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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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귀금속(보석); 도자기; 돈; 술(보드카); 음식; 의복; 죽음; 축제
본문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혼인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꾸리고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이다. 일련의 과정들은 개인의 일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구성원의 충원을 통한 다음 세대로의 연속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개인의 일생의례는 각 공동체 내에서 정형화된 방식으로 기려지며, 공동체 성원들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잔치음식과 음주가무, 의례를 통해 내적으로 일어나는 지위와 역할의 변화는 의례에 축제성을 부여한다. 의례의 시기, 방식과 공동체 내에서의 의미는 시대와 상황,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드러낸다. 의례에는 대체로 술과 음식이 수반되며, 착용할 의복과 장신구가 정해져 있다.
오늘날에는 특정 연령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말 다루는 실력을 성인의 자질로 꼽았다. 몽골계 민족들의 성년식은 매해 첫 눈보라가 치는 사흘째 되는 날 실시된다. 열 살짜리 소년들이 왕복 80km를 완주해서 성인이 되었음을 입증했다.
인간이 성장하여 새로운 가족을 꾸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결혼을 한다. 평균수명이 낮고 노동력이 중요하던 시절에는 조혼이 유행했다. 러시아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15세 미만의 남자, 13세 미만의 여자가 결혼하는 일이 잦아 법으로 금지해야 했다. 카르파티아 산맥에 거주하는 집시들은 오늘날에도 18세 미만에 결혼하는 비율이 60%를 넘으며, 그중 절반은 16세 미만에 결혼한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결혼 논의 과정이나 결혼식 때 일상음식인 빵을 대접하거나 나누어 먹으면서 빵에 일종의 상징성을 부여하는 공통점이 관찰된다. 특히 동슬라브 사회에서 빵과 소금은 환대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새로 맞이할 가족에게 반드시 대접해야 했다. 야쿠트족의 경우에는 신랑신부가 말의 심장과 간을 삶아서 함께 먹으면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믿었고, 신랑이 죽그릇을 비우는 것으로 신부의 순결을 알린다.
잔치에 쓰일 술과 음식을 이웃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결혼식은 개인이 여는 작은 축제이다. 우즈베크어와 카자흐어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축제’와 결합하여 합성어를 형성하며, 결혼식의 대외적 의의를 드러낸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 예복으로 성장하고 손님을 대접한다. 잔치는 몇 시간 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며칠씩 이어지기도 한다. 행정기관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것으로 의례를 대신한 소련 시기에도 지인들을 초대한 피로연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사의 대부분이 돈, 재화와 연결되어 있지만, 결혼은 특히나 노동인력의 양도라는 측면에서 경제논리와 맞닿아 있다. 고대 슬라브인들에게서는 약탈혼이 횡행했으며, 몽골 계통은 신랑이 처가살이를 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나중에 신부를 데려왔다. 잔치비용 부담 문제부터 지참금을 주고받는 문화가 있는 곳에서는 지참금의 규모와 내용도 협의되었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혼사가 무산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을 갔으나, 중앙아시아 유목사회에서는 남자 측에서 신부의 부모에게 신부대를 지불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신부대는 화폐부터 가축과 가재도구, 식량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지참금이 오가지 않을 경우에도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상대방의 재산과 지위는 매우 중요한 고려요소이다.
한편, 근대로 오면서 결혼은 부모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결정할 문제라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되었다. 부모와 집안의 이해관계보다 당사자들의 감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퍼졌으며, 이로 인해 전통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중매쟁이의 비중이 축소되었다.
결혼 의식을 통해 신랑과 신부의 신분은 미혼에서 기혼으로 바뀐다. 기혼 유무를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의복이나 머리스타일을 바꾸는 사회도 있다. 과거 러시아 농촌의 기혼 여성들은 머리를 땋았는데, 결혼식 날에만 머리를 푸는 것이 허용되었다. 시댁 식구들이나 외부인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가려야 했으며, 머리를 가릴 모자인 코코시니크를 인계받는 절차가 결혼식에 포함되어 있었다. 혼수품으로 준비해 가는 코코시니크는 진주와 각종 보석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혼이 가족의 탄생, 이어 출산을 통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죽음은 소멸과 맞닿아 있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러시아에서 근대 이전에는 이승에서의 삶의 종료가 존재의 소멸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자연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유목민들도 마찬가지이다. 벡위드는 친위대(코미타투스)가 통치자 사망 후 순장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저승에서도 통치자의 적들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이 그 대가로 저승에서도 화려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통치자의 무덤은 사치스럽게 꾸며져야 했다.
