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메타범주명(한글)
자연과 공간
메타범주명(러시아어)
Природа и пространство
메타범주명(그 외 언어)
Nature and space(영어)
연관 핵심코드
강; 도시; 말; 비단길(실크로드); 시골/농촌/마을; 시베리아; 유목민; 집; 카프카스; 토지
본문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의 자연과 공간을 특징짓는 키워드로 광활한 영토를 들 수 있다. 러시아는 그 면적이 한반도 면적의 77배를 넘는 17백만㎢를 상회하는 세계 최대 영토 보유국이다. 유럽의 동쪽과 맞닿아 있고 우랄 지방을 거쳐 아시아의 북쪽을 차지하는 시베리아, 동쪽의 극동지역을 아우른다. 러시아는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며 통상 유럽국가로 간주되지만 영토의 23%만이 유럽에 위치하고 나머지 77%는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다. 다만 인구의 80% 가량이 유럽 쪽 러시아에 밀집해 있다. 중앙아시아의 경우도 카자흐스탄이 270만㎢, 우즈베키스탄 44만㎢, 투르크메니스탄이 49만㎢를 넘는 광활한 지역에 펼쳐져있다.
러시아의 영토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드넓은 평원을 특징으로 한다. 러시아내륙은 해발 평균 500m의 우랄산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평야로 이루어져있다. 유럽 쪽의 국경선에서부터 동쪽의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펼쳐져있는 러시아 평원과 우랄산맥에서 예니세이 강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평원 등 드넓은 평지가 러시아 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광활한 평원은 북쪽의 삼림지대와 남쪽의 스텝지역으로 나뉜다. 이 평원 지대에서 고대로부터 주로 숲을 삶의 터전으로 하여 살아온 러시아인들과 스텝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영위하던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천여 년에 거쳐 조우하면서 분쟁도 하고 교역도 하면서 서로의 삶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러시아의 넓은 평원들을 따라 크고 작은 강들이 유유히 흐른다. 세계의 고대 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러시아의 고대 도시들도 모두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수로체계를 통해 주변 지역과의 왕성한 교역을 도모하게 되면서 강변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 도시가 등장하였다. 세계 제일의 영토 보유국답게 러시아 내에 흐르는 강의 규모나 개수도 가히 세계 최고에 버금간다. 러시아 곳곳에서 1000km가 넘는 80여개의 강을 만날 수 있는데, 러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자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인 예니세이 강(5500km)을 비롯하여 오브 강(5410km, 세계 6위), 아무르 강(5052km, 세계 7위), 레나 강(4400km, 세계 8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시베리아 쪽에 위치하며 러시아의 유럽 쪽으로는 돈 강, 카마 강, 오카 강, 페초라 강이 흐른다.
러시아 강들의 발원지는 대체로 중앙아시아 남단에 위치하는 산악지역이며 카스피해로 들어가는 볼가 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류한다. 대다수의 강이 남북으로 흐른다는 점이 러시아 하천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몇몇 중요한 사회적, 지형적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 먼저, 남북 방향의 유로는 하천의 주된 역할 중의 하나인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는 데 커다란 방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교통수단의 수요가 주로 동서 방향으로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남북 방향의 하천은 이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오래 전부터 운하를 건설하거나 동서 방향의 철도망을 건설하여 주요 하천들을 연결하는 교통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해왔다. 또한 하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기 때문에 해빙기가 되더라도 하구 쪽은 얼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하천의 범람이 자주 발생하여 농업에 큰 지장을 주곤 하였다.
