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1905년 혁명]
러시아 혁명은 1905년 1월ㆍ1917년 2월ㆍ 1917년 10월, 이렇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1917년 10월이 되어서야 러시아 혁명은 성공을 거둔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유럽 변방의 국가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정치ㆍ경제ㆍ 문화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 집어볼 수 있을 것이다. 주된 이유는 19세기 이후 러시아의 내부 모순들이 계속 격화되고 있었지만 기존의 권력층은 이 모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등 대개혁을 통해 당시에 누적된 러시아의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완화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뒤 보수적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로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속으로 곪아져갔다. 이 가운데에서 러시아에는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저항적인 사회운동 세력들이 계속 성장하여 여러 가지 사회운동과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에 러시아는 20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혁명이 발발한다. 이 혁명의 원인들을 여러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 농촌에서의 불만이다. 농노 해방 이후에도 농촌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농노 해방으로 인해 농민들에게 주어진 분여지를 농민들이 소유할 수 없었다. 농민공동체(미르)가 그것을 소유하였다.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거나 저당잡힐 수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수입이 너무 적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사거나 세금과 토지 상환금을 낼 수 없었다. 니콜라이 2세 통치 10년 쯤 되었을 때, 농민의 밀린 세금과 토지 상환금이 1억 천 8백만 루블에 이르렀다. 굶주린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농촌 인구는 늘어났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좋은 농토의 면적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02년에는 폴타바와 하리코프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이 폭동을 일으켜, 지주귀족의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농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도, 실행하지도 못했다.
두 번째는 민족 문제였다. 러시아는 다인종ㆍ다민족 국가였다. 비-러시아 문화가 허용되었지만, 절대적인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는 유럽 문명이 아시아 문화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특히 러시아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적, 농민의 착취자, 혁명 운동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수 세대동안 러시아 유대인들은 특별한 문제거리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도시 바깥에서 거주하거나 땅을 얻는 것이 금지되었다. 법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차단되었고, 지방자치단체장 투표 권리가 없었으며, 해군이나 수비대에 근무할 수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유대인들처럼 소수 민족들과 소수 종교들을 취급하면서 러시아화(Russification)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러시아에 대한 불충성,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에 대한 불만, 러시아화에 대한 반감만을 가져왔다. 1863년 폴란드의 폭동 이후, 차르는 제국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감소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1870년대에는 러시아 정부는 서쪽 국경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신경쓰기 시작하였다. 다민족ㆍ다인종으로 생겨난 문화적 이질성의 증대는 혁명 전 러시아 정부를 괴롭힌 문제 중 하나였다.
세 번째는 노동문제였다. 1890년대에 재무 장관 세르게이 비테의 주도 하에, 러시아에서는 사업화를 진작시키기 위한 정부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철도 건설과 운영에 정부 재정의 높은 투자, 개인 사업자들에 대한 보조금과 지원서비스, 러시아 사업들을 위한 보호관세, 통화 안정화, 그리고 외국투자의 장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테의 계획은 성공적이었고, 1890년대에 1년에 8퍼센트씩 경제가 성장하였다. 비테의 이런 산업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노동자층을 성장시켜, 1905년 혁명이 촉발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사업화 재정을 마련하는 정책은 수백만의 농민들이 세금 마련을 위해 도시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농민들은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농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런 산업화와 노동자 수의 증가에 맞추어 정부는 12살 이하 어린이의 노동 금지 등 온정적인 노동법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많은 사업노동자들은 하루 11시간 이상을 근무했고, 지각ㆍ실수 등에 대해 과도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노동법 상, 노동조합의 조직과 파업은 금지되었다. 이런 것에 불만을 느낀 많은 노동자들은 비합법적인 파업과 저항운동에 참여하였다. 1900-1903년에 불황으로, 많은 회사들이 파산하였고 실업률이 감소하였다. 1902년에 블라디카프카즈와 로스토프의 철도 가게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반응하여 남러시아와 트란스코카서스에서 다양한 사업에 종사하는 225, 000명이 동조 파업을 한다. 하지만 정부는 1903년 말에 모든 법적인 조직들을 폐쇄시킨다.