객사나 급사는 저승에서의 안식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자살은 인도유럽인들 사이에서 자애와 풍요의 대지모신이 용납하지 않는 죽음의 방식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더더욱 터부시되었다. 주요 종교에서도 자살을 금기시하며, 중앙아시아에서도 8세기 이후로 이러한 관념을 공유했다. 반면 축치족, 코랴크족, 캄차달족은 전사나 자살을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기고, 자연사를 악귀나 흑샤먼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서구 계몽주의 사상이 도입되면서 자살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넘어왔다. 일각에서는 자살이야말로 용감하고 자유로운 죽음이라 믿기도 한다.
죽음과 관련된 의례는 장례식이다. 러시아인들은 정교 수용 이전에는 화장을, 이후에는 매장을 행했다. 매장하기 전에 사체를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히고 사제가 기도문을 읽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한다. 의복과 장신구, 식기, 재물, 가재도구 등의 부장품이 함께 묻혔다.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와 동일한 화폐가 사용된다는 믿음 아래 화폐도 함께 묻었고, 유목민족들은 망자의 혀 아래 은화를 상징적으로 넣어두었다. 이슬람교가 전파된 중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진행된다. 몽골의 경우 3년간 풍장하고 그 후 화장이나 매장을 했던 듯하다. 라마교 수용 후에는 망자의 물건을 태워 바치는 툴레시 의식이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매장이 일반적이다. 소련 시기에는 화장을 정책적으로 추진했다. 장례가 끝나면 추모식이 이어진다. 러시아에서는 사후 9일, 40일째 되는 날, 중앙아시아에서는 3일, 7일, 40일째 되는 날 추모식을 행한다.
장례식과 추모식에도 술과 음식은 필수적이다. 슬라브인들은 꿀죽을 끓여서 대접한다. 몽골인들은 망자 앞에 고기와 마유주를 차려 두었고, 지기들이 와서 망자에게 양을 잡아 음식을 바쳤다. 술과 음식, 곡소리와 음악은 장례식에 일종의 축제성을 부여한다. 야쿠트족의 경우, 노인이 사흘 동안 잔치를 열고, 그 후에 생매장을 당하거나 숲에서 굶어죽었다.
망자나 장례와 연관된 자는 부정을 옮기지 않도록 여러 가지 금기를 겪었다. 시베리아에서 유족이나 매장을 담당한 자들은 죽음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나 생산도구를 만지는 일 등이 금기시되었다. 불이나 향으로 정화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도 고인의 영혼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정해진 절차와 방법을 따라야 했다.
한편, 살인은 윤리적, 법적 문제이면서 피해자의 노동력이 손실된다는 점에서 재화와 연결된다. 중앙아시아의 유목국가에서는 사람을 살해하면 가축으로 보상하도록 규정했다.
일생의례와 달리 축제는 세시풍속이나 종교 축일, 정치적 사건 등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계절의 변화, 수확, 성공적인 수렵 및 어획 등을 기원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과 음주가무가 수반되는 잔치가 어우러진 것이 축제의 시작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은 춘분에 유목과 농경의 성공을 기원하며 ‘새로운 날’ 나브루즈를 준비한다. 여름에는 나담을 실시한다. 동슬라브인들도 절기마다 축제를 벌였는데, 러시아 정교회는 후에 포교를 위해 민간 축제와 정교축일을 결합시켰다. 절식과 기도로 보내는 사순절(부활절 전 40일) 전 일주일 동안 봄맞이 축제 마슬레니차를 치른 후, 사순절 직전의 사육제에 음식과 술을 실컷 먹고 즐긴다. 하지의 쿠팔라 축제는 세례 요한 축일과 결합하여 이반 쿠팔라 축제로 변형되었다. 동지 축제 콜랴다는 크리스마스 주간과 융합되었다. 이슬람을 수용한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한 달여의 라마단(제9월)이 끝나면 사흘 동안 축제 이드알피트르를 연다. 제12월에는 이슬람 최대의 명절인 희생제(이드 일 아드하)가 있다. 성지순례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사흘 동안 주변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축제를 즐긴다.
