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열정
범주명 인간과 정서
토포스명(한글) 열정
토포스명(프랑스) passion
토포스명(러시아) страсть
정의 1. 열정이 강할수록 결실도 위대하다.
2. 열정이 강할수록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열정’을 뜻하는 프랑스어 ‘파시옹 passion[pa[ɑ]sjɔ̃’]은 크게 종교적 의미로 예수의 수난, 철학적 의미에서 이성에 반하는 감정, 그리고 일반적으로 감정들 중 사랑의 열정을 가리킨다. (대개 이성에 반하는 감정의 의미로는 ‘정념’, 강렬한 사랑의 감정의 의미로는 ‘열정’으로 옮겨지는 데, 본고에서는 함의에 따라 이 두 표현을 모두 사용하였다.) 파시옹의 어원으로는 그리스어 파토스πάθος와 라틴어 파시오passio를 들 수 있다. 그리스어 파토스는 파스코πάσχω에 그 어원을 두고 있고, 파스코의 동사 파스케인πάσχήϲυ은 ‘당하다, 견디다, 참아내다’의 의미를 갖는다. 라틴어 파시오는 동사 파티오르patior에서 파생되었고 그리스어 파토스와 마찬가지로 ‘견디다, 참다, 겪어내다’를 의미한다. 
  그리스어 어원 파토스πάθος는 주체가 외부의 작용을 견뎌내는 상태와 주체가 겪는 우연한 사고, 불행, 사랑, 증오와 같은 감정을 포괄한다. 브룅에 의하면 정념은 “초기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비극에서 신들이 인간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혼란”으로, “정념에 빠진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맞설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의 노리개가 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 (브룅, 『스토아주의』에서 재인용). 신화적 상상력과 달리 고대의 철학자들은 정념의 근원을 인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다시 말해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이는 곧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일과 연관된 것으로, 플라톤 이래 인간 존재를 정신과 신체, 즉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누는 이원론의 전통에 닿아있다. 
  파시옹의 종교적인 의미는 라틴어 파씨오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수난’으로 옮겨지고 대문자(Passion)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파시옹은 예수가 사는 동안 견딘 고통 전체, 또는 십자가에서 당한 죽음과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기까지 겪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기독교의 인류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사건을 소재로 수많은 연극, 회화, 음악 작품들이 창작되었는데 파시옹은 이러한 예술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수난극 파시옹은 지금도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전통적인 형식 그대로 공연되고 있으며, 예수의 수난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본질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던지는 영화(아르캉, <몬트리올 예수>, 1989 )와 뮤지컬(영국의 록 뮤지컬로 재탄생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1) )로도 새롭게 구성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회화 작품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종교 음악에서 파시옹은 17~18세기에 성행했던, 성서에 입각한 종교적인 내용의 성담곡(聖譚曲) 오라토리오의 한 범주이다. 이 또한 예수의 수난을 주된 내용으로, 무대장치 없이 합창과 낭송, 관현악 연주로 구성되며 바흐(<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1729), 헨델(<메시아>, 1742), 하이든(<천지창조>, 1798)의 곡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정념은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정념이 영혼에 무질서를 야기하고 이성을 압도할 때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면서 무절제한 행동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정신론』(기원전 330년경)에서 정념을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지만, 플라톤과 달리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 정상적인 ‘감정의 반응’으로 보았다. 또한 『수사학』에서는 정념을 “정신에 영향을 미쳐 판단에 차이를 갖게 하고 거기에 고통과 쾌감이 수반되게 하는 효과적인 설득의 수단”으로 봄으로써 변론가가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할 요소로 제시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정념에 대한 비난을 그것의 부작용으로 돌리고, 정념의 과도함을 조정하는 중용의 덕목을 강조했다. 정념이 비난받는 것은 사람이 “정념에 민감하고 그것을 욕망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데 있어서 과도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쾌락 자체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무절제는 악이다. 
  이후 서양 철학에서 정념은 특히 윤리학의 토대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스토아학파를 거쳐 데카르트,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이성에 반하여 인간의 정신을 교란시키는 인간적 결점으로 보는 시각을 유지한다. 1690년에 출판된 퓌르티에르의 『일반사전』은 정념을 “감각에 제시되는 다양한 대상에 따라 생겨나는 마음의 움직임과 여러 동요들”로서 “모든 인간의 정념은 그것을 낳은 이기심과 마찬가지로 나쁘고 무절제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념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러한 시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행복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는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들은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나오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을 선, 우리에게 불행을 주거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것을 악”(『인간오성론』, 1690)이라고 주장한 로크와 흄 등 영국 경험론자들의 영향 하에,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감각론은 정념을 “충만한 행복의 조건으로, 더 이상 지혜와 대립되지 않고 반대로 인간 행동의 합법적이고 필수적인 동력”(부르주아 외, 『문학과 도덕 16~18세기』)으로 간주하며 정념의 복권을 시도했다. 디드로와 콩디약의 정념 예찬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1731)와 루소의 『신 엘로이즈』 (1761) 등 이를 실제로 작품에 적용한 소설들 이후, 19세기에 이르면 정념은 절대적인 이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의 기능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최대의 인력(특히 사랑의 정념)으로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성의 원리로, 사회의 억압과 부르주아지의 물질적 가치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원동력의 함의를 갖게 된다. 특히 열정적인 사랑의 정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서구 최초의 연애이야기 『트리스탕과 이죄』(12~3세기경, 19세기 바그너에 의해 오페라 작품으로도 만들어져 1865년에 초연되었다) 이후 수많은 변주를 만들어내면서, 사랑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고통과 쾌락, 구원의 성격과 예술로의 승화 등 여러 복잡한 인생의 주제와 맞물리며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자 매력적인 창작 활동의 소재가 되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열정을 뜻하는 러시아어 ‘스트라스티 страсть[strast']’의 의미적 어원은 프랑스어와 유사하게 고대 그리스어의 ‘파토스πάθος’에서 출발하며, 형태적 어원은 ‘고통, 고난, 슬픔’을 뜻하는 고대 러시아어 ‘strast'’에서 기원한다. 11세기 고대 러시아어에서 ‘스트라스티’는 ‘고통’, ‘불행’, ‘질병’ 등의 의미를 지녔으며, 프랑스어의 ‘파시옹’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수난과 고통을 지칭하는 구별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파토스의 일차적 의미에 매우 유사하게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말 그대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사용되는 ‘스트라스티’는 대문자나 복수형으로 구별하여 ‘Страсть Христвы’, ‘страсти Христвы’ 등으로 표기된다. 
  ‘수난, 고통’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트라스티’는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죄악, 결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는 러시아 정교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때 ‘스트라스티’는 신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죄인으로서 인간의 상태와 습관을 지칭하였다.‘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이라는 러시아 정교의 ‘여덟 가지 대죄’는 ‘죽음의 죄’라는 표현과 동시에 ‘죽음의 스트라스티’라고 하기도 한다. 
  이후 ‘스트라스티’는 프랑스의 ‘파시옹’과 유사하게 초기의 의미인 ‘수난, 고통, 죄악’의 의미 보다는 이성의 지배를 넘어서려는 힘이자 욕구의 특별한 형태와 감정의 상태를 지칭하는 ‘열정, 정념, 충동, 정욕’등의 의미로 사용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죄악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스트라스티’가 이후에 ‘정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트라스티’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어 파토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포를 나타내는 단어 ‘스트라흐 страх[strakh]’가 파생되었다. 
  이처럼 ‘스트라스티’는 ‘수난, 열정, 정욕, 공포’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열정, 정욕’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종교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정념을 감각과 마찬가지로 이성과 영혼을 속이고 그릇된 인상을 심어 인간을 자기 존재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파스칼에게서 인간은 “정념과 이성의 내적 투쟁”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항상 분열되어 스스로 모순을 느끼는” (『팡세』, 1670) 존재였다. 그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파스칼의 해결책은 종교였다. 

