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유라시아 문화코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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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러시아미술; 문예사조; 문학; 박물관; 발레; 연극; 영웅서사시;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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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와 러시아 예술의 태동

러시아 예술은 러시아에 동방정교가 도입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이슬람 문화와 인접되어 있던 러시아가 동방 정교를 선택하게 된 것은 음주 문화나 육식 문화,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동방정교가 보여주는 시각적인 화려함과 의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동방정교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성당을 방문한 러시아 사절단은 동방정교 의례의 엄숙함과 장엄함에 매료되었고 이는 998년 러시아가 동방정교를 수용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동방정교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은 이후 러시아 정교에서 성화(икона, icon)가 발달하고 글보다 도상적인 기호가 보다 중요한 표교의 수단이 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정교의 수용 이후 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정교 사원이 건축되었고 사원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종교화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종교화로 가득 채워진 성화벽, 즉, 이코노스타시스는 비잔틴 성당에서와 달리 러시아 정교 사원에서 엄청난 규모로 확장된다.
비잔틴으로부터 유입된 성화는 성자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성화는 육체가 아닌 정신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성화에 그려진 인물은 대개의 경우 얼굴을 제외한 신체의 대부분을 옷으로 감싸고 있다. 얼굴에서도 영혼과 관계된 눈은 매우 크게 그려져 있으며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입은 극도로 축소되어 있다. 즉, 인체의 비례와는 무관하게 아몬드 형태의 큰 눈과 긴 코, 작은 입, 작은 손과 발은 성상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초기에 주로 인물을 그리는 데에 집중되던 성화는 점차 인물 너머의 풍경들을 가미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는 성화의 세속 버전, 때로는 패러디 버전인 민중 판화 예술 루복으로 발전해 가기도 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인 러시아 근대 미술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러시아적 이콘의 완성자로 간주되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비롯한 다양한 학파 이콘화가들의 성화가 발전하였고 이는 동방 정교 고유의 양식에 러시아적인 특수성이 결합되어 독창적인 러시아적 미의 초석을 마련한다.
비잔틴 스타일에 러시아 고유의 색채를 더한 종교화와 러시아의 기후와 자연의 특성 속에서 발전한 목조건축 양식은 이후 수도를 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적극적인 서구화를 표방한 표트르 대제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서구적 예술 양식이 러시아에서 자리 잡게 될 때까지 러시아 문화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특히 목조 건축 양식의 발달이나 동과 서의 건축 양식의 조화 등의 요인으로 인해 현재 러시아 건축물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필요는 러시아 조형예술을 비롯한 러시아 문화 예술 전반의 기원을 이룬다. “미적인 것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려 했던 러시아적 미학은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미적 규범을 배태한 정치적, 종교적 숭고의 문제와 관련된다. 러시아 문화의 각 지절에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시도들이 미적인 담론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의 미학화나 기념비 문화, 권력자에 대한 기념비적인 숭배 같은 것 역시 이러한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정신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근대 러시아 제국의 확립과 러시아 국민음악파

러시아의 동방 정교 수용은 러시아 문화의 태동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회화와 건축 등 조형 예술 분야에서 뿐 아니라 음악이나 문학 등의 모든 중세 러시아 예술 분야에서 자연히 종교적인 것은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동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인해 러시아는 이후 서구 유럽에 비해 늦게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자각과 러시아 문화에 고질적인 문화적 콤플렉스를 가져오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본격적인 서구화와 근대화의 시도로부터 러시아에는 급격히 서유럽 문화가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러시아가 영토를 본격적으로 확장하고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해 가게 되는 예카테리나 여제 시기에는 서유럽 문화와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게 된다.