소련 시기에 부활절을 비롯한 종교 축일은 금지되고,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는 전통축제들도 탄압을 받았다.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전통을 복원하고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각국에서 축제를 부활, 복원시키고 후원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각국에서는 독립기념일 축제도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다.
축제에는 시합과 놀이가 크게 행해진다. 마슬레니차에는 트로이카 썰매 타기, 주먹싸움, 모닥불 축제 등이 벌어진다. 장신구도 축제 놀이에 활용되었는데, 성탄절에 처녀들이 원을 만들고 술래가 원 안에 들어가 금반지를 쥔 사람을 찾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는 유목국가 시절의 휴전기에 훈련과 놀이를 겸해 실시했던 각종 마상경기와 사냥, 말경주, 씨름, 수레 경주 등을 축제의 놀이로 변모시켜 즐긴다.
축제에 술과 음식이 빠질 수 없다. 버터 ‘마슬로’에서 파생된 봄축제 마슬레니차는 절식 기간에 금지되는 고기 대신 버터를 비롯한 유제품과 달걀은 허용되는 기간이다. 다양한 블린을 구워 나누어 먹는다. 수요일에는 장모가 사위에게, 금요일에는 사위가 장모에게 블린을 구워 대접한다. 부활절에는 부활절 빵(쿨리치)과 부활절 케이크(파스카)를 구워 성당에 가서 축성을 받은 후 나누어 먹는다. 라마단을 지키는 지역에서는 낮 동안 금식하고 해가 지면 불우한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어준다. 이드 일 피트르 때에는 부유한 자들이 큰 잔치를 열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한다. 유목사회에서는 정결한 흰색을 띠는 마유주가 정화와 축복의 의미를 지녀 축제 여러 과정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나브루즈 때는 호밀의 싹을 틔워 오랫동안 끓인 수말락을 먹는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나브루즈에 물, 고기, 소금, 기름, 밀가루, 곡류, 유제품이 들어간 죽 나우르즈 코줴를 나누어 먹는다.
의식은 비일상적이다. 의식에 필요한 방향, 장소, 절차, 방식, 음식, 물품 등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 음식과 술에서 의복, 돈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에 비일상성이 부여된다. 그 비일상성이 인류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각종 의식에 해당 공동체의 특수성을 부여해 준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생필품들은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그 양상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것들을 다루는 태도 등을 통해 그 사회의 특징과 세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먼저 인간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음식을 보자. 농경민인 슬라브인들은 곡물과 채소 위주의 식사를 했다. 고기와 유제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 유목민들은 고기와 유제품이 주식이고, 농경민과의 무역이나 약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곡물은 적게 먹었다. 채소는 거의 먹지 않았다. 이동 중에 고기와 유제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가공법을 발달시켰다. 유목민의 주식이던 샤실리크와 발효 유제품, 만두 등은 몽골 지배기에 러시아로 유입되어 점차 일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반대로 유목민족이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는 유목민들의 식생활에서 곡물과 채소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코스요리도 러시아를 통해 이들 사회에 전파되었다.
18세기까지 러시아인들은 하루에 5차례 식사를 했다. 18세기 이후부터 서구의 식생활을 받아들인 귀족층과 하층민의 음식은 크게 달라졌다. 미식이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서구식 식사예절과 도자기, 테이블 세팅 등이 귀족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전까지 러시아 귀족들은 도자기보다 은식기를 선호했다. 유목민들은 가볍고 튼튼한 목기를 즐겨 사용하고, 손으로 먹는 음식 종류도 많다.
식생활에서 차의 비중도 크다. 러시아는 17세기에 처음으로 차를 접했는데, 차가 대중화됨에 따라 잼을 차에 넣어 마시거나 각설탕을 입에 물고 차를 마시는 러시안티 방식을 고안했다. 차 끓이는 도구인 사모바르는 러시아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오늘날에는 실제로 쓰이는 일은 드물고 장식품으로 활용된다. 채소 섭취비중이 매우 낮았던 유목민들에게 차는 중요한 비타민 공급책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이 즐겨 마시는 수테이 차이에는 찻잎 외에 우유나 마유, 소금이 기본적으로 들어 있으며, 때로는 으름이나 수수까지 첨가된다.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차와 크게 다르다.