러시아 강은 그 규모가 크다보니 수많은 민족들이 동일한 강을 터전으로 생활하면서 민족 간 문화적 접촉과 충돌이 일어나는 공간이 되어왔다. 이로써 강은 문화의 변형, 재생산, 새로운 문화의 창조 등 독특한 문화 지형적 의미를 지니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흔히 러시아인들은 강을 ‘어머니 볼가 강’, ‘고용한 돈 강’, ‘다정한 드네프르 강’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타문화권과 차별되는 러시아만의 특성으로서 강과 관련된 독특한 문화코드를 형성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평원이 펼쳐져있으나 대부분 초원과 사막으로 이루어져있고 러시아에 비해 하천의 발달이 미미하다는 점은 중앙아시아 공간의 특성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파미르 고원과 텐산 산맥에서 발원하는 아무르다리야강과 지류가 흐르기는 하지만 중상류는 건조 지역으로 지류 발달이 미약한 편이다. 동부에는 나린 강, 제라프샨 강 등이 흐르고 있는데 이들 강은 주로 농작물 재배를 위해 관개수로로 이용된다. 최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강들이 관개수로로 지나치게 이용되다보니 유량이 대폭 줄어드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자연환경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혹독한 기후 조건이다. 러시아의 기후는 춥고 긴 겨울과 서늘하고 짧은 여름이 대비를 이루며 봄과 가을은 매우 짧다.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동쪽으로 갈수록 추위는 더욱 심해진다.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는 주거, 음식, 의복 등 러시아인들의 생활과 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또한 추운 날씨는 겨울철 강의 결빙과 봄철 해빙기에 강의 범람을 초래하곤 하였다. 이는 주민의 생활양식과 리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의 지리적 조건과 자연환경은 이곳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 생활양식, 전통과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령,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러시아의 지리적 위치는 러시아 역사에서 수많은 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며 러시아문화의 독특한 특징으로 이어졌다. 혹독한 기후 조건과 광활한 자연환경은 자연을 극복하려는 모든 노력이 헛되고 오히려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 이롭다는 삶의 지혜를 낳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기후 조건도 러시아 못지않다. 강한 추위와 무더운 여름, 큰 일교차 등은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여러 가지 방식의 흔적을 남겼다. 토양도 비옥한 편이 아닌데다가 끝없이 펼쳐져있는 사막은 교통과 통신을 저해하는 일등 요소이다. 이렇게 건조한 스텝 지대와 사막 지대가 넓게 펼쳐져있는 지리적 환경과 건조한 기후 조건, 비옥하지 못한 토양의 상태는 농업보다 목축업이 발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연평균 강수량이 300mm이하인 스텝지역의 자연환경은 물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형성하여 물과 관련된 수많은 의례와 관습을 태동시켰다.
자연물을 특별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추앙하는 태도는 땅과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의 드넓은 땅은 삶의 터전이자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봉건 국가였던 키예프 루시에서 땅은 봉건제의 토대로 기능하였다. 땅은 공후들에게 세습과 하사라는 수단을 통해 신하와 군대를 결속하고 통치하는 힘을 제공해주었다.
농민들에게 땅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더욱 특별했다. 러시아와 유라시아 지역의 농민들은 마을공동체를 구성하여 토지와 목초지, 숲 등을 공동으로 관리하곤 하였다. 반면 정주하지 않고 이동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에게 땅, 특히 목초지는 소유가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정권의 입장에서도 땅은 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러시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토지제도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861년의 농노제 폐지와 그로부터 몇 년 후 단행된 토지개혁에 의해 과거에 세습과 하사를 통해서만 소유권이 이전되던 토지가 신분과 무관하게 매매할 수 있게 된 것이나,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정권이 ‘토지에 관한 포고령’을 선포하여 모든 토지의 국유화를 선언한 사건 등은 정권에 의해 시행된, 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들이다. 이에 따라 토지에 대한 매매가 금지되고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만 농지 이용권이 제공되는 등 토지제도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시기를 지나 소련의 해체와 함께 토지의 사유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대한 토지가 국가 소유로 남아 있다는 점은 러시아-유라시아 공간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징이다.

한편, 중앙아시아의 자연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원지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목축을 하는 유목의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정주민과는 다른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지니며 살아갔다.
유목민의 주거공간은 해체와 조립이 쉬운 원형 천막 형태가 주를 이룬다. 그 모양과 기능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권에 따라 사용되는 용어가 달라서 투르크어계열에서는 ‘유르트’라 부르고 몽골어에서는 ‘게르’라 칭한다. 유목민들은 이동시 집을 빠르게 해체하여 가재도구와 함께 휴대하였다.
