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공포
범주명 인간과 정서
토포스명(한글) 공포
토포스명(프랑스) peur
토포스명(러시아) страх, ужас
정의 1. 자신이 더 나약하다고 느낄수록 공포는 점점 더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공포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위협에 직면하거나 위험이 있을 것을 예상할 때 느끼는 감정이자 그것을 피해 살아남으려는 생존 본능을 의미하는 ‘푀르 peur[pœːʀ]’와, 푀르가 극대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테뢰르 terreur[tεʀœːʀ]’, 실존적 공포를 의미하는 ‘앙구아스 angoisse[ɑ̃gwas]’를 들 수 있다. 푀르의 어원은 라틴어 pavorem이다. pavorem은 ‘공포에 사로잡히다’, ‘무서워하다’의 의미를 갖는 pavere에서 파생되었고, pavorem의 본래 의미는 다른 파생어 pavire(‘땅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땅을 두드리다’), paver(‘땅을 고르다’)와 비슷하게 ‘~으로 두들겨 맞다’인 것으로 보인다. ‘맞아서 충격을 받다’에서 비유적으로 ‘갑작스런 공격에 압도당하여 겁에 질리다’, ‘~이 엄습하다’로 의미전환이 이루어진 듯하다. 
  “공포는 지혜의 시작이다.”(프랑수아 모리악, 『테레즈 데케루』, 1927)라는 표현에서처럼, 공포는 대개의 경우 거기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을 돕는 계기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공포의 기능을 잘 보여 주는 것이 통과의례 의식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반 헤넵이 성장,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변화에 따르는 관습적 의례를 지시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통과의례’(『통과의례』, 1909)는 일반적으로 죽음과 재생의 관념을 상징화한 것이다. 제 1 단계는 성인이 될 무렵 이전의 생활양식과 완전히 단절할 수 있도록 사회적, 육체적으로 청년을 격리시키는 의식이다. 이는 흔히 가상의 죽음이라는 형식을 취하므로 절식(節食) 또는 일부 신체의 훼손을 통해 육체적 고통을 참아 내거나, 극한 상황에서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데카르트의 『정념론』(1650)에 의하면, “공포는 비겁함, 놀람, 두려움이 과도한 것으로 언제나 그 자체로는 극복해야 할 약점”이다. 성장 과정에서 통과의례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용기를 배우지 못한다면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제압하는 데 있다”(프랑수아 미테랑, 『회고록』, 1996), “용기, 그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자크 쉬락)와 같은 표현들이 그 점을 보여준다. 
  인간에게서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을 잃는 공포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태어나 죽음을 향해가는 모든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존재론적 공포이다. 통제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만큼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며, 실상 외부의 자극을 위협이라고 느끼는 경험 자체가 그 근원에서 생존에 대한 위협일 것이다. 이로부터 공포가 생존 메커니즘이라는 심리학적 설명이 가능해진다. 심리병리학에서 공포는 고통이나 위험과 같은 특정한 자극에 반응하는 생존 메커니즘, 다시 말해 위험을 감지하고 그것을 피하거나 맞서 싸우고자 하는, ‘대항-회피 반응’이라 불리는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된다. 
  인류에게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오랜 세월에 걸쳐 제도적으로 관리해온 것으로는 종교가 대표적이다. 

“영혼의 불멸성은 죽음에 대한 공포 또는 죽은 자들에 대한 미련에 의해 창조되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수첩』, 1880)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유일한 원천이다.” (모리스 메테를링크, 1949)

  모든 종교에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위로하고 언젠가 닥쳐올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덜어주는 사후 세계에 대한 환상이 포함되어 있다. 죽음 이후 하느님의 구원을 형상화한 예수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매우 극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는 기독교의 해법일 것이다. 
  한편 죽음의 공포에 대한 비종교적 사고로는 무신론 또는 유물론을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역설적 성찰을 떠올릴 수 있다. 현실주의자이고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기원전 342~기원전 270)의 다음과 같은 글귀가 대표적이다.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없고,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서한집』, 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에서 재인용)