술도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달했다. 동슬라브인들은 일찍부터 술을 많이 마시는 것으로 동시대인 주변인들에게 유명했다. 곡주보다는 꿀술과 포도주 등이 음용되었으나 술이 귀해 축제, 의례, 연회 등의 특별한 날에만 마셨다. 증류주가 발달한 것은 15세기 말 이후이며, 이때부터 술이 개인적, 일상적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마유를 발효한 마유주, 마유주를 증류한 아르히, 아라카 등이 발달한 것이 특징적이다. 마유주는 도수가 낮아 술이라기보다 음료로 여겨지며, 아이들도 일상적으로 마신다. 캅카스 일대에서는 포도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해서 고농도 차차를 만든다. 20세기부터 보드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보드카는 일상으로 더더욱 파고들었고, 중앙아시아 각 지역의 전통주마저 보드카와 포도주, 코냑 등이 대체하고 있다.
독주가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끼치자 국가와 교회는 술의 위험성을 경계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정교가 독주를 금하자 보드카를 다양한 수식어가 결합된 포도주로 위장하여 부르는 방식으로 회피했다. 정부에서 밀주를 금지하고 주세를 높였으나, 폭음으로 인한 각종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세의 위력을 알게 된 정부가 주류 유통에 일조하는 부조리가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 말기에 금주법이 일시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지만 공업용 알코올 음용으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될 뿐이었다. 직접 담그는 독주인 사마곤 또한 법적으로 금지된 시기에도 근절되지 않았고, 오늘날에는 행사에서 참석자들의 친밀감과 동질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의복은 더위와 추위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역할에서 착용되기 시작했으나, 점차 착용자의 사회적 신분 등을 나타내는 표식이 되었다. 금실, 은실과 보석으로 장식한 고가의 의복은 신분과 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사제복이나 무당의 무복, 군복 등은 착용자의 직업을 드러낸다. 혼례복, 수의, 장례복 등 각종 의례의 의복은 비일상성의 표상이며, 착용자의 일시적 신분을 보여 준다. 공동체의 일원들은 의례복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정성 들여 마련한다. 축제 의상은 일상복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특별한 복장 규정이 없을 때에는 새 옷을 마련하여 입는 방식으로 행사를 기리기도 했다.
세계화가 의복의 탈문화적 추세를 불러왔지만, 과거에는 환경과 전통이 공동체의 복색을 만들었다. 러시아는 광범위해 복식에도 지역차가 있다. 여성 의상의 경우, 남부에서는 치마인 포뇨바가, 북부에서는 원피스인 사라판이 일상적이었는데, 19세기 말에 사라판이 전국에 보급되었다. 남성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통이 좁은 바지를, 우크라이나 서남부에서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다. 셔츠를 입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전자는 셔츠를 밖으로 꺼내고, 후자는 안으로 넣어서 입었다. 추운 계절에는 모피가 착용자의 부를 드러내는 위신재의 역할도 겸했고, 추운 지방에서는 신분과 계절에 무관하게 털옷을 착용했다. 유목전사들은 양털로 만든 상의 하나로 사시사철 입기도 했다. 여름에는 팔을 꺼내서 어깨에 걸치고, 겨울에는 팔을 끼우고 여미며 체온을 조절했다. 장신구도 지역색이 있어, 19세기 니즈니노브고로드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긴 진주목걸이를 여러 번 둘러 감았다는 관찰기록이 전해진다.
정책이 의복문화를 결정하기도 한다. 표트르 대제는 18세기에 서구 문물을 도입하면서 귀족층과 관리, 군인의 복장을 서구식으로 강제했다. 복장 외에도 머리스타일, 화장 등을 엄격하게 정했다. 종교인과 농민들, 소시민은 전통 복장을 계속 입을 수 있었다. 반면 19세기에 예카테리나 2세는 스스로도 러시아 의상을 착용했으며, 궁전에서 시녀와 궁녀들이 러시아 복장을 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여제는 또한 고관과 관리의 정복도 도입했다.
