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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범주명 인간과 정서
토포스명(한글) 분노
토포스명(프랑스) colère
토포스명(러시아) гнев
정의 1. 분노를 조절하지 못할수록 더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분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콜레르colère[kɔlεːʀ]’는 라틴어 콜레라cholera를 어원으로 한다. 담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χολέρα에서 연유된 이 어원은 히포크라테스의 기질론에서 비롯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기질을 담즙질, 흑담즙질, 다혈질, 점액질의 4가지로 분류하고, 그 중 담즙질은 급하고 화를 잘 내며 적극적이고 의지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분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라틴어 ‘이라ira’에서 비롯된 ‘이르ire[iːʀ]’도 있는데, 이는 근대 이후에는 간혹 시어로만 사용되는 고대 프랑스어지만, 분노의 종교적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어휘이다. ‘이르’는 분노의 생물학적 특성에 주목한 그리스어 어원과 달리 정의로운 신이나 고귀한 인간의 정당한 분노를 의미했다. 가령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타락과 악을 상징하는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과 방종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사 불과 유황의 심판을 받았다. 여기서 천둥과 번개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분노는 절대적인 정의의 표출로 받아들여진다. 라틴어 ‘이라ira’는 ‘불의에 대한 단죄와 그에 대한 보완’을 의미했고, 이는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분노의 날(Dies iræ, 프랑스어로는 jour de colère)”이라는 표현에서 확인된다. ‘디에스 이라이(Dies iræ)’는 죽은 자를 위한 가톨릭 미사의례에서 부속가(세퀜티아, 특별한 축일의 미사 때 외우거나 노래하는 다섯 가지 기도문)로 사용되다가 13세기 이후 가톨릭 제례를 개혁하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죽은 자의 휴식을 기원하는 노래’라는 의미의 성가 ‘레퀴엠’에서 주된 주제로 사용되었다. ‘디에스 이라이’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나오는 기도문 중 하나의 제목이고, 프란츠 리스트와 카미유 생-상스가 작곡한 <죽음의 춤>의 소주제이다. 분노의 이러한 의미들은 모두 ‘콜레르’의 사전적 정의에 포함되어, ‘콜레르’는 크게 인간의 신체와 심리의 격렬한 반응으로 표출되는 정신의 동요라는 의미와, 인간의 분노(기독교는 인간의 분노를 7가지 대죄 중의 하나로 본다.)와 다른 차원에 있는 신의 정당한 분노라는 종교적 차원의 의미로 정의된다.(http://www.cnrtl.fr 참조). 
  이외에도 분노를 가리키는 프랑스어로 분노의 정도에 따라 ‘퓌뢰르 fureur(격분)’, ‘라주 rage(광분)’, ‘엥디나시옹 indignation(화)’ 등이 있다. 
  분노의 심리적 동기와 겉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대한 첫 고찰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기원전 355년경)에서 분노에 한 장을 할애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자들과 분노한 사람들, 그리고 분노의 동기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노는 불의(나보다 열등한 자가 보이는 경멸, 무시, 모욕의 태도도 포함)를 당했다고 느낄 때 불의를 행한 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다. 충동적인 정념이라는 점에서 분노는 선을 행하려는 이성의 의지와 상반되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분노가 군인의 정신과 심장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군인에게 필요한 감정”(『니코마코스 윤리학』, 기원전 355년경)이라고 말한 데서 그가 분노의 긍정적 기능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는 지적을 통해 분노를 자존심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처럼 행동의 동기와 결과라는 측면에서 분노를 고찰했다면, 분노와 이성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 담론들은 세네카로부터 이어지는 모럴리스트들에게서 나타난다. 이성에 의해 정념을 통제할 것을 주장한 스토아주의자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De Ira)』(49)에서 이성과 분노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지 결정하고 싶어 하지만, 분노는 분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봐주기를 원한다.” (세네카, 『분노에 관하여(De Ira)』, 49)

  세네카는 분노를 해롭고 위험하며 모든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일시적 광기로 본다. 그것은 악이나 불의를 부추기는 정념으로서, 정의를 지향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지와는 상반된다. 특히 분노가 판단을 흐리게 하고 합리적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인간을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이 진리도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천한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의 나약함이나 불완전함과 관련하여 거론되던 분노는 기독교가 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지는 듯하다. 