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
화면 상단 우측의 제시(題詩) 끝 부분에 적혀있는 '운송거사(雲松居士)'라는 관서(款署)에 의거하여 이를 별호로 사용한 강희맹(姜希孟,1424~1483년)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다. 연구자에 따라 강희맹을 제시자로만 보고 작가는 별개의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품의 양식을 절파화풍의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고 후대에 그려진 전칭작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강희맹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顔,1417~1464년)의 동생이며, 아버지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의 수장품을 정리하고 관리했는가 하면 본인도 서화에 능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어 이 그림의 강희맹 친필 여부에 대한 조사는 매우 중요하다.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작품의 하나로 현재 일본식 족자 표구로 장황되어 있다. 종이 바탕은 일부 표층부가 벗겨져 나갔으며 세부적으로 흠집이 잘게 많이 나 있고 먹색도 부분적으로 퇴색되어 있다. 짙은 농묵 부분에는 원작 위에 붓질한 흔적이 보여 나중에 보필(補筆)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 우측 상단의 제시와 관서는 확대경 등으로 세밀 조사한 결과 바탕 종이와 연륜을 같이 하고 있어 강희맹이 벼슬에서 물러나 금양별업에서 퇴거해 살던 때인 1475년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의 서풍 자체도 1500년 전후의 양식이다.
근경의 둔덕에 서 있는 커다란 두 그루 교목(喬木)아래에서 작은 거룻배를 띄워 놓고 홀로 낚시하고 있는 고사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이러한 수하인물 형식의 소경인물화는 형인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중기에 성행하는 절파풍 소경인물화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잎이 다 떨어진 한림 모티프의 교목 양태는 원대 화풍과 14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고려 <오백나한도>의 수목 표현과 유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바다 게 발톱 모양인 해조묘(蟹爪描) 계열로 그려진 나무 가지의 양태는 초기 안견파 화풍의 특징과 상통된다. 근경의 언덕과 바위의 윤곽에 가해진 갈라진 붓질의 비백(飛白) 효과는 원대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의 필법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굵은 백묘풍(白描風)의 삼각형 돌의 양태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의 화풍과 유사하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부분 가운데 나중에 보필된 것이 적지 않아 이 그림의 인상을 중기의 절파풍 작품으로 보이게도 하지만, 이러한 필묵법은 남송의 선여(禪餘)화풍과 원대의 전절파(前浙派) 양식에서 간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작년대는 강희맹이 살았던 15세기 후반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다만 강희맹이 형인 강희안에 비해 창작활동이 활발하지 않았고, 현재 전하는 문헌상의 작품도 <매란도>와 묵희(墨戱) 그림, 전야(田野)풍속화인 <추포도(秋圃圖)>와 <춘경도(春耕圖)> 4점 뿐이어서 그의 친필작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