  죽음은 존재 밖에 있는 관념이고, 인간은 결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이 역설적인 성찰에서, 우리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본질이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둠에 대한 공포, 원인을 예측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 새로운 대상의 갑작스런 출현에서 느끼는 공포 나아가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공포는 모두 본질상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이렇듯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인 공포를 관리하고 조정하는 일은 인간에게 언제나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공포의 극복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적, 제도적 요소들의 발전을 추동해온 핵심적인 동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랑스 라스코 지방의 동굴 벽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대 동물들은 사냥의 공포를 없애려는 고대인들의 일종의 주술의 산물이었고, 중세 민중의 상상력을 지배했던 마법의 세계 역시 거대하고 신비로운 자연과 우주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상상의 세계 속에서 납득할만한 것으로 만들어 극복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입된 이후 중세적 상상력은 금기시되거나 신에 대적하는 악마적 요소들로 전환되었지만, 그 잔재는 기독교 풍속에도 남아있다. 기독교 국가에서 매년 열리는 카니발 축제는 예수가 황야에서 단식한 것을 기리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순절에 앞서 3~7일 동안 고기를 마음껏 먹고 즐겁게 노는 의식을 말한다. 지방마다 풍속에 차이는 있지만 카니발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가장, 가면행렬, 종이 인형이다. 가면은 악령이나 정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형상의 가면을 씀으로써 무서운 존재들에 대한 공포심을 줄이고 나아가 그들에 맞서는 용기를 내보려 했던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공포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는 경우는 한 집단 또는 사회구성원의 상당수가 동시에 공포를 공유하는 현상이 발생할 때이다. 실제로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유럽 인구의 1/3이 희생되었던 중세 말 죽음에 대한 집단적인 공포는 당시 ‘죽음의 춤’이나 저승 이야기, 최후의 심판 등 예술적 주제를 양산했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죽음을 형상화함으로써 공포를 극복하려는 중세적 대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20세기까지도 ‘죽음과 소녀’ 같은 변형된 테마로 여러 예술 장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양산된 대표적인 집단적 공포는 ‘천년의 공포'이다. 기독교도들은 천 년이 되면 사탄이 지옥에서 솟아올라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고, 그 때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믿었다. 중세 내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던 이 종말론적 사고는 특히 천 년을 통과하는 시기인 10~11세기에 절정에 달했고, 이 기간에 기독교는 제도적인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졌다. 이 공포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과 유토피아 사상이 결합한 ’천년왕국설‘의 형태로 현재에도 남아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공포’를 뜻하는 ‘스트라흐 страх[strakh]’는 그 어원이 명확하지 않으나 인도 유럽어 어근 *(s)terg-, *(s)treg-, *(s)terk-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체르니흐 어원사전>). 리투아니아어 stregti(‘꽁꽁 얼다’), 독일어 strecken(‘펴다, 뻗다’), 라틴어 strāgēs(‘멸망, 파괴’), 영어 strike(‘치다, 가격하다’) 등도 이 어근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흐’가 공포를 유발하는 다양한 원인과 다양한 강도의 스펙트럼을 모두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공포 개념의 중심적, 중립적 어휘라고 한다면, 러시아어에는 이보다 더 강력하고 통제 불가능한 공포를 표현하는 단어도 존재한다. ‘우자스 ужас[uzhas]’가 바로 그것인데, ‘스트라흐’ 보다 더 강력하고 극한적인 공포를 뜻하는 ‘우자스’는 인간이 자신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것과 마주할 때, 그리하여 그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경험하게 되는 극심한 공포를 가리킨다(<러시아어 동의어 사전>, 2003 참조).
  공포는 시대나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일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던 고대인들이 느꼈을 공포만큼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공포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이 감정의 본질적 특성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문화권마다 다소 상이하게 해석되어 왔다.
  세계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미미했던 시대에 공포의 감정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 자연 현상은 공포의 직접적 원인이자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포의 감정은 인간의 자기 방어를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종족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고대 러시아인들의 공포에 대한 표상은 고대 러시아 신화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현대까지 남아있는 공포의 은유적 표상인 ‘추위’와 ‘뱀’의 표상은 고대 시기에도 이미 널리 나타나던 것이었다. 공포와 추위의 은유적 관계는 여러 문화권에 널리 나타나는데 공포로 인해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들을 추위에 의한 인체의 반응처럼 묘사함으로써 공고해진 관계라 할 수 있다. 러시아어에서 이 관계는 다양한 언어표현으로 나타난다. 가령, “공포로 하얘지다”, “공포로 오들오들 떨다”, “공포가 피를 얼어붙게 한다”, “공포로 움츠러들다”와 같은 표현에서 추위와 공포의 유사한 생리적 발현이 드러난다. 또한 고대 러시아 신화에는 공포와 ‘뱀’의 연상 작용도 널리 발견된다. 공포는 마치 독을 품은 뱀처럼 인간을 덮치고 그 독으로 인간을 마비시키는 감정이다. 이러한 ‘공포-뱀’의 은유적 관계는 그리스 신화에 그 기원을 두지만 러시아의 전설과 신화에서 다소 변용되면서 독특한 러시아적 공포의 메타포를 형성해 왔다(우스펜스키, 1979 참조). 