신의 분노는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 나타나던 관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나 우주를 이해하는 사고의 한 방편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분노는 대기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신 가이아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서 인간 세계에 갈등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요소로 설명된다. 그러나 올림포스 산의 신들이 표출하는 분노에는 인간의 경우와 달리 정의로움과 성스러움이 부여되었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신의 분노와 나약한 인간의 무분별한 분노의 양면성을 모두 보여준다. 제우스의 분노는 변덕스럽고 맹목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인간의 분노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무질서와 혼란을 바로잡는 성스러운 신의 의지의 표출이 된다. 이는 기독교의 구약성서에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에게 불같이 분노하며 가차 없이 징벌을 내리는 하느님 야훼에게서도 확인된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며 인간에게 직접 분노를 표출하고 징벌을 내렸다. 사랑을 설교하고 몸소 희생을 실천한 예수 또한 성전에서 바리새인들과 상인들을 몰아내며 불같이 화를 내어 신을 모독하는 인간의 불의를 단죄했다. “신만이 분노할 권리가 있으며 신은 불멸성과 분노에 의해 최고 권력을 갖는다.”(장-피에르 뒤프레뉴, 『분노에 관한 소론』)는 말은 기독교 신의 정의로운 속성이 특권적으로 분노를 통해 표현됨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인간의 분노에 대해 기독교는 그것을 “육신의 행위”로 보고 “불륜, 불결,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악덕으로 간주한다(『신약성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분노는 기독교가 규정한 일곱 가지 대죄(태만, 식탐, 오만, 사치, 인색, 질투) 중의 하나이다. 중세의 대표적인 저승여행기, 단테의 『신곡』(1555) 지옥 편 중 다섯 번째 지옥은 ‘분노에 잡아먹힌 영혼들’이 받는 지옥의 형벌을 묘사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의 분노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에 고대 사상가들의 견해를 접목시켜 분노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을 권유하는 주장들이 나타난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1511)에서 탐욕과 더불어 “제우스가 이성에 맞세우려고 만든 두 폭군” 중의 하나로 분노를 제시하고, “인간 생명의 원천이라 할 가슴과 마음을 점령”해버리는 분노를 이성이 제압할 것을 주장했다. 프랑스 모럴리스트 전통의 시조인 몽테뉴 또한 분노를 이성으로 통제하고 판단력을 키울 것을 강조했다. 

“누군가 나를 거역할 때, 그는 분노가 아니라 나의 주의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몽테뉴,『수상록』, 1580)

  그러나 종교적 의미를 벗어나 인간의 분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은 17세기 이후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합리주의의 시조 데카르트는 『정념론』(1649)에서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절제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고귀함을 강조하고 분노의 심리적인 동기를 세밀하게 분석했다. 자주 분노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입히기 쉬운 기질임이 분명하지만, 근대 이후로 분노는 신의 정의만이 아니라 불의와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는 인간의 정의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분노’를 뜻하는 ‘그네프 гнев[gnev]’는 그 어원이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두 가지 기원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는 ‘곰팡이’, ‘고름’을 뜻하는 단어들과 어원적 관련성을 지니는 공통슬라브어 *gnoivъ에서 나왔다고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타오르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첫 번째 기원설은 ‘그네프’가 인간 내부에서 생겨나 그 안에서 썩고 곪다가 결국 외부로 폭발하는 감정이라는 생각과 관련된다고 한다면, 두 번째 기원설은 분노가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감정으로서 ‘불’, ‘끓어오름’, ‘뜨거움’과 연상 작용하여 수많은 표현에서 ‘불’의 메타포를 형성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분노’를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 ‘야로스티 ярость[jarost']’는 ‘그네프’보다 한층 강력한 분노를 표현한다. ‘야로스티’는 ‘종자’를 뜻하는 ‘야리 ярь[jar']’, 특히 ‘버섯의 종자’와 어원적으로 관련된다. 또한 이것의 어원은 슬라브 신화에서 ‘봄, 남성의 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자 남성적 에로스의 상징인 ‘야릴로’와도 관련이 있다. ‘야로스티’의 어원 중 하나인 버섯이 많은 문화권에서 남성생식기의 상징이며 신화적 기원으로서의 ‘야릴로’가 남성적 에로스를 상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야로스티’는 전반적으로 남성적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애초에 남성에게 부여되는 속성이었으며 19세기 중반까지는 여성의 상태나 성격을 지시하는 말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골로바닙스카야, 『언어에 반영된 멘탈리티』 참조).