제국 초기 러시아 문화는 대개 서구 문화의 모방에 불과했다. 러시아 왕실은 이탈리아의 음악가를 초빙해 왕실에서 고전음악과 오페라 등을 공연하게 하였고 화가들을 불러와 왕의 초상을 그리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에는 음악과 미술을 교육하는 왕실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와 화가 등을 본격적으로 양성하기에 이른다. 근대적인 예술기관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러시아어로 된 오페라가 창작되거나 러시아의 자연이나 풍속을 그린 회화 예술이 발전하는 등, 서유럽의 문화와 예술이 러시아 토양에 뿌리 내리게 된다. 또한 점차 러시아가 제국의 기틀을 완성하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감에 따라 러시아성을 강조하는 문화적인 전통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18세기는 이러한 러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1799년 러시아의 국민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태어났고 그는 1837년까지의 짧은 생애 동안 러시아 문학과 문학어의 발전에 있어 큰 업적을 남겼다. 17세기까지도 교회슬라브어를 중심으로 하는 상문체와 일반 민중이 사용하는 순수 러시아어에 기반한 하문체가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고 문학은 장르에 따라 문체의 구분을 엄격히 따랐다. 그러나 푸시킨은 자신의 문학 작품 안에서 자유로이 문체의 장벽을 허물고 상문체와 민중의 언어가 혼용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살아 있는 총체적인 러시아 문학어를 완성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서구의 문화를 접하고 온 러시아 젊은 귀족들의 개혁의지가 정점으로 치닫고 마침내 1825년 12월당 사건이 발생하기 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러시아에는 서구 귀족의 살롱과도 같은 공론장이 본격적으로 태동하였으며 이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산실이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러시아 귀족들은 러시아의 후진성의 극복을 위해 러시아가 나아가야 하는 바를 고민하고 러시아의 고유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대립 같은 러시아 역사의 뿌리 깊은 논쟁들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러시아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등장을 위한 문화적 토양이었다. 서유럽의 고전음악을 수용하여 모방하던 러시아 고전음악이 본격적으로 독특한 러시아적 색채를 드러내고 “러시아 고전 음악”의 시작을 알린 것이 바로 국민음악파였다.
1836년 글린카는 최초의 러시아 국민 오페라라고 부를 수 있을 작품 <황제를 위한 삶>을 창작한다. 19세기 초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동란의 시대를 끝내고 러시아 로모노프 왕조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반 수사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 이 러시아어 오페라에는 작곡가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민속음악의 선율이 서유럽 음악의 화성이나 대위법 등의 전통과 조화롭게 녹아들어 있다. 이러한 글린카의 시도를 계승한 것이 발라키례프,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큐이, 림스키-코르사코프 5인의 러시아 국민음악파였다. 이들의 음악은 다소 투박하고 거칠지만 서구의 낭만주의 음악과 구별되는 고유한 음색을 들려준다. 특히 이 시기는 민족주의 주제의 오페라 장르의 전성기였다. 이들은 이전까지 궁정 예술의 대세를 이루었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과감히 떨쳐내고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는 <예브게니 오네긴>, <보리스 고두노프>나 러시아 영웅서사시나 민담을 각색한 <이고리 공>, <사드코> 같은 민속의 색채가 강한 오페라를 창작하였다.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들의 사상적인 논쟁이 본격화 되던 시기 탄생한 이 그룹은 이미 에너지를 소진해가기 시작하는 서유럽 음악에 새로운 에너지를 부어줄 원천을 러시아 민중음악, 고대 루시의 음악, 러시아 정교의 음악, 러시아의 변방이었던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선율에서 찾았고 그러한 민속음악을 연구하여 유럽의 화성 체계 속에서 정리하였다. 이들은 러시아의 정체성을 고대 루시의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유라시아의 광활할 대지까지 넓혀,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의 음악 요소들까지 흡수하였다.
서유럽 고전 음악의 거의 전 장르에서 국제적인 대중성을 획득하고 명실공이 러시아 음악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차이코프스키에 이르면 민속적 색채는 축소되고 보다 세련된 서유럽 음악 안에 완전히 용해된다. 이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국민음악파와 대비해 서구적이라 평가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민속 음악의 선율에 대한 강박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러시아적 서정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의 작곡가 또한 스승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 아래 국민음악파의 음악적 전통에 크게 빚지고 있으며 그것이 이들의 독특한 음악적 색채를 규정하고 있을 만큼 러시아 고전음악에서 국민음악파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러시아 발레의 발전

국민음악파보다 약간 늦게 등장한 차이코프스키는 국민음악파가 오페라 창작에 주력한 것과 달리 당시까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 발레 장르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같은 대표적인 발레음악을 창작하였으며 러시아 발레의 전성기를 열었다.
