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사랑
범주명 인간과 정서
토포스명(한글) 사랑
토포스명(프랑스) amour
토포스명(러시아) любовь
정의 1. 사랑이 쾌락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치명적이다.
2. 진정한 사랑의 가치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조화 속에서 찾아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무언가를 혹은 훨씬 더 많은 경우,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과 그 사람에게 끌리는 심리상태 나아가 그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까지를 일컫는 말 ‘사랑’은 프랑스어에서 남성 명사 ‘아무르 amour’로 표현된다. 그리고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는 ‘애메 aimer’이다. 이 명사와 동사의 뿌리는, 고대 라틴어의 적자들 중 하나인 프랑스어인 만큼, 당연히 라틴어에서 찾아진다. 즉 라틴어에서는 amor, amoris 등의 명사가 쓰였으며, 동사 amare는 amo, amavi, amatus 등으로 인칭과 수에 따라 활용되었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프랑스어 문헌인 <스트라스부르의 서약>(842년) 에 나타나는 ‘아무르’는 amour가 아니라 amur였으며 당시의 고대 불어에서 그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명사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Pro Deo amur = Pour l'amour de Dieu = 신의 사랑을 위해).
  20세기 프랑스 작가 자크 샤르돈느가 말한 것처럼 “사랑은 사랑 그 이상이다.” 너무나 오래되고 너무나 크고 또 모호하기도 한 끝 간 데 없는 개념 ‘사랑’이 그 어딘가로부터 또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기원’한다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인간과 함께 시작했을 것이 분명한 이 개념은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실체와 실재가 온전히 증명된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의 토포스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것은 모든 실존들에서, 역사들에서, 신화와 종교들에서 번성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번성하는 것들을 늘 분류하여 왔다. 그리스인들은 ‘사랑’으로 번역될 수 있는 네 개의 어휘를 갖고 있었는데, ‘ἀγάπη(아가페)’, ‘φιλία(필리아)’, ‘ἔρως(에로스)’, ‘στοργή(스토르게)’ 등이 그것들이었다. 이것들 중 오늘날 ‘philosophie(필로조피, 철학)’을 구성하는 ‘필리아’와 주로 혈통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일컬었던 ‘스토르게’는 그 사용 및 발화 빈도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남는 두 짝 아가페와 에로스는 오늘날까지도 문화적으로 강력한 울림을 갖는 이분법을 구축하였다.
  그리스어의 아가페는 일반적으로 ‘거룩하고도 무조건적이며 사랑하는 주체는 배려하지 않은 채 순전히 대상만을 위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의미했다. 기원 후 1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기독교가 고대 로마 제국에 유입되었을 때, 이 개념은 그 새로운 종교가 표방한 주요한 가치들 중의 하나를 지칭하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이 개념은 흔히들 ‘인간을 향한 신의 가없는 사랑, 육신이 되어 인간에게 오신 신의 절대적 자비, 그리하여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에 담기는 덕스러운 희생의 정신’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에 반해 에로스는 신화적 기원에 의해 뒷받침된다. 아프로디테 혹은 비너스의 아들 에로스 혹은 큐피드는 사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유혹 혹은 유혹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화 속에서 프시케가 ‘절대로 내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에로스의 지침을 어기고 밤의 어둠을 걷어내는 등잔에 불을 붙여 그 얼굴을 보았을 리 없을 것이다.

  토포스적인 측면에서는 아마도 아가페보다는 에로스가 훨씬 더 뚜렷하고 풍성한 듯하다. 미와 유혹인 동시에 에로스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정념과 욕망이며 사랑하는 대상을 통한 본능과 쾌락이다. ‘에로’티시즘이 어떤 의미에서, 주체와 대상이 순간에도 수십 번씩 위치를 바꾸는, 또는 ‘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대의 대상’이라는 상호적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이든 ‘배타적 연애감정’이든, 그것이 육체이든 영혼이든, 그 ‘관계속의 쾌락’ 혹은 ‘쾌락이라는 관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사랑의 신 큐피드 그리고 그 에로스의 화살은 자체로 하나의 운명적인 파토스인 것으로 사람들은 말하고 또 믿어 왔다. 
  또 하나의 토포스를 구성할 만한 그 ‘큐피드의 화살’에 맞았으니 달리 도리가 없다는 언어적 표현은 역으로, 그 파토스 뒤에 불안한 에토스(ethos)를 감추고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사상가 드니 드 루쥬몽은 ‘화살을 쏜 건 저 쪽이고 나는 맞았을 뿐’이라는 변명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한 그 윤리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였다.
  음과 양,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만큼이나 사람들의 언어생활 속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것에 틀림없는 또 하나의 짝패 아가페/에로스의 이원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성찰한 루쥬몽은 『사랑과 서양』에서 에로스적 ‘사랑’ 즉 ‘정념으로서의 사랑(l'amour-passion)’이 갖는 이기적이고도 파괴적인 성격의 반공동체적 위험성에 대해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 분석을 통해 매우 체계적으로 우려하고 난 뒤, 사회적 실존으로서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 ‘책임’과 ‘신의(fidélité 혹은 정절)’를 제시한 바 있다. 결코 이타적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종 이기적이기만 하다면 주어진 삶을 관계 속에서 온전하고도 의미 있게 살 수 없으니 노력해야만 한다는 그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아가페/에로스 이분법은 문화사 혹은 정신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헤브라이즘/헬레니즘 쌍과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 희랍문명 → 중세 → 르네상스/휴머니즘 → 근대”라는 세계사적 시대구분의 적합성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조금 과도한 일반화를 무릅쓴다면, ‘사랑’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전개를 “헬레니즘(에로스) → 헤브라이즘(아가페) → 다시 헬레니즘 → 역사적 조건 속에서의 둘의 혼재”라는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런데 근대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위의 이분법이 말하지 않는 다른 이분법을 사랑에 대해 한 층 더 미시적으로 분리해 내려 든 적이 있다. 당대 역사적 순간에서 노정되는 인간과 사회의 제반 문제들의 뿌리를 개체적 실존의 본질로까지 내려가서 그리고 먼 원시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 상상하는 가운데 그는 우선 근본적으로 ‘타인을 향한 사랑’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듯하다. 그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데 적용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을 분리하여 기술한다. 둘 사이의 차이는 루소가 보기에 미세하지만 대립적인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기(amour de soi)’와 ‘스스로 사랑하기(amour-propre)’가 그것들이다. 