  여기에 더해 러시아어에는 보다 더 강력한 분노, 통제불가능한 동물적 분노를 표현하는 ‘베셴스트보 бешенство[beshenstvo]’라는 단어도 존재한다. ‘베셴스트보’는 ‘악령, 악귀’를 뜻하는 ‘베스 бес[bes]’와 동일한 어원을 지닌다. 흔히 이 분노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일컬어 ‘악귀가 들렸다’라고 표현하는 것에서도 두 단어의 어원적 관련성이 포착된다. 또한 이 격렬한 분노의 발현이 ‘짐승이 미쳐 날뛰는 상태’와 유사하다는 것은 ‘베셴스트보’의 또 다른 의미가 ‘광견병’이라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분노는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감정 중 하나인 분노가 왜, 그리고 어떠한 양상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철학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나’의 ‘가치판단’과 내 내면의 ‘욕구’, 그리고 ‘보복에의 의지’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요컨대 타자가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나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며 또한 그것이 나의 욕구에 손상을 가져오는바 상대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 순간의 정념을 분노라 정의할 수 있다(김수영, <분노에 대하여> 참조).
  분노가 대개 억제해야 할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되어 온 이유는 바로 이 ‘보복에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분노는 단지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이 감정의 원인 제공자에게 어떤 해를 입히고자 하는 충동이 따라오기 마련이며 이 충동은 종종 폭력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곤 한다. 또한 분노는 내면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육체적 반응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분노에 수반되는 격렬한 육체적 반응들은 로고스로 절제되지 못한 파토스의 발현이므로 로고스의 패배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분노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고 자신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는 까닭에 대다수의 종교에서 분노를 파괴적이고 위험한 정념으로 간주하고 경계해 왔다.
  그러나 분노가 항상 부정적인 정념으로만 사유되어 온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변혁이나 개혁은 주로 인간의 집단적 분노를 원동력으로 하여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며 또한 각자의 삶속에서 분노는 삶을 추동하는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령 인간의 정서를 ‘생존과 안녕’이라는 자기 보존 욕구의 측면에서 설명하는 스피노자 식의 맥락에서 보자면 분노는 공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에서 기인하는 자연스러운 정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합의된 것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한 분노, 일반적인 도덕적 가치 판단과 모순되는 행위에 대한 분노는 정당한 분노로 인정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기원전 355년 경)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마땅히 분노할 만한 일에 대해, 마땅히 분노를 낼만한 사람에게,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때, 마땅한 시간동안 분노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는다.”라고 한 말은 바로 분노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분노의 중용을 강조한 것이다. 
  분노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시각은 러시아인들의 분노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분노의 부정적 측면은 주로 분노의 표출 양상 및 그것의 위해성과 관련지어 이야기된다. 분노는 지나친 흥분과 격정을 수반하며 종종 공격적 행동으로 표출되곤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의 자제와 이를 언어적으로 적게 표현하는 것(understate)이 특징적인 영미 문화권과는 달리, 감정을 언어적으로 과하게 표현하는(overstate) 러시아인들에게 분노의 감정은 더욱 더 격정적인 육체적 반응과 행동으로 이어지곤 한다(테르-미나소바, 『언어와 문화 간 소통』 참조). 고대 시기에는 분노의 과도한 표출이 육체적인 힘, 용기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긍정적으로 인식되던 시기도 있었다(크라삽스키, 『독일과 러시아 언어-문화에서 정서 관념들』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덕과 이해심, 용서를 강조하는 러시아 정교 사상에 반하는 것이다. 정교 교리 안에서 분노는 자제하고 억눌러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취급된다. 분노는 일시적이며 덧없는 감정의 발작이며 이러한 발작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이므로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적 분노의 토포스는 이와 상반되는 측면도 활성화한다. 이때는 분노의 긍정적 측면이 정면으로 대두되며 이러한 분노의 긍정성은 특히 ‘정당한’ 분노의 개념이 크게 부각되는 양상 속에서 발전해 왔다. 