네 번째는 교육받은 계층의 성장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이후 대학교에 대한 많은 제한 조치들이 폐지되었고, 의무적인 유니폼과 군사훈련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학이 늘어나면서, 신문ㆍ잡지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공적인 강좌가 열렸고, 전문가 협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1860년대에 새로운 공론장이 출현하였다. 정부는 이런 흐름들에 놀라, 1861년에 입학을 제한했고, 학생단체들을 금지시켰다. 이에 반발하여 페테르부르그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벌어졌다. 그러자 정부는 대학을 2년동안 폐쇄시킨다. 하지만 정부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운동은 몇 십년동안 계속 이어졌다. 퇴학과 제명, 투옥과 유배 등 대학생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대학은 러시아 혁명가들을 양성하는 장소였고, 이렇게 길러진 소수의 대학생들은 이후 러시아 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다.
다섯 번째는 러시아 정부의 무능이었다. 차르와 러시아 정부는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생겨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었고, 각계각층과 각 지역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들을 제대로 달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동북아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의 대외 정책은 만주를 노리는 일본과 충동하면서,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난다. 1902년 4월 플레베가 내무장관에 취임하고, 1903년에 국제문제에 정통한 온건파 비테가 해임되면서, 대일관계에 있어 강경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1903년 7월에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교섭을 시작한다.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가지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가 일본이 조선에서 특권적 지위를 가지는 것을 인정해주도록 제안했다. 러시아는 이 제안을 거절하자, 교섭은 장기화된다. 시베리아 철도 완공 이후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인천ㆍ뤼순에서 러시아군을 기습공격한다. 이렇게 러일전쟁이 시작된다. 차르와 강경파들은 국내의 불만과 혁명적 분위기를 돌리기 위하여 이 전쟁을 활용한다. 니콜라이 2세는 국민들에게 전쟁 참여와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극동 지방의 전쟁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고, 일본을 얕잡아본 러시아는 랴오양(遼陽) 회전(1904년 8-9월), 봉천 회전(1905년 2-3월), 쓰시마 해전(1005년 5월)에서 잇달아 패하였다. 러시아 군대의 잇따른 패전은 안 그래도 좋지 않던 민심에 불을 끼얹이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가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 1ㆍ2월의 대규모 철도 파업, 각지에서의 반정부 시위와 반란이 벌어진다. 내우외환에 휩싸인 러시아 정부는 결국 1905년 8월에 미국의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일본과 포츠먼스 강화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인 권한을 인정하고, 요동반도(여순 항)의 조차권, 장춘에 이르는 남부의 철도, 사할린 섬의 절반을 일본에 양보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일본인들에게 일본해와 오호츠크해, 베링해 등과 같은 러시아 연안의 어업권을 제공해야만 했다. 러시아 내부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전쟁은 1905년 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이런 가운데에 1905년 1월 9일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다. 1904년 12월 페테르부르그의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해고되었다. 이에 푸틸로프 공장의 전 노동자가 파업하고, 이후 페테르부르그의 공장 노동자들이 동조파업을 한다. 이에 1905년 1월 9일 일요일에 차르에게 8시간 노동제, 노동조합 설립 및 노동쟁의의 자유, 일본과의 전쟁종결 등의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올리기 위해, 가퐁 신부(1870-1906)의 지도 하에 노동자들이 황제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평화적으로 행진하였다. 황제의 초상화, 정교회의 성상ㆍ십자가ㆍ 깃발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행진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황제의 따뜻한 환대가 아니라, 경찰과 군대의 폭력적인 진압이었다. 황제에 대한 민중들의 환상이 깨어지는 계기가 된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피의 일요일(1905))
그러자 5월 12일에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에서 60,000명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참가한다. 혁명의 기운은 노동자를 넘어서 농민과 병사들에게 파급되었다. 6월에는 전함 포템킨 호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차르 정부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1905년 8월 6일에 ‘두마’ 소집을 명한다. 내무성 장관의 이름을 따서 ‘불리긴 두마’로 불리워지는 이 두마는 입법권 없이 법률을 심의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의 투표권이 없고 농민의 선거권은 제한되었다. 그래서 사회민주당, 사회혁명당 등은 이 두마를 보이콧하였고, 결국 소집되지 못하였다.
