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민족]
흔히 민족이나 민족정체성을 정의할 때 그 준거점 중 하나로 기능하는 것이 언어이다. 민족정체성을 한 개인이 공통의 역사나 영토와 같은 공유된 특성들을 토대로 어느 특정 민족 집단에 느끼는 소속감이라고 정의할 때, 이러한 공유 특성들 중 언어가 가지는 상징성은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러시아어로 ‘언어’를 뜻하는 ‘야지크(язык)’는 언어와 민족의 상관관계에 대한 시각이 이미 고대 시기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러시아어에서 ‘야지크’가 (주로 복수형으로) ‘민족’을 뜻하는 의미로도 활발히 사용되었음을 통해 언어와 민족의 밀접한 상관성에 대한 인식, 곧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동일한 민족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교 사회였던 러시아에서는 언어를 종교와 동일시하는 태도도 널리 관찰되는데 ‘야지크’에서 파생한 ‘야지치니크(язычник)’가 ‘이교도’를 뜻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교도의 의미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단어 ‘바르바르(варвар)’에도 언어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교도’의 의미와 함께 ‘미개인, 야만인’의 뜻도 지니는 ‘바르바르’는 11세기경 그리스어 ‘바르바로스(βάρβαρος)’로부터 차용된 단어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로마서 1:14)”라는 성경구절에서 ‘야만인’을 가리키는 헬라어가 바로 ‘바르바로스’이다. 당시 그리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키다가 점차 ‘그리스 문화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 ‘미개인, 야만인’의 의미까지 함의하는 단어가 되었다. 로마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라틴어나 그리스어만이 진정한 언어이고 그 밖의 언어는 ‘어버버(bar-bar-bar)’거리는 소리로 들렸으며 그렇게 ‘어버버’거리는 자들은 ‘미개인, 야만인’으로 생각됐던 것이다(사이먼 베이커,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현대 러시아어로 ‘독일인’을 뜻하는 ‘네메츠(немец)’가 ‘네모이(немой, ‘말을 못하는’)’로부터 기원하며,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 일반을 가리키던 단어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르바로스’나 ‘네메츠’의 개념 변천을 통해 자기 언어를 중심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인간의 오래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먼 과거로부터 언어는 ‘자’와 ‘타’, ‘내 민족’과 ‘다른 민족’를 구분하고 ‘내 것’의 우월성을 확인시켜 주는, 이른바 정체성의 핵심으로 기능해 왔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시대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민족정체성의 구성 요소로서 언어의 상징성은 계속하여 유지되어 오고 있다.
저명한 러시아어 해석사전의 편찬자 블라디미르 달(Даль)의 일화는 언어와 민족의 상관성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해준다. 그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민중들이 사용하는 생생한 어휘들을 수집하여 주옥같은 러시아어 사전을 편찬했지만 혈통적으로는 러시아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질문이 바로 스스로를 어느 민족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달의 대답이다.