“‘자기를 사랑하기’는 우리 자신에게만 향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가 충족될 때, 만족한다. 그런데 ‘스스로 사랑하기’는 서로 견주며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만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감정은 남보다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면서 그 남이 자신보다 우리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데, 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소, 『에밀』 제 4장)

  한편으로 사르트르의 ‘즉자/대자’ 개념을 떠오르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사람들이 겪는 좌절과 불행과 갈등에 대한 이 설명은 프랑스 정신사가 기록한 성취들 중 하나임이 분명해 보인다.
사랑을 둘러싼 무시할 수 없는 두 갈래들 중 하나는 보다 생물학적이면서 동시에 보다 사회적인 것으로 떠오르  고 있는 갈래인데, 이성애/동성애가 그것이다. 21세기에 와서 더 뚜렷해지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이항대립이 실상은 알려진 것 보다는 훨씬 더 진작부터 실재하였다고 소수의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 이항대립의 후자가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생리학적 조건에 따른 것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루이-조르주 탱은 그의 책 제목을 『이성애 문화의 고안』이라고 달았다(한국어 번역서의 제목이 『사랑의 역사』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 책에서 저자는 중세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전개되는 남성들 간의 과도하게 끈끈한 우정과 교감이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왕 마르크가 조카 트리스탄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어서 결혼하라는 주위의 강력한 촉구를 끝내 물리쳐내는 과정이 후세의 신화 편자들에 의해 상당부분 삭제 편집된 사실을 밝혀낸다. 
  그리고 탱은 겹쳐 있는 중세의 기사도 문화와 궁정연애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시대적 간극과 그 대립상을 구분해 내기도 한다. 그가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기사도 문화에서 완연하게 드러나는 남성들 간의 신뢰와 교감은 애정 혹은 사랑과 결코 구분되지 않았으며,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해 그러한 경향을 일정부분 억제할 필요에 도달한 시점에서 왕실 혹은 영주의 궁정과 교회가 새롭게 이성애의 가치를 도입하여 장려하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그 와중에 13세기 무렵의 기사들과 궁정과 교회는 그로 인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혼란을 한참동안 느꼈으며, 때맞추어 남부 프랑스의 트루바두르들은 귀족 부인이나 영주의 부인 앞에서 기사들이 발휘하는 정중한 로맨스를 무훈시로 노래하여 장려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오전 현재,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의 법안 “모두를 위한 결혼”은 프랑스 국회의 100시간이 넘는 법률안 심의를 뒤로하고 그 표결을 몇 시간 앞두고 있으며, 『이성애 문화의 고안』의 저자는 며칠간의 찬성 시위에 참가한 후 이 표결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54%가 동성으로 구성된 커플의 사랑을 결혼이라는 법제도 속으로 통합하는 데 찬성하며 48%가 그 커플들에게 자녀를 입양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사랑’을 뜻하는 단어 ‘류보피 любовь[lyubov']’는 공통슬라브어 ljub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독일어 Liebe, 영어 love 등에서도 동일한 어근이 나타난다. ‘류보피’는 애초에 ‘류비 любы’의 대격형태였던 것이 ‘류비’를 밀어내고 주격형태가 된 것인데 이러한 형태 변화를 통해 사랑을 하는 ‘주체’와 사랑을 받는 ‘대상’의 상호불가분성, 그 긴밀함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랑하다’를 뜻하는 동사 ‘류비티 любить[lyubit']’에도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동사 ‘류비티’는 애초에 사역동사(‘사랑하게 하다’, ‘사랑에 빠지게 하다’)였던 것이 능동적, 적극적 의미(‘사랑에 빠지다’, ‘사랑하게 되다’)를 거쳐 수동적, 상태적 의미(‘사랑하다, 좋아하다’)로 개념발전한 경우로서, 여기에는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의 순환적 교류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스테파노프, <러시아 문화 사전> 참조).
  인류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하는 ‘사랑’은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여전히 인간사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화두이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과 그 발현 양상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며 발전해 왔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사랑이 개념적으로 상당히 발달했음은 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여러 개 존재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육체적 사랑을 지칭하는 ‘에로스’와 정신적 사랑, 우애를 지칭하는 ‘필리아’,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아가페’는 사랑의 본질적 위상과 사랑의 유형을 구분해준다. 흔히 정신적 사랑을 가리킬 때 ‘플라토닉 러브’라 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사랑이 ‘필리아’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플라톤이 논한 사랑의 범주는 에로스이다. 플라톤은 『향연』(BC 384~379로 추정)에서 세속의 에로스와 천상의 에로스를 구분하였다. ‘세속의 에로스’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인 더 젊은 아프로디테의 자식으로서, 정신보다 육체를 더 사랑하며 어리석은 자를 사랑한다. 어미 없이 우라노스가 낳은 딸, 더 나이 많은 아프로디테의 자식인 ‘천상의 에로스’는 육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정신적인 교감을 중요시하며 더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를 사랑한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사랑, 곧 ‘천상의 사랑’과 ‘세속의 사랑’은 이후의 사랑 개념의 전개와 발전에서 두 가지 중심축을 이루면서 그 대립과 통합을 통해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형성해왔다. ‘천상의 사랑’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교류로 형상화되고 ‘세속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 에로티시즘과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사랑의 개념 발전에서 이 둘의 통합에 대한 지향도 끊임없이 발견된다. 
  ‘사랑의 시대’ 중세는 사랑의 개념 발전사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시기이다.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의 서구는 기독교적 사랑의 기호로 넘쳐나던 곳이었다. 기독교적 사랑, 박애를 지칭하게 된 ‘아가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다 내어주는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설파하며 십자가 고행으로 스스로 그 사랑을 실천해 보인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단순히 종교적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실천 윤리와 공고히 결합된 것으로서 기독교적 사랑의 본질이 담겨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중세 유럽 문화에서 신학 사상과 예술적 모색의 기본 방향을 이루는 것이었다. 
  중세는 사랑의 문화사에 있어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시대’였다. 중세 기사의 사랑은 ‘천상의 사랑’과 ‘세속의 사랑’의 독특한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랑의 개념을 창출해낸다. 기사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상의 사랑에 가깝지만 지상의 여인,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세속적이다. 기사적 사랑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기사는 자신을 고귀한 부인의 신하로 천명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그 부인뿐이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침묵과 인내이며, 이 사랑은 비열하고 저속한 인간들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성스러운 비밀이다. 기사는 자신의 여인에 대해 경건하고 신실하며 기사적이어야 한다. 기사가 그 여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육체적 관계가 아니며 그녀를 위해 봉사하고 그녀를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그녀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사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향을 담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세속적 감정에 도덕적 힘을 부과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완성을 요구한다. 
  사랑 개념에서 ‘천상’과 ‘세속’의 구분은 러시아 문화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러시아어에 반영된 일상적 세계상에서는 사랑뿐만 아니라 여러 개념에서 ‘천상’과 ‘세속’의 대립이 두드러진다(시멜료프, 『러시아어와 언어외적 현실』 참조).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거나 의미적 대립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 유사 개념들이 러시아어에서는 별개의 단어로 표현됨으로써 ‘천상’에 속하는 개념과 ‘세속’에 속하는 개념이 구분되곤 한다. ‘기쁨’(радость-удовольствие), ‘선’(благо-добро), ‘진리(진실)’(истина-правд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신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더 넓은 의미로 정신적 사랑까지 포함하는 ‘천상의 사랑’과, 남녀의 사랑, 육체적 사랑과 보다 밀접히 관련되는 ‘세속의 사랑’을 인식적으로 명확히 구분함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은 ‘류보피’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다. 또한 러시아어 사랑 범주의 단어들(‘류보피’, ‘류비티’)은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해 만족감을 얻는 성향, 취미나 기호의 의미까지 포괄한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여러 종류의 사랑의 개념이 녹아있는 현상이 러시아어만의 특성은 아니겠지만 러시아어의 경우 ‘천상’과 ‘세속’의 대립이 어휘 쌍으로 잘 드러나는 언어임을 고려한다면 ‘사랑’ 개념만큼은 명확히 구분되는 의미조차 하나의 단어 안에 수렴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독특하게 느껴진다.
  러시아 언어-문화에서 사랑이 연민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도 종종 러시아적 특성으로 지적되어 왔다. 러시아어에 반영된 일상적 세계상에서 사랑과 동정은 개념 쌍을 이룬다는 것이다(잘리즈냐크, <사랑과 연민> 참조). 아래 예세닌의 시구에서는 사랑과 연민이 대립하는 것으로 읽힌다.