발레(ballet)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의 '발라레(ballare)'를 명사화한 '발레또(balletto)' 또는 '발로(ballo)'가 프랑스 표기법으로 전해짐으로써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노래하고 연주하며 춤추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인 발레는 음악, 디자인, 마임, 그리고 춤을 동반하고 있다. 러시아 발레의 역사는 1673년 알렉세이 황제를 위해 독일의 한 무용단이 러시아에서 최초로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발레>를 공연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734년 안나 여제는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이자 발레 마스터인 쟝-밥티스트 랑데를 초청하여 귀족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도록 했다. 4년이 지나서 안나 여제의 명령으로 랑데는 러시아 최초의 발레 학교를 세웠다. 거기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유래한 '학교 무용' 기법을 가르치게 된다. 3년 과정인 이 발레 학교는 175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설립한 발레 부문 제국 극장의 토대가 되었다. 극장에 대한 예카테리나 2세의 관심은 컸고, 그녀는 1756년에 제국 극장의 시스템을 확립했고 1773년에는 페테르부르크에 볼쇼이 극장을 건축했다. 1779년에는 제국 극장에 발레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레가 들어온 이후, 러시아 발레는 처음 얼마동안은 서구 발레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러시아의 발레는 활기를 찾는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낭만주의 발레가 쇠퇴해가고 있을 때, 외국의 많은 무용수들이 러시아로 건너왔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고전주의 발레가 번창하고 있었다. 이 시절 프랑스인 마리우스 프티파의 등장은 러시아 발레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춤의 표현과 심리묘사를 중히 여겼고 화려함과 장식성을 선호했다. 1869년부터 30년 동안 프티파의 책임하에 웅장하고 장대한 발레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프티파는 극적이고 이국적인 요소에 환상적인 변형을 가미해 1862년 이후부터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발레를 지배한 '대 스펙터클용 발레'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다. <무희>,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바야데르카>, <파티타>, <해적> 등은 그의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그는 러시아 발레에 뚜렷한 민족적 형식을 도입하였고 62년 안무가에 임명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약 40년간 러시아 발레계에 군림하면서 차이코프스키와의 협력으로 러시아 발레의 전성기를 가져온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 발레는 새로운 실험적 단계로 도약한다. 러시아를 방문한 무용수 체케티의 교육에 힘입어 러시아에서는 파블로바나 니진스키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들이 성장하게 된다. 20세기 들어 디아길레프는 마린스키극장의 젊은 무용가들을 이끌고 1909년 파리 공연의 막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발레 뤼스(러시아 무용단, 러시아 발레를 의미)’라 불리는 이들 새로운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근대 발레의 장을 연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1929년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러시아 발레단이 해산될 때까지 이들은 세계 발레의 선두에서 발레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전세계 현대 발레단은 어떤 형태로든 이들 발레뤼스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7년 10월 혁명과 더불어 러시아 발레는 위기를 맞이하지만 1920년대 점차 국민을 위한 예술로 수용되었다. 소련 시기 동안에도 사회의 현실적인 주제나 새 시대에 적합한 레퍼토리의 개발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볼쇼이 극장 최고의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는 <스타르타쿠스> 같은 작품을 낳게 하였다.

브나로드 운동과 19세기 후반 이동파 미술

미술에서도 서구적인 양식의 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표트르 대제 시대에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 이후 세속적 미술이 번성하였던 서구 제국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외국인 미술가가 러시아에 초빙되는가 하면 화가 니키친 형제, 마토베예프, 자하로프 등과 같은 러시아의 미술가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기도 하였다. 새로운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의 미술, 바로크 미술, 고대 미술 등 서구 미술의 유산으로부터 폭넓게 배움으로써 당시 세계 미술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였다. 표트르 대제 시기에는 특히 초상화, 전쟁화, 역사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자연히 이전의 이콘 회화의 전통과는 별개로 러시아 세속화 학파가 생겨났는데 이 학파의 중심지는 1757년에 세워진 제국예술 아카데미였다. 18세기 후기 러시아 미술계에는 고전주의적 형식에 당대적인 많은 요소들을 더한 진보적인 작품들이 등장한다.