이 분노의 감정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를 기준으로 내 욕구가 손상 받아 나타나는 개인적인 정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윤리적 판단에 어긋난 행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다. 또한 이 분노의 정념과 관련된 욕구와 의지는, 단순히 분노의 원인 제공자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단죄하고 이로써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자 의지이다. 이는 러시아어에 유독 ‘정의로운’ 분노, ‘고결한’ 분노, ‘성스러운’ 분노, ‘위대한’ 분노와 같은 표현이 많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성스러운’ 분노, ‘고결한’ 분노 개념은 정교 교리에 의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정교에서 말하는 ‘성스러운’ 분노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단죄하는 ‘신의 분노’이다. 죄악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인간의 분노와는 달리 신의 분노는 항상 정의롭고 옳은 것으로 사유되어 왔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분노의 토포스는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고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해를 미치는 치명적인 정념이자 생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 인간과 세상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긍정적인 정념이라는 이중성이 그 균형의 추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정신의 능동적 부분인 ‘의지’에 의해 정념을 제어하고 정념을 치유하는 것이 덕이라고 주장한 데카르트는 『정념론』(1649)에서 분노가 유발하는 폭력적 양상보다 거기에 내포된 심리적 요인들을 분석했다. 데카르트는 분노의 감정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화(indignation)’와 ‘분노(colère)로 나누고, 분노 또한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악하고 천한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를 구분했다. 사람은 남이 저지른 악행이 자신과 관련이 없을 때는 단순히 화가 나지만, 자신과 관련될 때는 복수의 욕구가 포함된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다. 

“선량하고 사랑이 많은, 따라서 피가 뜨겁고 다혈질인 사람은 급격하게 분노하고 그것이 겉으로도 쉽게 드러나지만 결국엔 쉽게 가라앉고 뒤끝이 없는 반면, 악하고 천한 사람은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겉으로 덜 드러내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고 증오나 슬픔에서 비롯된 분노를 느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데카르트, 『정념론』, 1649)

  데카르트에 따르면, 악하고 천한 사람은 오만하여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이 당한 멸시나 상실에 대해서도 남의 평판에 휘둘리며 더 강한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분노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생리현상은 심장으로 담즙이 흘러들어감으로써 일어나는데, 악한 사람의 경우에는 담즙이 간장과 비장에서부터 밀려온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의 기질론을 반영하는 이러한 해석은 이후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경험적 이해를 추구한 18세기의 유물론자들에게서 기질론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데카르트의 분노에 관한 논의는 지나친 분노가 초래하는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고결함(générosité, 이 어휘는 용기, 관대함의 의미로도 새겨진다.)’을 제안하며 끝을 맺는다. “고결함만이 남이 앗아 가버릴 수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경멸하게 하고, 자유로움과 절제를 중시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분노에 의한 손실을 막아주기”(『정념론』, 1649) 때문이다. 
  분노와 ‘고결함’의 관념은 코르네유의 작품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코르네유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한결같이 모든 정념을 이성적 의지로 극복하는 인물이다. 코르네유는 분노와 고결함의 관계를 더욱 심도 있게 고찰함으로써 분노와 자존심 또는 명예의 연관성을 부각시켰다. 『르 시드』(1636)의 주인공 로드리그는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 명예 때문에 사랑을 버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복수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분노는 최고의 덕목인 ‘고결함’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정념인 사랑을 조정하게 만드는 정당한 감정이다. 다시 말해 분노를 정당하게 표출시켜야만 지킬 수 있는 덕목이 고결함인 것이다.

“복수도 하지 않고 죽다니!
내 명예에 그토록 치명적인 죽음을 선택하다니!
내 혼란스러운 영혼이 어차피 실패하게 되어 있는 사랑을 존중하다니! ...
그래, 내 정신이 속고 있었다.
연인보다 아버지에게 먼저 빚이 있지 않은가?
이미 너무나 게으름을 피웠구나. 