1905년 6월에는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에서 노동자들이 러시아 최초의 소비에트를 조직한다. 우리말로 ‘평의회’ 혹은 ‘협의회’로 번역되는 ‘소비에트’는 새로운 형태의 대표기구/대의기관이었다.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의 노동자들은 6월에 스스로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아서, 그 대표자들의 소비에트를 구성하였다. 이것이 러시아 최초의 ‘소비에트’였다. 10월 14일에는 페테르부르그에서 250, 000명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550명의 위원들이 모여 '노동자 소비에트'를 발족시켰다. 이후 모스크바, 오데사 등에서도 소비에트가 생겨났다.
10월 7일 모스크바와 카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다. 이것을 계기로 전국의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킨다. 일반노동자와 시민들도 파업에 동참한다. 이것이 10월 총파업이다. 10월 총파업의 슬로건은 전제타도, '불리긴 두마' 보이콧, 보통ㆍ평등ㆍ직접ㆍ비밀투표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 8시간 노동제 등이었다.
학생, 사무원, 변호사, 의사, 기술자들도 이 동맹파업에 참여했다. 입헌주의자들도 최초의 전국 대회를 열고 파업을 지지하였다.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 유태인과 타타르인 등도 참여했다. “차르 정부 타도!” “민주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슬로건 아래, 전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계층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거국적으로 총파업이 일어나자, 결국 비테는 니콜라이 2세에게 국민에 대한 양보를 건의한다. 이것을 받아들인 차르는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조서를 발표한다. 차르는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 개설을 약속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언론ㆍ집회ㆍ결사ㆍ조합 결성의 자유, 인권 보장을 선언했고, 헌법제정과 투표권 확대도 약속했다. 이어 각료회의의 의장직을 신설하였고, 초대 의장으로 비테가 임명되었다.
차르가 양보를 하자, 혁명 세력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공장주ㆍ 은행인ㆍ 지주들은 차르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였다. 사회혁명당 내 온건파는 차르의 선언을 받아들이자는 쪽이었다면, 좌파는 토지의 국유화와 재분배를 주장하였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차르의 이 선언을 인민들의 혁명적 요구를 분산시키는 미봉책으로 보고, 선거를 거부하였다. 소비에트는 정치범의 전면적인 특사, 토지의 분배, 8시간 노동제, 검열제 폐지, 언론 자유의 보장 등을 요구하여, 어느 정도 관철시켰다.
그리고 차르의 10월 선언 이후 다양한 정당들과 정치 세력이 생겨났다. 대지주와 대자본가들은 10월당을 결성하였다. 러시아 국민동맹과 같이 전제정을 옹호하는 반동집단이 생겨났다. 우익 민병대인 '검은 100인조'가 만들어져 혁명가와 노동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그리고 유태인에 대한 포그롬(pogrom)의 열풍이 일어났다.
변호사ㆍ 의사ㆍ 교수 등 자유주의 성향의 전문직업인들과 차르 정부에 반대하는 젬스트보 의원들은 자유주의 정당을 만들었다. 자유주의자의 비밀결사인 해방동맹과 '젬스트보 입헌주의자 동맹'이 중심이 되어 1906년에 카데트(입헌민주당)를 결성한다. 역사학자 밀류코프, 합법적 맑스주의자 스트루베를 리더로 하는 이 당은 입헌군주제, 지주토지의 유상 수용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주의 세력은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였고, 사회체제를 파괴하는 혁명뿐만 아니라, 전제권력의 횡포와 탄압, 검열 등에도 반대했다.