“성(姓)도, 신앙도, 혈통 자체도 한 개인이 어떤 민족에 속하는지를 결정해주지 못한다. 민족정체성은 바로 인간의 정신, 영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신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정신의 발현인 사고로써 가능하다. 어떤 언어로 사고하는가에 따라 민족이 규정되는 것이다. 내가 사고하는 언어는 바로 러시아어이다.” (멜니코프, 『블라디미르 달에 대한 회상록』, 1873에서 인용)
언어를, 민족정체성을 규정하는 토대 중의 토대로 간주하는 시각이 비단 블라디미르 달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키르기스 작가 아이트마토프 역시 언어와 민족의 긴밀한 상관성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의 불멸성은 그 언어에 있다. 각 민족에게 자신의 언어는 위대하다.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하고, 가장 위대한 풍요로움, 곧 언어를 준 우리 민족에게 후손으로서의 의무가 있다. 우리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고 그 풍요로움을 배가시켜야 할 것이다.” (아이트마토프, 「문학 신문」, 1986년 8월 13일자)
언어와 민족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공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리하여 언어가 민족, 조국, 애국심과 더욱 공고하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경우는 사회가 여러 요인에 의해 불안정할 때이다. 가령 외세의 강력한 영향으로 민족적 위기의식이 고조될 때, 혹은 전쟁과 같은 정치 사회적 급변 속에 애국심이 고양될 때 언어의 상징적 가치가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사례는 러시아 역사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러시아에서 조국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역사적 전쟁의 시기, 애국심과 조국이라는 단어가 이미 조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애국심과 조국의 상징으로서 언어의 가치도 수직 상승하였음을 여러 사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령 1812년 전쟁을 기점으로, 당시 귀족 사회의 일상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다거나, 혹은 외래어의 사용 및 러시아어의 잘못된 사용 등은 모두 애국심의 부족을 드러내는 기호로 작용하였다.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되고 있듯, 페테르부르크의 살롱에서 예전에는 일상어였던 프랑스어가 이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언어가 되고 귀족 자제들 사이에 러시아어 교육 열풍이 일어난 것도 1812년 전쟁 전후의 정황이다. 아래 푸시킨의 『로슬라블레프』에서 당시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화에 심취해있던 귀족들이 더 이상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하는 모습은 조국과 민족의 상징으로서 모국어의 가치가 이전과 달리 언중의 인식 속에서 뚜렷하게 각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담배 케이스에서 프랑스 담배를 쏟아 버리고 러시아 코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프랑스 책자들을 불태우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프랑스산 포도주를 거부하고 신 러시아 수프를 먹었다. 모두가 프랑스어로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푸시킨, 『로슬라블레프』, 1831)
‘조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또 하나의 전쟁인 대조국전쟁의 시기에도 러시아어의 상징적 가치가 빛을 발했다.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에게 그야말로 큰 용기를 북돋아준 시 『용기』가, 그 직전까지 소비에트 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던 아흐마토바의 시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소비에트 공식 언론을 통해 발표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의 시계는 용기의 시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용기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총알 세례 아래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은신처 없이 남는다 해도 슬프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 러시아어를 지킬 것이다.
위대한 러시아어를!
우리는 그대를 자유롭고 순결한 이들에게 가져다주고,
후손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속박에서 구원하리라,
영원히.” (아흐마토바, 『용기』, 1942)
언어와 민족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그 긴밀성이 더욱 부각되고 강조되는 상황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중앙아시아 각국의 정부가 민족정체성의 상징으로서 언어의 기능에 주목하고 언어 문제에 왜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소비에트 해체 후 독립을 맞이한 중앙아시아 각국은 민족정체성 혹은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으로 나아가야할 실질적 문제에 당면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명목민족(titular nation)의 언어를 국어로 지정하고 이것의 지위 향상에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 있다.
그러나 카자흐민족의 언어인 카자흐어, 우즈베크민족의 언어 우즈베크어라는 공식에는 애초에 시작부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과거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방식의 것이었으며 역사적으로 독특한 개념 발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자흐, 우즈베크, 키르기스, 타지크와 같은 말은 어디서부터 기원하며 애초에 그것이 뜻하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중앙아시아의 민족 개념]