19세기 초의 러시아 미술은 고전주의를 기초로 발달하였다. 1800년대와 1810년대에도 제국예술 아카데미에서 고전적인 미의 규범이 유지되어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가 발전되었는데 키프렌스키와 트로피닌이 이 시기에 활약했다. 19세기 전반 러시아 풍경화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였다. 19세기 중반 니콜라이 1세의 통치시기에 접어들어 그의 반동 정치는 러시아의 자유로운 미술을 억압하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당시의 대가였던 브률로프의 회화에는 이 시대의 모순과 위기의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은 폼페이의 흥망을 그린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유명한 작품이다.
1840년대를 대표하는 페도토프의 풍속화는 이후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를 예고한다. 그는 이전의 왕실회화의 전형화된 소재로부터 벗어나 현실생활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다. 즉 30-40년대의 귀족, 소시민, 관리, 농민, 걸인 등 러시아의 모든 사회층의 대표자들이 그의 화폭 속에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 사회의 실상과 모순을 드러내는 풍자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본격화되는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들은 회화예술이 미적인 기능 뿐 아니라 사회적인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러시아 음악에서는 국민음악파가 나타났고 차이코프스키를 위시한 발레가 발전해 갔으며, 도스토엡스키,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의 사실주의 문학이 세계 문학의 판도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근대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고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양 미술사에서 러시아 미술은 다소 뒤쳐져 있었다. 흔히 서양미술사에서 러시아 미술사가 소외된 지점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서구 미술의 흐름을 앞서 가기 시작한 20세기 초반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이르러서야 그 존재가 서구에 분명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곰브리치의 명저 <서양미술사>에서마저도 러시아미술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실주의 미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심훈의 <상록수> 등의 작품을 통해 알려진 러시아의 브나로드(‘브 나로드’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운동이 나타난 것 역시 이 시기였고, 민중에 대한 관심과 예술이 민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의식이 대두되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동파라는 독특한 사실주의 미술운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동파에 속한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가지고 러시아 변방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였다. 자신들의 그림의 소재가 되는 민중이 그 그림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페로프와 레핀, 수리코프 등이 대표적인 이동파 화가들이다. 당시까지의 궁정예술가들의 초상화 작업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예술을 통해 진정한 러시아의 삶과 사회를 그리려 했던 이들의 작품들은 얼핏 그 표면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와 역사적인 진실들을 담고 있다.
이동파 화가 니콜라이 게의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작품들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레핀의 그림은 당대의 사회적인 문제와 인간의 심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보여준다. 또 다른 화가 수리코프는 특히 역사화 그리기에 주력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강렬한 개성을 지닌 민중들, 그들의 생활양식이 잘 표현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사실주의 미술은 때로 구체제에 대한 증오와 혁명적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 이동파 전시회에는 카사트킨, 이바노프, 메쉬코프, 아르히포프, 포포프 등의 작품도 출품되었으며 이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대표적인 미술관인 '국립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는 이 시기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19세기 말 러시아 사실주의 운동의 성장과 함께 이들의 대표자들의 작품들을 수집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려는 미술 애호가들이 늘어났는데, 트레티야코프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1856년부터 러시아 화가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러시아 미술 최대의 수집가가 되었다.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70년대에 들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1892년에는 모스크바 시에 기증되었다. 그의 수집품들을 전시한 미술관은 소비에트 시대에 들어 '국립 트레티야코프 갤러리'로 명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혁명과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예술

서구에 비해 문화적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러시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을 통해 서구 문화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 세계적인 리얼리즘의 거장들이 등장하였고, 서유럽에 비해 늦게 출발한 발레예술은 러시아 민속과 문화에 기반한 모더니즘 발레의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예술세계를 비롯한 러시아 모더니즘과 전위적이고 과격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칸딘스키, 말레비치, 샤갈, 로드첸코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가들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미술 운동과 새로운 음악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창조하려 했다는 점에 있어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예술형식의 창조라는 급진적 파괴와 창조에의 지향은 러시아 혁명의 정신과도 밀접히 결합되었다. 이들의 예술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 화가라기 보다는 프랑스 화가로 알려져 있는 샤갈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 러시아 미술가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세계 미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명성에 비해 매우 미미하다.