나로드니키의 전통을 잇고 있는 사회혁명당은 ‘토지의 사회화' 등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적극 대변하였고, 노동자ㆍ농민ㆍ사회주의 인텔리겐치아의 3자 동맹'를 통한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농촌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테러전술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02년에 내무장관 시퍄긴, 1904년에 내무장관 플레베를 살해한 것은 사회혁명당 당원들이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의 경우,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되어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의 주도권, 농민에 대한 태도, 당 조직의 성격 등에 대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의 경우, 혁명 제1단계의 주도권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있고 노동자 계급은 그들을 도와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르주아 혁명-사회주의 혁명이라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였다. 반면 볼셰비키는 전투적 당과 전위의 지도하에 노동자 계급이 농민 계급과 동맹을 맺고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중간 단계없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10월 선언 이후 혁명 세력이 분열되자, 정부는 혁명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1월 말 페테르부르그의 멘셰비키 지도자를 체포했다. 12월 2일 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 농민동맹, 사회민주당, 사회혁명당, 폴란드 사회당 등 6개 단체가 국민들에게 납세거부를 호소하는 ‘재정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정부는 다음날 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의원 전원을 체포했다. 12월 7일에는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가 모스크바에 있었다. 그러자 당국은 파업노동자들의 무장자위부대를 공격하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건물을 점령하여 지도자인 레프 트로츠키를 체포하였다.
1905년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두마 등의 설립을 통해 입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의 가능성을 열기는 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1905년 혁명을 통해 러시아는 무제한적인 전제정으로부터 두마 및 국가평의회라는 양의원에 의해 제한받는 전제정으로 이행하였다. 이런 정치 체제로는 러시아의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들을 해결할 수 없었고, 민중들의 정치적 ㆍ경제적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1905년 혁명은 차르 전제정의 타도와 민주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1905년 혁명을 통해 각성된 민중의 의식은 이후 1917년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레닌은 1905년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예행 총연습으로 보았다. "1905년의 '리허설(예행연습)'이 아니었다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레닌의 말처럼, 결과적으로 1905년의 혁명은 1917년 혁명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의 반동기]
이후 러시아는 1906년부터 1917년까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으로 이루어진 입헌군주제를 유지한다. 그 중 1906년 7월부터 1911년 9월까지는 수상 스톨리핀이 사실상 러시아를 이끌어 간다. 스톨리핀은 ‘평화’와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혁명가들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었고, ‘개혁’은 입헌군주제 하에서 러시아의 점진적 개혁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스톨리핀의 반동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1905년 12월 11일 모스크바 봉기 중에 두마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평등 선거가 아니었다. 이 선거법에 따르면, 여성,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4부류의 유권자 집단(지주, 도시민, 농민, 노동자) 사이에도 위계가 있었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
그리고 차르는 1906년 2월 20일 포고령을 통해 일종의 상원인 국가평의회를 개편하였다. 국가평의회 의원의 절반은 차르가 임명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종무원, 귀족, 젬스트보, 상공인 단체, 과학원과 대학, 핀란드 의회에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06년 4월 23일(구력, 신력은 5월 6일) 제1차 두마가 개원하기 전 황제에게 ‘최고전제권력’을 부여하는 새로운 기본법이 공포되었다. 전제군주가 두마와 국가평의회의 협조을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사이비’ 입헌군주제였다. 차르는 행정ㆍ 군사ㆍ 외교 등의 실권 이외에 법률 거부권ㆍ 비상 입법권ㆍ 두마 해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원인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국왕에 호의적인 세력들로 구성된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자유 선거를 치른 후 제1차 두마는 1906년 4월 27일(신력 5월 10일)에 소집되었다.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은 제1차 두마를 보이콧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제1차 두마의 총 497석 중 45석은 우익의 정당들에, 32석은 폴란드 등의 민족들과 회교 등의 종교집단에 돌아갔으며, 184석은 카데트들이, 124석은 서로 다른 좌익의 대표자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10월당은 13석이었다. 농민동맹, 사회주의 성향의 명망가들, 카데트 좌파 등이 농민의 지지를 얻어 다수 당선되었다. 의회 구성 후 이들은 ‘근로인민 계급 모두를 통합한다’는 모토로 트루도비키(трудовики)를 결성하였다. 트루도비키는 107석을 차지했다.
