갑자기 식어버리거나 비속적이거나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실재>는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탈리』에서 주인공은 사촌 누이와 사랑을 나누고 동시에 그녀의 친구인 나탈리와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나탈리의 아름다움 앞에 끔찍할 정도의 환희’에 사로잡히며 그의 가슴은 애수와 행복, 사랑의 갈망으로 가득 찬다. “행복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라는 나탈리의 말을 통해 부닌은 슬픈 사랑은 마치 애절한 음악처럼 인간을 고양시킨다고 확신하는 것만 같다.
이 단편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말로 행복하지 않은 사랑이 존재할까요? 과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지는 않는 걸까요? (부닌, 『나탈리』, 1941)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계획이 실현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행복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닌, 『카프카즈』, 1937)

우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행복감에 젖어 앉아있었어요. (부닌, 『늦은 시간』, 1938)

나는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로 고통과 행복이 반복되는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행복했다. 아주 커다란 행복이지 않은가! (부닌, 『깨끗한 월요일』, 1944)

그들의 사랑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랑은 <사랑하는 인간의 기억>속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둔다. 사랑은 시골 영지에서의 평온했던 생활을 파괴하지만 그들에게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러시아 미술작품 속의 사랑]

결혼은 철저한 거래이다. 파벨 페도토프의 그림 ‘소령의 구혼’의 왼쪽 문가에는 거만한 자세를 한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서있다. 그가 바로 소령이다. 바로 그 앞에 화려한 붉은 옷을 걸친 여인은 중매쟁이로 노인에게 소령을 왔음을 전하며 그를 소개한다. 노인은 그림 가운데 흰 드레스를 걸치고 고개를 돌리며 도망치듯 뛰어가는 아가씨의 아버지이다. 소령은 지금 구혼을 하러 이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아가씨는 청혼을 받는 일생일대의 행복한 순간을 거부하고 뛰어나가려고 한다. 중매쟁이의 손에는 돈주머니가 들려있다. 그것은 이 결혼이 가난한 귀족 가문과 작위가 없는 부유한 상인 가문의 결혼 즉 당시에 유행하던 거래에 의한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은 미모의 아가씨는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의 감상주의 소설에 나오는 그런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열병 같은 사랑에 빠지고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이 순수한 아가씨에게 다가온 사랑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건조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이 상황을 외면한다. 아가씨의 어머니가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하고 있다.

파벨 페도토프, ‘소령의 구혼’, 1848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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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부닌; 샤갈; 아가페; 에로스; 체호프; 톨스토이; 푸시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