20세기의 미술계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파들이 형성되었다. 이전의 사실주의 경향과는 다른 색깔을 띤 새로운 예술가들이 출현하여 20세기 러시아 미술계에 색다른 장이 펼쳐지게 된다. 19세기 말 사회적 의식보다는 심리적이고 미적인 의식을 더 높이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 상징주의 화가들은 사실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현실 세계와 피안의 세계를 동시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또한 회화 스타일에 있어서도 혁신의 과정을 거쳤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영원성으로 이상화된 여성, 신성하고 악마적인 테마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모호한 그림을 그렸다. 상징주의 화가들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화가 브루벨은 그러한 경향의 작품을 그렸던 화가로 유명하다. 브루벨은 레르몬토프의 <악마>에 나오는 주인공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앉아 있는 악마>는 장미색, 짙은 보라색, 연보라색, 회색, 푸른색 등 신비롭고 다양한 색들이 조화롭게 펼쳐진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악마의 형상을 통해서 개인주의의 공허함, 사회와의 불일치, 도덕적 타락성, 인간의 고뇌를 설파하였다. 20세기 초 쿠즈네초프, 사리얀, 우트킨, 사푸노프 등은 '푸른 장미파'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미술의 본질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감각을 표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현실 생활보다는 환상과 꿈을 선호하였다.
1910년대에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를 위시한 추상예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칸딘스키는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여 난해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예술의 개척자인 말레비치는 구성미술의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색면 자체가 완전한 객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개념을 발표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은 러시아인들의 본성에 내재하는 극단적인 지향과 종교적인 본질에 대한 추구를 반복하고 있다. 이들에게 예술 창작은 단순히 예술 창작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더 나아가 새로운 세계,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적인 혁명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들의 예술이 이후 소비에트 공식미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우리가 흔히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 단순화 시켜 알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이해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지금까지의 회화예술이 화폭 위에 그대로 재현하려 했던 대상이 아닌 그것을 초월한 어떤 것을 그리려 하였다. 지금까지의 현대 미술이 그려온 대상이 아닌 그 대상 너머의 것, 혹은 대상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화폭 위에 재현하려는 시도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는 가장 중요한 예술의 목적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것의 정점에 있는 것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라는 절대주의의 시도였다. 말레비치는 지금까지 회화 예술이 추구했던 색과 형태 등을 초월해서 가장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만을 남겨두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검은 사각형이었다. 미술의 본질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사색과 기존의 상식을 뒤엎고 새롭게 하는 전복의 기획은 이들의 미술 작품의 특징일 뿐 아니라 이러한 예술적 기획의 확장과도 같았던 러시아 혁명의 특징이기도 했다.

소비에트 프로파간다와 러시아 영화

혁명이 정점에 이르렀던 20세기 초반 러시아에는 영화가 새로운 혁명의 장르로 대두되었다. 러시아에서 영화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1896년 5월 17일 페테르부르크 여름 극장인 아쿠아리움에서였다. 연극공연 중간에 뤼미에르가 만든 영화가 상연되었는데, 연극보다 영화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힘입어 뤼미에르 영화사는 러시아 순회공연에 들어가게 된다. 뒤이어 1903-1904년부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화는 점차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러시아의 대도시와 중․소도시에는 이동 전기 극장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영화 제작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된 시기는 1908년부터였다. 1908년 드란코프는 최초의 러시아 영화 <스텐카 라진>(1908년 10월)을 제작했고, 계속 17편의 영화를 시리즈물로 만들었다. 독자적인 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보여 준 드란코프는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영화로 다루었고,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독립적 뉴스를 촬영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투기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 그 영화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한편 초기 영화 제작에서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한존코프는 1904-1914년의 기간 동안 7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그는 영화의 테마와 주제를 러시아 고전 작품과 역사 속에서 찾았다.