제1차 두마에서 카데트와 트루도비키는 토지 개혁을 요구하면서 정부와 대립하였다. 지주에 우호적이었던 정부는 두마에서의 토지 문제 심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73일간 40회의 회기를 마친 후에 니꼴라이 2세는 7월 8일 제1차 두마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약 200명의 두마 의원이 핀란드의 비보르그에 모여 비보르그 선언을 하였다. 새로운 두마가 소집될 때까지 세금을 내지 말고 징병소집에 응하지 말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반응은 미미했고, 이 선언의 가담자들은 3개월 징역을 받았고, 제2차 두마에 입후보할 권리를 상실하였다.
제1차 두마의 해산과 함께 스톨리핀이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두마 선거가 1907년 2월에 실시되었다. 제2차 두마를 구성하면서 정부는 두마에서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세력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모든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카데트와 좌익 등 반대세력이 전체 의원 수의 69%에서 68%로 감소하였다. 카데트 의원수는 184명에서 99명으로 줄어든 반면,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원들은 각각 64석, 20석을 차지하여, 두마 전체의 좌익 세력이 124석에서 216석으로 늘어났다. 좌파 정당들은 지주 토지의 무상 몰수와 모든 토지의 공동소유제를 주장했다. 제1차 두마 때처럼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두마와 정부가 다시 대립하였다. 스톨리핀은 혁명음모에 가담한 55명의 사회민주당 의원들 중 16명의 면책특권 폐지와 체포동의를 두마에 요구했다. 하지만 두마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1907년 3월 5일에 소집되어 3개월 가량 지속된 제2차 두마는 6월 3일 황제의 포고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제2 두마의 해산과 동시에 지주세력을 우대하는 새로운 국회선거법이 공포되었다. 농민의 의원 선출권은 반 이상 줄어들었고, 노동자들의 대표권도 축소되었다. 폴란드, 카프카즈, 그 외의 다른 국경지역 의원 수는 줄어들었다. 중앙아시아는 후진 지역이라는 이유로 대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귀족의 대표권은 늘어났다. 지주귀족 한 명의 투표는 상류 부르주아지 4명, 중간계급 65명, 농민 260명, 노동자 540명에 해당하였다. 전체 인구 중 20만 명에 불과한 지주 귀족들이 두마 의석의 50%를 차지하였다. ‘6월 3일 친정부 쿠데타’로 불리는 이런 선거법 개정을 통해 두마는 친정부적 기관으로 바뀌었다. 1905년 혁명으로 제도권에 진행되었던 개혁의 움직임은 정체되었고, 반동의 시기가 이어졌다.
제3차 두마는 1907년 11월 1일에 소집되었다. 바뀐 선거법 덕택에 차르 정부는 자신들이 바라던 의회를 가지게 되었다. 정부 지지 세력은 총 442석 중 우익 약 160석과 10월당 약 150석을 합하여 약 310석 정도 되었다. 반대 세력은 120석으로 줄어들었다. 제1차 두마에서 대러시아인을 제외한 기타 민족들이 두마 의석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면, 3차 두마에서는 대러시아인들이 377석, 기타 모든 민족들이 합쳐 36석을 차지했다. 사회혁명당원들은 제3차ㆍ제4차 두마를 보이코트하였다. 이렇게 보수화된 제3차 두마에서 제1당이 된 10월당과 그 밖의 우익정당들은 다수 여당을 만들어 스톨리핀의 정책을 지지했다. 제1야당이 된 카데트는 차르 정부의 정책을 간혹 비판하긴 했지만, 예산과 농업정책ㆍ혁명세력 탄압 등에서 차르 정부를 지지했다. 이렇게 제3차 두마는 정부와 밀월 관계를 가지면서 1907년부터 1912년까지 5년간의 법적인 임기를 채우고 마무리되었다.