“감각들은 거짓된 외양에 의해서 이성을 속이며, 이것들이 인간의 영혼을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영혼으로부터 속임을 당한다. 영혼이 그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다. 영혼의 정념들은 감각들을 교란시켜서 그릇된 인상들을 조성한다. 이 양자는 앞 다투어 거짓말을 하고 서로를 속인다.” (『팡세』, 1670)

  또한 종교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파스칼과 달리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1613~1680)는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잠언집』(1665)에서 해결의 가능성조차 찾지 못한 채 인간 본성과 정념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들을 개진시키고 있다. 

“정념은 흔히 가장 학식이 있는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들며 흔히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들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정념은 편파성을 지니며 정념의 추구를 위험하게 만드는 특유의 이해관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정념이 매우 합리적으로 보일 때조차 경계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서는 정념이 영속적으로 발생하여, 하나의 정념이 소멸해도 거의 언제나 다른 정념이 들어선다.”(『잠언집』, 1665)

  파스칼과 라로슈푸코가 스토아학파의 정념에 대한 견해를 답습하여 정념을 인간본성의 문제로, 본질적으로 정신을 혼란과 비이성으로 이끄는 악의 요소로 보았다면,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좀 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정념의 문제에 접근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을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인간 본성 자체의 발현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를 밝힌 저서 『정념론』(1649)의 프랑스어 제목은 ‘정신의 정념(les Passions de l'âme)’이다. 이 제목은 정념이 정신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어원적으로 수동성을 의미하는 정념이 정신의 능동적 본질인 의지와 더불어 정신의 다른 한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정신에서 정념(수동)인 것은 신체에서는 작용(능동)이다.” (『서한집』, 1649) 