  공포와 뱀의 연상 작용은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고르곤의 슬라브적 변형인 ‘고르고니야’에 토대를 둔다. 슬라브 전설 속의 고르고니야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에 뱀 머리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머리를 취하는 자는 세상의 그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는 강인한 힘을 얻게 되지만 그것을 취할 수 있는 자는 가장 용감한 사람, 단 한명 뿐이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고르고니야의 뱀 머리는 죽음을 의미하였으며 따라서 극심한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 그 법칙을 조정하는 어떤 초월적 힘의 작용을 느끼게 된 인간은 그 앞에서 무력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공포의 감정은 종교의 탄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불행은 신의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며 인간이 범하는 말과 행동에 대한 신의 단죄라는 생각이 퍼져나가면서 점차 공포가 죄의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띠게 된다. 외부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본능적 반응으로서의 일차적인 공포와는 다소 상이한 종류의 공포, 곧 인간의 자기 성찰의 산물인 죄의식과 관련된 공포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단죄의 공포, 신에 대한 공포는 중세 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가하면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공포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제기된다.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 사르트르 철학에서 이 공포 개념은 구체적인 대상이나 환경에 의해 유발되는 보통의 경험적 공포와 구분된다. 이 형이상학적 공포, 실존적 공포는 외부의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그 근원을 둔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무’에 대한 사유로부터 비롯된 이 공포를 가리키는 단어로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단어 ‘Angest’(『‘Angest’의 개념』, 1844)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독일어 Angst, 프랑스어 angoisse에 상응하는 단어로서 한국어로는 ‘불안’으로 번역되기도 한다(가령, 『불안의 개념』, 임규정 옮김, 한길사, 1999).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무’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실존적 공포, 형이상학적 공포는 프랑스의 철학, 문학, 사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당히 익숙한 개념인 반면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는 그리 근본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이는 이러한 실존적 공포를 지칭할만한 적절한 러시아어 단어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어로 이 공포 개념은 연구자에 따라 ‘스트라흐’나 ‘토스카(тоска, ‘슬픔’)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특히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1952)는 이를 지칭할 적당한 러시아 단어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복합어 ‘스트라흐-우자스’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실존적 공포 개념이 흔히 일상의 공포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일상성은 초월적인 심연에서 비롯된 공포를 일상적인 걱정으로 바꾸어버리고 미래의 징벌로 인간을 위협함으로써 공포의 윤리를 창조해낸다.”(베르댜에프, 『인간의 사명에 대하여』, 1931)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중세의 기독교적 공포의 관념과 무관하게 인간의 심원한 정서와 관련하여 새로운 함의가 도입되는 것은 18세기 말 공포와 관련된 근대적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고딕문학 또는 환상문학에서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기원전 355년경)에서 연민과 더불어, 비극이 가져오는 승화작용, 즉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감정으로 공포를 제시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 때문에 관중의 마음에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정념이 순화되는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진다. 실상 저주 받은 운명이나 마력이 깃든 물건이 야기하는 공포감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들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다. 중세적 상상력이 마법이나 초능력, 미신, 부적 같은 불가사의한 사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래적 공포에 대한 해법을 찾아내려 했다면, 18세기 말~19세기에 등장한 고딕풍의 환상문학은 합리적 이해를 벗어난 영역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인간의 의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포의 감정을 이용했다. 