민족을 국가나 민족에 대한 귀속이식, 즉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유래한 유럽적 민족 개념이다. 이에 반해 씨족적, 부족적 전통이 강했던 중앙아시아 사회에서는 러시아혁명 전 20세기 초까지도 이러한 근대 유럽적 민족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중론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즈베크인, 카자흐인과 같은 명칭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그 기원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즈베크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전통적 관점은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 중 한명이었던 우즈베크 칸(1313~134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즈베크가 군주명에서 집단명으로 나아갔는지, 혹은 집단명이 먼저 있었고 군주명이 이후에 나타났는지, 아니면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의 탐험가로서 중앙아시아에 정통한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킵차크 칸국의 군주 이름과 집단의 명칭으로서 우즈베크를 연결시킬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우즈벡이 öz(‘자신’)와 bäg(‘주인’)의 합성어로 ‘자신의 주인’ 곧 ‘타인의 구속을 받지 않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을 뜻한다고 주장한다(베르다드스키, 『몽골과 루시』 참조). 이 견해는 러시아의 동양학자 사벨리예프나 사학자 베르나드스키 등 여러 연구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반해 러시아의 저명한 동양학자 바르톨드는 집단명이 군주의 이름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즈베크 칸의 치세 이후, 15세기 사학자들이 조치(칭기즈 칸의 장남)의 후예들에 예속된 울루스를 우즈베크 울루스라 지칭하기 시작하면서 집단명이 되었다는 것이다(바르톨드, 『투르크와 몽골 민족들의 역사와 인문학에 관한 연구』). 앞서 루시의 어원에서도 살펴보았듯, 정복한 지역이나 주민에 정복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바르톨드의 견해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원래 군주의 이름이었던 우즈베크라는 말이 우즈베크 칸의 치세에 그의 직접적 지배를 받던 킵차크 칸국의 주민과 영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다가 점차 킵차크 칸국의 유목민 전체를 가리키는 집단명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김호동, 「15~16세기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집단들의 이동」 참조).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군주의 이름이 집단의 이름으로 바뀌는 예는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가령 중앙아시아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차가타이’도 칭기즈 칸의 2남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한다. 14세기 초 차가타이의 후예 두아가 정권을 확립하면서 ‘차가타이’란 명칭이 중앙아시아 몽골 제국의 공식 명칭(이른바 ‘차가타이 칸국’)으로 대두되기에 이르고, 우즈베크 칸 치세 이래로 우즈베크 울루스 주민들이 우즈베크인이라 불린 것과 마찬가지로, 차가타이 울루스의 지배를 받게 된 주민들도 그 부족적, 종족적 기원과 상관없이 차가타이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점차 차가타이 울루스의 본거지인 ‘마 와라 알 나흐르(지금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포함하는 오아시스 지역)의 주민을 가리키는 용어로 굳어지기에 이른다(일하모프, 「우즈베크 정체성의 고고학」 참조).
카자흐라는 명칭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어 ‘카자흐(казах)’와 카자흐어 ‘카작(қазақ)’, 그리고 러시아 역사와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카자크(казак)’(영어로 cossack)가 동일한 명칭인가 하는 점이다. 집단명으로서 ‘카작’이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세기 중반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바이셰프 외,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역사』 참조). 1459~1460년, 우즈베크 집단의 수장 아불 하이르 칸(1428~1468 재위)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에 반기를 든 자니벡 칸과 키레이 칸이 무리를 이끌고 모굴리스탄 변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들을 일컫던 말이 ‘카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자기 종족이나 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변방 지대로 이주하여 생활하던 사람을 가리켜 ‘카작’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대투르크어의 일반명사였던 ‘카작’은 애초에 ‘자유로운 사람, 탐험가, 방랑자’를 가리켰으며,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유로운 모험가의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우즈베크 집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변방에 거주하게 된 무리들이 ‘우즈베크-카작’, 즉 우즈베크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카작(자유인)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애초에 ‘카작’은 집단이나 부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으며 그 의미도 민족 혹은 부족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고유한 집단명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민족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16세기부터 18세기 이전까지는 이들을 ‘카작’의 러시아식 발음인 ‘카자크’라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8세기 전반부터 ‘카자크’라는 말과 함께 ‘키르기스-카자크’ 혹은 ‘키르기스-카이사크’라는 말이 혼용되더니 급기야 단순히 ‘키르기스’가 카자흐인들을 가리키는 대표어가 되면서 많은 혼동과 혼란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카자흐인 및 키르기스인과 관련된 용어상의 혼돈 상태는 192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가령 카자흐출신의 저명한 동양학자 발리하노프(1835~1865)가 19세기 중반에 쓴 글들을 보면 카자흐인들을 가리켜 ‘카자크’, ‘키르기스-카이사크’, ‘카이사크’란 용어가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 시기) 아랍 사학가들의 저서들에는 카자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의 형성이 15세기 이후 조치 울루스가 붕괴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발리하노프, 「베레진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 1850년대 초반)
“룝신은 마법, 환각, 주술이 키르기스-카이사크들의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말하면서 이 민족의 무지몽매함에 과도한 관심을 드러낸다. [...] 그러나 카이사크가 마법이나 점 등을 믿을 때는 좋거나 선한 것을 예언해 주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발리하노프, 「룝신의 키르기스-카이사크 울루스 연구 제 3부에 대한 소고」, 1853)
발리하노프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지는 도스토옙스키가 발리하노프의 사후에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는 아래의 예문에서는 카자흐인을 키르기스-카이사크라 부르고 키르기스인을 카라-키르기스라고 부르던 당시의 관례가 눈에 띤다.
