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탐욕
범주명 인간과 정서
토포스명(한글) 탐욕
토포스명(프랑스) avarice
토포스명(러시아) жадность
정의 1.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이 많을수록 탐욕은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탐욕’ 즉 자신이 쌓은 재물과 돈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정신의 상태를 일컫는 프랑스어 명사 ‘아바리스 avarice[abaris]’는 형용사 ‘아바르 avare’에서 파생된 말이다. ‘avare’는 라틴어 ‘avarus 아바루스’에서, 그리고 ‘avarice’는 라틴어 ‘avaritia 아바리시아’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 avarus가 프랑스어 avare로 정착되기 전, 중세 프랑스어에서는 ‘avere’라고 먼저 표기되고 사용되었었다. 물론 프랑스어에는 이와 대동소이한 의미로 쓰이는 ‘avide / avidité’ 라는 용어도 있다. 하나의 토포스로서의 ‘탐욕’을 이야기할 때 이 두 어휘군은 큰 무리 없이 호환되어 언급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테오프라스테스는 탐욕(μικρολογία)과 인색함(μικροφιλοτιμία)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유대-기독교 세계에서 탐욕은 음욕, 과식, 나태, 분노, 질투, 교만과 함께 이른바 ‘7대 죄악’을 구성하는 명백한 악덕이었다. 그것은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마땅한 배려라고 권장되던 베풀기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재화의 축적 자체는 죄악시되지 않았다. 부는 오히려 빈곤을 치유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재화 자체에 대한 세속적 집착이었는데, 이는 신성에 반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설교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또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같은 말들을 떠올리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탐욕의 개념은 기원과 근대에서 어느 정도 다르게 나타난다.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전의 중세 종교적 탐욕은 인색함을 가리킨다. “부자의 재물/인색함”이라는 탐욕의 토포스의 핵심은 “지출 혹은 소비하지 않음”이다. 그 토포스를 추정의 점진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재물을 아껴 쌓으면 쌓을수록 그 주체는 정작 점점 더 누릴 수 없게 되고 종국에는 더 곤궁하고 헐벗은 채 마감한다”라는 의미로 발전될 여지가 없지 않다. 
  이처럼 근대가 이전까지 탐욕 혹은 인색은 개인의 심각한 정신적 결함이었다. 카톨릭 교회 치하의 중세에서 재물을 쌓은 부자들의 개인적 심리는 언제나 자신의 소유를 교회에, 즉 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 규정 하에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탐욕을 뜻하는 ‘자드노스티 жадность [zadnosti]’는 어원적으로 ‘목마른, 갈증을 느끼는’이라는 뜻을 지닌 고대 슬라브어의 어근 ‘자드 жад-[zad]’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고대 슬라브어 형용사인 ‘자드니이 жадный [zadni]’는 ‘1) 목마른 2) 배가 부르지 않은 3) 극도의 강한 욕구의 4) 무언가가 부족한’의 네 가지 의미를 지닌다. 고대 러시아어에서 ‘자드노스티’는 ‘목마름을 느끼는’, ‘부족함을 느끼는’ 등의 일차적인 신체적 욕구와 관련이 있었다. 이후 ‘자드노스티’는 신체적 욕구의 의미를 확장시켜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획득하고 싶어 하는 욕구’, 즉 ‘탐욕’이라는 부정적인 원망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러시아어에서 ‘자드노스티’처럼 ‘탐욕’의 의미를 지니는 유사한 단어들의 기원이 음식에 대한 욕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드노스티’ 보다 문어적이며 종교적인 단어인 ‘알츠노스티 алчность [alchnost']’의 고대 슬라브어의 원뜻은 ‘배고픈’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ненасытный’는 ‘не(not) +насытный(full with food) - 배부르지 않은’에서 유래가 되어 ‘게걸스러운, 식탐의, 탐욕스러운’이란 뜻을 가진다.