  환상문학은 초자연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서 이해 불가한 사건을 소재로 ‘단절과 공포감’, ‘애매성과 의혹’이라는 특성을 담지한 문학작품을 일컫는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환상문학의 본질은 기이한 소재보다 그것이 야기하는 공포감과 의혹에 있을 것이다. 환상은 합리적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고 여겨지는 일상에 단절을 가져오고 그 단절은 자연스럽게 공포감을 유발하며 그 과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공포감과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환상적 텍스트의 이러한 특징을 프랑스의 구조주의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자연 법칙만 알고 있는 사람이 명백히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에 직면하여 겪는 망설임”(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이라고 설명한다. 단절된 현실 앞에서 혼란과 의혹에 휩싸이며 다시 현실에 안주할 수 없게 되는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이며, 독자는 주인공의 이 공포를 공유함으로써 똑같이 의혹에 빠져든다. 
  환상소설을 신화나 요정 이야기와 구분하여 문학사가 카스텍스는 “정신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환각을 경험하며, 거기서 공포심을 느끼고도 명확한 사실을 경험했다고 믿는 사람의 이야기”로 정의했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환상문학은 기만적인 현실에 대하여 상상 세계의 행위를 대립시키는 반사회적이고 내면지향적인 특성을 갖는다. 카스텍스에 따르면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노력으로 언젠가 실현시킬 수 있는 세계에 관심 갖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환상문학은 비롯된다.(피에르-조르주 카스텍스, 『프랑스 환상 이야기, 노디에에서 모파상까지』 인용 및 참조)
  이러한 환상문학이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절정에 달한 18세기 말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민족학자 레비-브륄은 『원시적 신화학』(1935)에서 환상에 의해 “합리적 사고의 구속에 매여 있던 정신이 이완”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사람은 해방의 만족 내지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애써 인정하지 않지만 동시에 늘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은 합리적 사고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이성적 탐색을 늦추지 않지만, 동시에 합리적 사고의 틀에 상상력을 종속시키기를 은연중에 거부한다. 비현실적인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초기 낭만적 환상문학에 이어, 점점 더 사실적인 세계, 일상과 가까운 세계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내면화된 공포를 묘사함으로써 비합리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지는 근대적 환상문학이 과학, 기술, 논리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19세기 중반에 대거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인 오노레 드 발자크도 가문의 멸망을 막기 위해 부모와 누이를 죽여야 하는 스페인의 귀족(『사형집행인』, 1830), 방탕한 아들을 죽이고 속죄를 위해 바닷가 바위 위에서 일생을 보내는 어부(『바닷가에서의 비극적 이야기』, 1834), 실제 범죄와 상상의 범죄를 혼동하는 몽유병 환자(『붉은 주막』, 1831) 등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환상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적 환상문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애드가 포의 『최면의 계시』(1844)가 1848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에 의해 번역, 소개된 이후에는 초자연적 공포와 현실의 삶이 압박해오는 죽음의 공포, 내면의 불안을 뒤섞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학과 상업의 진보가 초래하는 비인간화와 부르주아 계급의 잔인한 냉혹함을 다룬 빌리에 드 릴라당의 『잔혹한 이야기들』(1883)에는 서로를 떼강도로 알고 서로에게 총을 쏘아 결국 모두가 죽는 부르주아들(『노상강도들』), 사랑보다는 돈을 가치로 여기며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비엘필라트로 가문의 아가씨들』, 어린 연인들이 몰래 만나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돈 벌 궁리만 하는 『비르지니와 폴』이 나온다. 
기 드 모파상의 단편소설 『물 위에서』(1888)에는 배를 타고 센 강을 유람하다가 강 한복판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배가 붙들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마침 지나가는 다른 배의 어부들이 “설명할 수 없는 어리석은 공포”에 사로잡힌 주인공을 도와 걸려 있는 닿을 끌어올리는데, 이 때 닻과 함께 어떤 여인의 시체가 끌려 올라온다. 얼핏 보면 이 이야기에는 초자연적인 요소도 불가사의한 일도 없는 듯하지만, 모파상은 여인의 시체가 주인공이 탄 배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슬그머니 던져 놓는다. 현실의 합리적인 이해 속으로 안전하게 돌아오려는 독자의 발목을 붙드는 이 의심이 섬뜩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공포감은 독자가 현실의 안전한 논리 속에 안주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하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이처럼 환상문학에는 합리적인 사고를 혼란에 빠트리고, 합리적인 사고로 하여금 불합리한 것 또는 최소한 분류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초자연적인 것, 불가해한 것, 끔찍한 것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합리적으로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던 독자가 그것들의 존재를 믿게 될 때, 공포는 독자를 사로잡는다. 모파상의 환상소설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차츰 불안, 두려움, 공포, 그리고 공황에 사로잡히는 상태로 옮겨가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비합리적인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1893년 전신 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모파상은 자신이 체험한 인격의 분열, 자기 상실의 상태를 극명하게 관찰하고 “나는 무섭다, 나는 무서운 게 무섭다. 나는 겁에 질린 내 정신의 경련들, 설명할 수 없는 이 끔찍한 공포감이 무섭다.”(『그가?』, 1884)라고 존재론적 공포를 고백한 바 있다. 모파상은 그 공포감이 “모든 작가의 힘인 동시에 비참인 또 하나의 눈”(『물 위에서』, 1888)을 만들어 준다고 여겼다. 이를 통해 독자는 세계와 존재에 대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던져보도록 인도된다.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참조) 

