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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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문명교류; 문자; 문장; 인텔리겐치아; 정치제도; 카자크; 혁명;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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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명칭은 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 21개의 공화국, 49개의 주, 변경 지역 6개, 자치주 1개, 자치구 10개, 수도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특별시 2개를 포함한 총 89개의 연방 주체로 구성.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 남동쪽은 중앙아시아, 북서쪽은 북극지역. 총면적 1,709만km2로 지구 육지 면적 7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에서 제 1위의 영토 국가. 영토내의 시차가 11시간. 10개 이상의 국가와 인접. 인구 약 1억 3,808만 명. 150개의 민족.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레닌, 스탈린.
이상의 것들은 러시아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사실들이다. 러시아는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 중에서 위에 언급한 내용대로 대단히 광활하고 복잡한 나라이다. 따라서 러시아를 한두 가지 기준으로 설명하면 종종 오류를 범한다. 모스크바의 발달된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슬라브족도 러시아인이고, 북극에서 순록과 함께 생활하는 네네츠족도 러시아인이다. 추코트 반도와 칼리닌그라드의 시차가 11시간이나 되어도 두 지역 모두 러시아다.
전 세계의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오랜 시간 역사적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러시아만큼 역사의 급격한 굴곡과 정치적 변혁을 겪은 나라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역사적 사건의 의미와 배경,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온 국가로서의 러시아와 그 국가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의 삶의 양상들을 다양한 각도로 성찰해보는 것이 러시아를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역사의 가장 큰 변혁으로 988년 키예프루시의 정교수용, 13-15세기 몽골의 지배,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개혁, 1812년 나폴레옹 전쟁, 1917년 사회주의 혁명, 1991년 소연방 해체 등을 꼽는다. 천 년이 넘는 러시아 역사에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였지만 위의 사건들은 러시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일시에 변화시킨 ‘변혁’이기 때문일 것이다.
988년 정교수용은 러시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힌다. 러시아 정교는 천년 동안 러시아의 국교였다. 988년 동방정교로부터 신학과 예배의식을 수용한 이후 러시아 정교는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하였고 신학, 언어, 회화, 음악은 러시아 역사, 예술,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정교는 국가의 정체성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지녔다. 러시아가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유럽이나 아시아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러시아 정교는 가톨릭, 개신교와도 다르다. 러시아 정교 문화에는 신비주의적이며 비합리적인 동양 종교의 특성도 있다. 러시아 정교는 구조적으로 국가 지향적이었는데 정교회 지배층들은 러시아 대중들보다 국가 권력과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반면 러시아 대중들은 러시아 정교를 믿으면서도 전통적인 민간신앙의 생활방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교는 서구 기독교에 비해 덜 철학적, 제도적인 반면 예배 의식, 건축, 회화 등 종교예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러시아인들은 비잔틴 신학과 성당, 이콘, 모자이크, 성가를 독창적으로 결합하였다.
문화코드적인 면에서 정교가 러시아 정치 역사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키예프 루스가 유대교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유럽 대륙의 변방에 머루를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문명에 포함되려는 정치, 문화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오히려 동방정교를 수용하여 서구 라틴 문명과 동떨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러시아 정교가 오랜 시간 민중을 억압하는 정치적 논리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모스크바 제 3로마설’이다. 모스크바 제 3로마설은 1453년 동방정교의 종주인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1480년 러시아가 타타르 압제에서 벗어나던 시기에 발생했다. 당시 러시아는 타타르 지배에서 해방됨으로써 러시아 민족성을 새롭게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는 분열된 여러 봉건 국가들을 통합하면서 정신적 통일성이 필요했다. 비잔티움은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했지만 러시아는 반대로 이교 세력에게 승리했다는 점이 모스크바의 위상을 올렸다. 차르라는 용어는 이반 3세까지 황실에서만 사용되었으나 이반 4세부터 러시아 전체의 군주를 의미하는 뜻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차르라는 용어는 서구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했지만 러시아에서는 황제인 동시에 신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모스크바 제 3로마설은 러시아 민족에게 특유의 선민사상, 러시아적 메시아니즘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모스크바 제 3로마설은 러시아 정교회가 국가와 결탁한 사례이다. 군주들은 국가와 교회가 하나라는 사상을 통해 실질적으로 신정정치와도 같은 강력한 전제정치를 했고, 거꾸로 러시아 국민들은 전제정치의 폭정과 압제를 신의 벌로 받아들이고 인내하였으며 스스로를 참회하였다. 국가와 군주의 통치에 대한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신념은 사회주의 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불리는 알려진 13세기 중반에서 15세기 말까지 몽고의 지배 역시 중세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몽고족의 징기스칸의 손자 오코타이칸은 아들 바투를 지휘관을 삼아 유럽 원정을 시작하였다. 1236년 유럽원정의 총지휘관으로 키예프 루시를 점령함으로 키예프 전역은 240년간에 걸친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역사상 어느 나라건 타국가나 타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나라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2세기에 걸친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향후 러시아의 역사와 정치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몽고족의 지배는 러시아와 유럽과의 연결을 단절시켜 유럽의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는 유럽과 인접해있으면서도 특이하게도 유럽의 발전 양상과 차이를 종종 보여주는데 지리적 특수성을 제외하고는 바로 몽골의 지배가 러시아와 유럽의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3세기에서 15세기동안 유럽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보였다. ‘신의 시대’라고 하는 중세가 끝났고 유럽 곳곳에서 르네상스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전환되어 근대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종교등 사회 각처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하나의 대륙으로 구성된 유럽 각국은 이러한 변화를 서로 공유해나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시기 몽골의 지배에 의해 유럽의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16세기에 유럽은 르네상스, 종교개혁을 통해 근대 시민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까지 여전히 중세 사회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 지배의 또 다른 의미는 차후 러시아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도시 ‘모스크바’가 등장하고 ‘모스크바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1240년 몽골은 당시 러시아의 중심이었던 키예프 루시를 점령하면서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러한 몽골의 지배를 끝낸 것은 모스크바 공국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이반 3세였다. 1480년 몽골과의 주종관계를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선언을 함으로서 이반 3세의 모스크바는 러시아 전역의 실제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특히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인 소피아 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모스크바가 비잔틴의 계승자이자 동방정교의 본거지임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는 동로마 제국의 문장인 쌍두독수리를 국가 문장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인 ‘차르’를 사용하면서 종교와 정치를 합일시키는 강력한 전제군주 정권을 확립하였다.