유목민의 주식은 고기와 유제품, 빵이다. 사막과 스텝지역의 특성상 물이 귀했기 때문에 동물의 젖이 물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유제품의 등장과 발달로 이어졌다. 의복 또한 동물에게서 얻은 털과 가죽을 활용하여 지어 입는 경우가 많았다.
유목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동물은 양이다. 양은 유목 환경에 최적화된 동물로 알려져 있다. 필요한 초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다른 동물들이 잘 먹지 않는 풀도 양에게는 유용한 먹이가 되는데다가 양의 생산물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활용도가 높다. 유목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양이 유라시아 지역의 다양한 풍습과 전통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양의 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풍습, 아이의 출생과 관련된 전통관습 등에서 유목민들에게 있어 양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말 또한 이것을 배제하고 유목민의 생활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유목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말은 젖과 고기, 가죽과 뼈, 노동력과 이동수단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활발한 정복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특히 유라시아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민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동물이었던 말은 이 지역의 음식문화, 경제구조, 일상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곳 사람들은 말의 출산주기와 성장주기, 섭식에 따라 생활 반경과 방식을 바꾸어가며 살았다.
말의 중요도와 상징성은 중앙아시아 사회의 말과 관련된 풍습과 전통문화, 그리고 수많은 격언과 속담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를 비롯해 동슬라브 신화나 구비문학에서 말이 주로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데 비해 중앙아시아에서는 말의 비중이 훨씬 높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술작품의 대상이자 주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도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말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유라시아 공간에서 유목민들과 정주민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립과 갈등, 접촉과 교류하며 공존해왔으며 서로에 대한 상반된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예컨대 정주민에게 유목민은 생명과 생활 터전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 유목민은 종종 흉포하고 교양 없는 야만인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다른 한편, 정주민은 유목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호방한 기상을 부러워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혼란의 시기, 내외의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시기에 유목민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유목민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1910-1920년대 러시아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유라시아 지역에 진정한 의미의 유목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목 사회의 전통도 많은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유목민이 지니는 남성성, 야성미, 진취성 등의 긍정적 이미지는 여전히 다양한 문화 현상을 통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유목민들이 목초지를 중심으로 이동 생활을 했다면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의 정주민들은 도시와 시골에서 정착 생활을 했다. 러시아에서는 8세기 중반부터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노브고로드, 키예프, 수즈달과 같은 중세 러시아 도시들은 서유럽 도시의 기본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활발한 교역을 토대로 도시에 경제력과 정치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도시들은 서유럽 도시들과는 상이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서유럽 도시들이 르네상스와 자본주의에 힘입어 도시 국가 형태로 성장해나간 것과 달리, 러시아의 도시들은 몽골의 침략과 압제 속에 혼란과 파괴를 경험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도시의 기능이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후에 새롭게 형성된 도시들에서는 방어와 보호의 기능이 전면에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러시아의 2대 도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형성과 힘의 확장 과정은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한 근대 이후 서유럽의 여러 도시들이 비교적 균등하게 발전한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 정치, 경제, 문화적 힘과 자원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러시아 도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현 수도인 모스크바와 옛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라면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로는 고대로부터 수많은 왕국과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해온 고대 도시 사마르칸트를 들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중동부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는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중앙아시아 도시의 전형적인 특색을 잘 보여준다.
도시가 경제, 정치,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주민들의 주요 거주 공간은 농촌이었다. 러시아-유라시아의 농촌 마을은 마을공동체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미르’와 중앙아시아 사회의 ‘마할라’를 중심으로 각종 주민 행사, 놀이와 축제문화, 가족 기념일 등을 공동으로 주관하고 함께 즐기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통해 러시아-유라시아 사회에 전통적으로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적 성향, 공동체 문화가 발달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미르와 마할라는 도덕적 규범, 관습, 자치법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특히 마을의 원로들이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측면에서 유사성을 드러낸다.