교역이 발달하면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화폐 거래는 물물교환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시장이 있고 화폐가 도입된 곳에서 화폐로 구매하지 못하는 상품은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우선 주화를, 그 다음으로 지폐를 발행, 유통시켰다. 금융시스템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어음, 수표 등 화폐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다.
청동기, 철기 시대에 청동과 철로 화폐를 주조한 곳도 있지만, 곧 희소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잘 부식되지 않는 금과 은이 화폐의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서기전 6세기에 멸망한 리디아의 금화와 은화 주조기술이 그리스로 전파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이후에 그리스의 금화와 은화가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도 유통되었다.
실크로드가 무역중심지로 거듭나면서 주요 도시에서 아랍 세계의 디나르(금화)와 디르헴(은화)가 주조, 유통되었다. 키예프 루스에 디나르와 디르헴을 유입한 것은 루스 땅을 가로질러 콘스탄티노플과 무역한 북유럽 바이킹들이었다. 10세기 루스에는 막대기나 마름모 모양의 은화인 그리브나가 있었으나, 일정한 무게와 형태, 순도를 유지하던 아랍의 금화와 은화가 더 선호되었다. 루스에서 처음으로 금화와 은화를 주조한 것은 10세기 말 블라디미르 대공이며, 화폐 주조는 정교 수용과 맥을 같이한다. 한 면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른 한 면에는 블라디미르 대공의 이름을 새긴 주화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일시적이었고, 그리브나와 디나르, 디르헴이 계속 유통되었다. 이후 루스는 몽골 지배기에 킵차크 칸국의 영향을 받아 은 주화 제작을 재개했다. 은화는 금화보다 일상적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은과 돈이 함께 언급된 격언이나 속담이 러시아어에 잘 반영되어 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지폐가 발행된 것은 1769년이다. 지폐는 중국 당대에 도입되었는데, 유럽에는 원대에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을 통해 그 존재가 전해졌다. 유럽보다 더 이른 시기인 몽골 통치기에 루스에도 지폐가 알려졌다. 쿠빌라이 칸이 은화를 지폐로 대체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일 칸국과 차카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은 여전히 은화를 주조, 유통했다. 그리하여 러시아가 스스로 지폐를 발행한 것은 몽골 지배기가 아니라 유럽보다 한 세기 늦은 18세기였다.
금은을 비롯한 보석과 귀금속은 재화로 여겨지기도 하고, 실용적, 장식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석과 귀금속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위신재로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특정한 보석, 귀금속으로 만든 특정 장신구를 향유할 수 있는 신분이 제한된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관(冠)이다. 보석과 귀금속은 종교적으로도 많이 활용된다.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지역에서는 금으로 만들거나 금박을 입힌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중앙아시아의 고위 사제나 제사장은 금관을 착용하여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정교를 도입한 동슬라브인들은 성서와 복음서, 성화를 장식하는 데 각종 보석과 귀금속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귀금속과 보석에 대한 선호도, 용도 등은 환경적, 문화적 차이를 반영한다. 유목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어도 스키타이인들은 금 또는 은으로만 만든 장신구, 장식품을 선호했고, 사르마트인들은 금은 바탕에 터키석이나 석류석과 같은 보석들을 감입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유럽에서는 진주가 널리 쓰이지 않았으나, 러시아 여성들은 진주를 선호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신분에 무관하게 진주를 이용한 장신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은제 식기를 폭넓게 사용했으며, 러시아 차르와 귀족들도 18세기 이전에는 도자기보다 은식기를 선호했다. 19세기에는 도시 중산층들도 은식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이후로는 러시아에서도 지역색을 지닌 다양한 도자기가 제작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두루 사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 집단의 세태는 무형과 유형의 문화를 통해 그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세속적인 재화에서 가장 탈속적인 의례에 이르기까지 유무형의 문화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본 문화코드 사전에서는 러시아-유라시아 공간에 존재했던 모든 공동체의 모든 시기의 특징을 기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본 사전은 이 지역의 세태와 풍속을 파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되는 핵심코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압축적이고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하도록 노력한바, 커다란 줄기를 파악할 수 있는 길잡이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