  이에 따르면 정념은 신체를 원인으로 갖는 정신의 지각(conception)으로서 바로 “정신 자체의 움직임에 의해 야기되고 유지되고 강화”되는 한 요소이다. 정념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니지만, “정념에 빠져들기 전에, 이성과 의지에 의한 이중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데카르트의 견해는 정념을 “신체에 기원이 있는 동물적인 충동”으로 보고 정념의 과도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 전통적인 견해와 맥을 같이한다.(『정념론』, 1649) 
  데카르트의 정념에 관한 이러한 견해를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인간에게 적용한 작품이 피에르 코르네유(1606~1684)의 고전주의 비극이다. 충동적인 사랑의 정념과 이성의 합리적 선택인 가문의 명예 사이에서 갈등하는 『르 시드』(1637)의 주인공 로드리그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이성과 정념의 대립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느끼는 번뇌는 얼마나 처절한가! 
내 자신의 명예에 대항하여 내 사랑이 반대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면 내 사랑을 잃을 것이니,
하나는 내 가슴을 뜨겁게 하고 하나는 내 팔을 잡는구나.
사랑을 기만할 것인가, 아니면 불명예 속에 살 것인가!
슬픈 선택에 갇혀, 두 갈림길에서 고통은 끝이 없구나.” 
(코르네유, 『르 시드』, 1637)

  사랑과 명예를 모두 포기할 수 없어 고뇌하는 로드리그와 그의 연인 시멘느는 결국 “사랑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랑을 명예에 종속시키고, 사랑을 거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스스로 행복해질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한다. 정념과 의지의 싸움은 결국 의지의 승리로 끝이 나지만, 주목해볼 것은 사랑에 대한 코르네유의 관점이다. 코르네유는 사랑을 악이 아닌 선에 대한 욕구로 바라본다. 사랑은 사랑을 느끼는 대상에게서 보는 완전성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으로, 그 완전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랑은 미덕이 될 수 있다. 로드리그와 시멘느는 서로 영혼의 위대함을 존경하고 상대방을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닥쳐도 사랑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명예에서 오는 더 높은 선에 사랑을 종속시킬 뿐이다. 따라서 로그리그의 의지의 승리는 의지를 통해 사랑을 미덕의 실천으로 승화시키는 숭고한 행위가 되며, 그 때문에 그의 영웅주의는 더욱 감동적으로 빛을 발한다. 의지와 정념의 싸움은 이후로 모든 비극과 드라마의 본질적 요소가 될 것이다. (귀스타브 랑송, 『불문학사』 참조) 
  정념을 인간 행위의 강력한 동기로 보고 그것을 비극의 주된 테마로 삼은 작가는 장 라신(1639~1699)이다. 20세기에도 영화로 재탄생될 만큼 보편적인 공감을 얻는 사랑의 비극, 『페드르』(1677)가 대표작이다. 라신에게서 사랑의 정념은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일단 폭발하면 매우 이성적인 사람조차 본래의 난폭성을 표출하게 만드는 가장 충동적인 힘이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사랑에 빠진 인간의 넋을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끊임없이 그를 고뇌와 발광으로 던져 넣고, 그 광기는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또한 사랑의 정념은 숙명적이어서 사랑의 격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페드르는 남편인 테제 왕의 전처 아들 이폴리트를 연모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페드르는 자신을 분석하고 심판하고 순결의 의무에 사로잡혀 있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을 아무리 책망해도 소용이 없다. 라신이 그려내는 여성은 의지가 거의 없고 본능에 충실하여, “감정이 이성 구실을 하고 극도의 연약함에서 나오는 극도의 격렬함”(랑송, 『불문학사』)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의 정념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은 여성에게서는 더욱 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때문에 누명을 쓴 이폴리트를 구하기 위해 남편 테제에게 사실을 말할 결심을 한 페드르가 이폴리트와 아리시의 연인 관계를 알고 난 뒤 질투의 고통을 토로하는 장면은 정념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여!
나에게 이 엄청난 새로운 시련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단 말이냐!
내가 겪어온 모든 것, 두려움과 환희, 정념의 광기와 회한의 공포,
그리고 차마 견딜 수 없는 잔인한 거부의 모욕적인 말,
이 모든 것은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의 한낱 미미한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야 
[…]
죽음만이 내가 감히 애원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이었어.” (라신, 『페드르』), 1677)