제2차, 제3차 두마 시기에 중요한 인물은 스톨리핀이다. 스톨리핀은 ‘선평화ㆍ 후개혁’을 기본방침으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테러와 혁명세력 등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였다. 사회혁명당의 전투조직과 극단주의자들이 1906년 약 1400명, 1907년 약 3,000명을 죽이는 테러를 저질렀다. 1906년 8월에는 스톨리핀의 저택이 폭탄테러당하여 32명이 죽고, 스톨리핀의 아들과 딸이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스톨리핀은 200여 종의 진보적 신문을 폐간시키고, 반란 혐의자들을 즉결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리고 혁명 조직들에 경찰과 비밀정보원을 간첩으로 침투시켰다. 1907년부터 3년 동안 정치활동을 이유로 2만 6천명을 투옥시켰고, 5천 여 명이 처형시켰다. 그래서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할 정도였다. 많은 테러리스트ㆍ 혁명가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그리고 많은 혁명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런 ‘평화’ 을 기반으로 종교개혁, 언론ㆍ출판ㆍ결사ㆍ집회의 자유, 지방자치조직의 근대화, 젬스트보의 권한강화, 지방재판소 개혁, 중앙행정조직의 개편, 농업개혁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스톨리핀은 자영농을 육성하여 안정된 체제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1906년,ㆍ1910년ㆍ 1911년에 제정된 스톨리핀의 농업 관련 법들의 목적은 기존의 농민공동체(미르)를 해체하고 강력한 토지 소유 농민계급, 즉 자영농과 개인농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1906년 11월의 행정명령과 1910년 6월의 법령을 통해 농민공동체를 해체하여 농민이 공동체 내 자신의 분여지를 사유화하고, 흩어져 있는 토지를 한 곳으로 모아 단지(자영농민의 마을)를 만들도록 장려하였다. 이렇게 사유화된 토지를 오트루프(отруб), 단지를 후토르(хутор)로 불렀다. 농민이 내던 토지 상환금도 폐지되었다.
1914년까지 전체 농가 중 24%가 사유지를 갖게 되었고, 10%가 단지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주의 토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부농들은 농민은행의 융자를 받아 빈농의 분여지를 헐값에 사들이면서, 농민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비옥한 토지는 지주와 부농의 손에 들어갔고, 농민은 더 큰 궁핍에 시달렸다. 스톨리핀의 토지개혁은 농촌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했다. 도리어 농촌공동체적 질서를 고수하려는 농민들과 그것에서 벗어난 부농 사이에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고, 빈농과 부농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농민들을 유럽 러시아로부터 시베리아로 이주시켜 농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외에 스톨리핀은 보통교육 제도를 확립하였다.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인해 농민공동체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지방관리관의 권력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에 대한 특별한 제한들이 해제되면서 법적으로 농민들이 다른 계급들과 좀더 평등해졌다.
서부 국경지방 출신인 스톨리핀은 민족주의자로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핀란드를 러시아화하려고 했다. 핀란드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법안이 1910년 6월에 니콜라이 2세에 의해 추인되었다. 핀란드 사회가 이 법에 항의하자, 그 해 10월에 차르는 핀란드 의회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선거를 명령했다. 1906년 선거법은 두마의 폴란드인 의석수를 37석에서 14석으로 낮추었다. 1907-1908년에는 폴란드의 모든 민족 문화ㆍ교육 단체와 기관들을 폐쇄시켰다. 유태인을 억압하는 정책도 계속하여서, 교육기관에 유태인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1908년 8월부터 수도권 고등 교육기관의 유태인 대학생 숫자를 3%로 제한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 구상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뿐만 아니라, 차르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두마와 국가평의회가 양쪽에서 그의 개혁을 방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헌법 제87조, 비상시 입법권을 써서 두마를 일시 휴회하고 황제의 칙령으로 법률을 공포하는 방법을 취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발을 받았다. 이런 힘겨운 개혁의 과정 가운데에, 스톨리핀은 1911년 9월 1일 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혁명집단과 관련있는 경찰스파이에게 총을 맞고 살해당하였다. .