이반 3세를 기점으로 시작된 제정 러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1613년 미하일 1세의 등극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유럽에서 본다면 중세적 사고방식과 체제속의 가난하고 낙후된 농업 국가였다.
표트르 대제는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표트르 대제의 수많은 개혁과 정책으로 가난하고 낙후된 유럽의 변방 국가가 불과 100여년 후 유럽의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된 것이다.
1682년 러시아의 황제가 된 표트르 대제는 낙후된 러시아를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의 중심에는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 1703년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74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핀란드만 근처의 늪지대를 개척하여 요새를 만들고, 전쟁에 승리한 후 본격적으로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해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한다. 이후 페테르부르크는 혁명 이후 다시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기 전까지 러시아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러시아 근대화의 중심 기지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럽화’이고 그 대상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였다.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본격적인 페테르부르크 건설에 앞서 표트르 대제는 약 70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파리를 방문하였다. 체류 기간 내내 표트르 대제는 파리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광장, 건물, 건축물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감탄을 하였다. 특히, 표트르 대제는 루이 14세 동상, 소르본느 대학, 국립 도서관, 왕립 아카데미, 조페국 등의 건물 양식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이후 레브롱, 라스트렐리, 고쉐르, 카무스, 베가르, 롱슨 등과 같은 당대 유명한 프랑스 건축가들을 페테르부르크로 직접 초청하여 신축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파리 풍으로 건설하려고 했다. 실제, 페테르부르크는 운하가 많은 관계로 ‘북방의 베니스’, ‘북방의 암스테르담’과 같은 별칭이 붙어 있지만, 도시 구조 건물 자체는 파리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도시이다. 특히, 프랑스 건축가 레블롱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해 페테르부르크 도시 구조 자체를 직접 설계 하였고, 이후 ‘여름 정원’, ‘페테르고프’, ‘에르미타주’를 비롯한 도시의 건물들을 파리의 건물과 정원 양식을 본떠 건설하여 이른바 ‘페테르부르크의 파리화’를 완성하였다.
도시 건설이 완성되자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였다.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한 목적은 전통적, 정교적 러시아를 지양하고 유럽의 문물에 바탕을 둔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별칭과 함께 서구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정책으로 러시아는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며 유럽의 신흥강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 예술적인 측면은 유럽에 비해 한참을 뒤쳐져 있었다. 유럽에선 이미 발레, 오페라, 연극, 문학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이러한 문화 예술이 18세기 이전까지 거의 소개조차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 이후 여제들의 통치시기를 거쳐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예술 문화, 문학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문화 예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다. 특히 표트르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유럽 문물, 특히 프랑스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무도회, 살롱 등의 귀족 문화를 직접 수입하여 장려하는 한편,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의 예술 장르도 적극 권장하여 러시아 예술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 문화 예술은 발레 뤼스를 필두로, 연극의 모스크바 예술극장, 문학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음악의 차이코프스키를 중심으로 서유럽의 수백 년의 문화적 전통을 불과 백여 년 만에 극복하고 넘어서는 놀라운 문화적 성과를 보여준다.