  코르네유와 라신의 비극은 의지와 정념이 인간에게서 빚어내는 온갖 갈등과 투쟁을 의지의 승리를 통한 정념의 승화, 그리고 정념의 승리가 초래하는 파국이라는 두 극단적 결말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후로 나타날 정념의 드라마의 전형을 마련했다.
  이성과 진보를 신봉한 계몽주의의 시대, 18세기에 정념은 새로운 이론적 문학적 토대를 갖게 된다. ‘자유연애풍속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으로 대변되는 쾌락의 시대이기도 했던 18세기는 17세기의 궁정문화가 위선적으로 가리고 있던 사랑의 정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계몽주의의 빛은 인간의 정신만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도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계몽철학자들의 정념 예찬론이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정념에 희생당하는 남자 주인공의 불행한 일대기를 그린 아베 프레보(1688~1763)의 『마농 레스코』(1731), 장-자크 루소(1712~1778)를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어 준 『신 엘로이즈』(1761), 사랑의 주제를 다룬 피에르 드 마리보(1697~1763)의 연극 작품들이 사랑의 정념을 신화 속 인물들의 가상적인 삶이 아닌 인간의 일상적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사색과 잠언』(1746)에서 보브나르그 후작은 “의지란 꺾이지 않는 욕망이다.” “위대한 사상은 마음에서 온다.”라는 문구로 마음이 모든 행동과 모든 사상의 근원임은 선언했다. 또한 “정념이야말로 인간에게 이성을 가르쳐주었다”, “정념이 없는 인간은 신하 없는 왕이다.”라는 표현으로 인간에게서 진정한 행동의 동기는 이성 이전에 정념임을 강조했다. 『백과전서』의 편집, 기획, 저술을 맡았던 드니 디드로(1713~1784)는 “감정의 진실이 엄격한 논증의 진실보다 더 견고하다”(『서한집』, 1776), “정념이 철학보다 더 많은 편견을 타파한다.” (『극시론』, 1757년경)고 주장하고 1744년에 발표한 『철학단상들』에서는 본격적으로 정념 예찬을 펼쳤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념에 반대하여 과장되게 말을 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정념의 탓으로 돌리고 또한 정념이 모든 쾌락의 원천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 그런데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정념의 나쁜 면만을 본다는 것이다. 이성의 경쟁자에게 호의적인 한 마디를 건네면, 마치 이성을 모욕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신을 위대한 것들로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정념, 위대한 정념들뿐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회도덕에 있어서든 작품에 있어서든 숭고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유년기로 되돌아가고 미덕은 자잘한 것이 되어 버린다.” (디드로, 『철학 단상들』, 1744)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정념을 탁월한 주체의 실현방식과 결부시킴으로써, 정념이 쾌락이나 고통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하는 능력과 관련된다는 새로운 정념의 개념을 제시한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 “정념 없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가 정념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열적인 관심만이 주체가 완벽하게 존재하도록, 다시 말해 의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꿰뚫을 수 있도록 예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를 미리 볼 수 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정념 소설 『마농 레스코』는 젊은 연인들의 격정적 사랑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말의 애절함으로 인해 감정 소설의 진수로 여겨진다.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세련된 젊은 귀족이 창녀에게 광적인 사랑에 빠져, 그녀 때문에 몰락하고 그녀의 배신을 받아들이며, 도둑질을 하고 그녀를 따라다니다가 결국 파멸하고 만다는 줄거리의 이 작품에 당대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인공 데 그리외의 사랑이 보여주는 순수함과 위대함이 주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마농에 대한 데 그리외의 욕망과 정념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운명적으로 생겨났다. 

“제게 그녀는 너무 매혹적으로 보였고, 한 번도 남녀의 성 차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여자를 바라본 적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점잖고 신중하다는 칭찬을 받던 저였지만, 갑자기 정념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느꼈습니다. 저는 지나칠 정도로 내성적이고 쉽게 당황하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런 약점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제 마음의 연인을 향해 과감히 나아갔습니다.” (프레보, 『마농 레스코』, 1731)