1908-1914년에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전쟁 선동 작품들이었고, 그 이외의 작품들은 범죄 영화나 비사실적인 멜로드라마 등과 같이 흥미를 끄는 수준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기부터 1917년 혁명기까지의 영화에서 가장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영화는 상류 사회를 묘사한 심리 드라마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전선에서 뉴스 영화가 촬영되었는데, 그것은 사건에 대한 작가들의 평가나 사상 없이 무미건조하게 정보만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뉴스 영화는 민중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될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주된 내용과 형식의 중요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선동과 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혁명직후의 영화예술과 영화산업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1919년 레닌은 “영화산업의 국영화법령”에서 “영화는 대중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장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소비에트 영화는 이러한 기본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 이념의 선전과 민중의 교화라는 이상에 복무하게 되었으며, 이제 영화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닌, 대중들의 교육과 계몽의 도구로 기능해야 했다. 영화는 이미 도시에서 거대한 관중을 확보한 데 이어, 시골로까지 확산, 보급되었다. 내전 초기부터 ‘흐로니카(뉴스영화)’와 ‘아기트카’ 혹은 ‘살아 있는 포스터라고 불린 반 다큐멘터리식의 짧은 선동영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그 때까지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생생한 현실과 일반대중의 영웅들이 화면에 묘사되었다. 시민전쟁과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아기트카’를 실을 기차가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러시아어 이외에 다민족 언어를 사용하는 변방의 무식한 소비에트 국민들에게 ‘아기트카’는 볼셰비키의 이념을 전파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기에 그 충격과 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났다. 이러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계몽 단편영화의 전통은 이후 에이젠슈테인과 베르토프 등, 세계 영화사 초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거장들의 무성영화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이와 함께 영화산업의 국유화 조치, 세계 최초로 모스크바에 창설된 국립영화학교, 그리고 최초의 국가영화회사인 ‘고스키노(소련 국가영화위원회)’의 설립 등으로 명실상부한 소련 영화 산업의 기틀이 마련된다. 1970년대 소련 대중의 연간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30회를 상회하였고 많은 영화들이 5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소련 시기 영화 예술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해빙기와 언더그라운드 예술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게 된 이후 영화 부문에서도 이른바 '해빙'의 시대가 오게 된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고 소련 영화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영화 제작 편수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젊은 소비에트 영화 인력들도 유입되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신인 감독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해와 진실을 새로운 감성으로, 이데올로기 보다는 휴머니즘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말 소련 영화의 대표작인 칼라토조프의 <학이 난다>, 추흐라이의 <병사의 발라드>는 스탈린 시대의 전쟁영화와는 달리, 이데올로기보다는 휴머니즘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참상과 진실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고전들을 사실적인 영상에 담아 낸 본다르축은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 개념의 명징성과 정확성, 민중적인 생활의 탁월한 묘사를 통해 소비에트 리얼리즘 영화의 전통을 구축했다. 영상시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이라는 이유로 소련 내에서는 여전히 배척되었지만, 칸 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하는 등 러시아 예술 영화의 대가로서 전세계 영화에 큰 흔적을 남겼다.