그런데 러시아의 유럽화 과정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정치, 경제, 군사,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지만 18세기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자유, 민주, 계몽사상을 거부하였다는 점이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의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볼 수 있는 예카테리나 여제 역시 유럽의 문물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특히 여제는 프랑스의 계몽사상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계몽군주’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볼테르, 디디로, 그림과 같은 ‘백과전서파’ 회원들과 활발히 접촉하였으며 심지어 백과전서파의 저서가 출판 금지 당했을 때는 러시아에서 그것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제안하기조차 하였다. 여제는 프랑스 계몽철학을 이용해 러시아 전제정권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하고 전제정권은 결코 독재정권이 아님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처럼 집권 초기에 계몽철학을 신봉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그러나 러시아 역사 상 최대의 농민반란인 푸가초프 난(1773-4)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기존의 입장을 전면 수정하고 진보적 계몽 사상가들을 박해하며 전제정권을 강화한다.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는 1785년 ‘러시아 귀족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특권 인가장’을 1785년 훈령으로 공식화하면서 귀족의 권리를 강화시켜주었는데, 귀족의 권리가 강화될수록 일반 민중과 특히 귀족에게 예속된 농노의 삶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여제는 귀족의 후손에게 특권과 자유를 영구적으로 보장하였고, 귀족들의 명예, 생명, 재산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하였다. 또한 귀족 영지와 그에 속한 농노에 대한 무한적인 권리를 인정하여 영지와 농노를 귀족의 완전한 사적 사유물로 인정하여 이 시기 농노에 대한 지주의 권리는 무한하였고 귀족의 권리가 강화될수록 민중과 농노들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제정 러시아 사회는 경제, 문화적으로는 풍유함을 누리게 되었으나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전제정권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쪽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라 불리며, 러시아 쪽에서 본다면 ‘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1812년 6월 12일부터 시작하여 1812년 12월 14일 프랑스 군대의 퇴각까지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알렉산드르 1세와 러시아는 일약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지만, 이 전쟁은 러시아의 정치 역사에 전혀 뜻하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한편으로는 황실과 정부의 무능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경험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문물을 직접적으로 보고 접하면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의 승리로 파리까지 직접 입성한 당시의 젊은 귀족 장교들은 이제껏 책과 지인들을 통해 듣던 유럽 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돌아와서 프랑스 문물 수입의 직접적인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이 당시 무도회, 결투, 살롱 문화를 비롯해 음식, 옷 등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선진화된 프랑스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수용하여 러시아 귀족 사회에 전파하여 단기간에 러시아는 프랑스 문물의 급속적인 확산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양적인 문물의 수용이 아니라 젊은 장교들이 프랑스 사회를 보고 느꼈던 자유로운 분위기와 사상을 통해 조국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의 낙후성, 억압성, 폐쇄성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1825년 ‘귀족들의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까지 이어지면서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정신적 자각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1812년 전쟁은 러시아 사회에서 프랑스 문물의 직접적 수용의 매개체, 러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적 자각을 일깨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유럽의 자유로운 사상과 분위기를 갈망하던 젊은 청년 장교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난의 실패는 19세기 전반을 걸쳐 러시아 황제들의 강압 정치의 초석이 되었다. 유럽이 이미 시민사회와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새로운 민주 정치 체제를 다져가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여전히 황실, 귀족 중심의 사회로 민중, 특히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노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따라서 20세기 초에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어떤 면에서 좁게는 19세기 러시아, 넓게는 천년 역사의 러시아 정치적 후진성에 의한 당연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유럽 변방의 국가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정치ㆍ경제ㆍ 문화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 집어볼 수 있을 것이다. 주된 이유는 19세기 이후 러시아의 내부 모순들이 계속 격화되고 있었지만 기존의 권력층은 이 모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등 대개혁을 통해 당시에 누적된 러시아의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완화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뒤 보수적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로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속으로 곪아져갔다. 이 가운데에서 러시아에는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저항적인 사회운동 세력들이 계속 성장하여 여러 가지 사회운동과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에 러시아는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1905년 1월ㆍ1917년 2월ㆍ 1917년 10월, 이렇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1917년 10월이 되어서야 러시아 혁명은 성공을 거둔다. 이것은 19세기의 신생 사상이자 이념인 마르크스주의가 지구상의 공간에 최초로 실현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우리가 현재 다루고 있는 ‘유라시아’라는 개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탄생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성립시켰으며,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전반에 새로운 공화국들을 만들어냈고, 새로운 국경선을 그었다. 이후 전개된 사회주의 근대화와 산업화는 유라시아 지역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74년 후에 일어난 소연방의 해체와 CIS(독립국가연합)의 성립은 러시아-유라시아의 개념과 판도를 또 다시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소련은 사실 태생적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진 나라였다. 즉 다민족, 다종족, 다언어 연방국가라는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결속력이 약한 나라였다. 특히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이어져온 각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은 소련 시기에서도 계속되었다. 물론, 스탈린 정권 때처럼 체제 내부가 안정되어 연방 국가들에 대한 강한 구심력이 작용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반면 체제 내부가 불안정 할 때는 늘 독립의 움직임이 보였다.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유라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독립을 하였다. 현재 러시아와 유라시아 지역은 매우 묘한 상황이다. 기본적으로 유라시아 지역은 오랜 시간 러시아어 중심의 언어 정책, 종교적 탄압, 강제이주로 인한 인구 및 민족 구성 비율의 변화, 환경오염 문제, 공산당 일당 독재, 농촌 문제, 소연방 내의 지역격차 등과 같이, 이전부터 축적된 불만들이 일시에 터져 나와 러시아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은 사실 러시아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민족이기에 러시아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러시아, 유라시아를 때로는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러시아어라는 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 동안 자의든 타이든 공유하였던 정치, 역사적 문화 코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