어서 복수하러 달려가자.” (코르네유, 『르 시드』, 1636)

  한편 18세기 이후 기독교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세속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신의 분노가 곧 정의라는 관념도 비판을 받게 된다. 교권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했던 18세기, 반교권의 선두에 섰던 볼테르가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이후 발표한 철학적 콩트 『캉디드』(1759)는 신의 징벌이라 여기던 세상의 온갖 재난들을 ‘악’과 결부시킴으로써 신의 정의를 문제 삼았다. 볼테르는 이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는 주인공 캉디드(candide는 ‘순진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맞닥뜨리는 온갖 악들(전쟁, 종교적 불관용, 계급의 특권, 가난, 질병, 속박, 천재지변, 정치적 억압, 미신, 무지 등)을, 과연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정의로운 신의 보상 즉 구원에 대한 믿음만으로 감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볼테르의 대답은, 인간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이러한 믿음에 의지하기보다, 고통 또는 악의 정체를 경험적으로 밝히고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볼테르는 정의로운 신의 징벌로 여겨지던 세상의 온갖 재난과 악을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놓았다. 
  실상 서양 문화에서 정의로운 신의 의지와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는 신의 분노와 징벌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라는 주제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제우스를 속이고 반항함으로써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프로메테우스와 시지포스가 그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 동생을 살해하고 하느님의 분노를 사서 쫓겨난 카인도 그러하다. 이들은 신의 분노의 정당함을 보여주도록 설정된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과연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는 정당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 인물들이 저항하는 이유는 바로 신의 권위의 원천인 신의 정의로움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신은 악의 근원인 인간의 원죄를 예정하셨는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시련은 진정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가? 사회에 만연한 악의 문제를 인간의 정의로 해결할 수는 없는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발달을 신봉한 18세기 계몽의 시대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징벌보다 신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그의 반항적 행위가 더 강조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반항을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이후 사회적 불의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더 정당화된다.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이 된 사회에서 억압당하는 민중의 분노는 이제 억제되어야 할 악덕이 아니라, 불의와 억압에 맞서 피해자가 느껴야 할 정당한 감정으로, 또한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점점 피폐해지는 인간의 정신이 비루한 일상을 부수고 비약을 시도할 수 있게 해주는 첫 충동으로 여겨졌다. 발자크는 『인간희극』(1842)에서 ‘불사신’이라 불리는 보트랭이란 인물을 통해 이러한 분노를 묘사했다. 보트랭은 질서와 합리를 내세워 폭력을 자행하는 사회 권력에 맞서, 엄청난 에너지와 천재적 기지, 거기에 책략까지 갖추고 저항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도둑이나 잡범이 아니다. 물욕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으며 세상사를 철저하게 연구한 끝에 사회 질서에 순종할지 반항할지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종의 반란자”(『고리오 영감』, 1834)이다. 그의 특별함은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에너지와 그가 표출하는 분노, 거침없는 징벌의 의지로 인해 상대가 누구든 순식간에 제압하고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신의 속성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발자크가 보트랭이야말로 『인간희극』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말한 것은 세상 전체를 장악하고 불의에 맞서는 그의 의지와 방식이 신의 속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위적 작가와 사상가들은 인간의 분노를 약점이나 불완전한 인격의 표출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인간성을 매몰시키지 않고 의식의 자기 초월성을 확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다.

“분노는 인간의 정신에서 모든 제 원천을 비워버리고 저 밑바닥에서부터 빛이 나타나게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80)

“가자! 행군, 짐, 사막, 권태, 그리고 분노다.”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의 한 철』, 1895)

  알베르 카뮈는 『시지포스의 신화』(1942)에서 신의 분노에 희생당하는 인간의 운명에 주목하고, 인간의 부조리한 존재 조건과 그에 대한 분노의 표출인 묵묵한 저항을 강조했다. 신의 권위에 도전한 죄로 시지포스에게 내려진 형벌은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런데 카뮈는 인간에게 형벌을 내린 신의 분노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세계는 신의 정의가 질서를 세운 곳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주어지지 않은 텅 빈 공간이고, 인간은 그냥 그곳에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뮈가 주목하는 것은 형벌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신에게 저항하는 시지포스, 특히 굴러 떨어진 바위를 바라보며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묵묵히 다시 내려가는 시지포스였다. 시지포스는 침묵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깨어있는 인간 의식의 상징이다. 시지포스는 호머의 신화가 강조하듯이 형벌의 끔찍스런 고통에 괴로워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그 직시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영웅이다. 카뮈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꾸어놓았다. “삶이란 부조리를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게 내버려두라는 것은 그것을 응시하라는 것이다. […] 여러 철학적 위치들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을 거부가 차지하고 있다. 거부란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안에 있음”(『시지포스의 신화』, 1942)이기 때문이다. 