“잊어버려, 내가 네 것이었음을, 정신없이 널 사랑했음을.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동정하지. 날 떠나 버려,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예세닌, 『내 창가에서 떠나』, 1915)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1869)에서 언급되는 이 둘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백치』의 유명한 대화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야”라는 미시킨의 말에 대해 “자네의 연민이 내 사랑보다 더 대단한 듯하군.”이라는 로고진의 대답 속에서 연민은 사랑이 아닌 그 무엇, 사랑이 변질된 것, 혹은 사랑보다 더욱 고귀한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연민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란 어렵지만 사랑과 연민의 긴밀함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어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연민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의 사랑의 개념은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더 발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측은지심은 인의 시작이다’라는 맹자의 말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에서 사랑이 생긴다는 생각과 관련이 깊다.
  러시아에서 사랑에 대한 논의는 특히 종교철학 안에서 활발히 전개되어왔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백치』)라고 말하는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의 구원을 ‘미’에서 찾았다고 한다면 톨스토이가 그것을 찾는 토대는 ‘선’이라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미’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선’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겠으나 ‘미’와 ‘선’을 모두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러시아 종교철학자 솔로비요프에 이르러 이 지점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여기에 사랑의 의미가 있다는 사랑에 관한 철학이 확립된다. 사랑을 신의 진리로 가는 통로로 보았던 솔로비요프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현상적 존재의 한계가 극복되고 이상적인 개성이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존재의 자기부정이며 이로써 타인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기부정을 통해 최상의 자기긍정이 이루어진다.” (솔로비요프, 『사랑의 의미』, 1884) 

  사랑이란 그리스도처럼 타인에게 자기를 모두 내어주는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통해 타인을 긍정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최상의 자기긍정에 이르게 해 주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있기 마련이지만 사랑을 통해 이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타자로 전이시킬 수 있으며 여기에 바로 사랑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은 합일의 수단이자 세계 발전을 추동하는 신적인 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비요프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세르게이 불가코프, 플로렌스키, 베르댜예프 등 러시아 철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점차 사랑은 신앙과의 공고한 결합 속에 러시아를 추동하고 구원하는 근본적인 힘으로 사유되기에 이른다.