러시아-유라시아 공간에서 농촌은 도시와의 대립적인 관계 속에 여러 가지 이미지와 표상을 창출해냈다. 농촌의 개혁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외치는 이들 사이에서는 미개함, 낙후성, 후진성, 전근대성, 폐쇄성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러시아의 변화를 갈망하는 지식인들에게 농민은 계몽의 대상이 되었고 농민공동체는 해체되어야 할 낡은 잔재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미르를 러시아적인 진보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으며 농촌을 유럽문명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공존하였다.
러시아의 농촌은 오랜 세월 동안 농노제의 사슬에 묶여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농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노동력을 착취해온 농노제는 19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폐지되는데 러시아 정치와 사상, 사회와 역사, 문화와 예술에 농노제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시골은 러시아보다도 더욱 많은 변화를 겪었다. 러시아의 영향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주로 유목 혹은 반유목 경제에 따른 이동식 마을이 중앙아시아 시골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와 소연방에 의한 두 차례의 근대화 과정은 중앙아시아의 도시화와 산업화를 촉진한 동시에 유목민, 반유목민의 정주화를 조장하였고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마을도 정주형 농촌으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비에트 시대에 중앙아시아의 시골은 면화 등 특정 품목을 집중 생산하는 농촌 산업 지역으로 변화되어나갔다.
이렇듯, 소비에트 시대에 농촌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막론하고 정권의 산업화와 공업화를 위해 식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임무를 담당해야했다. 착취와 억압의 공간이었던 농촌은 콜호즈(집단농장) 등으로 강제로 집산화되었다.
러시아-유라시아의 도시와 농촌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있어 주거 공간으로서 집은 특별한 의미와 위상을 지닌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집이 보호와 휴식의 기능을 가지는 것은 공통적이겠으나,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혹독한 기후조건은 집에 특별한 의미와 역할을 부여하였다.
러시아 민중들의 전통가옥인 ‘이즈바’에는 종교적 요소가 풍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이즈바 안에서 민간신앙에 따른 여러 가지 의례가 치러지기도 하고 정교가 뿌리를 내리면서 점차 이콘(성상화)이 이즈바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아나갔다. 이렇듯 민중들에게 집은 단순히 보호와 휴식의 공간을 넘어서 종교적 가치가 보존되는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반해 러시아 귀족의 집은 농민의 이즈바와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났다. 18세기를 거치면서 서유럽 문화의 영향 아래 귀족의 집은 이전의 러시아 전통 주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서구식 저택으로 변모해나갔다. 귀족의 집이 저택으로 확대된 데는 서유럽에서 유입된 대규모 파티, 무도회, 살롱 등 귀족문화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전통식 주택에서 이러한 대규모 행사를 열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혁명 후 러시아의 주거 형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정권의 밀집화 운동에 따라 과거 귀족의 대저택을 여러 세대의 노동자들이 공유하는 공동 주거 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이후 소비에트 주택의 상징인 소위 ‘코무날카(공동주택)’로 발전하게 된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가옥에서도 자연, 지리적 요인과 종교적 영향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외세의 잦은 침략과 건조한 기후, 사막 환경은 집의 외관에 쳐져있는 높은 벽들과, 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집의 위치, 그리고 집의 필수요소로 마당의 존재 등을 설명해준다.
특히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에게는 이러한 정착식 가옥보다 이동식 가옥이 중요한 주거 공간이었다. 이동식 목축업에 따라 간편하게 설치하고 빠르게 해체할 수 있도록 고안된 ‘유르트’는 현재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집’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들에게 유르트가 단순히 이동식 가옥이 아니라 집 그 자체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전통 가옥들도 러시아의 영향이 강력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고 이들의 주거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집단 주거 양식들이 대거 들어섰으며, 중앙아시아 전통 가옥과 여러 측면에서 차이가 나는 러시아식 집도 곳곳에 등장하였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코무날카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 등 외부의 영향과, 경제 구조의 변화 등 내부적 요인에 의해 중앙아시아 사회의 주거 공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공간들이 즐비하다는 점 또한 러시아-유라시아 자연과 공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유라시아 공간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들 수 있다. 처음에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들을 거쳐 서아시아에 이르는 육상 교역로를 지칭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실제 물리적인 길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유라시아 지역, 더 나아가 세계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을 지칭할 때에도 쓰인다.