  실천신학자인 리타 바세가 저서 『성스러운 분노』(2002)에서, 야곱과 욥과 예수가 분노에 의해 성숙하고 인격적인 신앙을 이루듯이, 불의는 분노의 원인들 중 하나이고 “분노하는 사람은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인간의 분노는 기독교 내에서도 죄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 행동하게 만드는 창의적인 감정이 되었다. 
  2010년 프랑스에 ‘분노’ 신드롬을 일으킨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저항과 분노를 인간의 의무로 선언했다. 에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정신이 무너지고 인간과 정의에 무관심한 현 세태를 고발하며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것을 역설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2010)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인간의 이성을 흐트러트리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파괴적인 정념으로서 분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부정적 태도는 수많은 관용표현과 속담 속에 구현되어 왔다. “인간이 분노하면 그 지혜가 약해진다.”라는 속담에는 분노가 건전한 이성의 작동을 방해한다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분노에 분출구를 내어주다”, “분노를 터뜨리다”와 같은 관용표현이 흔히 폭력적 행위와 연상되는 데에는 분노가 일반적으로 구타나 폭력의 양상으로 표출된다는 인식이 작용한다. 그렇기에 분노는 극복해야 하는 감정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임을 다음의 속담들은 말한다. “자신의 분노를 극복하는 사람은 강인한 사람이다.”, “자기 분노를 통제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외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에 있어 분노는 종종 ‘불’ 혹은 ‘열’과 비견된다. 분노의 대표적 메타포는 ‘용기에 담긴 액체의 열’로서, 분노의 온도가 상승하면 이 액체는 끓어오르고 용기의 경계 밖으로 분출하면서 이윽고 폭발에 이르게 된다(레이코프, 『여성, 불, 위험한 것들』 참조). 러시아에서도 발작과도 같은 분노, 활활 타오르는 맹렬한 분노의 이미지는 분노와 ‘열’ 혹은 ‘불’의 연상 작용을 활성화한다. 가령 러시아어에서 분노 의미의 명사와 자주 결합하는 동사는 주로 불이나 열기를 지시하는 명사와 결합하는 동사들이다(“분노로 인해 끓어오르다/폭발하다/질식하다.”) 
  분노가 창출하는 이러한 ‘불’의 메타포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메타포라 할 수 있다. 가령 우리말의 ‘열 받는다’와 같은 표현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 문화에 보다 특징적인 분노의 메타포도 있는데 여기서는 분노와 맹수 혹은 질병의 연상작용이 두드러진다. “맹수를 길들이다”에 사용되는 ‘길들이다’라는 뜻의 동사(укротить)가 분노와 결합하면 “분노를 억누르다”의 의미를 표현한다. 병의 발작처럼 “분노의 발작”이 나타나기도 하고, 병을 치료하듯이 “분노를 치료하다(лечить)”가 ‘분노를 가라앉히다’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러시아적 인식 속에서 분노는 인간에 내재된 짐승적 본성이며 이 감정의 폭발은 맹수의 행동과도 유사한 공격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분노와 맹수, 질병의 메타포적 관계는 러시아어에서 격렬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베셴스트보’ 속에 집약되어 있다. ‘광견병’을 뜻하기도 하는 ‘베셴스트보’는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의 형상을 광견병에 걸려 미쳐 날뛰는 맹수의 이미지와 결합시킨다.
  이처럼 이성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불처럼 타오르는 짐승적 본성으로서 분노의 정념을 바라보는 러시아 작가들의 시선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종교적 성찰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의 고골이 논쟁과 분노에 대해 남긴 다음의 유명한 말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드러난다. 

“논쟁을 잘 듣기는 하되 거기에 끼어들지는 말라. 아주 사소한 표현이라도 흥분이나 격정에 휩싸여 말하지 말라. 분노는 항상, 특히 올바른 일에 있어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그 일을 모호하고 흐려지게 하기 때문이다.” (고골,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선』, 1847)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였던 톨스토이 역시 분노의 유해성을 강조하며 이를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보았다. 톨스토이는 말년의 사색록에서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도 유해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를 내는 당사자에게 가장 해롭다. 그리고 항상 분노의 감정 자체가 분노의 원인보다 더 해롭다.” 