“사랑은 러시아적 영혼의 근본적인 영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다. [...] 사랑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게으르고 무기력해지거나 혹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러시아인은 그가 무엇을 믿든 이상과 목표 없이는 공허한 존재가 되고 만다. 러시아인의 지혜와 의지는 사랑과 신앙에 의해서만이 영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인, 『러시아적 이념에 대하여』, 1948)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사랑’이라는 말이 프랑스인들에게서 어떤 정의(情意)적 의미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그들이 그 어휘 속에 일상적으로 담아내는 다양한 뉘앙스들은 어떤 것인가? 즉 ‘사랑’은 프랑스인들의 문화심리적 지형도 안에서 어디쯤 위치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랑의 토포스는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가?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있는지, 내가 사랑하거나 받고 있는 게 사실인지 등에 대한 대답은 불꽃처럼 늘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이라는 말은 실재하며 넘쳐난다. 사랑은 우선 토포스이며 말이다. 그러므로 말들의 집적체인 문학에게 우선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적 혹은 더 구체적으로 문학적 토포스로서의 ‘사랑’의 잠재력은 크다. 가령 소설의 인물들의 로맨스는 특히 그들을 향한 독자의 동일시를 촉매하는 묘약이 되어준다. 여느 나라처럼 프랑스 문학사의 소설가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소설가가 사랑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 혹은 연애의 테마를 그들의 이야기 속에 삽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작품은 공허 혹은 불모의 지경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 혹은 연애의 감정은 다른 인접 감정들을 손쉽게 유발 및 생산하는 제너레이터가 되어준다. 그래서 그것은 삶의 복합성과 다양성 나아가서 무정형한 실존 그 자체로까지 이야기의 지평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사랑의 주제는 그것의 고유한 범주를 넘어 삶의 드라마가 한껏 펼쳐질 수 있게 하는 뇌관 혹은 출발점으로 기능한다.
  어쨌든 사랑과 문학의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문학을 넘어선 문화적 토포스로서의 사랑이 갖는 넓이와 깊이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 준다. 
  우선, 17 세기의 마담 드 라파이예트의 『클레브 공작부인』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살며 고통 받으며 고통을 주며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공작부인이 느무르 공작에 첫 눈에 반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의 남편의 죽음을 그리고 그녀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과 불행과 순간의 황홀한 미망(迷妄)은 당대의 수많은 독자를 꿈속으로 사로잡았다.
  동시대의 걸출한 극작가 장 라신은 고대 그리스의 유리피데스와 세네카의 작품 페드라를 희곡으로 각색해 1677년 파리의 무대에 올린다. 오늘날까지도 되풀이 공연되고 있는 페드르의 비극은 감정과 정념의 존재 인간을 비추는 끈덕진 사랑의 토포스일 것이다. 의붓아들을 사랑하기에 이른 왕비 페드르의 독백과 같이 그녀의 불행 혹은 죄악은 훨씬 더 먼 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 언급된 루소 또한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토포스 아래 굴복하고 있음은 그의 소설 『신 엘로이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생산하는 문학적 언어 속에서는 앞서 언급한 이론적 담론에서와는 반대로 타인을 향한 사랑이 절절하게 노래되어 프랑스를 넘어선 유럽의 모든 독자들의 토포스를 꽃피운다. 두 남녀의 순애보는 여지없이 상대, 즉 타인을 향한 순정이며 열정이다. 남편 볼마르에 대한 의무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첫 사랑 생프뢰와 죽음에 이를 때 까지 나누어 갖는 그 사랑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고 독자들은 다음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위로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계몽주의 시대의 가치 안에 갇힌다.

“저는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저는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이승에서 우리를 갈라 놓은 미덕은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를 맺어 줄 거예요.” (루소, 『신 엘로이즈』)