  자신이 초래하는 불행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순수한 정념 그 자체로 묘사되는 마농 레스코는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의 동양풍의 콩트 『나무나』(1832)에서 ‘놀라운 스핑크스! 진정한 사이렌’이라는 예찬을 받으며, 알렉상드르 뒤마 2세(1824~1895)의 『춘희』(1848, 이 작품은 베르디가 <라트라비아타>라는 오페라로 각색, 상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의 『카르멘』(1845)으로 재탄생하고 에밀 졸라(1840~1902)의 『나나』(1880)에까지 이어진다. 저자인 프레보가 자신이 세밀하게 묘사한, 무절제한 사랑의 정념이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에서 독자가 절제의 교훈을 얻을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으로 억압되었던 정념의 분출, 비록 그것이 불행한 운명의 원인이 된다 할지라도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을 ‘새로운’ 영웅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마농 레스코』의 모티프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21번)을 배경으로, 서커스 단원인 엘비라 마디간과 군대에서 탈영한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 식스틴의 사랑을, 정념의 움직임을 따라 잔잔하게 묘사해간 영화 <엘비라 마디간>(보 비더버그 작, 1967)에서도 아름답게 재현된 바 있다. 
  1761년에 발표된 루소의 『신 엘로이즈』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은 18세기 후반에 달라진 사람들의 욕구와 정서를 설명해준다. 귀족들의 회의적이고 위선적이며 방종한 생활에 싫증이 난 이 세기의 사람들에게 『신 엘로이즈』는 새로운 인생의 모습을, 즉 사랑은 비극적이고 진실한 정념이라는 것, 여성은 경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결혼은 인생의 대사라는 것, 타락한 도시를 떠나서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랑송, 『불문학사』, 참조)을 생 프뢰와 쥘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다. 물질주의와 합리주의가 공고해지던 당시에 한편에서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낭만주의적 경향이 서서히 그러나 막을 수 없는 강한 흐름을 일구고 있었다. 독자들은 작가의 자기탐닉에 대한 병적인 열정이나 주인공의 격정적이고 솔직한 감정토로가 작품을 더욱 진실하고 설득력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참조) 
  우리는 이후로 스탕달(1783~1842)의 『적과 흑』(1830),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골짜기의 백합』(1842),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의 『마담 보바리』(1857) 등 이후 수많은 작품의 등장인물들에게서 『신 엘로이즈』의 사랑의 주인공, 생 프뢰와 쥘리의 후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성격과 삶의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모두 예민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꿈과 현실의 모순에 괴로워하고 꿈꾸는 이상과 범속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좌절하며 시대에 맞서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독자에게서 인정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야심과 책략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끝내 버리지 않는 순수한 열정 때문이다. 
  신분에 비해 뛰어난 자질을 부여받은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앙 소렐은 자신을 보호해 줄 친척도 후원자도 없이 홀로 기득권의 아성에 맹수처럼 뛰어드는 인물이다. 야심가인 그는 저들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만, 그들에게 아첨하며 구걸하기에는 뛰어난 재능과 고결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 그 권력을 눈앞에서 놓치고 격분하여 자신을 밀고한 레날 부인을 살해하려는 순간 쥘리앙은 레날 부인이 자신에게 품은 사랑과 야망에 눈이 멀어 그동안 외면했던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순수함을 발견한다. 그 사랑 때문에 마침내 진정으로 평온함과 충만함을 맛보고 쥘리앙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레날 부인의 사랑은 『골짜기의 백합』에서 끝끝내 모성애로 자신의 정념을 숨기는 모르소프 부인의 숭고한 사랑과 닮아있다. 펠릭스의 헌신적인 사랑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정조를 지키는 모르소프 부인은 펠릭스가 다른 여성의 관능적인 유혹에 빠지자 격심한 질투심으로 결국 중병을 얻게 되고, “당신에 대한 추억 속에서 영원히 백합처럼 살고 싶었다.”(랑송, 『불문학사』에서 재인용)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정념을 이성을 방해하는 인간의 결함으로 간주한 고전적인 견해나, 18세기 감각론 이후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정념예찬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공동체와 관련하여 정념이론을 전개한 샤를 푸리에(1772~1837)의 사상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여겨지는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1816)는 1789년 혁명이 일으킨 사회혼란과 비참한 민중의 현실 앞에서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는 유토피아적 성격이 강한 저작이다. 여기서 푸리에는 인간의 정념을 세계를 이해하는 데 불충분한 개념으로 이해한 데카르트 등 철학자들을 비판하며, 정념을 인간의 자아와 타자를 연결지울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주장했다. 푸리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이성보다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그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상상력이야말로 실재하는 오류를 극복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며, 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정념이다. 정념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을 통해 끊임없이 타자, 사회, 나아가 신과의 조화를 모색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동인이다. 따라서 “이성을 통한 지식이 가변적이고 위선적인 반면 정념에 의한 강한 인력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는 자극들을 통하여 우리를 계속적으로 고무시킨다.” 또한 정념에 대한 억압은 “영혼의 본능적인 원동력”을 억압하는 동시에 “신의 업적을 수정”(『보편적 조화론』, 1822~1823)하려는 것으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의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푸리에는 주장한다. 푸리에가 이해한 신의 의지는 정념의 비약적 발전과 자유로운 발휘를 통해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그 행복은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통해 사회적 조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념들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신의 영적인 숨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 신이 지닌 본래의 고결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신성한 정열과 특성들을 유지하게 만드는 정념이 하나 있다. 그 정념은 바로 사랑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신의 사랑의 불꽃이며, 완전한 사랑인 신의 진정한 정령이다. 사랑에 취한 상태에서 인간은 하늘에 이르게 되며, 신과 일체가 되지 않는가? […] 그러므로 모든 정념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푸리에, 『사랑의 신세계』, 1817~1819) 