  한편, ‘탐욕’의 의미를 지니는 다른 유사어들의 어원들은 주로 ‘돈, 물질, 이익’과 연관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корыстолюбивие’는 ‘корысть (이익, 효용) + любивие(사랑, 애착)’, ‘среболюбие’는 ‘серебро(은, 돈) + любие(사랑, 애착)’, ‘любостяжание’ 역시 ‘любо(사랑, 애착) + стяжание(재산, 부)’ 라는 구조에서 출발하여 ‘탐욕’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인색’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갖는 ‘скупость’는 재물에 대한 극도의 애착으로 인해 역시 ‘탐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유사한 단어들의 구별은 쉽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알츠노스티 алчность’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탐욕을, ‘스쿠포스티 скупость’는 더 적게 쓰려고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탐욕을, ‘자드노스티 жадность’는 이 두 가지의 상태를 합한 성격이나 감정을 나타낸다.
  ‘탐욕’과 연관된 러시아어는 기본적으로 신체적 욕구, 특히 음식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질에 대한 욕구로 전환되어 부정적인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드노스티’의 이러한 변형과정 원인은 근대 사회로 발전해가면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물질, 재물에 대한 가치와 효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의미의 변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근대 서구인들에게 찾아온 정신적 문화적 변화는 ‘탐욕’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소상공인 계급의 삶의 목표와 본질은 이전의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그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재화 혹은 부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는 더 이상 늘어나는 재산 그 자체에 대하여 죄악시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부의 축적은 그 개인의 근면하고 성실한 삶의 표현일 수 있으며 나아가 신이 그를 축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탐욕의 토포스에 찾아온 이러한 내적인 변화는 당연히 역사적 혹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17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사회와 개인의 재화와 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즉, 부의 축적은 이제, 경제적 성장과 세계의 진보와 삶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복’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된다. 돈과 재산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전환은 프랑스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 과정은 ‘인색’이라는 수동적 개념이 ‘탐욕’이라는 능동적 개념으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과 맞물린다.
  이렇듯 개인적 악덕의 개념으로서의 탐욕의 토포스의 약화 과정은 막스 베버의 주요 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에서 전개되는 논지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서구의 직업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념은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동할 것을 주장했고, 노동을 신에 대한 봉사로서 파악하여 게으름과 태만을 모든 악의 원천으로 보았다. 베버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현 시대의 자본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분석하면서, 합리적이고 자주적인 윤리로서 금욕적 직업윤리를 강조되는 19세기 사회의 담론의 변화를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탐욕에 대한 단죄는 근면, 성실, 절제, 가족, 노동이라는 소상공인 시민계급의 덕목들의 권장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혹은 기업의 부의 추구를 더 이상 ‘탐욕’으로 부르지 말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부의 추구는 이제 모든 경제 주체들의 공동의 목표로 들어섰으며, 그러한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탐욕스럽다는 단죄 대신에 ‘합리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화의 끝없는 축적 또는 탐욕의 개념을 둘러싼, 경제 사회적 문맥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근대의 유럽인들에게 분명 정신적 혹은 심리적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말하자면 약 1500년 동안 일정한 자리에서 변함없이 위치하던 탐욕의 토포스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 프랑스의 작가들은 바로 그러한 문화적 심리적 흔들림의 지점을 포착하여 작품화한다.
  우선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많은 소설들이 ‘탐욕’을 그 모티브로 채택한다. 혁명 이후의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의 합리적 부의 추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영광과 성쇠, 부상과 몰락을 집중적으로 그리게 된다. 그 대표적 소설가로는 단번에 발자크가 떠오를 것이다. 그는 “100권에 달하는 소설들로 구축된 나의 『인간희극』의 주인공 하나만 말하라면, ‘돈’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미 고전주의 시대에 극작가 몰리에르는 탐욕에 휘둘려 자신의 인간성에 위기를 맞는 인물을 희화화하고 있다.