  쥘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루소의 이 소설은 중세의 유명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의 실화에서 그 구도를 가져온 것이다. 둘의 연정은 금단의 것이었다. 스승과 어린 여제자의 로맨스, 그것이 금단인 만큼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은밀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인 지도, 지금도 어디에선가 또 하나의 엘로이즈가 자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19세기 초입, 낭만적 기운이 혁명과 함께 서유럽 대륙을 휘감을 때, 스탕달은 『연애론』을 써서 거의 최초로 남녀 간의 사랑의 사회 심리학적 조건을 가능한 한 세밀하고도 깊게 분석한다. 사랑의 토포스에 대한 최초의 접근이라고 말해서 과히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적과 흑』에서 ‘마틸드-쥘리앵-레날 부인’을 삼각 구도 속에서, 그리고 주인공의 사회경제적 욕구의 틀과 연관시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의 토포스는 아무래도 낭만주의자 위고에 의해 더욱 공고해 진다. 『파리의 노트르담』의 콰지모도-에스메랄다 쌍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성이 펼쳐보이는 안타까운 밀고 당기기로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독자에 따라서는,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와 마리우스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에 놓이는 것을 시종 감내하는 장발장의 존재보다는 문화적으로 훨씬 더 밀착해 오는 관계였을 것이다. 
  발자크에 이르면 이제 ‘사랑’은 그 자체로 소설의 주제를 이루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다른 드라마들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참여할 뿐이다. 사랑이, 연애의 정치학이 들어있지 않은 그의 소설을 찾기는 힘들다. 발자크의 사랑은 다양하다. 고리오는 애정의 대상으로 자신의 두 딸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우선 사랑의 대상으로 ‘화폐’를 선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수많은 사랑의 문학들 혹은 그 변주들 속에서 두 마르그리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사뭇 달라서 그것들이 드러내는 대조와 편차는 매우 크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과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알렉시스』, 이 두 이야기를 전달하는 언어는 극과 극이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사이공으로 가서 프랑스어를 배운 뒤라스의 문장은 정통 프랑스 중고등학교에서 논리와 적합성으로 꽉 찬 모국어를 익힌 유르스나르의 눈과 귀엔 매우 이질적인 것일 것이다. “Il sent bon la cigarette anglaise”라는 비문(非文)을(프랑스어 문법은 Il sent bon(그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와 Il sent la cigarette anglaise(그에게선 영국 담배 냄새가 난다)를 단일한 동사 구문 속에 통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슴없이 적는 뒤라스는 그녀의 문장들만큼이나 파격적인 사랑을 경험하며, 사회적으로 결코 환영받지 못할 그 연애를 말년에 이르러서 자전 소설 『연인』을 통해 고백하고야 만다. 
  유르스나르의, 오랫동안의 조각 작업을 거친 듯한 논리적 언어, 그리고 그 엄정함으로 프랑스 학술원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된 로고스적 남성성에 감명 받은 독자들은 그녀의 전기가 들려주는 사랑의 좌절과 동성애 경험에서 한편으로 아연해하면서 또 한편으로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보편적일 것만 같은 ‘사랑’이라는 문화 토포스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미세하나마 편차를 드러낼 수 있다면, 이는 과연 사랑이 얼마만큼 ‘쾌락’인가라는 질문과 만났을 때 드러날 수 있다.
  1968년 5월에 발생한 저 ‘5월 난동’의 시발점이 된 작은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파리 근교의 황량한 낭테르 대학교의 기숙사에 새롭게 내려진 “밤 10시 이후에는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방에서 나와야 한다”는 황당한 지침을 거부하며 총장실로 몰려가서 “당신이 무슨 권리로?”라고 항변한 프랑스 여학생들, 그녀들의 심정적 이해 구도 속에 구축된 문화적 토포스 ‘사랑’은 5월 난동 기간 동안 대학교와 관공서 건물의 벽에 “너희는 서로가 서로 위에서 사랑하라”라고 쓰고 행진하게 만들었다. 
  2000년 5월 5일과 6일 양일에 걸쳐 프랑스 최대의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는 몇 개의 항목을 가지고 현재의 프랑스인들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앙케이트를 실시했는데, 그 중 첫 항목, “당신은 우리의 중학교에 콘돔 배포기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십니까?”에 대해 80% 의 프랑스 학부모들이 찬성하였으며 반대 18%, 모르거나 무응답 2%로 집계되었다. 
  “‘쾌락’의 반대 개념으로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문화적 질문에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절제와 중용 등을 말하는 문화 속에서라면, 쾌락은 ‘고통’의 반의어이며 모든 생물학적 개체는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는 고통을 피해 쾌락을 추구하며 이 성향은 일체의 생의 활동의 원초적 동기로 기능한다는 백과사전의 <에도니즘> 항목의 기술은 여전히 낯설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인들의 사랑의 토포스는 특히 오늘날에는, 주체의 자유로운 발현으로서의 측면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오해되기 쉽다. 특히 대중음악이라는 매체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흔한 말들은 그러한 차이를 가린다. 그러나 20세기에 비로소 발현되기 시작한 프랑스 샹송의 가사들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는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들 수 있다.

“난 내 조국을 부인할 수 있어, 자기가 원한다면, 내 친구들도 몰라라 할 거야.” (피아프, <사랑의 찬가>)

  그러나 사랑의 토포스는 실은 전지구적이다. 그만큼 범박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대서양을 건너고 대륙을 또 횡단하여 캘리포니아에 이르면, 관객에 따라서는 참을 수 없는 영상 문화적 발현을 생산하기도 한다. 영화 <그랑블루>를 통해 한없이 깊고 드넓은 파란 색 미학을 펼쳐 보인 바 있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뤽 베송은 헐리우드적 사랑의 토포스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내 그곳의 범속한 휴머니즘에 침윤하였다. <제 5원소>라는 기이한 제목을 가진 그의 영화 속에서는, 탈레도/헤라클리토스/엠페도클레스로 이어지는 고대 그리스의 상상력이 정련해 낸 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4 원소(물/불/바람/대지)에 한갓 인간의 연애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든다. 브루스 윌리스가 앳된 소녀의 입에 키스를 함으로써 외계인의 침략을 분쇄하는 로켓을 발사하여 지구를 구한다. 유럽 관객의 눈에 과연, 그 키스에 개인이, 주체가, 쾌락이 들어있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차라리, 독일의 미카엘 하네케가 감독하고 장-루이 트랭티냥이 주연하여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를 밀어내고 2012년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아무르>가 ‘사랑’이라는 토포스의 모든 지난한 조건과 과정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허위들을 직시하게 해 준다. 반신불수와 겸하여 뇌의 기능도 즉 영혼도 서서히 소멸해 가는 평생의 사랑 아내를 베게로 눌러 종결시키는 한 진정한 노인의 선택은 ‘사랑’이라는 말을 단번에 하나의 영원한 질문으로 돌려놓아 줌으로써 그 토포스의 생명력을 복원하기 때문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역사와 문화 속에서 천상의 사랑과 세속의 사랑은 때로는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멀어지기도 하면서 러시아적 사랑 개념의 특성을 이루어왔다. 천상의 사랑이 성스러움과 고결함, 인간을 신과 연결시켜주는 근원적 속성으로 나아가고 세속의 사랑은 육체적 사랑, 파괴적이고도 치명적인 속성이 부각되는 양상으로 나아갈 때 두 유형의 사랑은 극단으로 멀어진다. 특히 러시아 종교철학이나 문학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육체가 배제된 사랑이 미화되고 성적 욕망이나 육체적 사랑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도덕적 악으로 치부되는 경우에 두 사랑의 접점을 찾기 힘들어진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두드러지는 사랑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정교의 영향 아래 태동한 러시아 문화 특유의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네긴에 대한 타티야나의 사랑도(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라스콜니코프에 대한 소냐의 사랑(도스토옙스키, 『죄와 벌』)도 사랑의 육체적 측면보다는 그 정신적 위대함이 부각되는 사랑이다. 육체적 사랑과 사랑의 정열을 죄악시하는 사랑관은 소위 정신적 위기를 겪은 후의 톨스토이 작품 세계에서 두드러진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생각은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주인공 포즈드니세프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인류의 목표가 지복이나 선, 사랑이라고 가정해봅시다. [...]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데 장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욕정입니다. 욕정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가장 악하며 끈질긴 게 바로 성욕이고 육체적 사랑입니다. 때문에 욕정, 특히 가장 강력한 육체적 사랑이 제거된다면 [...] 인류의 목표는 달성될 것입니다. [...]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은 바로 절제와 순결을 통해 달성되는 선입니다.”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1889)