  이러한 생각은 푸리에의 문명 비판에서 더 명확해진다. 사랑의 정념을 억압하는 문명화된 도덕은 사랑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은밀하게 모든 규범들을 부인하는 기만적 행태를 야기함으로써 사회조직을 파괴시킨다. 반면 사랑의 정념은 인간이 지닌 성적 본능을 복권시킴으로써 문명화된 도덕이 규정한 모든 규범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다. 그 본능은 자연적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문명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왜곡되고 단죄되어왔다. 푸리에가 성적 본능을 복권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동물적인 수준의 성적 욕구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적 본능과 관련된 상상력을 기존의 도덕적 규범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욕망의 완전한 해방은 혼돈을 초래하지 않는다. 무질서는 정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억압하는 각종 구속들로 인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완전히 해소할 뿐만 아니라 불균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초래되는 자연적인 불일치를 감소시켜 “완전한 결합을 유도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결합’이라는 특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푸리에, 『보편적 조화론』, 참조) 
  사랑의 유토피아는 일견 순진한 듯 보이지만, 오늘날 인간이 구원과 화해와 소통과 창조의 원리로 사랑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자 본능으로서의 사랑에서 남녀 간의 결합 원리인 열정적인 사랑, 예수의 인류 구원의 원동력인 신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푸리에가 우리에게 종합적으로 제시한 사랑의 정념 개념에 맞닿아있는 듯하다. 
  열정적인 감정인 정념은 일상의 권태로움과 구속을 벗어나려는 현대인에게, 무엇인가 자기만의 표현을 추구하며 직관적인 초월을 체험하려는 예술가에게, 세계의 비참을 타파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사랑예찬론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원동력인 동시에, 여전히 언제든 인간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어두운 심연에 빠져들게 만드는 숙명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쓸모없는 정념이다.”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943)

“삶의 기술은 저속한 정념을 더욱 고상한 정념을 위해 희생시키는 데 있다.” (프랑수아 모리악, 1950년경)

“정념 없이는 세상에서 위대한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게오르크 헤겔, 『역사철학강의』, 1837)

“모든 정념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며 삶에 부과된 의무들을 완수하는 데 열정을 바치는 자는 행복하여라.” (루드비히 반 베토벤, 1770~1827)

“사랑은 당신을 물어뜯고, 짓누르고, 꼼짝 못하게 하지만, 당신의 영혼과 육체를 열어준다.” (미셀 레리스, 『언어, 흔들림 또는 단어들이 내게 말하는 것』, 1985)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열정, 정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스트라스티’는 감정적이거나 육체적인 매혹에 빠져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이나 이성의 힘을 넘어서려는 강력한 감성의 표출을 뜻한다. 열정이 러시아 문화 지형에서 토포스로서 의미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 18세기 중엽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백과사전파들의 영향을 받아 무지한 러시아 민중들에게 서구의 발달된 이성의 힘을 교육시켰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균형과 절제를 중시하게 하였고, 이러한 분위기는 이성이 도덕적, 윤리적 개념속에 포함되어 때로는 양심의 동의어로, 때로는 진리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쉽게 변질되고 그 가변성을 측량할 수 없는 감정, 특히 그 감정의 극단에 있는 ‘스트라스티’는 18세기 중반과 후반의 러시아 사회에서는 쉽게 허용될 수 없는 죄의 근본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는 이성의 힘보다는 인간의 감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가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초반 러시아 귀족 사회 문화 정착에 큰 영향을 끼친 무도회, 결투, 살롱 문화는 이제껏 러시아 사회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인간 감정에 대한 자유로운 표출을 맛보기 시작했다. 
  무도회, 결투, 살롱 문화는 열정이라는 감정을 드러내기에 매우 유용하였다. 귀족 남녀들의 자유로운 사교 모임인 무도회를 통해 젊은이들은 열정적인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들은 당대 문학작품을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장면에서 그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환락과 욕망의 시절에는 
나도 정신없이 무도회에 빠져 있었지.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건네주기에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결투, 살롱, 무도회의 토포스가 열정의 외적 토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면, 보다 본질적인 열정의 내적 근원은 19세기 초 러시아 문학의 낭만주의 시대의 도래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세기 말 러시아 문화와 문학은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 사조와 절제와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감성이나 감정을 다루는 문학 보다는 장중하고 근엄한 서사시, 송시, 애국적인 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로 러시아 문학에서는 사랑, 우수, 애도, 열정, 욕망 등을 모티브로 삼는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열정의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19세기 이전 러시아 문학에서, 특히 시문학에서 ‘열정, 정념, 욕정’의 의미로서의 ‘스트라스티’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스트라스티’는 19세기 러시아 국민 시인 푸시킨의 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악의에 찬 권세로
나를 비천한 구덩이에서 불러 올려
내 영혼을 열정(‘스트라스티’)으로 채우고
내 머리에 의혹으로 채운 자 누구인가?” (푸시킨, 『무익한 선물, 우연한 선물』, 1828)