“누가 내 돈을 훔쳐갔단 말이냐! 누구냐? 어디로 도망을 갔느냐? 어디 숨었어? 어찌하면 그 돈을 찾을 수 있을까? 어느 쪽으로 가야 되지?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잖아? 거 누구냐? (자기가 자신의 팔을 잡고) 섰거라! 내 돈을 내놔! 이 고얀 놈아! 아! 나로구나. 얼이 빠져서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군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 불쌍한 돈아! 제일 소중한 내 벗아! 어떤 놈이 널 내게서 뺏어갔구나! 네가 없어지니 난 슬프기 한이 없다. 이젠 모든 게 다 끝나 버렸어. 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죽어 버릴 테다. 아니야, 벌써 죽어서 묻혀 버린 거야. 내 돈을 훔쳐 간 놈을 찾아 주거나 내가 제일 아끼는 돈을 찾아서 날 살려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 나가 보자. 난 경찰서에 가서 집안사람들을 조사해 봐야겠어. 하녀들이나 종놈들, 아들딸과 나 자신도 조사해야 돼. 저기 웬 사람들이 모여 있지? 눈에 띄는 놈은 누구든 전부가 도둑놈 같아 보이거든. 저쪽에선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내 돈을 훔쳐 간 놈의 얘긴가? 이층에서 소리가 나는데? 도둑놈이 저기 숨었다구? 제발 내 돈을 훔쳐간 놈을 알면 말해 주시오, 순사 나리, 헌병님, 재판관 나리, 고문하는 기계, 교수대, 사형 집행인들! [...] 모두다 교수형에 처하고 싶다. 만일 내 돈 못 찾으면 나도 목매달아 죽어야지.” (몰리에르, 『수전노』, 1668년)

  이 희곡의 제목을 ‘수전노(구두쇠)’라고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이다. 몰리에르가 주인공 아르파공을 동원해 비웃고 있는 것은 바로 탐욕이며 탐욕의 자기착란과 자기소외이다.
  중세 시절, 마을의 신부님의 지도하에 일정한 정신적 질서 하에서 재물에 대한 균형과 절제를 지키며 살던 시대를 지나, 그것이 무의미하고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부를 향한 무한 질주를 종용당하는 부르주아 시대의 군상들을 탁월하게 묘파한 작가는 바로 발자크이다.
  소설 『외제니 그랑데』의 세 주인공 펠릭스, 외제니 그리고 샤를이 보여주는 운명들의 주인공은 바로 재산이다. 탐욕스런 펠릭스의 삶뿐만 아니라, 금전을 향한 욕망을 알지 못하는 순진하고 착한 딸 외제니의 실존을 조건 짓는 것도 바로 돈임을 발자크는 보여주고 있다.
  발자크의 탐욕스런 주인공들에 대해 그 어떠한 공동체의 단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느냐는 전적으로 개별적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즉 산업화 시대에서 개인의 탐욕은 더 이상 사회적 공식 담론이 언급하는 주제가 아니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히 내재화되는 혹은 개별화되는 토포스이다. 이를 두고 ‘탐욕의 토포스가 약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별도의 문제일 것이다. 
  사회적 공론의 광장에서 물러난 채 개별화된 탐욕의 토포스가 전형적으로 잘 드러나는 직업이 있으니, 바로 ‘고리대금업자’ 이다.
  소설 『곱섹』에서 동명의 주인공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투지로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는지 편견인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러한 고리대금업자들은 많은 경우 유대인이다. 『인간희극』에서 또한 사람의 거부(巨富) 유대인 뉘생장이 ‘금융의 살쾡이’로 불리기도 한다. 
  동시대인들의 삶의 본질적 조건을 간파하였다는 듯이 발자크는 “궁핍이 끝나는 곳에서 탐욕은 시작된다” 고 말했다. 
  온갖 다채로운 요소들과 복합적인 양상들이 함께 모여 구성하고 있는 근대적 삶의 풍경을 궁핍과 탐욕으로 양분하여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의 시대 이후로 모든 실존들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그 양자의 사이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것들이다.
  결국 하나의 무난한 토포스로 자리매김하기에는 ‘탐욕’은 너무나 윤리적으로 민감한 주제임을, 탐욕을 말하게 되면 누구든 어느 정도 위축되게 됨을, 그래서 그 토포스는 현대에 와서는, 역설적이게도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자크는 미리 예감한 듯하다. 