“사실 자신을 모욕한 자에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언제나 말로든 행동으로든 자기 마음을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누를 수는 있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그러나 러시아 작가들이 분노에 대해 부정적 시각만 견지했던 것은 아니다. 분노할만한 사안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정당한 분노’의 개념도 여러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어 왔다. 이때 러시아 작가들은 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해학과 풍자를 통해 묘사하는 방식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19세기 러시아 풍자 작가 살티코프-셰드린의 이솝우화식 『동화』(1869~1886)를 들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분노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너무도 순종적인 민중에게 화가 나 있으며, 민중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농노제, 전제 정권 등과 같은 사회 현실에 분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동화』 속 이야기 중 하나인 <한 농부가 두 고관을 먹여 살린 이야기>에서 이러한 풍자와 해학이 잘 드러난다. 어느 날 무인도에서 굶어죽을 상황에 처한 두 고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순종적인 농부를 혹사시킴으로써 살아남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고관보다 상황적으로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혹사당하는 민중의 모습은 웃음을 통해 안타까움을,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노를 느끼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했듯이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음은 노예근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감정에 대한 풍자는 솔제니친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에서도 빛을 발한다. 작가는 수용소에서 가지각색의 죄목으로, 그러나 전혀 타당하지 않은 죄목으로 수용된 사람들의 하루 동안의 일상을 보여준다. 굶주림과 공포가 만연하는 비참한 수용소의 하루를, 그러나 이 글의 마지막에 기술되었듯이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곤 전혀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를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절망적 상태에 대한 분노의 감정, 곧 ‘정당한’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이 분노는 결코 불타오르는 뜨거운 분노가 아니라 웃음을 통한 끈끈하고도 안타까운 분노이다. 
  분노의 토포스는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에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에서도 두드러진다. <전함 포템킨>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전국적 확대에 기폭제 역할을 한 포템킨호 수병 반란 사건(1905)을 다루고 있으며 혁명 20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의 스크린은 공포에 떨고 분노하는 민중들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 유모차 속의 아이를 보호하려 애쓰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여인의 모습과 계단 위를 천천히 굴러가는 유모차를 보여주는 이른바 ‘오데사의 계단’ 장면은 분노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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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구성요소 중 하나를 ‘보복에의 의지’라 할 때 이것이 표출되는 양상은 분노가 개인적인 차원인가 아니면 집단적인 차원인가에 따라 다소 상이하다. 분노가 내면의 ‘욕구’의 손상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해 유발된다고 한다면 개인적 차원에서의 내면의 욕구는 주로 자존감과 관련되고 따라서 분노는 자존감이 손상 받았다는 판단에 의해 발생된다. 이때 이 욕구의 손상에 대해 보복하고 싶은 충동은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모욕감-분노-보복에의 의지’가 러시아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발현된 사례로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를 휘감았던 결투문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가치판단 곧 모욕감은 분노를 유발하고 이는 보복에의 의지로 이어진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에서 자신이 마음에 품은 올가에게 수작을 거는 오네긴의 짓거리와 이에 대해 싫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올가의 모습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렌스키, 그 “분노에 떠는 렌스키”가 보복에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결투였다.
  모욕감은 분노로 무르익고 무르익은 분노는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되는데 이때 분노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것이라면 그것은 폭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모욕이 분노로 무르익는다. 그리고 분노의 무르익음, 그것은 곧 폭동이다.” 
