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베이스 소개
 20세기 초반 우리의 근대사가 전지구적 제국주의 침탈의 와중에 일제 식민지체제에 편입되면서 겪은 곡절만큼이나, 근대문학사도 전에 없던 급변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표현수단에 있어 구한말까지 공적 소통언어의 지위를 잃지 않았던 한문은 근대성의 시각으로 타자화되면서 급격히 소외되어 갔고, 漢文을 바탕으로 한 문학활동이 지양되면서 우리 문학사 내부의 반성을 통해 근대적 문학 개념을 창출해간 것이라기보다는, 근대성을 선취한 구미 혹은 일본의 문학양상에 자극되어 전통 문화유산 일체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근대문학 건설의 향방을 구미화 혹은 일본화에 두게 되었다. 근대사와 더불어 근대문학사도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을 겪었던 셈이다. 식민지적 근대화의 과정을 겪게 된 제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사도 전통과 근대의 혼효, 멸실과 건설의 착종이 존재하였다. 이 시기 중세적 문학양식은 그것대로 온존하며 재래의 창작 향유 방식으로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고, 전혀 별개의 공간에서 근대적 문학양식들이 창작되어 유통 향유되고 있었다. 근대적 문학양식들이 창작 유통 향유되던 공간은 바로 신문 잡지 등의 근대매체였다. 그런데 근대성을 표방하는 근대매체에 중세적 문학양식의 대표격인 漢詩가 등장한다는 사실, 그것도 대량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전통과 근대의 혼효가 어느 정도의 복잡성을 갖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중세적 문학 양식과 근대적 문학 양식이 동시대에 존재한 것을 넘어서, 동일 공간에서 종횡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
 애국계몽기(1905~1910) 매체에도 漢詩 자료가 적잖이 들어있으며 그 양상이 어느 정도 밝혀진 바도 있다. 적어도 애국계몽기 매체에 한시가 게재되는 데에는 수요자로서 독자층의 요구보다는 생산자로서 편집간행자들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근대계몽기에는 편집간행자들의 교양수준에서 식자층을 계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층 더 대중을 의식해야 하는 식민지시기(1910∼1945)에 들어와서 자본주의 유통망 속에 소비되는 근대 매체는 독자들의 관심과 요구를 반영한 지면 구성이 필요하였는데, 식민지시기에도 여전히 ‘詞藻’ ‘諷林’ ‘詩叢’ ‘文苑’ 등의 한시난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한시의 향유에 일정한 요구를 하였다는 추정을 낳게 한다. 또 창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시기 근대 매체에 종종 ‘백일장’이나 ‘한시 현상 공모’ 등의 광고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한시를 창작할 수 있는 인구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광범위한 한시의 창작과 향유가 대중적 근대 매체에 지면을 확보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식민지적 근대성을 선취한 근대문학이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이면에, 중세성을 내포한 전통문학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 매체들의 현상모집기사를 보면 근대적 양식인 소설, 자유시와 더불어 한시도 동등한 자격으로 포함되어 있다. 광범위한 한시 창작 향유층을 포섭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겠으나, 근대매체의 문예물 인식에서 한시가 제외되어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한다. 현상한시를 考選하여 당선작은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바, 상당량이 발견되었다. 또 한편 신문의 창간기념, 100호기념 등 각 기념일에 축시를 게재하는데, 거기에도 한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여기에서 중세적 교양물인 한시가 변화된 근대적 매체환경에 적응하며 여전히 왕성하게 창작 향유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과정의 한편에서는 백일장 등 한시를 장려하는 일이 근대 청년 교육에 방해가 되는 시대역행임을 주장하는 기사(조선일보 1925년 7월 16일)가 게재되는 일도 있었는데, 이 역시 오히려 한시가 흥왕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국한문학은 동아시아 보편문어에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투영한 결과물로서 국문학의 한 구성요소이다. 한문학과 중세국문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한국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대면한 바 있다. 이제 한국한문학은 국문학의 한 구성요소임이 의심되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한문을 표현수단으로 하는 기본 속성으로 인해, 한국한문학의 연구범위는 통념적으로 한문이 의사소통의 중추기능을 담당했던 19세기 이전으로 제한되었다. 즉 20세기 이후 근대문학의 연구범위에 한문학은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로만 본다면, 1900년을 전후하여 그 전까지 왕성하게 유지되어온 한문학이 순식간에 소멸되고, 근대성을 성취한 국문문학이 문학사 전반을 일시에 장악한 양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단절적 인식은 역사적 실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문학사의 이러한 인식은 이 시기 한문학자료를 외면하고 그 가치를 무시한 결과이다. 특히 한시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근대 매체에 편입되면서 광범위한 향유 구조를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일면 근대문화의 한 축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 한시의 경향과 양상을 속단할 수는 없다. 중세적 교양물로서 한시가 지녔던 吟風弄月의 경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주제면에서 근대적 변화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일부 한시는 근대문물이나 정치적 사건들을 다룸으로써, 주제면에서도 근대적 현실인식을 일정정도 반영하고 있었다.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식민지시기 한시의 양상이 총체적으로 정리된다면,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중세적 양식의 지속과 소멸 과정을 정밀하게 고찰할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기반 자료의 구축은, 우리 문학사가 전통적 양식과 근대적 양식 사이의 부단한 길항작용을 거쳐 근대문학을 형성해가는 과정이었음을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5년 ~ 2007년까지 2년에 걸쳐 158만여자, 1만9천여 수의 한시에 대한 내용을 축적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연구를 효율적으로 저장, 유지, 활용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1년 12월 ~ 2012년 6월까지 6개월에 걸쳐 식민지시기의 한시 자료집에 대한 DB 및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직관적 내비게이션 및 웹 검색기를 통하여 다양한 용어에 대한 신속한 정보 제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사업명 : 인문사회분야지원토대연구
연구과제명 : 식민지시기 한시 자료의 수집 정리 [기초학문자료센터(KRM)과제 정보]
연구책임자 : 이희목
연구수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연구기간 : 2년 (2005년 9월 1일 ~ 2007년 8월 31일)
 
사업명:토대기초연구 연구결과물 추적 및 DB구축
연구과제명 : 식민지시기 한시자료집의 Web DB 서비스 구축 [기초학문자료센터(KRM)과제 정보]
연구책임자 : 이희목
연구수행기관 : 성균관대학교
연구기간 : 6개월 (2011년 12월 30일 ~ 2012년 6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