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 ․ 서 장벽 건설
패전국이자 전범국이던 독일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독일 문제는 언제나 냉전의 핵심이었다. 나치 청산, 국경선, 전후 복구 등의 문제를 놓고 주변국들의 이해가 엇갈렸다. 그러나 분단 후 서독은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수상의 집권 하에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공산권과의 긴장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1961년에 동서독을 나누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아데나워는 반파시즘의 분위기가 사라지자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다. 1947년 봄에 미국의 압력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로부터 거의 동시에 축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을 내쫓은 대가로 서유럽국가들은 마샬 플랜에 따른 경제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유럽의 옛 산업강국들은 경제를 일거에 회생시킬 능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유럽은 외부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해야 했고 그 내부의 정치적․군사적 힘은 더 이상 위력을 갖지 못했다.
<마샬 정책 커리커처>
2) 대연정
1966년 가을, 기민련, 기사련, 사민당이 대연정을 형성한다. 독일은 냉전체제하의 국시였던 반공을 비판세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악용한다. 그 때문에 사회는 공산주의 이념이나 정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갔다. 좌파계열의 사민당은 1966년에 이르러 보수정당과 대연정을 맺었고, 이러한 노선의 선회는 지식인, 학생층, 좌파 노조지도자 등의 반발을 야기했다. 1968년 5월 30일에 사민당은 긴급조치법의 제정에 협력했고, 1969년부터 자민당과 연정함으로써 집권정당의 꿈을 이루었다. 아래의 커리커처는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을 비꼬는 것이다.
<대연정 커리커처>
아래의 사진에서도 대연정을 형성한 사민당과 기민련이 오직 성공만을 추구하면서 달려가고 있고, 원외야당과 야당은 저 멀리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만을 지켜 볼 뿐이다 .
<대연정 커리커처>
아래의 사진은 1966년 12월 1일 연정을 이루는 모습이다.
3) 60년대 당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모습을 다음의 동영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동영상>
<베트남 전쟁 당시 네이팜탄공격으로 인한 참상>
<독일에서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반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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