(블로크, <불안의 열기와 한기 속에서...>, 1910~1914)

  시인 블로크의 시구가 말해주고 있듯, 개인적 차원의 분노와 다르게 집단적 차원의 분노는 집단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폭동과 혁명도 그 시작은 집단적 분노와 무관하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 봉기(1825)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의 젊은 귀족 장교들은 1812년 조국전쟁(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파리로의 진군을 통해 서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발달된 사회상을 접하게 되고 러시아도 근대적인 유럽 국가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들이 되돌아 온 러시아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전제정권과 농노제 안에 갇혀 있는 러시아의 현실은 그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예 취급을 받던 농민들이 저항하자 정권이 이들의 저항을 대량학살로 진압한 사건은 젊은 귀족 청년들의 실망을 분노로 바꾸어 놓았다. 그 분노가 마침내 최초의 러시아 지식인 혁명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데카브리스트 봉기’로 폭발된 것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봉기나 혁명과는 상이한 또 하나의 집단적 분노 현상을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이 러시아 사회에 몰고 온 충격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특한 우리 문명의 통탄할 만한 특성 중 하나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 진리를 우리 모두가 여전히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 나란히 간 적이 없으며 인류의 그 어떤 쪽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방도 동방도 아니고, 그 어느 쪽의 전통도 지니지 못합니다. 마치 시간 밖에 서있기라도 한 듯, 인류의 보편적 교육이 우리에게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세대를 걸쳐 계승된 인간 사유의 절묘한 연결 관계와 인간 정신의 역사가 세계의 여타 지역에서는 인류를 오늘날의 수준까지 이르도록 이끌어주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차아다예프, <첫 번째 철학서한>, 1836)

  러시아가 민족적 유산이나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며 세계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차아다예프의 지적은 충격을 넘어서 강렬한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민족적, 국가적 명예에 잔혹한 모욕을 느낀 사람들의 분노는 이 ‘미치광이’를 공개적으로 소추할 것을 요구했으며 차르는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차아다예프를 정신이상자로 선언하고 자택에 감금하도록 조치하였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참조).
  이러한 집단적 분노의 표출은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2011년 러시아 하원 선거가 부정 선거로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이 선거 이후, 2010년부터 러시아 야당들의 주도 하에 매달 열리고 있는 ‘분노의 날’ 집회가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외의 여러 언론들(뉴욕타임즈, 로이터통신 등)은 이러한 러시아 시위 현상이 예전의 시위 양상과 사뭇 다름에 주목한다. 기존 시위들이 주로 골수 공산당원이나 연금생활자,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특정 집단의 시위였다고 한다면 최근의 시위는 지금까지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 중산층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또 다른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질 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분노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콜레르colère’는 담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χολέρα에서 연유된 라틴어 콜레라cholera를 어원으로 한다. 러시아어로 ‘분노’를 뜻하는 ‘그네프 гнев’는 ‘곰팡이’, ‘고름’을 뜻하는 단어들과 어원적 관련성을 지니는 공통슬라브어 *gnoivъ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분노는 대개 인간 본유의 감정으로서 강한 기질이 공격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을 가리키며 대개 이성적으로 자기를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약점과 연관된다. 그러나 종교의 지배력이 강한 시기에 신의 분노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분노의 날’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이나 ‘성스러운 분노’, ‘고귀한 분노’와 같은 러시아어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의 정의로운 속성의 정당한 표출을 의미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18세기 이후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의 분노는 명예나 사회적 정의와 같이 지켜야 할 가치와 연결될 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구체제가 무너지고 근대적인 사회와 정치가 형성되는 19세기 이후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집단적인 형태로 분노가 표출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분노의 정당성이 강조되었다. 1789년 혁명이후 한 세기에 걸쳐 수차례의 혁명과 체제전복을 경험하며 복잡한 계층 간 갈등을 목도한 프랑스 사람들은 사회적 불의와 권력의 탄압에 맞서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실천하는 일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20세기 이후에는 실존주의가 프랑스 특유의 존재론적 사유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본성을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러시아 또한 전통적으로 러시아정교의 영향 하에, 분노는 인간의 이성을 가로막고 격렬한 신체적 반응을 수반함으로써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해를 미친다는 분노의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체제비판적인 지식인과 작가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도 분노하지 못하는 너무나 순종적인 농노를 비판하고, 민중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농노제, 전제정권 등과 같은 사회 현실에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집단적 분노의 표출은 러시아 역사를 수놓고 있는 수많은 봉기와 폭동을 통해서도 만나게 된다. 이는 현재의 러시아 사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2010년 이후 러시아 야당들이 기획, 주관하는 ‘분노의 날’ 시위에 러시아 중산층이 대거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러시아 사회가 분노를 통해 지향하는 바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처럼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인간에게 공통된 감정인 분노에 대한 시각은 양국의 역사와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전과 근대 이후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변화는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와 자주 화를 내는 개인의 기질에 대해서는 경계하지만, 국가 권력이나 사회 체제의 부당함 또는 불의에 맞서 인권을 지키기 위한 분노의 정당한 표출이 가치있게 여겨지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관 토포스 명예; 모욕; 민중; 봉기/폭동; 용기; 의지; 정의; 증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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