제4차 두마의 경우, 1912년 가을에 선거가 치러지고 1912년 11월 5일에 개원하였다. 제4차 두마의 정당별 구성은 제3차 두마와 비슷했다. 10월 당원은 98석, 카데트는 59석, 사회민주당은 14석,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은 21석을 차지했다. 10월당의 좌익에 속하는 의원들이 좌익 10월당을 결성하여 카데트와 제휴하였다. 우익 정치인들의 압력을 받는 국가평의회가 두마의 개혁안을 대부분 거부하면서, 제4차 두마의 분위기는 반정부적으로 변하였다. 제4차 두마는 1912년부터 1917년 2월 혁명직전까지 5년동안 지속되었다.
스톨리핀의 반동적인 개혁 하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1910년 11월 7일 톨스토이의 죽음과 장례식은 대규모 민중봉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12년 1월 프라하회의에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결별한 독자적인 볼셰비키 정당을 결성한다. 민주공화제, 8시간 노동제, 지주토지 몰수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레닌이 이끄는 이 정당은 노동자들의 지도세력으로 자리잡는다.
1912년 4월 시베리아 레나 금광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군대가 파업노동자들에 발포하여 270명이 살해죽고, 250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퍼져 대규모 파업과 집회, 시위가 시작되었다. 30만 노동자가 항의 파업에 가담했고, 메이데이 때는 4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였다.
1912년에 100만 명, 1913년에 127만, 1914년에 15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1910년과 1914년 사이에 1만 3천 건 이상의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1912년 7월 투르케스탄에서 공병대의 무장반란이 일어났고, 발트 함대와 흑해 함대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914년이 되자 노동운동의 물결이 러시아를 휩쓸었다.
[러시아 혁명2-1917년 2월 혁명ㆍ1917년 10월 혁명]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한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가블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죽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이 대전에 러시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대항하여 슬라브 형제국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하여 참전한다. 독일도 이에 맞서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쟁에 뛰어든다. 그러자 독일에 맞서기 위하여 프랑스와 영국도 가세한다. 전쟁 초기에 러시아는 프러시아 동부와 갈리치아 지역을 공격하여 몇 번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후 군대를 규합한 독일이 탄네베르크 전투(1914년 8월 27일- 29일)에서 러시아군대를 섬멸하고, 갈리치아에서도 승기를 잡는다.
전쟁을 치르면서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과 정치적 군사적 리더십의 부재 등 러시아 체제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쟁이 발발한지 1년 뒤에 러시아는 970만 명의 병사들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군대를 이끌 장교와 부사관, 신병 훈련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니콜라이 황제의 삼촌 니콜라이 대공은 군대를 어떻게 이끌지 몰랐다. 후방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병력이 1500만 명까지 불어났지만, 군수품 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공장과 농장에서 군수품을 생산할 수 있는 노동력이 부족하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생활수준이 하락하였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방위산업이 성장하면서 생필품이 부족하였다. 1916년 배급제가 도입되었지만, 1917년 초에는 주요물자가 부족하게 된다.
러시아 황실과 내정은 황후 알렉산드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승려 라스푸틴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황후와 라스푸틴의 염문설이 유언비어로 국민들 사이에 퍼져, 황제와 황실의 권위는 추락하였다. 이렇게 러시아 체제의 내적 모순과 위기는 확연하였다. 하지만 무능한 차르와 정부의 장관들은 이런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더욱 키워가고 있었다.
1917년이 되자 혁명의 파고는 다시 올라온다.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에 비보르그 구의 여성노동자들이 “빵을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이튿날 다른 구로 퍼져나가 약 20만 명이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2월 25일에는 학생들과 중산층 계급이 합류하여 더 많은 군중이 거리로 나왔다. 그러자 차르는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이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하지만, 진압에 동원된 카자크 병사가 오히려 경찰 서장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2월 26일에는 파블로브스크 4중대가 경찰을 향해 발포했다. 2월 27일(구력, 신력 3월 12일)에는 연대들이 발사명령에 불복종하고, 2월 26일-27일 밤 사이에 볼린스크 연대의 병사들은 지휘관들을 살해해서 거리로 내던져버렸다. 이에 다른 부대들도 동조하였다. 3월 1일에는 17만 명의 병사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위에 가담한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2개의 감옥에서 정치범을 해방시켰다.