“두려워한다는 것은 수천 번 죽는 것이며, 그것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스테판 츠바이크, 『클라리사』, 1942)

“요정 이야기들은 모두 참혹하다. 모든 요정 이야기는 피와 공포의 심연에서 솟아난다.” (프란츠 카프카, 1924)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산업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확산된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현실에 대해 환상을, 과학주의에 대해 신비주의를 그리고 안정적인 것에 대해 병적인 것을 우위로 삼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위스망스의 악마숭배주의(『거꾸로』, 1884), 괴물의 혐오스러운 변신을 통해 두려움과 공포를 확산시키는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1869)가 이 시기에 출현했다. 또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악마적 성향에 대한 공포는 흡혈귀나 늑대인간 등 변신의 주제를 통해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다. 샤를 노디에가 흡혈귀의 전설과 콩트를 모아 『엥페르나리아나』(1822)를 출간한 이후 흡혈귀는 테오필 고티에의 『사랑에 빠진 죽은 연인』(1836)에서 성직자 로뮈알드가 마법처럼 사랑에 빠져든 치명적인 여인 클라리몽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알렉산드르 뒤마의 『1001명의 유령들』(1849), 보들레르의 『흡혈귀의 변신』(1857)에도 등장한다.

“그녀가 내 뼈마다 온통 골수를 빨아내고
내가 사랑의 키스를 돌려주려 나른한 몸을 
그녀 쪽으로 돌렸을 때, 눈에 띈 것은
오직 고름으로 꽉 찬 끈적끈적한 가죽 부대뿐!(……)
등골이 오싹하여 두 눈 딱 감았다가
환한 불빛 속에 다시 떴을 땐,
내 곁에 피로 가득 찬 듯이 억센 
마네킹 같은 여체는 간 곳 없고, 
해골 조각들이 뒤섞여 떨고 있었으니, […]” 
(보들레르, <흡혈귀의 변신>, 『악의 꽃』, 1857) 

  들뢰즈에 따르면, 흡혈귀는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혹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 죽었으나 죽어 있지 않은 상태”(질 들뢰즈, 『천 개의 고원』)를 나타내며, 늑대인간의 변신은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갈등을 공포로 형상화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은 인정된 질서의 단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일상의 한결같은 적법성 한가운데로 뜻하지 않게 출현하는 현상이지, 현실 세계가 오로지 불가사의하기만 한 세계로 완전히 대체되는 현상이 아니다.”(로제 카이유아, 『환상 속 일관된 모험들 - 일반화된 미학 - 불균형』)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느끼는 불안과 의혹에서부터, 필연적인 것과 자의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부조리한 것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에 이르기까지 더욱 다양해지는 환상문학의 주제들은 현대사회가 현대인들의 무의식 속에 쌓아가는 온갖 불안과 공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것도 그렇게 끔찍한 것도 아니라는 안전장치로, 또는 점점 견고해지는 현실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으로 작용하면서 이후로도 서구 문화의 한 영역으로 지속될 것이다. 
  한편 20세기 전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 공포는 외부의 대상이나 자극, 또는 심리적, 정신적 불안이 유발하는 공포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그 근원을 둔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인간의 죽음을 새삼 자각하게 해주는 외적 요인이 되기는 했겠지만, 실존주의의 특징은 그 공포를 해결해주는 종교적 사유를 거부하고 존재의 소멸 곧 죽음을 ‘무’라고 규정하면서 직시한 데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갖게 되는 근원적인 공포, 존재론적 슬픔을 프랑스어로 ‘앙구아스(angoisse)’라 말한다. 경험적 공포가 동물도 느끼는 감정이라면 형이상학적 공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는 인간의 전유물이다. 

“모든 것이 근거가 없다. 이 정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속이 메스꺼워지고 모든 것이 둥둥 뜨기 시작한다. 그건 구역질이다.”(장 폴 사르트르, 『구토』, 1938)

“공포심이 없는 자는 정상이 아니다. 이는 용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장 폴 사르트르, 1980) 

  『구토』는 일상생활 속에서 가끔 발작적으로 느끼게 되는 구토의 원인을 알기 위해 주인공 로캉텡이 일기를 쓰면서 그 구토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가 존재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구토를 일으키는 것은 정확히 심연으로의 추락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심연 속에 뛰어들 수 있는 경계 없는 자유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불안 ‘앙구아스’다. 

“‘불안은 현기증에 비유될 수 있다. 입을 크게 벌린 심연을 우연히 내려다보는 자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심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에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1844)

“희망은 공포에게로 열린 욕망이다.” (조르주 바타이유, 『진지함의 저편』, 1962.)