“그의 이름은 키르기스-카이사크인들과 카라-키르기스인들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두 민족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베갈린, 『초칸 발리하노프』, 1976에서 인용)
러시아에서 그들(지금의 카자흐인들)을 ‘카자크’가 아니라 ‘키르기스’라 불렀던 상황에 대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러시아에 이들과 다르지만 ‘카자크’라 불리는 집단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시 전역에서 봉건영주들의 박해, 가난과 기아를 피해 드네프르, 돈, 볼가, 우랄 강 주변으로 이주해 온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카자크’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어 ‘카자크’도 ‘자유인, 모험가, 방랑자’의 뜻을 지니던 투르크어로부터 차용된 단어이다(『파스메르 어원사전』). 15~17세기까지는 이 의미로 사용되다가 17세기 이후부터 카자크들이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국경 수비에 적극 활용되면서 국가의 여러 혜택을 받는 특정 사회계층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에 러시아의 패권을 수립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카자크들이다.
이처럼 러시아의 카자크들과 구분하기 위해 ‘키르기스’라는 말이 사용되면서 시작된 용어상의 혼동과 혼란은 혁명 후까지 이어졌다. 혁명 후 1920년 8월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Russian SFSR)의 자치공화국 중 하나로 성립된 곳의 명칭은 ‘키르기스 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Kirghiz ASSR)’으로서,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키르기스가 가리키는 것은 지금의 카자흐이다. 이렇게 ‘키르기스-카이사크’ 혹은 ‘키르기스’로 불리던 카자흐인들은 1925년 ‘키르기스 ASSR’이 ‘카자크 ASSR’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카자흐’는 1936년에 ‘카자크 ASSR’이 소련의 연방공화국 중 하나로 승격되면서 공식 명칭이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Kazakh SSR)’으로 변경되면서 등장한다. 카자크가 카자흐가 된 데에는 러시아의 카자크와 구분하기 위함이라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볼셰비키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러시아의) 카자크들로 인해 이 용어가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도 한다(「왜 혁명 전까지 러시아에서 카자흐인을 키르기스인이라 불렀을까?」 http://kazakh.orgfree.com/ 참조).
키르기스의 종족적 기원 문제는 중앙아시아의 그 어떤 민족들보다도 복잡하고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다(아브람존, 『키르기스인들과 그들의 민족형성 및 역사-문화적 관계』 참조). 키르기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사서에서 발견된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원전 201년 동천산의 보로-호로 산맥 지역에 살던 키르기스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바르톨드는 키르기스인을 중앙아시아의 가장 고대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한 바 있다(바르톨드, 『중앙아시아 역사 개론』). 키르기스의 어원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이 단어가 합성어라는 점과 키르기스의 앞부분을 이루는 ‘кирк’가 ‘40’을 가리킨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소녀들’에서 ‘부족’, ‘10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가령 ‘소녀들’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는 민간어원론에 따르면 고대 투르크 설화에 투르크 영웅들의 주변에 40명의 병사가, 귀부인들의 주변에는 40명의 소녀가 시중드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브람존(위의 저서)에 의하면 마흐무드 카시가리의 『디완 루가트 아트 투르크(투르크 제어 모음집)』(1077)나 라시드 앗 딘의 『집사(集史)』(14세기 초)등 옛 기록들에서 키르기스라는 명칭을 민족명으로 볼 근거가 희박하다.
이란의 하마단에 있는 라시드 앗 딘 동상. 『집사(集史)』는 몽골의 지배를 받던 이란에서 칸의 칙명에 따라 당시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이 14세기 초에 완성한 역사서이다.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지만 13, 14세기의 몽골어와 투르크어 어휘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