“그녀의 모든 것은 조화와 기적 그 자체 세상의 열정(‘스트라스티’)를 모두
초월하여 수줍은 듯 쉬고 있네” (푸시킨, 『미인』, 1832)

“그런데 이 참혹한 고독 속에서 
그녀의 열정(‘스트라스티’)은 더욱 세차게 타올라 가슴은 더욱 우렁차게
먼 곳의 오네긴을 소리쳐 얘기한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19세기 러시아 비평가 벨린스키는 푸시킨의 시에 나타난 이러한 ‘열정’의 현상을 ‘파토스’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문학에서 열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벨린스키는 푸시킨에 관한 논문에서 모든 시작품은 시인이 지니고 있는 강력한 사상(파토스)의 결과물이며 만약 이 사상을 오성적인 활동의 결과물로 생각한다면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의 가능성 자체도 말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예술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더욱이 오성적인 이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예술은 오직 시적인 이념들만을 허용할 뿐이다. 시적인 이념이란 삼단논법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며 규칙도 아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열정, 즉 파토스이다... 이념은 이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생명을 창조하고 낳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적인 이념과 시적 이념간의 차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즉, 전자는 이성의 열매이고 후자는 사랑, 즉 열정의 열매이다.” (벨린스키, 『전집』 4권』)