  현대의 유럽인들이 서구 정신의 뿌리 기독교가 마련해준, 죽음의 공포에 대한 안전장치(구원)를 거부하고, 죽음이 존재의 소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느끼는 실존적 공포, 사르트르는 그것을 신체가 이물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일으키는 구토에 비유한 듯하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한 바 있듯이 러시아에서는 실존적 공포, 형이상학적 공포뿐만 아니라 경험적 공포나 집단적 공포를 포함하여 공포 개념 자체가 다른 감정이나 가치 개념들(가령, ‘슬픔(토스카)’, ‘자유’, ‘양심’ 등)에 비해 그리 근본적인 감정 혹은 주제는 아닌 듯하다(골로바닙스카야, 2009 참조). 이와 함께 공포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각, 그 부정적 태도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어에 존재하는 수많은 속담이나 경구를 통해 공포 감정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가령, “공포를 느끼는 것은 수치스럽다”라는 표현에는 공포를 인간의 약한 본성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드러나고, “공포로 눈이 커지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속담은 공포로 인해 인간이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민중의 생각을 담고 있다. 이처럼 공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공포를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마련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에서는 공포보다는 반대로 ‘베스스트라시예 бесстрашие[besstrashie]’가 더 강조되고 반복되어 나타나는 주제가 된 듯하다. ‘베스스트라시예’는 ‘베스 бес[bes](~의 부재)’와 ‘스트라시예 страшие[strashie](공포)’의 결합 형태로, 문자 그대로라면 ‘공포의 부재’ 혹은 ‘공포를 모름’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용감한 사람의 특성으로서 ‘베스스트라시예’는 단순히 공포가 없거나 공포를 모르는 상태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러시아에서 진짜 용감한 사람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 공포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베스스트라시예’는 단순히 공포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어떤 것인지 알고 경험하지만 스스로 극복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베르댜예프가 말했듯이 “용감함은 공포의 부재라기보다는 공포에 대한 승리”(『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존재론적 변증법』, 1952)인 것이다.
  러시아 사상가 리하쵸프는 러시아 민담이나 정교 교리의 ‘바보들’과 ‘선(善)’, 그리고 이들의 ‘베스스트라시예’의 관계에 주목하여 러시아적 공포를 설명한다. 가령, 러시아 민담의 주인공 ‘바보 이반’이나 정교 신앙에서 ‘바보 성자’로 일컬어지는 ‘유로디비(holy fool)’는 그 기이한 행동과 차림새, 세상사로부터 초연한 듯한 모습으로 인해 ‘바보’로 불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바보들과 유로디비들은 자신들의 우둔함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들, 특히 귀족과 황제의 우둔함을 드러내주었다”(『러시아인에 대하여』, 1987)는 리하쵸프의 지적처럼, 민중들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던 이 ‘바보’들은 선한 본성을 기반으로 공포에 초연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항상 진실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인간의 공포는 충동적인 감정이며 약한 본성의 발현으로서 억누르고 자제해야 할 것이라는 식의 공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정교의 수용 이래로 다소간의 변화를 겪게 된다. 공포가 여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두드러진 변화는 공포가 신과의 관계를 통해 읽히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나온 저술들에는 공포가 신의 자비로움에 대한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이는 깨끗하지 못한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들이 나타난다.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니, 그것은 바로 깨끗한 양심이다.”(『꿀벌』, 12-13세기 격언 모음집)

  신과의 관계를 통해 읽히기 시작한 공포는 정교 교리 안에서 신성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변화되는데 이를 ‘신의 공포(Божий страх 혹은 Господень страх)’라 부른다. 이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 즉 신에 의한 단죄의 공포이자 죽음의 공포이다. 그러나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러시아어 성경에서는 ‘신의 공포(Господень страх)가’) 지혜의 근원이요(『성경』, 시편 111:10, 공동번역)”라고 한 성경 구절에 잘 드러나 있듯이, 이 공포는 신에 대한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신앙의 증거이자 지혜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보통의 공포와 구분되는 이 공포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의 저속한 상태와 관련된 동물적 공포, 그리고 지고의 상태와 관련 있는 영적인 공포를 구분해야 한다. 저속한 세상의 위협에서 비롯된 공포가 있으며, 이와는 달리 저 높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공포, 곧 신의 공포가 있다.”(베르댜예프,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존재론적 변증법』, 1952)

  이처럼 정교 교리 안에서 공포가 신앙의 증거로 주창되기도 한 점도 러시아적 공포의 특성 중 하나가 되겠으나 그것의 더욱 독특한 특성은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바로 ‘공포’와 ‘증오’의 밀접한 연관성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굴곡의 역사 속에서 공포는 늘 증오의 감정을 수반하는 것이며 때로는 공포와 증오가 동의어로 기능한다는 주장까지도 제기된다. 가령 스테파노프(1997)는 “공포와 증오는 순수하게 러시아적 동의어이다”라는 언급으로써 러시아인의 정신세계에서 공포와 증오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적한 바 있으며 특히 시인 네크라소프도 이 두 감정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곧 - 나의 전조가 좋다! 
곧 슬픔의 사원을 떠날 것이다. 
러시아 영혼의 영원한 동반자, 증오와 공포가 잦아들고 있다.” 
(네크라소프, <곧 - 나의 전조가 좋다!>, 1877)