실크로드에는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의 3대 간선이 가로로 나있고 이 간선들이 5대 지선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보다 규모가 작은 지선들이 무수히 얽혀있다. 3대 간선 중 가장 먼저 이용되기 시작한 초원길은 흑해 동북편에서 출발하여 카스피해, 카자흐 초원, 알타이산맥을 지나 한반도로 이어진다. 오아시스길은 사막과 초원의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하는 길로서 이 길을 통해 로마의 도기 제조법이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중국의 제지법과 비단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해상 실크로드(바닷길)는 정치적인 이유로 육로의 이용이 불안정해질 때 육로를 대체하는 교역로로 각광받았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한 중세에 오아시스길의 대체 교역로로 활발히 이용되었다. 특히 아랍상인들에 의해 해상 실크로드가 크게 번성하게 되는데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나침반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5대 지선은 ‘호박로’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명칭 없이 노선으로 지칭되었으나, 교류의 특성을 반영하여 말 교역이 주로 이루어지는 ‘마역로’, 라마교가 전파된 노선인 ‘라마로’, 불교의 전파로인 ‘불타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거치는 ‘메소포타미아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호박로’라는 명칭도 발트해 연안의 호박이 이 길을 따라 지중해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3대 간선과 5대 지선 외에 실크로드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선들도 동서교역에 이바지하였다. 가령 16세기 이후에 러시아가 시베리아 지역으로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크게 확장된 시베리아 초원길도 그러한 지선들 중 하나이다. 남부 러시아의 초원지대, 볼가 강 유역, 시베리아 북방 침엽수림 지대를 거쳐 헤이룽 강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통해 시베리아의 모피가 러시아 서부로 유입되면서 ‘모피의 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통해 다양한 물적, 인적, 정치적, 사상적, 학문적, 언어적, 문화적, 종교적, 군사적 교류가 있어왔으며 이러한 교류가 형태와 양식을 달리하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러시아-유라시아 지역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 있다. 바로 우랄 산맥의 동쪽에서 태평양 연안의 캄차카 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펼쳐져있는 시베리아가 그것이다. 시베리아에는 러시아인을 비롯해 유럽-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여러 민족과 부랴트족, 에벤키족, 네네츠족, 추코트족, 에벤족 등 원주민이 거주한다.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도유럽어에서 투르크어, 우랄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종교 또한 언어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러시아정교, 이슬람, 티베트 불교, 유대교 외에 시베리아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 토착 민간 신앙이 오늘날까지 신봉되고 있다.