  19세기 초반 푸시킨을 비롯한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스트라스티’가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나 애착 등의 다소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열정’을 의미하였다면, 19세기 중, 후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에서의 ‘스트라스티’는 ‘성스러운 것’과 대비되는 ‘욕정, 욕망, 탐욕’의 부정적인 토포스를 나타내곤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싸우는 전투의 장이다’라고 말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실제 생활에서도 도박과 여자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욕망, 욕정, 집착, 즉 강렬한 ‘스트라스티’를 지니고 있었고, 이것은 그의 문학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 치정, 살인이며 각각의 모티프들은 탐욕, 즉 욕정의 토포스로 긴밀하게 얽혀져 있다. 『죄와 벌』은 돈과 살인이라는 욕정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근간에는 페테르부르크라는 탐욕스런 도시가 존재한다. 1860년대 심화된 양극화의 도시공간인 페테르부르크는 알코올 중독, 매춘, 빈민, 대기오염으로 인한 범죄와 탐욕의 도시였다.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은 아버지와 큰 아들 드미트리의 3000루블이라는 돈, 그루쉔카를 둘러싼 치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문제 들이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돈과 여자에 대한 강렬한 욕정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스트라스티’가 이전의 ‘열정’의 의미에서 ‘욕정’으로 전환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급속한 자본주의화로 인한 러시아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빈부격차, 세기말의 혼란스런 분위기 속에서 인간 정신의 극단적인 모습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교문화적 설명   ‘열정’을 뜻하는 프랑스어 ‘파시옹’과 러시아어 ‘스트라스티’는 모두 ‘고통, 수난, 열정, 정념, 욕정, 정열’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고대 그리스어 파토스 πάθος를 어원으로 한다. ‘파토스’의 원의는 ‘고난을 견디는’, ‘수동적인’의 의미를 지니며 여기에 근거하여 ‘파토스’는 ‘고통, 고난, 수난’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열정은 종교적 의미로 예수의 수난, 철학적 의미에서 이성에 반하는 감정, 그리고 일반적으로 감정들 중 사랑의 열정, 욕정을 가리킨다. 종교적인 의미의 열정은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수난을 의미한다. 고대 철학에서부터 인간의 정념은 정신을 흐리고 맹목적으로 만드는 강한 충동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견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근대로 오면서 정념,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인 사랑의 정념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행동 동기로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프랑스는 17세기 이후 확립된 모랄리즘의 전통에 따라 사랑의 열정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이루어졌고 그것의 부정적인 효과 때문에 절제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로 알려진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인간의 쾌락과 정념을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관련하여 깊은 성찰이 이루어졌다. 영국 경험론자들의 영향 하에,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감각론은 정념을 충만한 행복의 조건으로 간주하며 정념의 복권을 시도하여, 사랑의 정념이 인간에게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미덕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확립시키기도 했다. 이후로 정념은 이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의 기능으로, 인간들 사이에 작용하는 최대의 인력(특히 사랑의 정념)으로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원리로도 받아들여졌다. 특히 현대로 올수록 정념이 인간에게 가장 순수하고 창의적인 삶의 에너지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순수한 자기실현의 동력이라는 가치가 강하게 부여된다. 
  ‘열정, 정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러시아어 ‘스트라스티’의 개념은 감정적이거나 육체적인 매혹에 빠져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 본능적 흥분에 의해 만들어지는 강한 충동과 이끌림 등 이성의 힘을 넘어서려는 강력한 감성의 표출의 토포스를 주로 형성한다. 이는 18세기 중엽부터 이어져온 예카테리나 여제의 계몽정치가 막을 내리고 보다 진전된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새로운 러시아적 문화 토포스들이 정착해가던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문학의 도래로 러시아 문학에서는 사랑, 우수, 애도, 열정, 욕망 등을 모티브로 삼는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열정의 토포스의 토대가 마련되고, 특히 19세기 러시아 국민 시인 푸시킨의 시에서 주된 테마로 등장했다. 한편 19세기 중, 후반 사실주의 문학에서 ‘스트라스티’는 ‘성스러운 것’과 대비되는 ‘욕정, 욕망, 탐욕’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부각되었는데, ‘인간의 마음은 신과 악마가 끊임없이 싸우는 전투의 장이다’라고 말한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대표적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급속한 자본주의화로 만연해진 러시아 사회의 물질만능주의, 이로 인한 빈부격차, 세기말의 혼란스런 분위기 등이 야기하는 인간 정신의 극단적인 갈등과 러시아 특유의 정신성에 대한 지향을 반영하는 듯하다.
연관 토포스 결투; 명예; 무도회; 사랑; 살롱; 이성; 탐욕
참고자료(프랑스) Bourgeois, M., Guerrier, O. et Vanoflen, L. Littéature et morale 16e-18e siècle, Armand Colin, 2001.
Brun, J. Le Stoïcisme, Paris, PUF, 1994.
Coulet, H. Le Roman jusqu'à la Révolution, Armand Colin, 1967.
Diderot, D. Correspondance, Robert Laffont, 1997,
Fourrier, C. Le nouveau monde amoureux, 1816.
Furetière, A. et Chalivoy, A. de l’Acadéie Françise, Dictionnaire Universel, Rotterdam, 1690.
Lanson, G. Histoir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Hachette, 1894.
La Rochefoucauld, Réflexions ou sentences et maximes morales, 1678.
Montandon, A. Le Roman au XVIIIe siècle en Europe, PUF, 1999.
Morilhat, C. Charles Fourier, imaginaire et critique sociale, Paris, Méidiens Klincksieck, 1991.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Le Robert, 2005.
Vauvenargues, M. de, Réflexions et maximes, 1746.
블레즈 파스칼, 『팡세』, 이환 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외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83
참고자료(러시아) Гумеров П. Дружба, влюблённость, любовь, Интернет-журнал Сретенского монастыря. 2010.
Конечный А. Быт пушкинского Петербурга 1, 2. СПБ.,: 2011.
Могилевский Н. Тайна души человеческой. М.: 1999.
Ян Ппампера. Российская имрперия чувств. М.: 2011.
벨린스키,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 심성보, 이병훈, 이항재 옮김, 한길사, 2003.
추천자료(프랑스) 김태훈, <이성의 시대, 정념의 비극>, 『프랑스학 연구』, 55, 2011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이동진 역, 해누리기획, 2010
박인철, <정념의 근원>, 『탈경계 인문학』, 3권 3호, 2010
박혜숙, 『프랑스 문화와 예술』,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발작, 『골짜기의 백합』, 정예영 역, 을유문화사, 2008
블레즈 파스칼, 『팡세』, 이환 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스탕달, 『적과 흑』, 이동렬 역, 민음사, 2004
아베 프레보, 『마농 레스코』], 이환 역, 서문당, 1997
에밀 졸라, 『나나』, 정봉구 역, 을유문화사, 1989
장 라신, 『페드르』, 송민숙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1
장-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서익원 역, 한길사, 2008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화영 역, 민음사, 2000
________, 『감정교육』, 김윤진 역, 펭귄클래식, 2010
피에르 코르네유, 『르시드, 오라스』, 박무호 역, 울산, UUP, 2004
추천자료(러시아) 도스토옙스키, 『죄와벌』, 박형규 옮김, 누멘, 2010.
____________,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07.
푸시킨, 『문학 작품집』,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