  토지를 보유한 자, 즉 귀족과 지주 앞에서 토지를 빼앗긴 자로서 농민이 느끼는 공포, 전제 정권의 서슬파란 칼날 앞에서 민중이 느끼는 공포, 러시아 혁명과 테러 앞에서 일반 시민이 느끼는 공포, 이러한 공포는 모두 공포를 유발하는 대상에 대한 증오를 내재하고 있으며 때로는 증오의 감정과 동일한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적 공포의 또 다른 측면은 18-19세기 귀족 사회에서 발견된다. 바로 공포와 수치심의 밀접한 관련성이 그것이다. 귀족의 행동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이 공포는 ‘수치심의 공포’라 이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그들의 평가, 그에 의해 결정되는 자신의 자존감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던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명예는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푸시킨의 말처럼 러시아 귀족 사회는 세상의 여론, 명예의 우상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론이란 것이다! 명예의 태엽, 우리들의 우상! 세상은 바로 이 위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이러한 상황에서 명예의 훼손은 극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며 귀족들은 이에 대해 강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이 명예의 훼손에 대한 공포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이 시대 귀족 사회를 휘감았던 결투 문화에서 공포와 수치심의 상관관계가 잘 드러난다. 이 “죄악과 수치심의 공포”(『예브게니 오네긴』)는 바로 렌스키가 오네긴에게 결투를 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투에 임하는 귀족들은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음을 천명하고 죽음의 공포에 애써 초연한 듯 애쓰지만,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중심에는 늘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미래이지만, 육체적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사후 세계는 어떤 것인지 전혀 알려진 것 없는 이 미지의 미래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 떨게 만든다. 인간의 죽음을 묘사한 수작으로 손꼽히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속에서도 주인공 이반 일리이치를 강하게 사로잡고 괴롭혔던 것은 죽음의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강력한 죽음의 공포 그 자체였다. 

“ ‘나는 이곳에 있었으나 이제 저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가? [...] 내가 없어지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된단 말인가? 죽음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 그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이런 끔찍한 공포가 인간의 운명이라니.” (톨스토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1886)

  『악령』의 키릴로프 또한 이 죽음의 공포에 강하게 집착하며 이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과 그 극복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유하는 인물이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공포를 더 두려워하는 키릴로프는 이 공포란 감정이 인간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저주이며 약점이라 생각한다. 

“끔찍한 공포 속에 있기에 난 너무도 불행하다. 공포는 인간의 약점이다.” (도스토옙스키, 『악령』, 1872)

  키릴로프는 이 죽음의 공포가 만든 허상이 바로 신이며 따라서 이 공포를 극복하는 자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명을 제거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이다.

“신은 죽음의 공포이다. 통증과 공포를 극복하는 자는 신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며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원치 않기에 [...] 나의 생명을 제거하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악령』, 1872)

  고골의 문학 세계에서 공포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비극이 아니라 희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했던 고골은 공포의 감정을 웃음과 절묘하게 혼합함으로써 독특한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포와 웃음이라는 이질적 요소들의 대립과 충돌이 빚어내는 감흥은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예로 『검찰관』의 5막 대단원 장면, 이른바 ‘침묵의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장면은 시골 마을의 권력가들이 다른 인물을 검찰관으로 오인하고 자신들의 비리를 숨기려고 갖은 수를 다 부리다가 그가 가짜였으며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경악과 공포로 동시에 굳어버리는 장면이다. 1846년에 발표된 『검찰관의 대단원』에서 이 장면에 대해 고골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모든 사람을 멸망시킬 것이며 완전히 파멸시키고 마침내 전멸시킬 진짜 검찰관의 도착을 알리는 그의 말은 모든 이를 돌처럼 굳어버리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내가 진실로 고백하건데, 내게는 진정 그 어떤 비극도 이처럼 슬프고 고통스럽고 우울한 감정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고골, 『검찰관의 대단원』, 1846) 

  공포의 토포스가 잘 발현된 사례를 러시아 회화 분야에서 찾는다면 무엇보다도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누구보다도 대중의 공포를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한 황제 이반 4세는 그의 공포정치를 통해 잔혹한 황제, 무서운 황제, 즉 ‘이반 뇌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이반 뇌제의 잔혹함은 그의 아들을 죽인 사건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되는데 바로 이 사건을 화폭에 재현한 것이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이다. 이 그림은 이반 4세가 자신의 아들을 쇠막대기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힌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있는 이반 4세의 공포에 질린 눈과 그 옆에 나뒹구는 쇠막대기, 그리고 흘러내리고 있는 피는 섬뜩함을 배가시킨다. 