  탐욕에 대한 프랑스의 마지막 발언은 플로베르가 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 시대와 역사를 향한 소설가 플로베르의 사유들은 『보바리부인』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엠마가 성의 무도회에 초대되어 ‘화려함’을 알아버린 후, 일 년이 지나도 그녀의 마음에 남아 있는 “마치 그날 신고 춤추던 무도화 밑창에 묻어있는, 아무리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마룻바닥의 초칠(밀랍)처럼” 화려함에 대해서 본 그 맛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몇 년 후, 비소를 먹고 죽어간다.
  엠마가 맛 본 그 리셰스를 ‘부(富)’라고 번역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축적해 본 적이 없다. 존재의 낭만적 본질이 지시하는 대로 지출하고 소비하고 누리려고만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돈은 결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발산하는데 필요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엠마 만큼 시대의 사회경제적 트렌드로부터 이탈해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어떠한 자살도, 그 사람 혼자 이룬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면, 그래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 그렇게 몰아갔다고 전제한다면, 엠마의 자살을 불러온 악마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일상화되고 범속화된 탐욕의 토포스를 떠올리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탐욕이 나타나는 과정의 물적 메커니즘들이 삶의 정경의 도처에서 보편화된 시대가 19세기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직업들 속에서, 또한 도시와 시장에서, 생산과 소비와 물류와 금융의 산업 현장에서 탐욕은 편재하였던 것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문학 초기에 나타나는 탐욕의 토포스는 러시아 희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니스 폰비진의 희곡 『미성년』 (178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러시아 최초의 풍자 희곡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는 착하고 신의 있는 신붓감 소피야, 그녀의 상속 재산을 노리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양육모인 프로스타코바 부인과 그의 동생 스코티닌, 그리고 그들을 혼내주는 현명하고 선한 주인공 스타로둠, 프라브진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스타코바 부인과 그의 동생 스코티닌이 보여주는 재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은 당대 러시아 사회의 반영이라기보다는 프랑스 고전주의 희극의 영향, 특히 몰리에르 식 희극의 전형성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당대 사회에 만연한 탐욕, 특히 물질에 대한 탐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농노제의 강화와 부르주아 자본주의 형성기인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이다. 더욱이 19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1812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의 조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유럽의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정신, 사상적 부분에서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넘어온 자본주의와 계몽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러한 사상들은 이전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던 정교적 금욕과 절제에 대한 표상을 약화시켜 물질에 대한 욕구를 강화시키고, 그 물질을 축척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출세와 권력에 대한 집착을 사회 전반에 걸쳐 강하게 상승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하였다.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은 문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유럽 자유주의 사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차츠키의 눈으로 구태의연한 모스크바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 (1824)은 당대 러시아의 구체적인 세태 속에서 귀족들의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비판한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딸인 소피야를 고위관료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출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파무소프의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당대 귀족들의 탐욕에 대해 차츠키는 다음과 같은 신랄한 비판을 한다. 

“차츠키: 러시아의 아버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약탈로 부자가 된 자들은 아닙니까?