브레즈네프 정권(1964~1982)시기에는 베트남 전쟁 등 국제정치의 긴장으로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그러나 미․소 냉극체제를 이용한 묘한 균형은 러시아 사회 및 문화의 긴 ‘정체기’를 가져왔다. 많은 영화 제작자들은 러시아 고전들을 영화화하여 이데올로기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앞에서 언급한 본다르추크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등 많은 영화들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 시기 또 하나의 특징은 소련 내 러시아 외의 다른 공화국에서 제작된 민족적 정취의 영화들이 대거 출현하였다는 점이다.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와 파라자노프는 키르기즈스탄이나 우크라이나 공화국 등에서 교조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시적 영상과 대담한 형식의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고스키노’를 통한 검열과 통제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이 여전히 영화제작에 작용하고 있었지만, 스탈린 시대와 비교해 볼 때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운영되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소련 예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소비에트 광고 포스터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 영화 같은 프로파간다 예술은 분명 소련 문화를 대표하는 장르들이다. 스탈린 동상이나 스탈린 양식을 따르는 건축물들이 지어졌고 지하철이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지도자와 체제를 찬양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말하는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알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나 아름다운 선율의 러시아 가곡들이 만들어진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러시아 문화 전통은 지속되고 있었으며 이는 검열을 피해 공식 문화 속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 문화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때로는 권력의 검열과 창작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가운데 공존하였다. 해빙기와 함께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검열과 억압이 다소 완화된 틈을 타서는 자유와 저항을 표방하는 러시아 록 음악이나 음유시인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시기에는 사회주의 예술이라는 한 단어로 말하여질 수 없는 다채롭고 풍부한 문화들이 존재했다. 체제를 피해 망명한 러시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도 러시아 정신은 계속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과 함께 예술에서는 본격적으로 反소비에트적 역사청산의 시도들이 이루어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 소련 시대의 낙관주의를 비웃는 듯 암울한 현실을 그린 어두운 내용과 정조의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 영화를 흔히 “체르누하”라 불렀는데 아불라제의 <참회>나 피출의 <리틀 베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회화 예술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호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해체함으로써 탈신화화는 소츠-아트나 모스크바 개념주의라 부르는 일군의 비순응예술가들의 활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 문화는 억압기제가 사라진 소련 해체 이후 잠시 문화적 혼란을 겪는 듯 보였다. 검열의 자유와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온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러시아 문화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문학은 소재를 잃었고 부흥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록 음악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미국문화를 위시한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물결은 러시아 문화에 해악이 된다는 인식 또한 팽배해졌다. 이러한 문화적 과도기의 현상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소련 해체와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문화

러시아인들이 소련 해체 이후 이전의 소련 역사에 대한 강한 부정이 자기부정과 다르지 않으며 이는 결국 러시아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0년대가 그러한 역사청산과 자기 부정의 또 다른 혁명의 시기였다면, 2000년부터의 러시아 문화는 새로운 러시아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의 새로운 문화 정체성 확립에의 노력은 2000년대 들어 부강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강한 러시아에 대한 지향으로 변해 가기도 하였다. 러시아 문화를 지배하는 노스탤지어라는 정서는 과거의 러시아-소비에트 제국의 영광의 부활이라는 사회적인 이슈와 맞물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의 일상의 삶에 대한 향수와 이를 예술 공간 속에서 복원하려는 순수 예술적인 시도들 역시 존재했다. 새로운 모스크바를 건설하려는 소비에트적 프로젝트가 다시금 부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러시아 문화 속의 민족주의적, 전체주의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모스크바는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사실 현재 러시아 대중문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 여느 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판타지 소설과 영화에 열광하고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서구의 팝을 듣는다. 러시아 음반 시장 역시 팝 음악이나 팝 음악화된 러시아 음악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러시아적인 문화적 기현상들이 나타난다. 러시아 고전을 텔레비전 영화로 새롭게 제작하여 방송하는 전통은 이미 자리잡은지 오래다. 러시아 고전 문학과 음악, 발레는 여전히 러시아 극장의 최고의 레퍼토리이다. 소련에 대한 문화적 향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비에트 시기 음악을 듣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소련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졸부 계층인 “신러시아인” 계층의 성장이 극장의 활성화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져온 것 역시 러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다.
러시아인들의 정신적인 것에 대한 지향과 문화 전통에 대한 자부심, 러시아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러시아 문화를 지배하는 키워드이다. 이것이 어쩌면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현재의 문화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유럽을 지향하면서도 아시아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태생적 이원성과 이 양극단을 오가며 모순적인 극단을 하나로 수용하는 러시아 영토만큼이나 넓은 문화적 스펙트럼은 격변의 러시아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러시아 문화의 정수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