  실제로 톨스토이는 『크로이체르 소나타』 후기편에서 결혼과 육체적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연애가 됐든 결혼이 됐든 사랑의 대상과 결합이라는 목적 달성이 아무리 시적으로 미화되더라도 이것은 많은 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는 걸 최고의 행복이자 목표로 삼는 것이 가치 없듯이 인간으로서 가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이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자기희생이다. 육체적인 사랑, 결혼은 자신을 섬길 뿐이다.”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후기>, 1890)

  여러 톨스토이 연구가들은 톨스토이가 왕성한 성욕의 소유자였으며 성적 욕망을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육체적 사랑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더욱 높아지고 금욕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 문제와 싸워야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평생 동안 육체적 사랑을 억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쓴 톨스토이는 점차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융합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 듯하다.
  세속의 사랑이 천상의 사랑과 가장 멀어지는 지점은 사랑이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할 때, 문란하고 무분별한 음란과 만났을 때이다. 현대 사회도 결코 비켜갈 수 없는 문제이지만 18~19세기 러시아 상류사회는 음란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묵인되던 곳이었다. 절대 왕정 시대 유럽 궁중에 만연했던 ‘총애’ 현상은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그 절정에 다다랐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총애를 받는 공공연한 ‘밤의 황제들’(여제의 애인들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도 그 수가 상당했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보다 여제의 명성을 더 널리 떨친 것은 일회적이고 무질서한 관계였다고 한다. 심지어 페테르부르크에서 널리 회자되던 이야기 속의 여제는 근위연대 소속의 젊고 잘생긴 장교들에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그려진다. 여제가 누군가를 간택하면 신하들이 그를 겨울궁전으로 데려와 천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줄 수 있는 자인지를 검증한 후 여제에게로 데리고 가고, 동이 틀 때쯤 여제로부터 금화 하나를 건네받은 그가 옆방으로 보내지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 채 네바강에 던져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신달롭스키, 『북쪽 수도의 타락과 유혹』 참조).
  이처럼 세속의 사랑에는 성욕과 육체적 사랑만이 난무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정신적 사랑, 자기억제적 사랑,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랑으로서 천상의 사랑만이 고양되고 추앙받는 경우 두 사랑은 극단으로 멀어진다. 그러나 인간사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삶을 추동하는 힘으로서 사랑은 어느 한 쪽 측면만의 사랑은 아닐 것이다. 러시아 문학 속의 사랑 이야기들도 그러하다. 이 안에는 천상의 사랑도 들어있고 세속의 사랑도 들어있다. 세속의 사랑을 통해 천상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고 천상의 사랑에 가까워지려는 지향 속에 세속의 사랑은 더욱 고양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러시아 상징주의 비평가 메레시콥스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부의 사랑, 지상의 에로스가 무엇인지 죄 많은 우리도 경험상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형제애, 천상의 에로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상-세속’의 에로스, ‘형제-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는 오로지 성자만이 알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천상의 사랑, 아가페에서는 그토록 이해가 안 되던 두려운 모든 것이 지상의 사랑, 에로스에서는 단순하고 쉽고 즐거운 것이 된다.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자, 사랑에 빠진 자들은 판단하지 않고 서로에게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내어 준다. 한 쪽은 사랑하고 다른 쪽은 증오하는 관계라면 사랑하는 쪽은 적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에게 ‘사랑하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 에로스, 세속의 사랑은 천상의 사랑 아가페를 가르쳐 준다. 바로 여기, 에로스 안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사랑해’라는 말을 하였고 사랑에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메레시콥스키, 『서양의 비밀. 아틀란티스 유럽』, 1929~1930)

  러시아적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가가 바로 푸시킨일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개인사도 사랑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로 충만하다. 푸시킨의 시를 분석할 때 수많은 연시들이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지를 밝히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이다. 푸시킨은 수많은 사랑의 헌시를 썼으며 그 사랑의 시들 만큼 많고도 다양한 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푸시킨의 유명한 사랑의 시 『그대를 사랑했소...』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대를 사랑했소. 어쩌면 사랑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았을지 모르오.
하지만 그 사랑이 그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길 바라오.
그대를 그 무엇으로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말없이, 희망 없이 그대를 사랑했소,
때론 수줍게, 때론 질투로 애태우며.
내 너무도 진정, 너무도 애틋하게 그대를 사랑했기에,
이제 그대가 다른 이로부터 사랑 받기를 바랄 뿐이오.” (푸시킨, 『그대를 사랑했소...』, 1829)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자기억제적이다. 푸시킨이 이 시를 썼을 때의 심경이 실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랑의 모습은 세속의 사랑을 천상의 사랑에 가깝게 만든다. 그러나 푸시킨이 보여줬던 사랑의 모습이 늘 그러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 사랑의 시가 누구에게 바쳐진 것인지조차 명확하게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푸시킨의 여성 편력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돈 주앙 목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귀족사회의 부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살롱을 찾은 손님들의 기록을 앨범으로 담아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러한 앨범들 중 하나인 우샤코바의 앨범에는 푸시킨이 사랑했던 37명의 여인들의 이름을 담은 ‘돈 주앙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삶과 작품 속에서 사랑의 정열을 불태운 작가 푸시킨에 대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볼콘스카야는 푸시킨이 “모든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시인의 의무”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여인들 중 한명이었던 안나 케른에게 바치는 유명한 사랑의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기억하네, 경이로운 순간을.
내 앞에 그대가 나타났지,
스쳐가는 환상처럼,
순수한 미의 화신처럼.” (푸시킨, 『K***에게』, 1825)