친구, 친척에게서 재판의 보호를 구하는 자들,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놓고, 끊임없는 주연과 낭비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자들은 아닙니까? <......> 심심풀이로 농노 발레단을 만들겠다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아이들을 수많은 수레로 끌어 모은 자는 어떻습니까!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서 권력과 출세에 대한 탐욕의 토포스가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면, 물질에 대한 탐욕은 푸시킨의 작품에서 강하게 발현되고 있다. 푸시킨의 『벨킨 이야기』 (1830)의 <장의사>편에 나오는 물질적 탐욕 속에 갇혀 사는 장의사 아드리안, 『스페이드 여왕』 (1833)의 도박에 미쳐 물질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파멸하는 게르만이 그 본보기가 된다. 푸시킨의 창작 세계에 나타난 탐욕은 소(小)비극 『인색한 기사』(1830)에 아주 잘 반영되어 있는데, 돈 때문에 아버지를 결투에서 죽이는 아들 알베르, 돈이 권력이자 행복, 명예, 영광이라고 여기며 극도의 인색함과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드러내지만 결국은 파멸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알베르 : 오! 우리 아버지가 돈 속에서 보는 건 하인도 친구도 아닐세. 군주를 발견하여 섬길뿐. 어떻게 섬기는 줄 아는가? 알제리 노예처럼 사슬에 묶인 개처럼 난방도 안 되는 개집에 살면서 물만 마시고 마른 빵부스러기만 먹으며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맴맴 돌며 짖어 대지. 헌데 황금은 궤짝 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지. 그만두자고! 언젠가 그것은 나를 섬길걸. 궤 속에 누워 있지만은 않을걸세.” (푸시킨, 『인색한 기사』, 1830)

  『인색한 기사』에서 흥미로운 형상은 이후 러시아 문학에서 탐욕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는 고리대금업자 유대인의 형상이다. 무자비하며 이해 타산적이며 탐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형상은 이후 고골의 『초상화』(1834)에 나타나는 고리대금업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 알리나 이바노브나로 이어지며, 전당포는 러시아 문학에서 주인공들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물리적 공간이자 탐욕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공간의 역할을 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 치정, 살인이며 각각의 모티프들은 탐욕으로 긴밀하게 얽혀져 있다. 한 사람의 비열한 사람을 희생시켜 수만 명의 인간을 구원한다는 이념, 위대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살인까지 허용된다는 초인 사상과 소냐를 통해 보이는 구원과 종교적 성찰을 다루고 있는 『죄와 벌』(1866)은 돈과 살인이라는 탐욕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근간에는 페테르부르크라는 탐욕스런 도시가 존재한다. 1860년대 심화된 양극화의 도시공간인 페테르부르크는 알코올중독, 매춘, 빈민, 대기오염으로 인한 범죄와 탐욕의 도시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독특한 형태의 탐욕은 다음의 대화에 잘 드러나고 있다.

“아주 긴 이야기입니다,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 여기에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일종의 이론이 개재되어 있는데,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예를 들어 본질적인 목적만 정당하다면 한번 정도의 악행은 허용될 수 있다는 그런 식의 이론입니다. 단 한 번의 악과 수백 가지의 선행이라는 거지요!”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6)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작품인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1880) 역시 아버지와 큰 아들 드미트리의 3000루블이라는 돈, 그루쉔카를 둘러싼 치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문제들이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돈과 여자에 대한 탐욕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나타나는 탐욕은 19세기말 20세기 초 체호프의 작품들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19세기 말부터 강화된 정부의 반동정책과 억압으로 사회는 침체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세기말초의 프랑스에서 유입된 데카당스한 분위기는 인텔리겐치아를 중심으로 무력감과 나태함을 사회 전반에 침투되었다. 또한 서구 산업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어렵게 얻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지키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른바 속물성, 즉 소시민적 탐욕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시민적 탐욕은 체호프의 작품에 가장 중요한 토포스로 자리 잡는다. 
  체호프의 작품에 나타나는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은 이전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거대한 액수의 돈이라든가, 높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작은 액수의 돈, 하급관직에 대한 소시민적 탐욕의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체호프의 초기 단편 작품에서는 가족, 가까운 친인척,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사이의 적은 돈에 얽힌 탐욕들이 드러난다. 아들이 자신의 돈 25루블을 훔쳐갔다고 의심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 『아버지』(1881), 『방앗간에서』(1886)라는 작품에서 어머니에게 1루블 주기도 아까워하며 가난한 형을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 탐욕스런 방앗간 주인인 비류코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비류코프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탄식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샤는 가난하지만, 너는 잘 살고 있지 않니? 방앗간도 네 것이고, 땅도 좀 있고. 물고기도 팔고 있고……. 좀 도와주려무나……. 너는 나에게 여전히 좋은 아들이다. 똑똑하고 잘생겼고, 장사꾼 중의 장사꾼이지. 그러나 너는 진정한 인간의 심성을 가지지 못한 듯하구나. 사람들에게 냉담한데다 절대로 웃지 않고,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은총도 베풀지 않고, 마치 짐승처럼... 네가 사람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강탈하고…….”