  공포정치로 전 러시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또 한명의 인물인 스탈린 시대는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를 숙청의 피바람 속에 전 국민이 공포에 떨던 시기였다. 1936-8년 동안 휘몰아친 대숙청의 소용돌이에서 작가들 중 공포정치의 최초의 희생양이 된 사람은 만델시탐이었다. 만델시탐은 비밀모임에서 스탈린과 그 측근을 야유하는 시를 발표하였고 이 시는 시인의 주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은밀히 읽혀나갔다.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 아래 제 나라를 느끼지도 못한 채.
열 발자국만 떨어져도 우리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몇 마디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도
저 높은 곳에 있는 크렘린 사람의 말은 들린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은 벌레처럼 피둥피둥하고
그의 말은 1푸드처럼 무겁다. 
그의 바퀴벌레 같은 수염이 미소 짓고
그의 구두코가 번쩍인다.
그의 주위에는 목을 길게 빼고 아첨하는 지도자들 무리,
그가 가지고 노는 반쪽짜리 오합지졸들
짹짹거리고 야옹대고 흐느낀다.” (만델시탐,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 아래 제 나라를 느끼지도 못한 채...>, 1933) 

  극한적인 공포의 시대에 권력이 휘두르는 총칼의 공포는 만델시탐에게는 그리 커다란 작용을 하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만델시탐은 자전적 산문인 『이집트의 인장』(1929)에서 공포를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공포가 내 손을 잡아 이끈다. [...] 나는 공포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심지어 ‘나는 그게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오시프 만델시탐, 『이집트의 인장』, 1929)

  ‘시인의 손을 잡아 이끄는’ 공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그의 아내 나데즈다 만델시탐의 설명을 통해서 추측해볼 수 있다.

“창작의 순간을 늘 함께하던 그 공포는 비밀경찰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폭력, 파괴, 테러에 대한 원초적 공포가 발현될 때, 존재 자체에 대한 이 비밀스러운 공포는 사라지고 만다. 이에 대해 오시프 만델시탐은 종종 말하곤 하였다. 우리의 눈앞에서 수많은 피를 흘린 혁명과 함께 그 공포는 사라져버렸다고.” (나데즈다 만델시탐, 『회상』, 1970)

  시인 자신은 혁명과 함께 그 공포가 사라졌다고 하였으나 시인의 마지막까지 이 실존적 공포는 시인의 창작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비교문화적 설명   공포를 뜻하는 프랑스어 ‘푀르peur’는 ‘공포에 사로잡히다,’ ‘무서워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pavere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는 pavire(‘땅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땅을 두드리다’), paver(‘땅을 고르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고, 공포를 뜻하는 러시아어 ‘스트라흐страх’는 인도 유럽어 계통의 여러 언어에서도 발견되는 어근 *(s)terg-, *(s)treg-, *(s)terk- 등과 어원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는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의 전통 속에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논증의 대상이 아닌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근대 이후로 공포는 대체로 심리적, 사회적, 실존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나 실존적 삶의 상황, 사회현상과 결부되어 다루어진다. 19세기 프랑스에서 공포를 문학적 주제로 삼은 환상문학이 등장하는 것도 위협적인 존재나 비현실적인 잔혹한 세계 앞에서 느끼는 공포심을 통해,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현실에 대해 환상을, 과학주의에 대해 신비주의를 그리고 안정적인 것에 대해 병적인 것을 내세워 합리의 틀에 갇힌 인간의 정신과 내면세계를 일깨우는 감각적 자극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상문학의 이러한 내면 지향적 경향은 20세기 전반 양차대전 시기를 거치며 죽음이라는 절대적 무 앞에 적나라하게 맞닥뜨린 현대 유럽인의 실존적 공포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프랑스 실존주의에까지 이어진다.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공포는 다른 감정이나 가치 개념들에 비해 그리 근본적인 주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가 변화해도 공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공포는 약한 본성의 발현으로서 억누르고 극복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사회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 공포를 억누르고 초연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을 용기 있는 자로 칭송한다.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바보 성자’ 유로디비 또한 기이한 행동과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선함’으로 인해 공포에 초연하고 그 때문에 항상 진실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자들로 칭송받았다. 정교 수용 이래로 정교 교리 안에서 공포가 신앙의 증거로 주창되기도 한 점 또한 러시아적 공포의 독특한 일면이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공포와 증오를 ‘러시아 영혼의 영원한 동반자’로서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굴곡의 역사 속에서 공포가 늘 증오의 감정을 수반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삶을 견디는 데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지의 것, 혹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으로, 어느 사회에서나 한 인간의 생존이나 성장을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제시되고, 죽음에 대한 본질적 공포는 종교적 사유의 원천으로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유사한 정서적, 문화적 표출 양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실증주의가 우세한 프랑스에서 그에 대한 반발로 환상적 공포를 통해 인간내면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환상문학의 전통과,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직시함으로써 극대화되는 존재론적 공포에 집중하는 실존주의에서 주로 공포에 대한 문화적 반응이 나타난 반면, 러시아에서 공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실존적 공포보다는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생리적, 경험적인 공포에 보다 더 근접해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는 프랑스인들이 상당히 익숙하게 느끼는 내면적, 실존적 공포가 그리 근본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차이를 보인다. 
연관 토포스 그로테스크; 분노; 신앙; 용기; 정교; 죽음; 증오; 테러리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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