  훗날(1840) 러시아 작곡가 글린카에 의해 이 사랑의 시는 로망스 <나는 기억하네, 경이로운 순간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푸시킨이 안나 케른을 사랑했듯, 안나 케른을 꼭 빼닮은 그녀의 딸 예카테리나 케른을 사랑했던 글린카가 이 로망스를 예카테리나에게 바쳤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러시아 작가들은 사랑이라는 테마를 다룰 때 사랑과 욕망, 쾌락의 문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난해한 심리 소설로 읽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 안에서도 사랑의 문제, 특히 사랑과 욕망의 문제는 낯설지 않다. 인간의 심리, 인간성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에 주목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 것은 천상의 사랑과 세속의 사랑,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합일과 조화 가능성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중성과 그 극한적 양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랑관을 베르댜예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는 사랑 안에 두 가지 근원, 두 가지 원천, 인간이 함몰하게 되는 두 가지 심연 곧 쾌락과 연민의 심연이 있음을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사랑은 항상 극한까지 나아가며 광적인 쾌락과 광적인 연민에 의거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이러한 극한적 본성의 발현이지 사랑의 중용이 아니다.” (베르댜예프,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1923)

  쾌락과 연민이라는 사랑의 이중성은 『백치』(1868)와 『미성년』(1875)에서 잘 드러난다. 동시에 두 여인을 사랑하는 미시킨은 아글라야에 대해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랑, 쾌락과 욕망의 사랑을 느끼지만, 나스타시야에 대해서는 깊은 동정심에서 우러난 사랑, 거의 연민과 같은 사랑을 느낀다. 베르실로프(『미성년』)가 카테리나에게 바치는 욕망의 사랑과 소피야에 대한 연민의 사랑 또한 그의 인격만큼이나 분열되어 있다. 
  사랑과 욕망의 문제, 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욕망의 광기에 사로잡히고 이러한 사랑은 어떠한 평온도, 기쁨도 허락해 주지 않는다는 도스토옙스키식의 사랑관은 튯체프의 시구에서도 이어진다.

“아, 우리는 얼마나 살인적으로 사랑하는가,
격렬한 욕망에 눈 멀어
우리 심장에 소중한 것들을 
말살하는 도다.” (튯체프, 『아, 우리는 얼마나 살인적으로 사랑하는가』, 1851)

  사랑과 쾌락, 욕망의 문제는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부닌의 사랑이야기들 속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육체적 측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가로 평가받는 부닌은, 사랑의 주제를 다룰 때 주로 육체가 배재된 정신적 사랑의 측면에 보다 집착했던 이전의 러시아 작가들과는 달리, 육체적 욕망, 성의 문제를 감추지 않았으며 여성의 몸,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도 과감히 단행하였다(최진희, <이반 부닌의 창작에서 ‘사랑’의 테마> 참조). 

“언젠가 아빠 책에서 여성이 어떠한 아름다움을 지녀야 하는지 읽은 적이 있어. 검고 타는 듯한 눈동자, 칠흑같이 까만 속눈썹, 부드럽고 장난기 어린 홍조, 마른 몸매, 보통보다 더 긴 손, 작은 발, 큰 가슴, 그리고 예쁘게 알이 잡힌 종아리, 조가비 색의 무릎, 비스듬한 어깨. [...]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 그건 가벼운 숨결이야! 바로 나한테 있는 거지. 내가 숨쉬는 걸 잘 들어 봐. 정말이지?” (부닌, 『가벼운 숨결』, 1916)
부닌의 사랑이야기라고 한다면 그의 소설 속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부닌의 실제 삶 속의 이야기가 러시아인들의 뇌리 속에 더 뚜렷이 각인된 듯 보인다. “진정한 사랑은 재고 따지지 않는다.”(『사랑의 문법』, 1915)라는 거의 경구가 되어버린 그의 유명한 글귀처럼 부닌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보다 거의 서른 살이나 어렸던 갈리나 쿠즈네초바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부닌의 사랑이야기는 중년의 남자와 어린 여인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테마보다는 부닌과 그의 아내 그리고 갈리나의 삼인 가족이라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관계로 더 유명해졌다. 이 이야기는 <그의 아내의 일기>라는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사랑이야기중 하나이다. 거의 7년가량 이어진 복잡하고도 기이한 한 지붕 아래 동거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했지만 그 때의 사랑의 경험은 ‘사랑의 백과사전’이라 불릴 정도로 각양각색의 사랑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를 조명하고 있는 『어두운 가로수 길』(1937~1945, 1953) 시리즈로 재탄생하였다. 

  혁명 후 러시아 사회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퍼져나갔으며 결혼이라는 테두리 밖에서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시인 마야콥스키와 그의 연인 릴리 브릭도 그러한 자들 중 하나였다. 마야콥스키와 사랑의 코드를 연결시킨다면 혁명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마야콥스키가 혁명에 대한 사랑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마야콥스키가 쓴 사랑의 시들 중에서 연인 릴리 브릭에게 바치는 수많은 연시들이 눈에 띤다. 『척추의 플루트』(1915)을 비롯해 『인간』(1916), 『릴리츠카』(1916), 『나는 사랑한다』(1922) 등 릴리에 대한 사랑을 시로 읊었던 마야콥스키는 그녀에 대한 연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그녀에게 헌정하였으며 수많은 편지와 쪽지를 통해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토로하였다.