2월 27일(구력, 신력 3월 12일)에 니콜라이 2세가 두마 해산을 명령했지만, 두마 의원들은 의회 건물 안에 남아 ‘두마임시위원회를’ 구성한다. ‘두마임시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와 교섭을 벌였다. 2단계 혁명론을 지지하던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는 두마임시위원회의 임시정부 수립 구상에 동의하지만, 참여는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3월 2일에 두마임시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승인 아래 임시정부를 발족시킨다. 임시정부는 수상에 젬스트보의 지도자였던 리보프, 외무장관에 밀류코프, 육군 및 해군장관에 구츠코프, 법무장관으로는 케렌스키로 구성되었다. 카데트와 10월당이 대부분의 각료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상태가 러시아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군 수뇌부는 두마 의장 로드쟌코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제에게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줄 것을 요구했다. 3월 2일 니콜라이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난다는 칙령에 서명했고, 혈우병에 걸린 자신의 아들 대신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다음 황제로 지명된 미하일은 왕위를 거절한다. 이로써 3백년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했고, 러시아의 전제정은 붕괴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병사 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가입했다. 이를 필두로 러시아 여러 지역에 노동자와 병사들이 주축이 되는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당시에 소비에트는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진 유일한 권력기구였다. 소비에트에 참여한 사회혁명당원들과 멘셰비키들은 당면한 러시아의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합법적인 권력기관으로 인정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감시와 압력 기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안들에 있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황제의 전제정이 몰락한 권력의 공백지대에서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정치권력의 한 축이었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동의 없이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중권력 상태가 등장하였다.
3월 1일에 소비에트는 군대에 '제1호 명령'을 내린다. 근무시간 외에 거수경례 폐지, 장교의 부하에 대한 가혹행위 금지, 모든 분대에서 위원회를 구성할 위원 선출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 명령은 반혁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월 3일에는 임시정부의 선언문이 공표되었다. 정치범에 대한 사면, 언론과 출판의 자유, 군인들의 정치적 자유 허용,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인정, 모든 사회적ㆍ종교적ㆍ민족적 차별 철폐, 보통ㆍ직접ㆍ평등ㆍ비밀투표에 의한 지방자치기관의 선출, 선출된 책임자를 가진 민병대와 민간치안대 설치, 국가의 통치 형태와 헌법을 제정할 제헌의회 소집의 즉각적인 준비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외에 농업문제 관련 권고안을 작성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농업문제의 해결과 민족별 국가 설립 문제는 이후에 소집될 제헌의회까지 연기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병사ㆍ노동자 등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3월 18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무병합ㆍ무배상'의 강화(講和)를 실현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방침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이중권력 상태가 진행되었다. 4월 18일에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차르 정부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준수하고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러시아의 동맹국들에 보낸다. 4월 20일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밀류코프 타도’, ‘전쟁 중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벌인다. 모스크바와 지방 도시에서도 동조시위가 벌어진다. 이에 밀류코프와 전쟁성 장관 구츠코프는 내각에서 사임하였다. 4월 23일에 정부는 기업에서 생기는 생산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실현하는 공장위원회를 합법화했다.
4월 3일에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밀봉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 도착하여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다. 다음날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내용이 담긴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이른바 '4월 테제'를 발표한다. 이 테제에는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어떤 경우에도 임시정부를 지지해서 안 된다.’, ‘귀족 소유의 대토지를 당장 몰수하여 국유화해야 한다.’, ‘모든 은행을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당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을 공산당을 바꿔야 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밀봉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한다. 그는 2단계 혁명론을 폐기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시켜 즉시 사회주의 혁명을 할 것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