16세기부터 본격화된 러시아의 동진정책으로 시베리아는 빠르게 러시아에 복속되어 나갔다.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는 처음에는 모피를 얻기 위한 사냥터로, 다음은 농사와 교역의 터전으로, 마지막으로 광대한 자원 개발을 위한 처녀지로 각광받았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농노제의 압박을 피해 시베리아의 자유로운 땅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농민들과, 정치범을 비롯한 수많은 유형수들이 시베리아의 개발과 식민화 과정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일부가 되면서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에 걸쳐있는 나라로 변모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는 유럽-러시아에 대비되는 아시아-러시아를 대변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점차 본격화되는 러시아의 영토 팽창과 식민 개척의 과정을 통해 러시아사회에서 점차 ‘유라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때, 시베리아가 유라시아성의 중대한 하나의 축인 아시아적 요소의 근간을 대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러시아 문화사에서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전반적으로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원론적 대립 속에 사유되어왔다. 가령 시베리아는 자연-지리적 차원에서 추위와 어둠의 땅이자 풍요와 신비가 넘치는 광활한 대지로 다가왔으며, 정치-사회적 차원에서는 유형과 추방의 땅이자 자유와 해방의 대지로 지각되었고, 경제-환경적 차원에서는 천연 자원의 보고로서 기회의 땅이자 자연 생태의 착취와 파괴의 현장으로 기록되었으며, 문화-인류적 차원에서는 야만과 몽매의 황무지이자 민속과 신화의 본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21세기에 시베리아는 에너지, 교통물류, 자원의 보고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를 주도할 전략적 거점으로 새로이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추어 시베리아의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정치 및 사회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민과 실현 방안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러시아의 서남부 지역으로 가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카프카스 산맥을 중심으로 펼쳐져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공간, 카프카스를 만날 수 있다. 인류 발상지의 한 곳으로 꼽힐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니는 카프카스는 초기 서구 문화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및 그리스 신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노아의 방주가 떠내려가다 멈추면서 뱃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지는 아라라트 산이 바로 카프카스 산맥이며, 프로메테우스가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죄로 사슬에 묶여 수백 년간 형벌을 받은 곳도 다름 아닌 카프카스의 엘브루스 산이다.
카프카스가 러시아-유라시아 문화 지형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히 복합적이고 중대하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서 정치군사적 요충지이자 사회경제적 거점인 카프카스에서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기독교와 이슬람 등이 각축하며 특이한 관계망을 형성해 왔다. 특히 카프카스는 러시아와 카프카스 민족(국가)들 사이에 복잡다단한 애증관계가 끊임없이 표출되는 특별한 역사, 문화적 공간이기도 하다.
카프카스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민족, 종교, 언어들과 그것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화들이 때로는 경쟁하고 충돌하며, 때로는 결합하고 소통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공존해온 온 공간이다. 언어는 크게 3개의 어족으로 구성되는데 카프카스어계통, 인도유럽어계통, 투르크어계통이 발견된다. 종교도 다양하여 정교, 이슬람, 유대교 및 각양각색의 민간 신앙이 혼재한다. 이렇듯, 카프카스는 민족, 언어, 종교적 측면에서 특유의 다양성과 혼재성을 기반으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러시아와 카프카스의 애증의 관계는 18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카프카스 징벌 정책으로 더욱 본격화된다. 19세기 중반 체르케스 민족의 저항이 최종 진압되면서 카프카스가 러시아에 완전히 복속하게 되고, 카프카스 민족들의 반러 감정은 더욱 확산되어나갔다.
특히 소비에트 시대에 카프카스 지역을 둘러싼 각종 정치적, 행정적 변화와 함께, 체첸지역 및 남카프카스, 북카프카스 지역에 유전지대 개발을 위해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산악인들과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과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갈등이 적지 않게 표출되었다.
무엇보다도,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비롯한 소비에트화 정책에 완강하게 저항했던 체첸인들과 북카프카스인들을 카자흐스탄 및 키르기스스탄으로 강제 추방해버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정책이 가한 충격과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이는 카프카스인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언어, 종교, 전통관습, 경제 방식에 이르기까지 민족정체성을 형성하는 모든 요인들을 제거하려는 일종의 민족말살정책이었다. 스탈린의 강제추방 조치는 카프카스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이는 반소, 반러 감정을 더욱 강화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소연방 해체 후 남카프카스 지역의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하였지만 북카프카스의 민족들은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으로 다시 편입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립 국가를 이루려는 체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끊임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광활한 영토와 혹독한 자연, 기후 조건을 특징으로 하는 러시아-유라시아의 자연과 공간에서 사람들은 광활한 평원 지대를 중심으로 아주 먼 과거로부터 긴 시간동안 서로 만나고 싸우고 교역도 하면서 서로의 삶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혹독하고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 각 문화권마다 독특한 생활양식, 전통과 문화, 가치관이 형성되어왔으며, 이와 동시에 러시아-유라시아 공간을 아우르는 유사성도 많은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의 자연과 공간이 드러내는 두드러진 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