“나는 사랑한다.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 때문에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무례하든 상냥하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상관없이 사랑한다.” (마야콥스키, <릴리 브릭에게 보낸 편지>, 1923년 2월 6일)

  마야콥스키가 유서로 남긴 편지 속에는 그의 마지막 시가 담겨있다. 그 시의 유명한 구절 “사랑의 배가 세태에 산산이 부서졌다.”에서 사랑의 배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전문가들은 이를 여인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레닌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1993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학술대회에서 마리야 로자노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마야콥스키에게는 세 개의 사랑이 있었다. 릴리 브릭, 혁명 그리고 레닌. 이 세 개의 사랑 모두가 대답 없는 것이었다. 릴리는 닥치는 대로 다른 이와 어울려 그를 배신했고 혁명은 관료주의와, 레닌은 나드손과 어울려 그를 배신했다.” (마리야 로자노바, <마야콥스키와 레닌>, 국제 학술대회 ‘마야콥스키와 20세기’, 1993)

  러시아 소설 중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랑이야기는 아마도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57)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닥터 지바고』는 오마 샤리프 주연의 <닥터 지바고>(1965)에서부터 2005년 러시아에서 제작된 11부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에서 사랑받고 있는 소재이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은 격동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외적 사건으로 왜곡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심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등장한다(윤영순, 『러시아 고전, 연애로 읽다』 참조). 파스테르나크는 단순히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에서는 육체적 사랑도 정신적 사랑과 합치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도스토옙스키에서 분열로 치닫던 사랑의 두 가지 양상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들의 사랑은 위대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 특별한 속성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불안한 인간적 실존에 마치 영원의 바람이 불듯 욕정의 바람이 찾아드는 순간이 있었다. 이것은 그들 자신과 삶에 대해 끝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 종종 찾아드는 욕정의 순간은 단순히 탐욕과 쾌락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삶에 대해 끝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는’ 순간으로 이해된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양 극단에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우하고 화합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보다는 종교, 철학, 사상이라는 주제가 더 친근한 듯 보이는 러시아 문학에서도 사랑은, 작가에 따라 다소 상이한 관점에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늘 그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테마였다. 사랑의 숭배는 유럽 기독교 문화의 꽃이며 러시아에서는 사랑의 로맨티시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베르댜예프(1923)의 지적처럼 러시아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사랑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사랑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은 사랑과 욕망, 정열, 쾌락의 문제,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연민과 이타심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의 모습 등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랑의 형태들과 문제들을 다루어왔다. 이러한 사랑의 다양성은, 사랑의 경험이 지극히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대인의 머리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현대를 살아가는 세계인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인류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하는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토포스이지만 그 의미와 발현 양상은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며 발전해 왔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사랑이 개념적으로 상당히 발달했음은 이를 지칭하는 어휘가 여러 개 존재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혈통에 대한 본능적 사랑, 형제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필리아’,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으로서 ‘아가페’, 그리고 정념으로서의 사랑, 욕망, 본능, 쾌락과 강력한 상관관계를 지니는 ‘에로스’ 등이 있다. 특히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사랑의 짝패는 음과 양,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만큼이나 일상생활 속에 확고한 자리를 잡아 왔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교류로서의 사랑 아가페는 천상의 사랑으로,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사랑 에로스는 세속의 사랑으로 분열되는 가운데 이 둘의 통합에 대한 지향도 인류의 사랑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지향이었다.
  사랑의 짝패 에로스와 아가페 중 세계 문화에 더 뚜렷하고 풍성한 흔적을 남긴 것은 에로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정념과 욕망, 그를 통한 본능과 쾌락으로서의 사랑 에로스는 그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속성 때문에 더욱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토포스가 가장 잘 발현되는 문화 장르는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소설의 주제를 이루지 않으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다른 드라마들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라고 말하는 발자크의 말을 따르더라도 사랑이, 소설 속 인물들의 로맨스가 그들을 향한 독자의 동일시를 촉매하는 묘약이 되어주는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프랑스 작가들이나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이를 십분 활용하였다. 프랑스 문학에서 사랑 혹은 연애의 테마는 그것의 고유한 범주를 넘어 삶의 드라마가 한껏 펼쳐질 수 있게 하는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스승과 어린 여제자의 사랑이라는 금단의 사랑을 보여주는 루소의 『신 엘로이즈』, 최초로 남녀 간의 사랑의 사회 심리적 조건을 세밀하고 깊게 분석해낸 스탕달의 『연애론』, 그리고 『파리의 노트르담』, 『레미제라블』의 작가 위고,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에서 사랑의 토포스가 펼쳐진다. 
  사랑보다는 종교나 철학, 사상이라는 주제가 더 친근한 듯 보이는 러시아 문학도 사랑이 삶의 드라마를 추동하고 전개하는 데 필수적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프랑스 문학과 다르지 않다. 다만 러시아 문학에서는 ‘정신적 사랑, 천상의 사랑, 아가페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세속의 사랑, 에로틱한 사랑’의 이분법이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육체가 배제된 사랑이 미화되고 성적 욕망이나 육체적 사랑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도덕적 악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그려주는 데는 다소 인색할지라도 러시아 작가들은 사랑과 욕망, 탐욕, 쾌락의 문제,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연민과 이타심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의 모습 등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랑의 양상들을 형상화해줌으로써 현대에도 여전히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연관 토포스 도덕; 신앙; 에로스; 에로티시즘; 연민; 욕망;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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