  또한 희곡 『바냐 아저씨』 (1899)에서는 평생을 자신의 공부 뒷바라지를 한 처남 바냐와 딸 소냐의 헌신과 수고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들이 사는 영지를 팔아 핀란드의 별장을 사려는 교수 세레브랴코프, 『세자매』 (1903)에서 등장하는, 세 자매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터전을 조금씩 침식하여 자신의 안위만을 채우려는 나타샤의 형상에서도 이러한 소시민적 탐욕의 토포스를 발견할 수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자드노스티’와 ‘아바리스’ 각각의 슬라브 어원 및 라틴 어원의 차이 말고는 두 문화권의 탐욕 토포스의 표상들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그만큼 탐욕이 인간에게 보편적인 하나의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탐욕의 죄의식을 유태인에게 연결 짓는 방향성도 양 문화권에서 동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고대와 중세에서는 교회 혹은 종교가 말하는 항목이었다. 탐욕의 토포스가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에서 의미 있는 주제로 들어선 것은 아무래도 근대의 산업화 과정과 맞물린다.
  그 점에서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서 큰 차이점은 발견하기 힘들다. 단지 서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세계의 경제사적 흐름과 매우 일치되는 흐름을 보였으며, 따라서 문화적으로도 그것에 걸맞는 변천의 과정을 발맞추어 밟아 온 것에 비해,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인 민중적 기반에서 조금은 뒤늦게 따라온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서는 1812년의 프랑스와의 전쟁 경험이 탐욕의 토포스의 폭발적인 발현의 계기가 된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따라 토포스가 일찍 형성되고 발현된다. 
  일차적인 문화적 발현은 양쪽이 다 연극 무대에서의 수전노의 희화화로 시작하는데, 프랑스의 몰리에르가 앞장선 것으로 기록된다. 즉 데니스 폰비진의 희곡 『미성년』의 발표 년도로 판단하자면 약 1세기 이상의 시차를 보인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의 경험 이후, 러시아의 도시 사회에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탐욕의 토포스의 발현에 동참한다. 즉,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은 당대 사회의 구체적인 세태의 바탕에서 탐욕의 토포스를 발현한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의 발자크의 출현과 비슷한 연도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리니코프의 하숙집이 발자크의 고리오의 하숙집을 따라온다. 누추한 하숙방의 푸념어린 묘사에 이미, 동시대인들의 부를 향한 갈망과 광란은 짐작된다. 
  재미있는 비교의 대상은 플로베르와 체호프이다. 전자는 충분히 사회 역사적인 문맥 속에서 형상화되는데 비해 후자는 훨씬 더 그 문맥과 무관한 것으로 형상화 된다. 엠마는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안나와 쿠로프는 훨씬 더 담담하며 『벚꽃 동산』의 여주인공은 훨씬 더 순진하다. 
  탐욕과 관련하여 러시아 문학사가 만들어 낸 한 특이한 인물은 라스콜리니코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탐욕 그 자체를 과감히 살해하였기 때문인데, 이러한 극적인 이미지를 프랑스 문학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발자크가 대표하는 프랑스 리얼리즘 문학은 그저, 화폐가 인간을 변질시키는 지루한 과정을 스탕달처럼 거울을 들고 좇아가며 비추는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은 끝까지 산문적이었다. 
  실제 역사의 전개도 비슷한 비교점을 제사하는 듯하다. 프랑스는 19 세기 내내 저항과 폭동을 동원하여 점진적으로, 탐욕의 지배를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와 제도들을 수립해 나간 반면에 러시아의 난세 영웅은 20 세기 초 일거에 혁명을 쟁취함으로써 탐욕의 싹을 자른 바 있기 때문이다.
연관 토포스 도시; 돈; 부르주아; 산업혁명; 속물; 욕망;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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